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경의 고개]
여우목고개와 문경
여우목을 중심으로 한 문경(聞慶)의 인문학·3
오상수(吳尙洙, '길 위의 인문학')
금천(錦川)의 경천호
여우목 동쪽에는, 동로면 생달리 백두대간 대미산과 황장산에서 발원하는 금천(錦川)이 흐른다. 경천호는 낙동강 지류인 금천 상류에 건설한 댐으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계곡형 저수지이다. 문경시 동로면 인곡리에 위치하며 흘러들어온 물이 맑고 수심이 깊은 너른 호수다. 호수 주변에는 수려한 경관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데크와 벤치, 정자가 조성되어 있다. 문경팔경 중 하나로 불린다. 경천댐은 1983년 6월에 착공하여 3년 6개월간의 공사 기간과 602억 원을 들여 1986년 12월에 준공하였다. 제방길이 368m, 높이 63.5m, 최대 수심 57m이며 총 저수량 2,822만 톤으로 문경과 예천 9개 읍면의 3,400ha 농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여 준다. 경천호의 동쪽은 예천군 용문면이다.
운달산 김룡사(金龍寺)
김룡사(金龍寺)는 금천(錦川)의 지류인 산북의 대하리천 상류, 아천의 깊숙한 산곡에 천 년 고찰이다. 김룡사는 운달산의 우람한 산세에 안긴 장엄한 고찰이라는 외형에서만이 아니라, 근래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性徹)·서옹(西翁) 스님 등이 수행한 곳으로 유명하다. 김룡사(金龍寺)는 신라 진평왕 10년인 588년에 운달조사(蕓達祖師)가 운달산 자락에 절을 창건하고 운봉사(蕓峰寺)라고 했다. 후에 김룡사(金龍寺)로 개칭되었다. 김룡사(金龍寺)는 일제 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로 경북 북부 일대에서 45개의 말사를 거느렸으나, 후에 조계종 제8교구의 본사 직지사(直指寺)의 말사로 편성되었다.
김룡사 일주문은 홍화문(紅霞門)이다. 일주문(一柱門)은 두 개의 기둥이 일렬로 서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찰의 일주문은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이요, 속계(俗界)와 성계(聖界)를 구별하는 경계이다. 홍하문은 1727년(영조 3)에 건축된 것으로 그 보존 가치가 높다. 특히 김룡사 일주문의 편액(扁額) 글씨는 개화기 독립운동가였던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김가진은 조선 후기의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를 사숙했는데, 그의 글씨는 날렵하고 획의 움직임이 빠르다. 창덕궁 후원 정자 편액 상당수가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홍하(紅霞)는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 붉은 노을이 푸른 바다를 뚫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금천(錦川)의 의기(義氣)
유서 깊은 수행도량 김룡사는 역사적으로 의기(義氣)가 성한 곳이다. 김룡사를 품은 운달산(雲達山)은 임진왜란 때는 산양(山陽) 지역의 선비 권의중·고상증이 주도한 문경의병이 발진한 곳이다. 특히 구한말에는 왜병과 맞서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이 창의한 의병이 주둔하기도 하였으며, 또 1919년 3·1만세운동 때에는 김룡사 학승들이 만세운동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과 문경의병(聞慶義兵)
¶ 1592년(임진년) 4월 13일(음력) 신식 조총으로 무장한 왜적(倭賊)이 부산에 상륙하여 조선(朝鮮)을 침공하였다. 조선이 제대로 방비가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왜적은 파죽지세로 북상하며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을 살상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왜적의 부대가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밀양-대구를 거쳐 상주-문경 조령으로 향했는데 상주에서는 부분적인 전투가 있을 뿐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주력부대가 한양의 길목인, 험준한 문경새재를 저항 없이 통과했다. 신립(申砬)의 관군은 탄금대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 대패했다. 문경이 뚫리고 충주에서 관군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임금은 한양 도성을 버리고 황급히 북으로 피난을 갔다.
그렇게 관군이 무너진 상황에서, 홍의장군 곽재우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경상남도)에서 창의한 의병(義兵)이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해 5월 2일 왜적이 문경 땅에 들어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고, 문경지역 일대가 왜적에게 포위되는 등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때 문경의 선비들이 분연히 일어났다. 초야에서 학문에 정진하던 선비들이 의병을 창의한 것이다. 권의중(權義中)과 고상증(高尙曾)과 고상안(高尙顔) 형제 등이 여러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주로 금천(錦川) 산양지역의 선비들이다.
