영적 세계에서 기본적인 원칙
영적 금언!!
영적인 오류의 근원인 종교
전통적인 참된 종교들에서 비롯된 오류의 근원은 다음 두가지를 들을 수 있다.
첫째는 위대한 스승의 애초 가르침들을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그 스승의 제자들이나 그 가르침을 직접 들은 사람들은
깨달은 사람들이 아니었으므로
원래의 가르침은
그들의 에고에 의해 물들었다.
그렇게 오염된 내용은
뒤이어 여러세대를 걸쳐 번역되고 베껴지는 과정에서
더욱 더 오염되었다.
그런 왜곡의 과정은
에고가 가르침의 참뜻이나 핵심이 아니라
귀에 들리는 말 자체에만 매달리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평화와 사랑 이외의 것을 가르치는 번역본은
무엇이든 다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원칙이요.
오류를 쉽게 식별해낼 수 있게 해주는 원칙이다.
두번째이자 한층 더 광범위하고 심한 왜곡은 통상적으로 '교리라 부르는 것에서 유래한 종교적 가르침들'이다.
흔히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금제의 형태로 이루어진 이런 규정들은
그 당시 교회단체의 조직속에서 정치적 권력을 획득했을 뿐,
실제로는 그 어떤 권위도 내세울 권리가 없는 교회간부들과
교회의 권위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만들어낸 것이다.
위대한 스승의 정확한 가르침을
표면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함부로 변경하는 것에
그 어떤 정당하고 그럴싸한 이유도
있을 수 없다.
예를들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그저 그리스도 가르침을 정확히 따르는 것임을 뜻하는 자명한 사실은
몇백년 동안 그리 선명하게 부각되지 않았다.
모든 위대한 스승들은
비폭력과 비난하지 않는 자세,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르친다.
교계의 권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신앙을 위해서나 교회를 위해서
혹은 이교도들을 몰아내기 위해서나
정의로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이런 기본적인 진리들을 훼손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원래의 영적인 가르침에는 들어있지 않은
꽤 많은 주제들은
거짓된 종교적 창작품들이 등장할
기회를 제공한다.
과거 오랜 세월에 걸쳐
온갖 종류의 죄인들이 창안되어 왔고,
이에 곁들여 임상적으로 볼 때
자연스러운 인간사에 대한 병적인 조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정교한 설명들과 합리화도
창안되었다.
그로 인한 폐해는
영적인 오류를 저지르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심리적인 잔혹성을 조장하고
인류전체의 내면에 죄의식을 심어주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죄와 죄의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상반되는 것들의 딜레마와 지각의 이원성을 강화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을 한층 더 옥죄었다.
인간의 의식에 미치는
지각의 이원성이 지닌 파괴적인 영향은
인간을 신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지게 하고,
정교한 오류의 강압적인 덫을 피할 수 있는
극소수의 영적인 천재들만이 돌파해 나갈 수 있는 장애를
만들어낸다.
종교적 교리의 확산은
강렬한 전쟁과 박해의 토대를 만들어 내
인류에게 한층 더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전쟁과 박해는
항시 종교적인 차이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승인된 파괴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적 차이의 중요성을 과장하곤 한다.
이런 식의 잘못된 해석과 탈선은
종교가 성, 출산, 자녀양육, 식생활,
일생생활의 온갖 측면들, 관습, 의복, 정치권력 등에
까닭없이 관여하는 관례들에서
특히 더 두드러진 양상을 보인다.
자신들과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모자를 쓰고
다른 식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종교적인 박해를 가하거나
전쟁을 일으킬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할례를 하고,
금요일에 고기를 먹지 않고,
식사하기 전에 감사기도를 드리는 등의 관행들,
종교적 휴일에 해당하는 날이 언제인지와
그에 관련한 모든 자잘한 일들이
모조리 화약과 총탄이 된다.
안식일이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하는 것이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된다.
신에게 경의를 표할 때
모자를 써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은
성스럽고 엄숙한 논쟁거리가 된다.
종교들은
지극히 하찮은 것들을 이용해 이익을 추구하느라
영적인 진실이라는 주된 주제를 무시하는 대가를 치름으로써
종교자체의 몰락뿐 아니라
인류전체가 몰락하는데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사람들이 교리로서 떠받드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에고의 산물이다.
예수가 말한대로
'악이 보는 이의 눈속에 있는 것'이라면
문제는 도처에서 죄와 악을 보는 사람들
자체에 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식탁다리조차도 유혹의 마수로 간주하여
식탁보로 일일이 덮어줘야했다.
전통적으로
죄라고 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정서적으로 불안한 교회 당국자들의 마음이 지어낸
죄의식에 물든 과장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죄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라는
충고를 충실히 따를 때
이렇듯 영적인 진실을 함부로 악용하거나
남용하는 것들은
저절로 멈출 것이다.
이처럼
영적인 진실을
집단적으로 왜곡하는 행위들은
역설적이게도 "신성"의 이름으로
신과 인간의 본성을 비난해 왔다.
신성의 권한을 강탈하고
신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공표하는 짓들은
과대망상적으로 보인다.
일찍이
신의 현존이라는
절대적 실상을 체험한 그 어떤 사람도
그런 식의 왜곡된 발언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의 해방
새로운 방향을 찾기에 앞서
과거의 오류를 식별해내고
그 오류를 넘어서고자 하는 갈망을 일깨우는 일이 우선 필요하다.
그러러면
용기와 두려움없는 정직성을
가져야 한다.
앞으로
죽음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치유 불가능하고 위중한 병들에서 회복되려면
'진실과 과감히 직면하고 있는
다른 길을 선택하고자 하는 자발성과 능력'을 가져야만 한다.
부정하는 마음을 버리고
진실을 받아들일 때
온전성이라는 임계점(200수준)을 넘어설 수 있다.
영적인 각성의 불사조는
절망의 재로부터 태어난다.
테레사 수녀가 말한대로
아름다운 연꽃은
연못 밑바닥의 진창에 박혀있는
뿌리로부터 피어난다.
전 인류가 겪는 고통의 총체가
이 글을 쓴 사람의 인생 초반에 드러났다.
그것은
놀랍고도 압도적이라 할 만큼
실로 엄청난 양에 달했다.
다른데서 이미 말했던 바와같이
유감스럽게도 그런 계시는
인류의 모든 고통을
"그 모든 것이 일어나도록 허용한"
'종교의 신 탓으로 돌리는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계시는 인류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충동과 갈망을 강화시켰다.
이런 결과로 인한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무신론자가 된 그 사람은
깊은 절망상태에서
느닷없이 신에게 모든 것을 내맡겼고,
신, 진실, 실상에 대한 모든 이해를 변형시킨
깊은 영적각성의 순간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년 후
인간의 모든 고통의 근거이자 근원임이 드러난
'뿌리깊은 무지와 인간이 지닌 의식의 한계'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찾아왔다.
