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압락사스"에게로 날아간 사람
- 의식과 아상과 무의식의 세계, 그리고 미투
인간은 오관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覺)합니다. 오관 즉 眼눈, 耳귀, 鼻코, 舌혀, 身몸으로 사물에 대한 정보를 뇌로 입력하는 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감각을 두고 인간이 인식하는 최초 정보이자 지식이라고 불교에서는 전오식(前五識) 이라고 가르칩니다. 모든 생명은 존재의 본능이 죽음의 공포에 비례될 만큼 강함으로 이 인식을 통해서 존재에 유리하고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정보를 내면으로 의식화 시키면서 자기존재를 유지발전시켜 나갑니다. 이러한 의식화 작용을 두고 5식 다음에오는 인식이라고 제 6식(第六識)이라 하며 분별지(分別智)라 부릅니다. 사람마다 동일한 사물을 보아도 다르게 보는 이유는 각인이 지니고 있는 서로 다른 분별지(分別智)의 작용 때문입니다.
인간은 분별지로 제6식에 모아둔 잔영(殘影=편견)들로 자아(=자의식=我相= 자기라고 착각하는 틀)를 만들고 강한 집착을 가지게 됩니다. 이 자의식의 영역을 일곱번째의 인식이라고 제 7식 말라식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의식은 무의식의 영역에 깊숙이 저장되어 제 8식의 세계를 만듭니다. 이를 아뢰야식이라고 하고 프로이드는 무의식이라 했습니다.(그의 제자 칼융은 무의식 영역에도 개인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이 있다고 함). 무의식에 저장된 이 이미지들은 대게가 자기중심적인 편견들의 집합이지만 어느 날 자기가 체험한 유사한 환경과 맞닥트리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되어 스스로도 통제가 안 되는 행동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걸 두고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모든 인간들이 십인십색이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됩니다. 이 업은 분별지가 형성되는 어릴 때 에 강하게 생성되는데 업(業)중에서 가장 강력한 업이 비교심에서 오는 열등감이며 그 열등감이 열등감의 대상을 향해 강한 증오심과 복수심을 불러일으켜, 힘이 약할 때는 자학(自虐)으로, 힘이 강할 때는 가학(加虐)으로 폭력화 합니다. 폭력은 자기 존재든 타의 존재든 존재 그 자체를 파괴합니다. 생명이 존재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평화는 그때부터 사라집니다.
여기까지가 일반 대중들의 보편적인 삶의 양태 입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넘어가야 합니다.
인간들의 정신세계에 잘못 형성된 이 업(殘影)을 닦아내는 작업을 해야 사물이 바로 보이고 바른 이미지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업을 소멸시키는 이 작업이 바로 제8 식 아뢰아식인 무의식의 영역을 청소하는 일입니다. '그걸 두고 마음을 비운다. 마음을 깨끗이 한다. 인연을 끊는다.'로 표현하는데 불교에서는 비워진 이 마음 상태를 두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의 상태인 공(空)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무의식 세계를 청소하는 이 부분을 수필을 쓰면서 이해하게 되었는데 남을 감동시키려고 자신의 내면에서 가장 상처가 깊었던 아픔을 글로서 토해 내고나니(자기를 미화하는 방법이 아니라 거짓 없는 참 자기 마음을 토해내야 합니다. 정말 이게 어렵지만 참 자기 마음이 무엇인지를 궁구하여 이걸 토해 내야 합니다) 마음이 평안해 지고 그때부터 사물이 바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상처라는 것은 결국 자기 존재를 위태롭게 만든 어릴 적의 경험이 무의식의 영역에 남긴 자기인식의 오류(상처) 입니다.
자기 내면에 깊숙이 저장된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끄집어내어서 스스로 청소하는 이 작업이 성공하게 되면 흐릿하던 모든 것이 밝게 보이게 됩니다. 관점이 바뀌게 되니까 오관의 기능이 이해가 되고 사물을 바로 보는 관찰지(觀察智)가 생기고, 모든 존재의 동일성을 알게 되는 평등성지(平等性智)가 생기고, 존재와 사물의 본질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대원경지(大圓鏡智)가 열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바른 세계가 보이니까 바른 글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마음을 비워낸다는 뜻을 잘못 이해하여 마음이 무너지게 되면 미친 사람이 됨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시인들이나 신앙인들 중에는 마음이 무너져서 미쳐버린 사람들이 더러 나오는 데 그걸 기행이라며 미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 맹목적 집착이 지나쳐서 광적인 기질을 발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부조건 피하는게 상책입니다). 좋은 수필을 남기고 싶은 분들께서는 제가 말씀드리는 이 부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종북좌빨” “수구꼴통”이란 언어에 집착하는 분들도 한국전쟁이 그 분들에게 남긴 과거사의 아픈 상처가 무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때문입니다. 이를 스스로 풀어내고 용서와 화해로서 대 동화(同和) 시키지 않으면 한국민족은 끝없는 분열과 대립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갑질 추방 운동과 미투 운동도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자기 정화작용입니다. 사회도 무의식의 창고를 비워내는 작용을 통하여 자기정화가 되고 평등성지의 길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칼융이 말한 집단 무의식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아픈 상처를 비워내는 일종의 “살풀이” 작업입니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에 엄청난 상처를 남겼습니다. 오직 존재하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하는 의식을 업으로 남긴 것이지요. 필자의 지난 삶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정신세계의 깊은 경지를 이해한 장자는 이를 두고 오상아(吾喪我= 끊임없이 자기를 죽여서 장사지내는 일)라 표현했고, 헤르만 헷세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라압락사스』 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도다!" 하는 경지의 『거듭남』으로 표현 했습니다.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이, 이해 하려는 노력도 없이, “자기 쪼대로" 사는 인간들을 두고 중생(衆生)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중생이라는 단어 앞에는 늘 미련한, 아둔한, 가련한, 어리석은 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것입니다.
2018년 3월 14일은 스티븐 호킹 박사가 타개한 날입니다. 그는 평생을 육신의 질병에 갇혀지냈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무한 우주로 열려 있었던 분입니다. 그가 돌아가신 날이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탄생한 날이라 합니다. 두 분 다 편견(아상)에 갇힌 인간의 정신세계를 먼 우주로 까지 열어준 위인입니다. 스티븐 호킹의 영혼은 틀림없이 "라압락사스"에게로 날아갔을 것입니다. “삶에는 먹고 싸우고 우두머리가 되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가 있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 수천만 번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갈매기도 거기 가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광대무변한 우주에는 별들이 빛납니다. 보고 듣고 깨달은 것을 글로 남기는 작업이 참으로 기쁘고 행복 합니다. "라압락사스"에게로 날아가는 기분이 이런 기분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헤르만 헷세가 왜 신의 이름을 그 단어도 생소한 "라압락사스"라고 불렀을까요? "라압락사스"라는 단어는 사전에도 없는 말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미지의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알에서 깨어난 자는 자기만이 본 미지의 세계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게 문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