8월 15일 궁수와 검사 백여 명이 합세하게 되자 정식으로 의병대를 조직하였다. 의병장은 상주의 권의중(權義中), 치병장은 고상증(高尙曾)·고상안(高尙顔), 막좌에 황정간(黃廷幹)·고인계(高仁繼)·채득강(蔡得江), 선봉장에 최대립(崔大立), 전향관(轉餉官)에 여춘(余春)을 임명 조직하고 산북의 김룡산(金龍山, 雲達山)에 올라가 천지신명에 고하고 입술에 짐승의 피를 발라 맹서한 후, 의병 명단을 수령과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이어서 문경지역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여 왜적을 참수하거나 포로를 잡아 상주목사에게 보고하고, 날마다 무기를 제작하면서 격문(檄文)을 도내 사림에게 통문하였다.
8월 17일부터 10월 26일까지는 고상안, 이봉, 조정 등이 이끄는 함창의병진과 안동의병진 권해 부대와 협조하면서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수차례 전과를 올리고, 12월 18일 300여 명의 왜적을 참수한 것이 그 유명한 ‘당교전투’이다. 1596년 70개 고을 500여 명이 모인 팔공산회맹에 문경의병이 다수 참석하였다.
이듬해(1597) 1월에는 진지 구축에 힘쓰고 7월 19일에는 창녕(昌寧)의 화왕산에 들어가 곽재우(郭再祐) 의병장과 함께 왜적을 제압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8월에 곽재우 의병장의 고령전투에 참여하여 왜장을 죽이고 구내역(경주)에서 왜장을 잡아 죽이는 등 전과를 올린 후에 문경 산양(山陽)으로 귀환하였다. 10월에는 300여 명의 의병으로 행점(상주 공검)에서 노략질하던 왜장 등 다수를 백갈산 아래에서 참수하였다.
¶ 2017년 5월 22일, 영강(穎江)의 ‘솔숲공원’에「壬亂聞慶義兵紀念碑」(임란문경의병기념비)를 제막했다. 영강 변의 솔숲은 1596년 9월 12일 당교(唐橋, 지금의 문경시청 자리)에 주둔한 왜적이 영순(永順)을 침공하는 길목인데, 당시 의병이 이곳에서 적을 크게 물리친 전적지(戰迹地)이다. 높이 6m의 거대한 자연석으로 주비(主碑)를 세우고, 그 우측에 따로 장방형의 오석(烏石)에 임란문경의병의 전적과 의병의 이름을 새긴 비를 세웠다.
근암서원(近嵓書院)
동로의 경천호를 지나온 금천이, 산북 운달산에서 발원한 대하리천을 받아들이고 남으로 흐른다. 산북면 대하리에는 천연기념물(426호) 노거송(老巨松)이 있고, 황희 정승의 후손인 황시간(黃時幹, 1558~1642)이 세운 장수황씨종택(宗宅)이 있다. 그 아래 산북면 서중리에는 ‘근암서원’이 있다.
☞ 근암서원(近嵓書院)은 1665년(현종 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과 1669년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모셨다. 그 후 1693년에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과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를 추가 배향하였으며, 1786년에는 활재(活齋) 이구(李榘),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을 추가 배향했다. 선현 7위를 배향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근암서원에 배향된 선현(先賢)
*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 1473~1508)은 부림 홍씨로, 홍문관 대제학, 경기관찰사를 지낸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의 넷째 아들로 문재가 뛰어났다. 23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예조정랑을 지냈다. 아버지 홍귀달처럼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직언하다가 참혹하게 곤장을 맞고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앞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진안 유배 중, 자신의 앞날에 닥칠 운명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만사(輓詞)를 지었다. 서른 두 살의 젊은 나이에 자만사(自挽詞)를 짓고 4년 뒤에 죽었다. 비장함과 비애감이 절절하게 전해진다. 문경시 영순면 의곡리 묘소 앞에 「自挽詞碑」(자만사비)가 서 있다. 홍언충은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 용재(容齋) 이행(李荇), 조은(釣隱) 박은(朴誾)과 함께 ‘시가사걸(詩歌四傑)’로 일컬어진다.