그 사람은
무지가 얼마나 완강하며
그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혹심한 대가를 치르게 했는지를
통렬하게 깨달았고,
그로인해
육체적 정신적인 병과 고통을 구제하는 것에서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영적인 오류쪽으로 탐구의 방향을 바꾸었다.
사회에 의해 표현되는
인류의 집단적 에고는
고통의 밑바닥을 이루는
그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지 못한다.
이른바 문제들이라고 하는 것이
저밖에 있으며
따라서 전쟁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인 프로그램들은
그것들 혹은 저밖에 있는 것들을 뜯어 고치는데
온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는 믿음이야말로
에고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 진실과 거짓을 식별할 수 없다는데 있다"
인간의 마음은
선과 악을 가려낼 수 없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해
애국심, 종교, 사회적 선, 해롭지 않은 오락 등과 같은
온갖 기만적인 탈을 쓰고 나타나는
거짓의 처분에 자신을 맡긴다.
역사상 나타난
모든 독재자들과 황제들,
선동가들에게
진실과 거짓 테스트라고 하는
쉽게 행할 수 있는 간단한 테스트를 적용했다면
진면목이 드러났을 것이다.
히틀러의 사진 한장을
서류봉투속에 집어넣고는
어린이에게 한손으로 그것을 들어 명치에 갖다 대게하면
그 어린아이 다른쪽 팔 근육은 약해진다.
그와 똑같은 진실을 보여주는 반응은
스탈린과 레닌, 아랍의 광적인 지도자들,
공산주의, 캄보디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의 흉포한 지도자들,
알라신의 이름 뒤에 숨은 독재자들의 진면목 역시
여실히 드러내준다.
지난 수백, 수천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들은
모두가 위력이 만들었으며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해독제는
힘(power)이다.
위력(force)은
거짓을 바탕으로 하고
힘은 오로지 진실만을 바탕으로 한다.
악은
그것의 정체가 드러날 때
위력을 상실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이야 말로
악의 치명적인 약점이요
아킬레스 건이다.
거짓은
그 정체가 드러날때
무너져 내린다.
명백한 진실을 식별하는데는
미국정부나 CIA, FBI, 스파이 위성들,
컴퓨터들도 필요치 않다.
천진한 다섯살 아이의 팔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진정한 힘(power)을 갖고 있다.
진실 그자체는
무적이며
그 어떤 재물도 요구하지 않는다.
아이의 팔
세상에 존재하는 어둠의 군단들이
그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천진한 아이의 팔이다.
그 이유는
그 팔이 전세계 인구의 78%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속임수 가면을 벗겨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을 부정하는 마음가짐을 버릴 때
우리는 거짓과 속임수, 진실의 왜곡이
인간의 가장 낮은 성향들을 크게 만족시켜주고,
또 그것들이
사회전체에 널리 퍼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기있는 컴퓨터 게임들은
순수하지도 않고
무해하지도 않다.
그것들은
함부로 중상을 입히거나
죽이는 일에 사람의 마음을 길들임으로써
영적인 민감성을 죽이는 기능을 하는
살인 훈련장치들이다.
초원의 다람쥐를 일부러 죽이는 짓은
스포츠가 아니라
냉혹한 살육이다.
마약은
멋진게 아니라
예속시키는 것이다.
헤비메탈록과 랩 음악은
해방감을 주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의식을 들뜨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음악이다.
대중매체들은
인간의 가장 저열하고 나약한 부분을
만족시켜주고 엄청난 돈을 긁어 모으면서도
자신들은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는 듯
시치미를 뗀다.
천진한 아이의 팔은
사람들의 무지함 덕에
좋은 세월을 구가하는 많은 조직과 집단들을
두렵게 하고 있다.
기만적인 마약과의 전쟁은
그것이 바로 마약문제를 일으킨 주범이요,
마약업계 전체를 지켜주는
보루임이 드러나고 있다.
마약업계는
그것에 의해 태동하고
힘을 얻고 부유해졌다.
공산주의는
전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르바초프의 비폭력주의에 의해
패배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예고된 위대한 재림은
진실이 거짓을,
빛이 어둠을,
앎이 무지를
대신한다는 것을 뜻한다.
크리슈나와 붓다, 그리스도, 알라의 중요성은
이들이 한때 이 행성에 존재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드러내고 옹호한 진실들과
그 가르침들에 동반된
측정가능한 높은 에너지에 있다.
깨달은 이들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인격이나 인품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라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인류는
그것과는 정반대되는 짓을 하고 있다.
이런 경향의 전형적인 예는
종교계에서 횡행하고 있는
잘못된 이해와 왜곡이다.
인류는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은 무시하고
그들 개인을 기념일들을
그들이 방문한 날과 장소들을
숭배하고 있다.
최근들어 인류의 의식수준이 부정적인 영역에 속하는 190에서 진실과 온전성의 수준인 200이라는 임계점을 넘어 207에 이를정도로 급격하게 변화했다는 것은 그리스도, 붓다, 크리슈나, 화신들의 가르침들이 널리 확산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보인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일어난 이 사건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와 비견되는 것으로
우리는 지구의 평균온도가
불과 몇도쯤 올라가는 문제가
물리적인 측면으로만 봐도
지구 전체와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인류의식이 190에서 207로 변화했다는 것은
전체적인 영향의 면에서
지구상의 온도변화를
훨씬 뛰어넘는 중요성과
의미심장함을 지녔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하나의 징후에 의해서 드러난다고 한다면
그 징후는 극히 최근에 이미 일어났다.
인류의 의식이
스스로를 왜곡시키는 거짓들로부터
진실쪽으로 크게 변화했다는 사실은
전 인류에 대한 긍정적인 약속이요
암시임이 분명하다.
아이의 팔은
문명의 새로운 새벽의 첫 빛일수 있다.
우리가
아이의 순수함에 의해
신과 하늘나라로 인도되리라는 얘기는
성인들에 의해 이미 설파되었다.
진실에 이르는 문은
실로 내면의 아이의 순수함과 천진함을 통해서만
열릴 수 있다.
모든 사람의 의식속에서
아이의 순수함은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교란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것은
의식자체의 본원적인 구조다.
실생활에 비추어 이야기하자면,
하드웨어는
컴퓨터를 통해 가동되는 소프트웨어에 물들지 않으며
카메라는 렌즈를 통해서 들어오는 영상에
영향받지 않는다.
본래 상태의 재발견
우리는
인류의 의식이 지닌 낙후성에 대해서
여러가지 우려를 하지만,
사실 눈에 잘 드러나지 않고
또 의외라고 할만한 방식으로
사회를 변형시키는 것은
개인이다.
