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친 글] 그래! 성장하고 있는 거다 / 정희연
신작로에서 가운데 골목으로 들어가 여섯 번째쯤 되는 곳이 외갓집이다. 숫자를 세기보다는 왼쪽이면서 대문의 생김새를 보고 알아본다. 초등학교 1, 2학년 후로는 간 기억이 없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시고 외할머니가 생을 마친 후로는 발길이 끊겼다. 엄마가 3남 3녀중 세 번째이고 내가 막둥이라서 나이 차이가 많아 같이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 적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너무 어려서이었을까 슬픔이란 걸 몰랐다. 어른들은 여느 때와 다르게 방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 보다는. 이러저리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래서 나도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여기저기 서성이다 집 뒤편으로 돌아섰는데 그동안 지나쳤던 나무가 보였다. 겨울철에만 와서 그랬을까, 분명 포리똥(파리똥, 보리수) 나무와 생김새는 같은데 열매는 대 여섯 개를 합한 것 만큼 컸다. 키가 작아 손이 닿지 않아 겨우 몇 개만 맛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그 맛은 대단했다. 배고픈 시절이라 그 크기는 훨씬 더했다.
4년 전 우리 농장으로 보리수 두 그루가 이사를 왔다. 외갓집에서 맛보았던 그 기억을 잊을 수 없어 기회가 되면 꼭 심고 싶었다. 두 해를 보내고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작년에 재법 달렸었는데 대전으로 발령을 받아 새로운 현장에 투입되다 보니, 바빠서 하나도 맛보지 못하고 고스란히 자연으로 보냈다. 신맛이 강해 벌레도 새들도 싫어하다 보니 나무 밑에는 떨어진 열매로 가득했다. 1년의 수고와 기다림이 모두 땅바닥으로 쏟아졌다.
하늘은 시간을 내게 맞춰 주지 않았다. 과실이 작고, 껍질이 단단하지 않아 오래 두면 물러져 가치가 없다. 열매가 작다 보니 수확을 2주에 끝내야 한다. 주말에만 시간이 있고 주말부부다 보니, 가족과 함께 시간도 보내야 해서 이틀밖에 시간이 없다. 이번에는 꼭 성과물을 만들어 내야 했다. 누가 해내라 하지는 않았지만 나와의 약속이 그랬다. 술 담는 법, 효소 만드는 법, 건강하게 먹는 법 등을 익혔다. 효소를 담는다. 설탕 10kg, 항아리를 준비하고 아침 일찍 서둘러 작업을 시작했다,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여름이 다가오지도 않았는데 한 낮에는 태양빛이 강열하다.
지난겨울 가지마다 햇볕을 받을 수 있게 가지치기도 정성을 들였다. 퇴비도 뿌리 끝에 닿도록 가지가 자란 크기 만큼 바깥으로 넉넉히 거름을 주었다. 그 결과인지 잘 모르지만 열매가 튼실하고 가지가 휘어질 만큼 많이 달렸다. 몇 개 따서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 이 맛이다” 단맛과 신맛이 감칠맛 나게 섞였다. 건강해질 것 같은 맛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알맹이가 작아 손을 부지런히 놀려도 바구니가 그대로다. 허리가 아파온다. 그래도 멈춰서는 안 된다. 한 번에 끝을 내야지 쉬면 고충의 시간은 고무줄처럼 늘어난다.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제법 많다. 이제는 꼬투리를 없애야 한다. 앉아서 하는 것이라 이건 일도 아니다.
깨끗한 물에 씻고 채반에 널어 물기를 말린다. 설탕과 1대 1 비율로 섞어 으깬 후 항아리에 옮겨 담고 곰팡이가 슬지 않도록 설탕으로 덮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담근 날자 2023년 5월 27일, 2023년 6월 3일 과육 제거 예정일 2023년 8월 27일, 2023년 9월 3일.
끝났다. 대나무의 성장 과정이 생각났다. 땅 밑에서 4~5년 간 뿌리를 내리다가 땅 위로 올라오면 성장 속도가 급격히 빨라진다. 땅 속에서 오랜 시간 든든하게 뿌리를 내렸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세상에 거저 되는 것은 없다. 7~8kg 남짓한 양의 열매를 얻었다. 앞으로 3개월이 지나면 효소를 맛볼 수 있다.
올해 3월 7일 목포 대학교 평생 교육원에서 시행하는 <일상의 글쓰기>를 시작해 6월 13일 마지막 강의를 앞두고 있다. 다행인 건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요일 저녁까지 올려야 하는데 가족과 함께 술 한잔 하다 보니 늦었다. 마지막 숙제가 월요일 아침까지 나를 괴롭힌다. 나가마쓰 시게히사의 <20대를 무난하게 살지 마라>의 책을 읽고 있다. 인생에는 성장과 성공만 있다고 한다. ‘지금 힘들면 성장기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공기’라는 것이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머릿속은 온통 글 생각으로 가득 했었다. 고치고 다듬고를 반복하지만 맞는지 틀리는지도 잘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하지?’만을 연발했다. ‘그래! 지금 성장하고 있는 거야’로 위안을 삼는다.
1년 후 이맘때 어떤 모습으로 보리수와 글쓰기가 함께 만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