*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년~1613년)은 조선 예조참판 겸 예문관 대제학 등을 거쳐 조선 한성부판윤 직책을 지낸 조선 중기의 유명한 문신이자 대학자이다. 경기도 출신이지만 이덕형은 상주(尙州)와 깊은 연고가 있다.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이다. 이덕형(李德馨)은 임진왜란 때 많은 활동을 했다. 특히 이순신이 노량의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을 때 동요하는 수군을 통제하고 수습에 나서기도 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절친 이항복은 글을 지어 “이덕형은 도량이 넓었으나 불의와는 타협할 줄 몰랐으니, 결국 이 때문에 죄를 얻었고, 또 그 때문에 만백성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고 그를 기렸다.
☞ 근암서원이 있는 산북면은 고려 현종(1018년)이래 상주목 산양현에 속하였다. 상주(尙州)는 이덕형의 진외가가 있다. 조부는 이진경(李振慶)이고 조모는 진사 김윤종(金胤宗)의 딸 상주 김씨이다. 이덕형은 상주의 거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막역한 사이였고, 영남사림 즉 상주지역의 류성룡-정경세-홍여하 등의 문인들과 유대가 깊었다. 이덕형의 아들 이여규(李如珪)가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1634년(인조 12) 상주에서 부친의 문집인 『漢陰集』을 간행한 바 있고, 손자 이상정(李象鼎)이 1668년(현종 9)에 상주에서 문집을 중간했다.
*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 1540~1594)은 본관이 상산이다. 부친 김범(金範)은 경서에 밝고 행실이 높았다.(經明行修) 조정에 추천되어 옥과현감을 지냈는데, ‘후계 선생’으로 잘 알려진 당대의 명사였다. 김홍민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독서량이 풍부했다. 사간원 사간, 홍문관 응교, 춘추관 편수관, 청주목사를 지냈다. 그는 상소문을 통해 율곡 이이와 박순을 강렬하게 탄핵하기도 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600명을 규합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다. 1594년 임란 중에 생을 마감했다.『사담집』이 있다.
*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0~1674)는 부림 홍씨로, 성종 때의 명신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이 5세손이며, 아버지 홍호(洪鎬)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에 이른 강직한 인물이었다. 어머니는 의병장 고경명의 손녀이다. 5대조부터 문경에 이거한 후 가문의 세거지로 삼았다. 아버지 홍호가 상주의 정경세(鄭經世, 1563~6)를 스승으로 삼은 것을 미루어볼 때, 이황-류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학문적 계통 속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1654년(효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사간원 등 청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두 번의 응지상소(應旨上疏, 왕의 구언교에 응하여 올리는 상소)를 올렸는데, 서인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아 유배되었다. 함창 율곡리(문경시 영순면)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저술활동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유명한 역사서『휘찬려사』『동국통감제강』을 저술했다.
* 활재(活齋) 이구(李榘, 1613∼1654)는 효령대군 8세손이다. 스스로 산양처사(山陽處士)라 했다. 황희 정승의 후손인 황시간의 딸인 장수 황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가가 있는 산북에서 살다가 아버지의 관직을 따라 서울에 가서 성장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엄중하였는데, 주자와 퇴계의 가르침을 학문의 바탕으로 삼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산양현(산북)으로 내려와 세상의 명리에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았다. 주자(朱子)의 성리학(性理學)과 왕도(王道)정치의 실현을 위한 방책을 고구하는 데 힘썼다. 주렴계의 태극설의 뜻을 발휘하여「태극도설」을 지었다. 이러한 경지는 스승에게 전수를 받은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득한 것이었다.『활재집』『활재유고』가 전한다.