위력은 무한한 숫자에 달하는
각종 저항에 취약하지만
힘은 그것과 맞설 만한 것들이나
적들이 전혀없다.
힘은
허공 그 자체처럼
어떤 공격도 받지 않으므로
영원히 무적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제멋대로인 자기 마음에 지배받고 있고
주위 상황에 피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매 순간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요약해주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흐름이나 감정상태,
무시로 변하는 상황의 희생자라고 생각한다.
자기 마음의 현 상태와 감정의 톤,
정서들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이렇듯,
그것(마음)과 저 밖의 것들(세상)에 의해 휘둘리는 것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일로 여겨진다.
정말로
다른 선택지들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성찰과 내적인 관조에 힘입어
의식의 모든 상태가
선택권을 행사한 결과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의식상태는
전혀 제어할 수 없는 요소들에 의해
결정되는 변할 수 없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런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사실 마음에 지배받고 있지
않다.
마음이 드러나는 것은
기억, 망상, 두려움, 개념 등으로 무장한
무한한 선택지들의 흐름이다.
마음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저 그런 주제들의 흐름이
마음의 스크린을 가로지르는
마음대로 골라먹을 수 있는
셀프서비스 식당의 음식들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우리에게 부정적인 기억에 의지해
화를 내라고 강요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으며,
미래에 대한 두려운 생각에 빠져들라고 강요하는 것도 없다.
그런 것들은 단지 선택사항이다.
마음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들을 갖추고 있는
텔레비전과 같으므로
어떤 생각이 우리를 유혹한다고 해서
그것을 쫒아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에 빠지거나 화를 내거나
근심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이런 모든 선택지들이
우리 마음을 은근히 잡아끄는 것은
그것들이 마음의 생각들을 유혹하는 원천인
내적인 보상이나 은밀한 만족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보상들을 거부할 때
생각의 스크린 배후에
생각과는 무관한 고요하고 기쁜 공간이
항시 숨어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공간은
늘 접할 수 있지만,
그것을 체험하려면
마음을 유혹하는 다른 선택지 전부를
넘어서서 선택해야 한다.
기쁨의 원천은
항시 존재하고
항시 접할 수 있으며
상황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과 접하는 데는 단 두가지 장애가 있을 뿐이다.
첫째, 그것이 항상 접할 수 있고 항상 존재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
둘째, 에고보상의 은밀한 즐거움때문에 다른 어떤 것을 평화와 기쁨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신의 현존을 체험하는 일은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선택을 해야한다.
그런 선택은
평화와 사랑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신에게 내맡김으로써만 이루어진다.
모든 것을 내맡기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가 외면했거나 잊었거나 다른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을 뿐
참나의 신성은 항시 존재해왔다는 것이
저절로 드러난다.
미래란 언제인가?
신의 현존을 체험하기 위해
선택하는 일은
시간밖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그것은 미래의 어느 시점이 아니다.
그것은 항시 현재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현재의 순간은 영원하므로
다른 어떤 조건도 필요치 않으며,
또 그런게 있을 수도 없다.
현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제나 내일로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상 현재는 피할수 없다.
지금 이순간이면 족하다.
주시해보면
변하는 듯 보이는 것은 외양뿐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질 것이다.
현재는 고요히 머물러 있다.
영화 스크린은 영원불변하다.
영화대본은 변하고 스토리는 전개되지만
그것조차도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현재성은
원초적이고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하며,
전능하고 불변이며
경험의 절대적인 필요조건이다.
그것은
있음과 존재에 대한
앎의 본질이다.
지금이라는
강렬하고 근원적인 실상을 벗어나
다른 어떤 시점에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이 순간이야 말로
존재하는 것의 전부다.
참나로서의 우리 자신의 의식은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아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눈이다.
실상에 대한
우리의 내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은
참나에 의해 외부환경에서 주어진 것이며,
이것은 그런 외부환경을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므로
실재같다는 느낌은
참나로부터 비롯된,
자아에 의한 의식의 투영이다.
따라서
우리는
실재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실재처럼 보이는 것들의 근원은
사실상 우리 자신이다.
사실 세상은 오락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은
장난감처럼 가볍게 쓰고 버리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천국은 우리안에 있고
앎에 의해서 드러난다.
세상은
단지 외양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의 멜로드라마는
지각의 뒤틀린 감각이 빚어낸 것이다.
지각의 뒤틀린 감각은
세상이란 크고 막강하고 영원하며
참나는 작고 약하고 덧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낳지만
진실은 정반대다.
지각이 그려내는 세상의 모습을 믿지 않을 때
우리가 실재라고 생각했던 세상은
사라진다.
우리가 기쁨과 평화의 내재적인,
항상 존재하는 잠재성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편을 선택할 때
세상은 유머러스한 놀이공원으로 바뀌고
모든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습관적으로
다른 선택지들을 고르는 것에서 비롯되는 무지와
무자각의 배후에 매몰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진실과 평화와 기쁨의 선택지는
항상 존재한다.
신에게 내맡김으로써
다른 모든 선택지들을 거부할 때
내적인 진실은 저절로 드러난다.
변성의식 상태로서의 인간조건
역사가 분명히 입증해주고 있는 바와 같이
다수가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자명한 사실이나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거짓은
사람들이 어디서나 쉽게 체험하는
가장 보편화되고 일반화된 현상이다.
의식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가장 의미심장한 발견 중 하나는
웬만한 사람이면
대부분 사고와 행위와 느낌의
정상적인 체험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들이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볼때는
일정한 기간동안
일정한 사회계층내에서만 통용되는
변성의식 상태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실상 인간의 참된 상태가
아니다.
인간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자책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싸우고 고통스러워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 있어서
여타의 부정적인 정서와 태도, 감정들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으레 따르게 마련인
정상인 것들로 받아들인다.
인류(환자)는
자신들의 그런 느낌들을 직시해줄
치료자를 찾아가 보라는 충고를 받곤 한다.
하지만
망상이 부채질하고 조장해낸
그런 감정들을 직시하기 보다는
그것들의 근원이 바로 지각임을 밝혀
그것들을 모조리 뿌리뽑아 버리는 편이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참된 의식의 정상적인 상태는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로부터 벗어난
그 자리에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 상태다.
그 밖의 모든 것들은
지각의 왜곡현상들과 망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 사회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해서
전염병이 정상인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인류역사에서는
항시 돌고 있었던
그런 병들이 한 사회에 속한 인구의 상당수를 몰살시키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들을 자연스러운 조건이라 할수는 없다.
그 무서운 흑사병조차도
결국은 사라졌다.
전세계 인구의 78%가
사실상 신경증적인 상태에 놓여있다는 사실은
아주 간단한 방법을 사용해서
이내 밝혀낼 수 있다.