*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1732)는 연안 이씨 후손으로서 이조판서와 판중추부사를 지낸 이관징(李觀徵)의 손자이며, 이조참판과 경기관찰사를 지낸 이옥(李沃)의 아들이다. 그의 가문에서는 수십 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고조는 지봉(芝峯) 이수광(李粹光)이며 처가로는 처증조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다. 그는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예술에 몰두한 산림학자로 일가를 이루었다. 34세 때 서울에서 상주의 노곡으로 이주한 후, 1700년 식산정사를 짓고 원림을 경영하며 학문과 저술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식산문집』『도동편』『역통』『예기상절』『사서강목』『태학성전』『지서』『누항록』등 방대한 서적을 남겼다. 그런 가운데 이만유, 이현일, 정시한, 이광좌, 이형상, 오상원. 이익 등 당대 남인과 소론은 물론 근기학파와도 폭넓은 교류를 했다. 주자학의 큰 봉우리였다.
*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은 본관이 안동,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이다. 상주 산양현 근암리(현재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서 태어났다. 1710년(숙종36)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한 이래 예조낭관, 만경현령, 울산부사, 사헌부 집의, 지중추부사, 이조참판, 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18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6대조 권대기, 5대조 권우가 모두 퇴계의 문인(門人)으로, 퇴계의 학문이 가학으로 전승되었다. 권상일은 퇴계를 사숙(私淑)하여「사칠설(四七說)」을 지어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분리하고 이(理)는 ‘본연의 성’이며 기(氣)는 ‘기질의 성’이라고 주장했다.
¶ 『청대일기(淸臺日記)』 ☞ 권상일(權相一)은 다른 저서와 함께『청대일기(淸臺日記)』를 남겼는데, 이는 그가 20세가 되던 1702년 1월 1일부터 1759년 7월 1일까지 약 58년, 총 425개월에 걸쳐, 자신과 가족의 일상은 물론 친지, 동료, 관직생활 등의 다양한 생활상을 매일 기록한 것이다. 『청대일기(淸臺日記)』는 권상일이 58년 동안 생활하며 직접 경험한 우리나라의 사회, 경제, 군사, 문화, 정치에 대한 모든 것들을 기록하여 남김으로써, 18세기(영조 대) 상주·문경지방의 향촌생활, 지방선비의 서울에서의 관직생활, 조선후기 지방유생들의 과거 응시 과정, 18세기 영남사족의 일상과 생활의례, 경상도 지방 특유의 각종 관혼상제 의식을 자상하게 기록하였다. 당시 문인들의 삶과 서원 활동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권상일의 한시 164수와 산문 13편 등도 함께 실었다.
근암서원(近嵓書院)은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82년 9월 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묘우(廟宇), 신문(神門), 강당, 문루 등이 있다.
금천의 청대구곡(淸臺九曲)
금천(錦川)은 ‘비단결 같이 아름다운 시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천에는 일찍이 도락지사에 의해 구곡원림이 경영되었다. 그 대표적인 원림(園林)이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의 청대구곡(淸臺九曲)이다. 그 후 청대의 제자 채헌(蔡瀗 1715~1795)이 산양구곡(山陽九曲)·석문구곡(石門九曲)을 경영하였는데,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
☞ 산양구곡(山陽九曲)·석문구곡(石門九曲)은 청대 권상일의 제자인 채헌(蔡瀗, 1715∼1795)이 금천(錦川)에 경영하던 구곡원림이다. 채헌은 조선 정조 때의 학자로, 자는 계징(季澄), 호는 근품재(近品齋)이다. 39세 때(1753년, 영조 29)에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하지 않고 처사로 지냈다. 74세 때(1788) 석문정(石門亭)을 짓고 거기서 여생을 보냈다. 스승인 권상일의 청대구곡을 계승하여 산양구곡을 경영하며 「산양구곡시」를 지었고, 석문구곡(石門九曲)을 경영하며 「석문구곡가」도 지었다. 근품재 채헌은 석문정이 완성되고 나서 새롭게 석문구곡을 설정하였다. 근품재 채헌이 말년에 경영한 석문구곡은 1곡 농청대, 2곡 주암정, 3곡 우암대, 4곡 벽림방, 5곡 구룡판, 6곡 반정, 7곡 광탄, 8곡 아천, 9곡 석문정이다.