그것은
의식척도 측정 척도상으로
200이하의 수준에 해당하는
극도로 위험한 지대를 벗어난 사람들이
전세계 인구의 22%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변성의식 상태를
인위적으로 조성된 초자연적인 상태
혹은 최면상태나 망아(忘我)상태 비슷한 어떤 것,
또는 프로그램화되거나 세련된 상태로
생각하곤 한다.
사람들의 의식수준들이
한곳으로 휩쓸려 가는 결과를 낳곤 하는
강력한 확산효과를 지닌 영향력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인류의 마음이
과학적 연구에서 행해지는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통제되고 영향받고
세뇌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아이는
프로그램화되지 않은
의식의 순수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집어넣어 주는
소프트웨어에 의해 조직적으로 프로그램화한다.
하지만
이런 체제는
한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새로운 소프트 웨어 프로그램들의 진위(옳고 그름)를 가리는데
이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이다.
아이는
무슨 말이든
곧이 곧대로 믿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보호받지 못하는
그 아이의 의식은
지난 1000년 동안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인류의 능력을 시들게 한
집단적인 무지와 그릇된 정보,
잘못된 신념체계들의
먹이가 되어버린다.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그런 식의 프로그래밍은
아이의 마음을 프로그래밍하는 자료의
진실성을 테스트 할 수 있는 메카니즘이 없으므로
바로잡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충 따져봐도
입력되는 데이터의 78%는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파괴적이고 해로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자료들이
유전적으로 이미 결함이 있는 뇌에
겹쳐진다.
인류의 삼분의 1 이상은
우울증과 과식, 약물중독,
자기행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상태 등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을
충분히 공급해 주지 못하는 뇌를 갖고 있다.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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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amin D and the omega-3 fatty acids control serotonin synthesis and action, part 2: relevance for ADHD, bipolar disorder, schizophrenia, and impulsive behavior
ABSTRACT
Serotonin regulates a wide variety of brain functions and behaviors. Here, we synthesize previous findings that serotonin regulates executive function, sensory gating, and social behavior and that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bipolar disorder, schizophrenia, and impulsive behavior all share in common defects in these functions. It has remained unclear why supplementation with omega-3 fatty acids and vitamin D improve cognitive function and behavior in these brain disorders. Here, we propose mechanisms by which serotonin synthesis, release, and function in the brain are modulated by vitamin D and the 2 marine omega-3 fatty acids, eicosapentaenoic acid (EPA) and docosahexaenoic acid (DHA). Brain serotonin is synthesized from tryptophan by tryptophan hydroxylase 2, which is transcriptionally activated by vitamin D hormone. Inadequate levels of vitamin D (~70% of the population) and omega-3 fatty acids are common, suggesting that brain serotonin synthesis is not optimal. We propose mechanisms by which EPA increases serotonin release from presynaptic neurons by reducing E2 series prostaglandins and DHA influences serotonin receptor action by increasing cell membrane fluidity in postsynaptic neurons. We propose a model whereby insufficient levels of vitamin D, EPA, or DHA, in combination with genetic factors and at key periods during development, would lead to dysfunctional serotonin activation and function and may be one underlying mechanism that contributes to neuropsychiatric disorders and depression. This model suggests that optimizing vitamin D and marine omega-3 fatty acid intake may help prevent and modulate the severity of brain dysfunction.—Patrick, R. P., Ames, B. N. Vitamin D and the omega-3 fatty acids control serotonin synthesis and action, part 2: relevance for ADHD, bipolar disorder, schizophrenia, and impulsive behavior. FASEB J. 29, 2207-2222 (2015). www.fasebj.org
그런 사람들의 경우
이성 그 자체의 능력이
통제할 수 없는 격정의 폭발로 인해
순식간에 완전히 파괴될 수 있다.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해묵은 파충류적, 동물적인 뇌가
아직도 해부학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또 제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생물학적인 사실에 의해
한층 더 약화된다.
격세유전적인 그 활동은
포식자적인 경향과 공격성을 강화시키는
강렬한 동물적 본능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
뇌의 이러한 모든 동물적 본능들은
꾸준히 지속되면서
인간의 행동과 감정상태의 상당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지배하기까지 한다.
동물적 정서들은
항시 존재하고 또
언제든 표면화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이런 경향들은
사회적 프로그래밍이나 선전에 의해
쉽게 훈련되고 조작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애초부터 생물학적으로 결함있는 뇌와
동물적 본능을 갖춘 상태에서
출발한다.
이어서
인간의 적응능력과 정보는
적어도 78% 정도 부정확하고
기만적이며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데이터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프로그램화되고 저하된다.
이것은
단순히 인류 전체가 직면하고 있는
통계적인 가능성을 밝힌데 불과할뿐
사회내에는 100%가까이 잘못된 자료들에 의해
프로그램화되는 집단들,
곧 거리의 범죄자 집단이나
하위문화집단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행동 요소들과 관련된
잘못된 프로그래밍은
가장 해로운 것이 되곤 한다.
한 국가나
문화전체의 총체적인 생산력이
파괴적인 목적에 종속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때의 독일이나 일본에서는
그 나라의 경제 전체가
죄없는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화 자체를 파멸시키는 것으로
전락했다.
나라 전체를 폐허로 만든 선전이
너무나 무지하고 논리에 맞지 않는 오류투성이라는 점을 볼 때,
그런 선전을 믿고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만큼
국민 다수가 어리석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간단한 운동역학 테스트는
진실을 즉각 밝혀준다.
예컨대
일본왕 히로히토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며,
시저역시 신이 아니다.
독재자들은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사회는
그 어떤 사람도
언제 어디서나 간단하게 시행할 수 있는
진실 테스트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것 외의
다른 안전장치들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 간단한 테스트가 널리 알려질 경우
인류의 의식이 전체적으로
크게 상승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 테스트는
광범위한 효용성과 유용성을 지니고 있을 뿐아니라
지극히 간단하게 시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퀴나 수준기, 전기, 컴퓨터 칩 등의
발명품과 같은 반열에 든다.
인류는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서
많은 이득을 무한히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이 근육 테스트를 이용해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것에 깊은 관심과 흥미를 보일 것이다.
이 테스트를
상업과 연구, 제품생산분야 등에 적용할 경우
문자 그대로 수조달러의 돈을
절약해주는 효과를 만들만한 잠재성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주류계층은 기득권을 누리고 있으므로
가급적 현재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놀랍게도
우리는 검사들이 어떻게 해서든
유죄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피고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를
고의적으로 묵살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재판에서 이길수만 있다면
피고가 사형을 당하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이러한 일들은
인류의 의식이 깃든
병이 중증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징후에 불과하다.
운동역학 테스트는
DNA테스트와 같은 정확성을 갖고서
피고의 유죄와 무죄여부를 즉각 드러내준다.
그것은
그 어떤 증인이나 증언의 진위도
즉각 판별해준다.
그것은
반역자, 변절자, 외국의 첩자, 밀고자, 사기꾼, 거짓말쟁이,
온갖종류의 배신자들의 정체를
즉각 밝혀준다.
그 테스트는
산업스파이나 정치적 스파이,
부정직한 피고용인, 마약 밀매자, 위험인물 등의 정체나
범죄자의 소재지를
불과 몇초 내지는 몇분만에 드러내준다.
범죄 수사관들은
연쇄 살인범의 신원이나
그의 소재지를 밝혀내기 위해
수백, 수천시간을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범죄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범죄와 관련된 모든 것,
또는 과거에 일어난 범죄나 사건들을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다.
범죄가 일어난 날짜와 시간, 동기, 증거의 소재지,
범죄자의 신원 등을
전부 알아낼 수 있다.
이 테스트를 통해 범인이 어디에 있고
무기가 어디에 있으며
동기가 무엇인지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나침반이 항해를 할 수 있게 해주고,
망원경이 천문학을 연구할 수 있게 해주며,
현미경이 세균학을 연구할 수 있게 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운동역학 테스트는
역사상 어느 시점, 공간상의 어느 곳에 있는
그 어떤 주제에 관한
그 어떤 사실도
짧은 시간내에 다 밝혀낼 수 있게 해준다.
운동역학 테스트는
우리가 아직까지 그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다재다능한 도구다.
역사적 조망
유사이래
영적인 가르침들과 신에게 이르는 길
오랜 영적 전통속에서 정립된 길들은
대단히 많았다.
요가 수행들이나
전통적으로 서술되어 온
그밖의 방식들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가르침들이나 길들은
각각의 학파나 종교, 영적인 문헌, 경전 등을 만들어 내고
수많은 성인들과 스승들,
역사적 인물들을 배출했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또한
민족적 특성과 그것들을 배출한 문화의 나머지 부분들을
많건 적건 간에 흡수해 왔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위대한 영적 전통들의 대부분은
종종 그 가르침 자체의 내적인 순수성에서 이탈하거나
그 순수성을 해치곤 하는
민족적 영향력 내지는 민족적 관습들과
동일시 되어 왔다.
이런 경향은
이 세상의 위대한 종교들 간의 불화를 조장해왔고
더 나아가 참혹한 종교 전쟁들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아마도
영적인 진실에 대한 새로운 연구는
이런 피상적인 차이를 넘어선
훌륭한 영적 가르침의 경우
그것이 어느 민족 어느 문화권에서 나왔던
그 이름과 무관하게
가르침의 중요한 본질을
골라 모을 것이다.
순수한 영적인 길이란 무엇인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적인 가르침들이나
영적인 스승들의 진실됨과 거짓됨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거의 없다시피했다.
그러므로
영적인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주로 스승의 명성이나 평판에 의지해서
스승의 온전성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럴때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지침은
자신이 내적인 은총과 카르마에 의해
온전하고 올바른 영적수행을 하게 되리라는
바람정도에 불과했다.
몇천년전에 시작된
위대한 길들은
애초의 가르침들이 부족한데다
그나마 말을 통해 기록된 내용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망실되어갔다는
제약을 안고 있었다.
게다가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
자신들이 들은 내용을 잘못 해석했으며,
다른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잘못 번역하는 일도 많았다.
우리가
운동역학적인 시험방법을 이용해서
이 세상의 위대한 종고들의 진실수준을 측정할 경우
"의식혁명"이란 책에서 상세히 저술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일부 종교들의 진실수준이
세월이 흐르면서 전반적으로 크게 저하됐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아마도 불교는
원래 수준을
비교적 잘 유지해 온 종교일 것이다.
하지만 그밖의 종교들은 그 수준이 놀랍도록 저하되었다.
우리는
각 종교의 의식수준들을 100년 단위로 측정하고
당대의 다양한 해석들의 수준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매우 유익한 연구를 쉽게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심지어 어느 해에 누구의 지시로 저하현상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짚어낼 수도 있다.
이런 저하현상을
권위있는 성직자들이 내린 종교적인 결정으로 인해
아주 심각하고 끔찍한 결과가 빚어진 사건들과 결부시켜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경우가 왕왕있다.
그리고
그런 잘못의 정확한 성격 역시
당대의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들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이해하고 정의할 수 있다.
당대에는
나름대로 정당화되기도 했고,
생존을 위해 그 효력을 잠시만 발휘하리라 여겨진 타협들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타협들이
훗날 다시 바로잡아지지 않아
오랜 세월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 타협들 가운데
가장 심각하고 개탄할 만한 예는
니케아 종교회의 결과로 일어난
기독교의 진실수준의 현저한 저하현상이었다.
기독교는
애초에는 900수준이었으나
구약과 신약과 더불어 성경에 포함시킨데다,
요한계시록까지 포함시킴으로써
400포인트 이상 떨어지는 결과를 빚었다.
창세기를 제외한
구약의 모든 내용들이
운동역학 테스트에서 피험자를 약하게 만들었고
그 내용들의 진실수준이 200이하였으므로
성경에 구약과 계시록을 포함시킨 것은
매우 치명적인 잘못이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은
신을 의인화된 존재로,
즉 앙갚음과 증오, 치우침, 거래, 상처받기 쉬운 특성, 분노, 파괴, 교만함,
허영심등과 같은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들에 종속된
오류많은 존재로 서술한 탓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앙갚음하려는 마음으로 가득한
성난 신이 파괴적인 난동을 계속 일으키기 않고
홍수와 화재, 역병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진정시키고 아첨하고 달랬으며
또한 그와 거래도 해야 했다.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가 대신해서
표현한 진실과 자비, 용서의 신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복수의 신이
자비와 용서의 신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에게 적들이란
그들의 무지로 인해
기도하고 용서해줘야 할 사람들이었다.
이런 가르침은
정의로움과 앙갚음,
편애의 신이라는
고대 히브리 전통에 의해 거부되었다.
고대의 원시문화건들의 신들은
인간적인 열정, 동기, 위치성, 증오심, 재물에 대한 요구,
질시와 분노어린 파괴 등의
적나라한 한계를 지닌
스칸디나비아의 게르만, 그리스, 헤브라이, 로마, 이집트, 바빌로니아,
잉카와 마야 신들의 기원이 되는
아스트랄 수준의 의식에서
유래된 존재들이다.
참된 신은
무한하고 높은 힘을 지녔으므로
보잘것 없는 낮은 힘을
조작할 필요가 없다.
참된 신성은 그
어떤 취약성이나 욕구, 기득권도 갖지 않고 있다.