청대구곡(淸臺九曲)은 권상일(權相一)이 경영한 원림으로, 금천(錦川)의 흐름을 따라 문경시 산북면과 산양면에서 예천군 용궁면에 걸쳐 설정된 구곡이다. 일반적으로 구곡은 물의 상류로 오르며 설정하는데, 청대구곡은 아래로 내려가며 설정된 것이 특징이다. 청대구곡은 제1곡이 우암(愚巖), 제2곡이 벽정(碧亭), 제3곡 죽림(竹林), 제4곡이 가암(佳巖), 제5곡은 청대(淸臺), 제6곡이 구잔(溝棧), 제7곡은 관암(觀巖), 제8은 성암(筬巖), 제9곡이 소호(穌湖)이다.
*청대구곡 제1곡은 우암(愚巖)이다.
‘우암 (愚巖) ’은 청대(淸臺)가 은거하던 산양면 서중리 앞 금천에 있다. 후에 채덕동(蔡德東, 1757~1814)이 ‘우암정(友巖亭)’을 지었다. 청대의 시절에는 우뚝 솟은 우암과 금천의 맑은 물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一曲愚巖擁不開
巖前流水自縈回
我家只在川西畔
童子時遊幾往來
일곡이라 우암(愚巖)이 안아서 열지 않으니
바위 앞에 흐르는 물은 절로 돌아가네.
내 집은 다만 시내 서쪽 가에 있으니
동자와 때때로 노닐며 몇 번을 오갔던가.
☞ 우암(愚巖)은 제자 채헌(蔡瀗, 1715~1795)의 산양구곡 제5곡[巖臺]에, 석문구곡 제3곡[友巖臺]에 설정하였다. 청대구곡의 ‘우암(愚巖)’이 우암(友巖)으로 바뀌었다. 채귀하(蔡貴河)의 후손인 우암(友巖) 채덕동(蔡德東, 1757~1814)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선조 채유부(蔡有孚)를 기리기 위하여, 1801년(순조1)에 우암정(友巖亭)을 짓고, ‘우암(友巖)’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정자 뒤쪽 바위에 ‘友巖蔡公 藏修之所’(우암채공 장수지소)라고 새겨져 있다.
청대 시절 우암 앞을 지나던 금천의 맑은 물길은 제방을 쌓으면서 저 만큼 떨어져 흐른다. 그리고 지금 우암 앞에는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인가가 한 채 있어 옛 풍치에 어울리지 않는다.
☞ 우암정(友巖亭)에서 바라보이는 금천 건너편에는 채유부(蔡有孚), 채헌(蔡瀗), 채덕동(蔡德東) 등의 인천 채씨 선조들이 살았고,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리’가 자리 잡고 있다. 현리 뒤편에 근품산(近品山)이 있다. 채헌의 호가 근품재이다. 현리에는 많은 인재가 나왔다. 그 중 1983년 제11대 국회의장을 역임한 채문식(蔡汶植, 1925~2010) 의원, 1968년 치안국장(현 경찰청장)을 지낸 채원식(蔡元植, 1926~1972) 변호사가 이곳 현리 출신이다.
☞ 현리의 이웃마을 개성 고씨 집성촌 산양면 녹문리는 전 서울대학교 총장 고병익(高炳翊, 1924~2004) 박사의 고향이다. 임란 중 창의하여 문경의병으로 활동한 월봉(月鳳) 고인계(高仁繼, 1564~1647)의 후손이다.
* 청대구곡 제2곡은 벽정(碧亭)이다.
우암정에서 금천의 현리교를 건너 물길 따라 잠시 내려간 곳에 있다. 벽정에는 부벽(浮碧)이라 이르는 바위를 안고 물굽이 돌아나간다. 바위 위에 인천 채씨(蔡氏) 집안 정자인 경체정(景棣亭)이 세워져 있다.
二曲山高翠欲浮
故人茅棟倚層丘
輕檣利檝何時動
西岸巖橫一小舟
이곡이라 산은 높고 푸른빛 들려 하는데
벗의 띠집이 층암의 언덕 위에 기대어 있네.
가벼운 돛대 빠른 배 어느 때 움직일까
작은 배 한 척 서쪽 강안 바위를 가로 지르네.
‘벗의 띠집이 층암의 언덕 위에 기대어 있네.(故人茅棟倚層丘)’라 한 걸 보면, 청대 시절에는 이 바위 곁에 띠집[茅屋]으로 지은 친구의 정자가 있었을 것이다. 채헌은 산양구곡 제4곡 형제암(兄弟巖)으로 설정하고 있다.