원시적인 문화권의 신들이 드러내는
격정적인 특성이나 편향성, 한계들은
사랑과 평화에 의해서
그 현존이 드러나는
신의 속성들이 아니다.
그런 부정적인 속성들은
예배와 재물을 한결같이 요구하는
수많은 거짓된 신들을 만들어 내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다.
실상의 신은
그 어떤 욕구도 갖고 있지 않고
만족스러워하거나 불만스러워하는 존재가 아니며
달래줘야 하는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신에 대한 이해도가
얼마나 낮아졌는가 하는 것은
수치로 측정된 그 값들이 로그적 값이라는 점에서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100포인트의 저하는
진실과 힘이 실로 엄청나게 낮아졌음을
뜻한다.
일부 종교들에서는
그런 잘못의 정도가 너무나 심했으므로
그런 종교들의 근본주의 계통의 분파들은
임계점인 200수준이하로 떨어졌고,
그로 인해 진실이라고 잘못 전해진 거짓들은
인류의 집단적인 고통과 파괴라는
심각한 결과들을 이끌어 냈다.
200이하의 수준들은
온갖 형태의 고통을
뜻한다.
세상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게 한
주요한 지렛대들 중 하나는
정의로움이라고 하는
자멸적인 개념의 형태를 띤 무기였으며,
그것은 190수준에 해당하는
자부심으로 측정된다.
'정의로움'은
지난 몇 천년간
인류 역사에서 으뜸가는 파괴적 힘이자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해왔다.
'정의로움'은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잔인성과
야만성을 가장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둘러댈 수 있는
수단이었다.
참으로 위대한 역사적 길들은
우리가 이 세상의 영역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인
1000수준으로 측정되는 존재들이라 여기는
화신들, 혹은 위대한 스승들에게서 나왔다.
서구사회에서
가장 잘 알려진 위대한 스승들로는
그리스도, 붓다, 크리슈나, 조로아스터가 있다.
1000수준의 의식은
전인류의 구원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전 인류에게 이야기하는 영적인 스승은
화신의 수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화신들은
인쇄술을 사용하기 전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가르쳤고
그 가르침이 어떻게 해석되었는가에 관한
믿을만한 자료들이
상당히 부족하다.
그들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참뜻과 관련된 내용이
너무나 적으므로
원래의 가르침이
후세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잘못 해석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우리는
오류가 재개되어
원래의 순수성을 훼손한 부분을 쉽게 실별해낼 수 있다.
원래의 가르침에서 이탈한 내용의 상당수는
그 왜곡이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영적인 직관이나 기본적인 윤리감각을 가진 사람이면
확연하게 식별할 수 있다.
그런 왜곡은
종교단체들이 자행한듯 하다.
권위있는 종교집단들이
추종자들과 세속적인 이익을 끌어모으고
신도들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게 해주는 힘과 권위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기 위해
창시자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해
간판처럼 내걸 때 발생한 듯하다.
영성 그 자체는
그 누구와도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며,
잘못된 해석들은
독단적인 종교단체들이
스스로에게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서
엉뚱한 해석을 내림으로써 파생되었다.
그들은
세속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잘못된 해석들을
영적인 진실로 이용해 먹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낮은 힘을 얻기 위해
높은 힘을 버렸고,
애초의 창시자들이 설파한 진실을 훼손했으며
그로 인해 그 창시자들은
역사적으로 이름뿐인 창시자들이 되어버렸다.
그후 화신의 지위와 명성은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일에
도움되고 거래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짧은 역사적 조망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원래의 진실이 지금 이순간까지 오염되지 않은 채 남아있고
재발견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적이란 말은
종교와 신이란 말들과 마찬가지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지나치게 자주 사용되어왔다.
역사적인 왜곡을 피하면서
인간과 신에 관한
모든 유용한 정보를 포괄하는 좀더 폭넓은 용어는
'의식'이다.
영성은
의식의 측면들 중
진실과 신성에 대한 앎과 관련된 측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존재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요
무한한 영역인 절대이자
항상 현존하는 실상과 관련된
모든 측면들을 포괄한다.
이러한 정의속에서
의식은
모든 가능성들과 실상들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며
앎은 그 궁극적인 잠재성을 향해 나아가는
공간이자 모체다.
우리는
분리된 존재로서의 구도자가
이미 하나의 환상으로 용해되어 버릴
1000의 의식수준까지 이르는 이 길을
안전하고 정확하게 검증해볼 수 있다.
일찍이 살았던
모든 위대한 영적스승의 가르침들을
지금 검증할 수 있을뿐 아니라
그 내용을 낱낱이 수치화해서
확인해 볼수 있다.
600수준은
이원성이 비이원성으로 사라지는 수준을
나타낸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것,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평상적인 것과 가능한 것 사이에 놓인 다리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수준에서다.
600수준에서
영과 인간이 만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서로 뒤섞인다.
그것은
하나의 기준이 되는 참조점이며
그것이 깨달음의 수준이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운동역학적인 진실 테스트 자체가 600수준으로 측정되고
따라서 그것이 이원성과 비이원성의 영역들의 만남을
물리적인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식의 본질에 대한 연구는
그것이 스스로를 바로잡고
스스로의 힘에 의해 나아가는 것이 된다는 점에서
모든 영적인 길들 중
아마도 가장 강력하고
가장 순수한 것일 터다.
의식과 영성에 관한 문헌들은
구도자를 오류에 빠지게 하기 쉽다.
따라서
오늘날 진지하게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들은
객관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진실을 설파하는
모든 가르침들을 배제한다.
500부터 1000에 이르는 의식수준들은
다른 영역이나 차원이라
묘사할 수 있는 것들을 나타낸다.
500대 중간 이상에 이른
영적 스승들은
많은 숫자의 사람들과
가장 널리 접하는 사람들이다.
영적으로 진화한 그들의 의식이
700에 이르면
그들은 접하기 어려운 전설적인 존재가 되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기록된 가르침들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인간의 삶을
인간의식의 다양한 장들과 수준들이
서로 서로 이야기하고
사람들을
다양한 수준들의 비인격적인 대변자들로 보는 것으로
정형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물론을 완강하게 신봉하는 과학자가
종교나 영성을 깔보는 것은
사실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400대 에너지 장의 표현이며
아울러 자신들의 능력과 고유한 한계들의 표현에 불과하다.
특히 400대 중간 이하에서는
지성과 이성, 합리적 사고에 대한
자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400대에서는
모든 지식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원천인
과학이 신을 대신한다.
300대에서는
정치가 인류를 구원하는 희망이 되고
정치적 이데올로기, 표어, 구호들을 둘러싸고
전쟁이 벌어지며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가치가 저하된다.