☞ 경체정(景棣亭)은 1935년 채묵진(蔡默鎭)과 채홍의(蔡鴻儀)가 할아버지 7형제의 우애를 기리어 부벽(浮壁) 위에 세웠다. 경체정 앞에 흐르는 깊은 물속에 형제암(兄弟巖)이 잠겨 있다고 한다.
* 청대구곡 제3곡 죽림(竹林)이다.
경체정에서 금천 건너에 있는 주암(舟巖) 주변의 산을 죽림 (竹林) 으로 추정한다.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 있다. 채헌의 석문구곡 제2곡인 주암 (舟巖)의 뒷산에는 *도천사(道川寺) 옛터가 있는데, 청대는 도천사를 죽림사라고 하였다. 그 시절에는 산에 대나무 숲이 장관이었을 것이다.
☞ 도천사(道川寺)에는 삼층석탑(三層石塔) 3기가 있었다. 이 탑은 1974년 김천 직지사로 옮겨져 그 중 2기는 대웅전 앞에, 나머지 1기는 비로전 앞에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앞 석탑은 보물 606호, 비로전 의 석탑은 보물 607호로 지정되었다.)
三曲巍然會老堂
藍田遺法日星光
願言永世行無廢
前有淸川滾滾長
삼곡이라 높다랗게 자리한 회로당은
남전의 유법이 해와 달처럼 빛나네.
원하노니 영원히 폐해지지 않아서
앞에 있는 시내처럼 세차게 흐르기를.
청대는 금천에 비친 그 대숲을 보며 ‘원하노니 영원히 폐해지지 않아서/ 앞에 있는 맑은 시내처럼 길이길이 흐르기를’(3,4구)하고 노래하였지만, 지금은 빈 절터만 남아 있다. 죽림아래 주암(舟巖, 배바위)에는 후대에 지은 주암정(舟巖亭)이 있다.
☞ 청대구곡의 죽림(竹林) 아래에는 지금 인천 채씨의 주암정(舟巖亭)이 있다. 주암정(舟巖亭)은 현종 때 선비인 채익하(蔡翊夏)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44년에 지었다.… 채익하(蔡翊夏, 1633~1675)의 자는 비언(悲彦), 호는 주암(舟巖)이다. 강희 12년(1673) 생원시에 합격한 성균관 생원으로 학덕을 겸비한 인물로, 충의위(忠義衛) 채극명(蔡克明)의 아들이다. 채익하는 나재(懶齋) 채수(蔡壽, 1449~1515)의 6세손이다. 채수는 조선조 예종1년(1496) 21세 때 문과인 관시, 회시, 전시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중종반정 때 공신이다. 1511년 국내 최초의 한글소설인 설공찬전(薛共璨傳)을 지었다.
☞ 채익하(蔡翊夏)는 자신의 호를 주암(舟巖)이라 할 만큼 주암을 자주 찾아 사색하고 심신을 수양했다. 주암정(舟巖亭)은 채익하의 8세손인 채종진(蔡宗鎭)이 주축이 되어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1944년에 지었다. 처음에 주암은 그 앞에 금천의 물이 흐르고 있었으나 대홍수로 물길이 바뀌고 제방 공사를 하면서 금천 밖으로 밀려나 뭍에 올려진 배 형상이 되었다. 10세 종손인 채훈식(蔡勛植, 채종진의 손자, 2023년 81세)이 사재를 털어 연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으니, 주암정이 물 위에 떠있는 것처럼 조성되었다.
* 청대구곡 제4곡은 가암(佳巖)이다.
벽정에서 물길을 따라 1km 정도 아래쪽 강 건너에 위치해 있다. 가암은 채헌의 산양구곡의 제3곡 창병(蒼屛)에 해당한다.
四曲洋洋魚躍淵
東看蒼石矗平田
乘流鼓枻眞閒事
早晩巖前繫小船
사곡이라 양양하게 고기는 연못에서 뛰놀고
동쪽 벌판에 우뚝 선 창석이 보이네.
배 타고 노 두드리니 참으로 한가하고
아침저녁에는 바위 앞에 작은 배 매어 둔다네.
가암(佳巖)은 아름다운 바위라는 뜻으로 청대가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청대는 이를 두고 ‘양양히 고기가 연못에서 뛰놀고 / 동쪽으로 보니 창석(蒼石)이 들판에 우뚝 솟았네’라 노래하였지만, 지금은 딱히 지목하여 그 ‘푸른 바위’를 찾을 수 없다.
* 청대구곡 제5곡은 청대(淸臺)이다.
제4곡 가암에서 400m 가량 떨어진 문경시 산양면 존도리에 있다. 채헌의 석문구곡 제1곡 농청대(弄淸臺)에, 산양구곡 제2곡 존도봉(尊道峰)에 해당한다.
五曲中蟠作小臺 * 蟠(반)
西巖百尺執崔巍
窩中白髮閑無事
賢聖遺編案上開
오곡이라 그 가운데 작은 누대 지으니
서쪽 바위 백 척이라 높다랗게 솟았네.
움집 안의 백발노인 한가하여 아무 일 없으니
성현이 남긴 서편 책상 위에 펼치네.
‘움집 안에 백발노인’(窩中白髮)은 이곳에 은거하는 ‘청대 권상일’ 자신일 것이다. ‘성현의 남긴 서편(책)’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학문과 구도에 힘썼다. 주자(朱子)의 「무이구곡」 제5곡 ‘무이정사’에 있는 은병암(隱屛巖)에 견주어, 존도서와(存道書窩)가 있는 바위를 은현암(隱見巖)이라 명명하였으니 주자학자로서 청대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농청대는 문경시 산양면 존도1리에 있다. 권상일은 존도서와(存道書窩)를 ‘농청대(弄淸臺)’라 하고 거기에서 ‘淸臺’(청대)를 취해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영조 15년(1739)에 창건하여 처음 ‘존도서와(存道書窩)’라 하였다. 순조 8년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후인들이 뜻을 모아 철종 4년(1863)에 중건하였다. 현재의 현판은 농청정 (弄淸亭)으로 되어 있다.
* 청대구곡 제6곡은 구잔(溝棧)이다.
농청대에서 물길을 따라 1km 쯤 내려와 산양면 연소리 금양교가 있고, 그 옆 좁은 길로 들어 왼쪽으로 보이는 바위산이 있는데 거기 금천에 잔도(棧道)가 있었던 듯하다. 잔도(棧道)는 나무로 만든 다리이다. 지금은 ‘구잔’이라는 지명이 어디에도 없다.
六曲山阿棧路危
長溝包石去遲遲
西看柳市人爭集
緬憶神農交易時
육곡이라 산비탈에 잔도가 위태롭고
돌을 안은 긴 봇도랑 천천히 흘러가네.
서쪽의 유시에는 사람들이 다투어 모이니
멀리 신농씨가 교역하는 때를 생각하네.
구잔은 바위 아래 물이 흐르고 바위와 길을 연결하는 잔도(棧道, 나무다리)가 있어 운치 있는 풍경을 이루고 있었던 것 같다. 구잔은 채헌의 산양구곡에서 제1곡으로 설정한 창주(滄洲)이다. 지금의 문경시 산양면 불암리 금천이다. 창주에는 깨끗한 모래사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보(洑)가 가설되어 옛 이름에 걸맞게 푸른 물이 가득히 고여 있다.
* 청대구곡 제7곡은 관암(觀巖)이다.
관암은 산양면 송죽리 금천에 있다. 관암은 황사들판에서 흘러온 시냇물과 금천이 만나는 지점의 오른쪽에 솟아있는 바위산이다.
七曲逶迤二水橫
南奔西轉執如爭
中分末合元天理
未到穌湖一道行
칠곡이라 구불구불 두 물이 가로질러
남으로 달리고 서로 돌며 다투는 듯하네.
중간에 나뉘고 끝에 합함이 원래 천리(天理)이거늘
소호에 이르지 않아서 한 길로 흘러가네.
금천이 이 바위산 아래에서 천천히 흘러가니 그 굽이에서 강물은 거울처럼 고요하다. 중간에 두 갈래로 나누어진 물줄기가 다시 하나로 합류한다. 천리(天理)는 하나이지만 그 천리가 작용하는 만물은 수만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이(理)에 수렴된다는 성리학적 세계관이다. 성리학자 청대는 자연현상을 통하여 천리(天理)가 유행하는 단서를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 청대구곡 제8곡 성암(筬巖)이다.