나쁜 사람들은
단두대와 전기의자에 의해 제거되거나
감옥에 갇힌다.
이 수준에서는 마음이
옳음 대 그름이라는 제한된 영역에 대한
이원적인 집착 상태에 빠지고
그런 이분법을 낳는 위치성에 대해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그보다 더 낮은 수준들의 의식들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규정이 매순간마다 변하고
각 문화마다 다르며
한 문화내에서도 교육이나 아이큐, 사회적 풍습,
지리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혼란스런 세계속에서 살고 있다.
이 수준은
뉴미디어에 매우 취약하며,
뉴스 미디어는 그 점을 최대한 이용해
감정적이고 감상적이 호소력을 지닌 것들로
대중을 착취한다.
이런 양자택일적 성향은
400대에서도 과학대 비과학으로서 지속된다.
따라서
과학 그 자체는
중세시대 교회의 도그마에 버금가는
유력한 도그마로 무장한
기계론적 환원주의(생명현상을 물리, 화학적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관점)와
결정론의 진원지다.
500대의 의식수준에 이르면
양극의 본원적인 한계와
무지속에 갇혀 있는 경향이 줄어들고
그런 오류들이 마음에 대해 갖고 있던
지배력도 약화된다.
500대에서
사랑의 형태로서의 영이
경화된 양극을 용해시키기 시작하고
사안의 맥락을 고려하는 상황윤리와 휴머니즘이
극단론을 중화시키는
좀더 폭넓은 균형감각과 윤리관을 가져다 준다.
가슴의 수준(500)은
현세주의와 완강한 정의,
징벌적인 도덕주의로부터 벗어나는 다리가 되며,
서로의 견해에 대한 고려와 자비, 연민, 이해와 비판단을 통한 용서 등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다.
500대가 지닌 큰 힘은
이해의 능력을 사용한다는 데 있으며,
이해야말로 무조건적인 사랑의 수준인
540으로 나아가도록 해주는 요소다.
이런 수준들에서는
행위와 행위자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를테면
어머니는 아들이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감옥에 갇힌 아들을 찾아가고
그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의식수준 500대에서
인간이 지닌 한계들과 그 한계들을 벗어날 능력이 없는 것을
이해해주는 능력 역시 존재한다.
그들이
자신들이 뭘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하려는 마음과
실제로 그럴 수 있는 능력은
자비심이 징벌과 앙갚음, 역공을 대신하므로
실현가능한 목표가 된다.
그러므로
용서가 근본원리가 된다.
500대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이해한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자리잡은 아이가
모습을 드러내고
가장 깊은 곳에 내재된 원초적인 순수함이
좀더 뚜렷해지며
우리가 응징하려 하는
사회적 범죄의 잔혹함에 버금가거나
혹은 그것보다 한층 더 잔혹한 형태를 취하곤 하는
보복과 응징이 가능하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의식수준 500대에서는
모든 행위를
다양한 요인들의 결과로 볼 수 있는 능력도 존재하므로
이제는
사안의 맥락과 상황들에 따라서
책임의 유뮤와 경중을 보게 된다.
행위는 짙고 옅은 다양한 의미의 명암을 지닌 것이 되며,
조건반사적인 지나친 단순화는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즉각적인 판단은
그치고 다양한 역설들을 가늠하고 고려한다.
사건들이 자신이 뜻하지 않았는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제껏 내린 선택들에 대한
자신의 현재 혹은 그 이전의 영적 입장이 일치할때만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생명의 모든 표현들은
이 생이 그에 참여한 존재에게
참으로 적절한 영적 성장의 기회임을 알고 있다.
우리가
평상시 체험하는 삶이란
600이하의 모든 가능성들의
극화요 서사시이며,
600수준에서 그 맥락은
극적으로 변화하고
외관상 장애처럼 보이는
그러나 종래와는 완연히 다른 것들이
이제 앎의 원리이자 과제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600수준에서는
지각의 자리에 통찰력이 들어선다.
지각의 세계에서는
불행과 재난으로 보였던 것들이
이제는 좀더 향상된 통찰력의 앎을 통해서
선물로 보인다.
또한 600수준에서는
물리적인 몸과의 동일시가 끝나고
따라서
그 어떤 두려움보다 큰 두려움이자
가능한 사실처럼 보이는 죽음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참나는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고치에서 빠져나온 에벌래처럼
새로이 해방된 영은
그 비물질적 속성을 마음껏 향유한다.
600을 넘어선 의식은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기에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하는 자명한 상태나
조건이라 서술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 될 수 있다.
아는 자와 알려진 바는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라서
동일하며 자명한 것이다.
거기에는 안팎에 없고
'신대 개인'의 구분도 없으며
전체를 벗어난 부분도 없고
설명할 만한 독립적인 실체도 없다.
모든 이원성은 초월되었다.
그때의 앎은
스스로 존재하므로
앎이 일어나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순간에
자아가 참나로 해소되어 버림으로써
한동한 경이로움과
아울러 깊디깊은 외경심이 자리잡는다.
자아의 죽음을 체험하고 난 후에는
고요와 평화만이 존재한다.
과거의 몸을 참나로 여겼다는 것이
이해할수 없는 일로 여겨지며,
그런 식으로 생각해왔던 것은
일시적인 착오나 망각에서 비롯된 것임이
절로 자명해진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진실로 어떤 존재였는지를
불가사의하게도 까많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본래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환희에 젖는 것과 흡사하다.
모든 두려움들,
삶의 온갖 변화와 부침들이 사라지고
죽음 그 자체로부터 해방된 자리에는
자신이 항상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항상 존재할 것이며 생
존따위는 전혀 문제된 적이 없었다는
기억이 자리잡는다.
자신의 본래적인 안전은
항상 현존하고
시공을 넘어서는 참나의 실상에 의해
줄곧 보장되어 왔다.
참나의 실상에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그것은 온세상과 우주보다 먼저 존재했다.
모든 것이 동일한 가운데서는
어떤 이분법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거기에는 물음도 답도 없다.
자신은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며
공간적인 위치성과 정신작용을 넘어서 있다.
자신의 참나는
하나와 여럿이 생겨나는
실상이라 말하는 것이
좀더 정확할 것이다.
모든 것은
스스로 완전하고 자족적이며
그 자체의 바깥이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으므로
그 자체의 바깥에 있는
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아가 내용인데 반해
참나는 맥락이다.
거기에는
창조자와 창조되는 것 사이의
구분이 없다.
모든 것은
신의 마음이 행하는 표현으로서
스스로 창조되고 있다.
이런 위대한 앎은
참나가 있는 모든 것인
700대 의식수준의 특징이다.
우주는
스스로 진화하고
스스로 실현해가므로
어떤 관여도 필요치 않다.