제7곡 관암에서 1km 정도를 내려간 지점으로, 문경시 산양면과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의 경계에 있다. 금남리 용두산이 시작되는 바위가 금천의 물과 함께 어울려 정취 있는 풍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八曲蒼然峭璧奇
周翁風詠在於斯
巖間孤蹟篆雙字
眼底孤山蠶一眉
팔곡이라 창연히 가파른 벼랑 기이하니
주옹(周翁)의 풍영대(風詠臺)가 이곳에 있네.
바위 사이 고적은 두 글자 전서(篆書)이고
눈 아래 고산( 孤山 )은 누에의 눈썹이네.
청대는 이곳에서 북송의 학자 주돈이(周敦頤)가 즐겨 찾던 풍영대 (風詠臺) 를 떠올려, 그 감회를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바위 사이 두 글자 전서(篆書)‘라고 노래했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다.
* 청대구곡 제9곡 소호(穌湖)이다.
성암에서 물길을 따라 1,5km 정도 내려가면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에 청원정(淸遠亭)이 있는데, 그 앞의 금천은 맑은 물이 고여 작은 호수(湖水)를 이룬다.
九曲將終山亦窮
武夷村在岸邊東
淵源水接乎郊近
淸遠亭留古壁空
구곡이 장차 다하고 산 또한 다하니
무이촌(武夷村)이 언덕 가 동쪽에 있네.
연원의 물이 들판 가까이 이어지는데
청원정에 남아 있는 옛 벽은 비어있네.
시에서 소호(蘇湖)의 물가 언덕 동쪽에 있는 동네를 무이촌(武夷村)이라 했다. 무이리(武夷里)라는 이름은 송나라 주자(朱子)가 은거했던 무이산(武夷山)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 금천 동쪽 무이촌(용궁면 무이리)에는 고려 공민왕 때 원(元)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귀국한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 ?~1421)의 유덕을 기려 건립한 청원정(淸遠亭)과 소천서원(蘇川書院)이 있고, 그리고 정자 뒤편 바위에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이 새긴 ‘淸遠亭’ 세 글자가 또렷하다. ― 금천의 서쪽은 문경시 영순면 왕태리이다.
☞ 이곳 금천 소호의 서쪽은 문경시 영순면 왕태리-신전이다. 임진왜란 때 산양(문경)의병을 창의한 성재(省齋) 고상증(高尙曾, 1550~1627)·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함창현감, 풍기군수) 형제가 이곳 출신이다. 이웃의 평지리 안항은 문경의병진에 함께 활약한 월봉(月峯) 고인계(高仁繼, 1564~1647)의 고향이다. 월봉은 서애 류성룡의 제자이다.
청대 권상일은 이곳을 청대구곡의 극처로 삼아 구곡 유람을 마감하는 감회를 노래하고 있다. 저 백두대간에서 발원[淵源]하여 흘러온 금천(錦川)이 이곳을 지나고 나서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래서 ‘구곡이 장차 다하고 산 또한 다하니’ 하고 노래한 것이다. * [참고 문헌] ☞ ‘청대구곡(靑臺九曲)’ 『문경의 구곡과 근암서원』(근암서원연구총서5, 문경시·근암서원운영위원회, 2019.12.)
에필로그
백두대간 대미산에서 남쪽으로 분기한 운달지맥(運達地脈)은 문경의 중추(中樞)를 이룬다. 그 산줄기가 시작되는 여우목고개 좌우에서 흐르기 시작한 영강과 금천은 문경의 생명줄이다. 문경의 역사와 문화가 거기에 있다. 특히 영강의 물길 따라서 개설된, 문경의 중심을 관통하는 조선시대 영남대로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도 문경은 청정·수려한 자연환경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생명의 땅이다. 무엇보다 학문과 구도에 정진한 선인들의 산수관으로 보면, 금천과 영강은 한 굽이 한 굽이가 천혜의 자연이요, 처처에 천지 만물의 이치가 깃들어 있다. 결국 산과 강은 생명의 터전이고 역사의 근본이다. …♣〈끝〉 [2023.10.20.] * 백파(柏坡) 오상수(吳尙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