모든 것은 완벽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800대와 900대의 의식수준들은
전 인류의 잠재적 의식의
가장 높은 수준들을 대표한다.
현자가
이따금 세상으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세상은 이제 달라졌다.
구원을 필요로 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다.
개인들은
자신들을 고양시키고 강화시켜 주는
에너지 장만을 필요로 할뿐이다.
온전성의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측정되는 의식들은
200수준이하에 해당하는 인류가운데
78%의 사람들이 가진
부정적 에너지를 상쇄해준다.
1000수준에 이르는 의식수준의 힘은
인류의 부정적 에너지 전체를 상쇄해주며,
전 인류의 구원의 잠재성을 창조할뿐 아니라
그것의 확실성을 보장한다.
시간의 세계에서는
전 인류의 구원이 서서히 진행되는 듯하지만
시간을 넘어선 전대성의 실상속에서는
이미 존재한다.
영적인 성장은
그것을 자유의지와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을
토대로 삼고 있으므로
모든 이들은 스스로가 선택하는 세계만을 체험한다.
우주에 희생자란
절대 있을수 없으며
모든 사건들의 결과는
내적인 선택과 결정의 표현이다.
필연적인 운명이 지체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우리가 낮은 힘
혹은 환상과 거짓으로 표현해온 에너지 장들이
끌어당기는 듯하다.
이런 끌어당김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자아를 몸과 동일시 하는 것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생존의 두려움이다.
따라서
죽음은
삶의 종말을 뜻하는 무서운 것이 되는 동시에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가공적인 존재성을 가진 독립적이고
가능한 실체로 인식된다.
더 높은 자아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이 실제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인간의 삶은
게임들과 익살극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죽지 않는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지 않다면
어째서 사람들이 정치적인 이익이나
돈과 같은 하찮은 것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려하겠는가?
난도질당한 시신들의 역사는
전쟁의 영광이 완전히 부조리한 것임을
영웅 지망생들에게
순간적으로나마 확신시켜준다.
7000만명이 죽은 전쟁후에도
그 나라 국경선은 전과 다름없고
모두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며그
모든 익살극은
서글픈 농담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과거의 적들이
이제 악수를 나누고
서로의 전몰장병 기념일을 축하해주며
서로의 전쟁기념관을 방문한다.
체스나 체커 게임에서 말들은
이튿날 다시 사용하기 위해
판에서 치워지기만 할뿐
실제로 파괴되진 않는다.
에고는
경기 참가자들과 관전자들에게
아주 실감나는 것으로 보이는 전투에 몰입한다.
그런데
어떤 수준에서는
경기 참가자들이 꼭 배워둘 필요가 있는,
모두에게 유익한 교훈을 실연해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준다.
용기에서 나온 행동들은
궁극적인 앎에 이르는데 꼭 필요한
영혼이 지닌 내재적인 힘을 일깨워준다.
600대를 넘어설 경우
선택을 하는 개인적 자아같은 건 없다.
진화나 성장은
의식 그자체의 본성의 표현이다.
따라서
영적인 어떤 과제를 열심히 수행해 나간다고 하는 것은
그저 과제가 완료될때까지
물질세계 속에서
몸을 계속 내달리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실상에는
연속적인 장들로 보이는
하나의 생이 있을 뿐이다.
기독교의 흠정역 성서에 대한 메모
구약은
190으로 측정된다.
그러나
창세기 수준은 660이고
시편은 650이며 잠언은 350이다.
이것들을 제외하면
구약은 전체적으로 불과
125로 측정된다.
신약은
640으로 측정된다.
하지만
70으로 측정되는 요한계시록을 제거하면
신약은 790으로 측정된다.
현재의 성서는
475로 측정된다.
성경을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참으로 성스럽게 만들려면
창세기와 시편, 잠언을 제외한
구약 저체와 요한계시록을 제외시켜야 한다.
이렇게 되면
성서는
진정으로 성스러울 것이며
740으로 측정될 것이다.
구약성경 - 190
창세기 - 660
시편 650
잠언 - 350
신약 - 650
요한 계시록(묵시록) - 70
중요한 것은
람사판 성서는 킨 제임스판 성서보다
20포인트 더 높게 측정된다.
킹 제임스 판 성서는
중대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한 것으로 잘못 인용되어 있다.
이 부분이 아람어 번역본에서는
"오 나의 하나님, 이것을 위해 저를 예비하셨나이다"로
말한 것으로 인용되어있다.
람사 성서에서
창세기와 시편, 잠언을 남기고
구약전체와 요한 계시록을 제외시킨다면
람사 성서는 810으로 측정될 것이다.
신약의 람사 번역본에서
요한 계시록을 제외시키면
람사 성서의 신약은 880으로 측정될 것이다.
첫댓글 전통적인 참된 종교들에서 비롯된 오류의 근원은 다음 두가지를 들을 수 있다. 첫째는 위대한 스승의 애초 가르침들을 잘못이해하거나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그 스승의 제자들이나 그 가르침을 직접 들은 사람들은 깨달은 사람들이 아니었으므로 원래의 가르침은 그들의 에고에 의해 물들었다. 그렇게 오염된 내용은 뒤이어 여러세대를 걸쳐 번역되고 베껴지는 과정에서 더욱더 오염되었다. 그런 왜곡의 과정은 에고가 가르침의 참뜻이나 핵심이 아니라 귀에 들리는 말 자체에만 매달리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평화와 사랑 이외의 것을 가르치는 번역본은 무엇이든 다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원칙이요.
<간디 묵상록 중에서>
신은
천 가지의 이름을 지니고 있거나,
아니면
차라리 이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모든 이름으로
그분을 예배하거나 기도 드리게 됩니다.
누구는 그분을 라마(Rama)라고 부르고
누구는 크리슈나(Krishna)라고 부르며,
또 다른 사람들은
그분을 라임(Rahim)이라 부르고
또 혹자는 하느님(God)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숭배는
같은 정신을 갖지만
모든 음식이 모두에게 맞지는 않듯이,
모든 이름들이
모두에게 적용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종교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겠지요._()_
신의 은총!!
여기서 기도하든
저기서 기도하든
안에서 기도하든
밖에서 기도하든
혼자 기도하든
같이 기도하든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지정된 종교적 외관은 다양하게 있지요 ㅋㅋ
여기서 종교적 상징물들을 조금 감상 해 볼까요?
(올 해 찍은 사진입니다ㅋ)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 있는 정교회
가고 싶네요 ㅎㅎㅎ
체코 프라하 비투스 대성당
(1300년대 고딕 양식)
오스트리아 짤츠캄머굿 산 정상 해발 1500미터에 서있는 십자가 (주변 알프스의 호위를 받으며 하늘과 맞닿아 있음)
엣지있고
느낌 있는 십자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