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두 목사의 생애
출생과 유·소년 시절
김익두(金益斗)는 1874년(甲戌) 11월 3일, 황해도 안악군 기와집에 태어났다 1874년은 청년들(白鴻俊, 徐相崙 등)이 큰 뜻을 품고 만주에 가서 유랑하다가,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 Ross)와 맥킨타이어(J. McIytyre) 목사들을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한국최초의 신자가 생겨진 뜻 깊은 해이기도하다
6세 되는 해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10세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독하여 신동(神童)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익두의 부친은 총명한 아들을 출세시키려고 과거를 치르기로 열심히 준비하여 응시했으나 낙방이었다. 부친은 심적 타격을 받았음인지 병석에 누었다가 아들에게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고 유언하고 세상을 떠났다.
불도 입문과 장사 시작
익두는 날마다 부친 산소에 가서 아버지를 불렀으나 "인생이란 무엇인가?"고민하다가 이를 해결해보려고 불도에 입문하여 구월산 패엽사(貝葉寺)에 들어갔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설(輪回說)이 납득이 아가고 사람이 짐승 버러지가 되었다. 다시 사람이 되었다. 점점 미궁에서 방황하다가 절을 떠났다.
익두는 가족 생계를 위하여 장사를 시작 '장똘뱅이'가 되었다. 익두는 자전거를 타고 안악과평양을 오가면서 사다 팔고 해서 제법 가정 생계에 도움이 되었다. 한번은 길에 떨어진 돈주머니를 주웠는데, 돈 임자를 찾아 돌려주었다. 이를 계기로 상점 지배인으로 채용되어
김익두는 이제 가정 생계에 안정도 되었고 결혼도하여 신혼생활에 한참 재미있을 때
친구가 찾아와서 자기 동네에 큰 공장이 들어서는데 투자하면 큰 돈을 벌 것이라는 말에 한께하였다가 연대보증을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었다.
낙심한 익두는 그때부터 낙힘하고 술을 마시고 술꾼이되어 장날이 되면 술에 취해 장 마당광주리들을 발길로 차고, 사람들을 차고 패고 나중에는 그래서 장꾼들이 장에 오면서 성황당에 들러 "오늘 김익두 안 만나게 해 달라"고 치성을 드리곤 할 지경이었다.
드디어 예수를 영접하다
김익두는 어느 날 장터가 나갔다가 서양 선교사가 전도하는 것을 보았다. 선교사가 주는 전도지(傳道紙)를 코를 풀다가 “그러면 코가썩어요”하는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 무심코 그 전도지를 읽어보았다. "인생이란 무엇이냐?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이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익두는 '세세토록'이란 글자에 이상하게도 마음을 찔렀다. 그러던 참에 며칠 후에 친구 박태환(朴泰煥, 그는 후일 장로가 되었다)이 찾아왔다. 선교사가 와서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가보자는 권면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동요가 되던 익두는 기꺼이 친구를 따라 나섰다.
강사는 선교사 소안론(蘇安論, W. L. Swallen) 목사였다. 그런데 어쩌면 조선말을 그렇게 잘하는지 특히 '영생'에 대한 설교는 김익두를 사로잡았다. 인생문제에 실패한 김익두, 술망나니가 된 김익두, 그는 지금까지 풀지 못하고 고민하던 인생문제를 풀게 되었다. 그는 드디어 소목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난날의 무섭고 지긋지긋한 모든 죄를 모두 쏟아 놓았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이 모두 자복했다. 엄청난 죄짐이었다. 소목사는 기쁨과 놀라움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여 죄인이었던 김익두를 용서해주시고 앞으로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게 해 주옵소서. 불의 사자로 일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드렸다.
예수 믿고 변화된 생활
김익두는 그날부터 미친 듯이 시간을 정해 놓고 또는 시간 나는 대로 성경읽기에 재미가 나고 또 모르던 진리를 깨닫는 맛이 과거 술 마시던 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전도하기로 결심했다. 제1호 대상자가 옛날 술친구 김선봉(金先奉)이었다. 제일 힘들고 어려운 전도 대상자인데 비상한 결심과 기도 끝에 전도했더니 그는 곧 믿기로 작정하고 둘이서 교회도 같이 다니며 교회의 일할 것이 생기면 둘이 모두 해버렸다.
두 친구는 의논하기를 자기네가 술을 끊고 신자가 되고 보니 술 마시는 분들이 모두 불쌍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전도하기로 하고, 그 대상자가 술집에 기생들인데 우선 월선(月仙)과 옥화(玉花)였다. 둘은 기도 많이 하고 단단한 결심으로 술집에 가서 기생들에게 전도했더니, 그 태도와 진심을 알고 기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믿기로 작정했다. 김익두도 기뻤지만 친구 김선봉이 너무 기뻐서 기생들이 믿게 되었으니 '이별주'나 나누자고 무심코 한두 잔 마시다가 김익두가 감전(感電)된 사람처럼 충격을 받더니 새파랗게 질려 기절하고 쓰러졌다.
김선봉은 깜짝 놀라 김익두를 업고 집으로 와서도 회생하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있다가 이레 되는 날 간신히 회생했다. 그는 죄의 가책으로 회생 후 3일간 통곡하며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성령의 불을 받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변화되어 매일처럼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로 미친 사람 같으니 모두들 이상시하고 어머니는 아들이 미쳤다고 탄식할 정도였다.
성경에 예수님이 40일간 금식기도하신 것을 본받아 자기도 기도하려고 산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시작하여 마지막 날 익두의 몸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지 못할 신비경에 도달했을 때, "익두야! 익두야!"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익두는 깜짝 놀라 사면을 둘러보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주저하는데, 다시 들려오는 주의 음성 "너는 불의 종이 되어라. 너는 삼천리 금수강산을 신유와 회개로 진동시키고 한반도를 성령의 물결로 휩쓸어라" 하여 "아멘,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김익두의 육과 영은 불덩어리 상태였다. 그리고 기도와 찬송이 쏟아지고 그의 몸에서 광채가 나며 이때부터 김익두는 불의 사자가 되었다.
1년이 지난 세례를 받았는데, 그때까지 한결같이 준비한 덕분에 성경을 100독했다고 한다(일설-신약 100독).
노방전도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다
성령 받은 김익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불신자를 바라볼 때 그들의 영혼이 너무 불쌍해서 도무지 견딜 수 없어 노방전도에 나섰다. 전도 대상자는 안악 장터나 과거에 자신이 술망나니가 되어 장꾼들을 괴롭히던 그 자리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성경을 들고 전도자로 나타났다. 장꾼들은 모두 놀랐다. 미치광이 깡패 김익두가 한동안 보이지 않아 조용하던 참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위장을 하는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와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쉬 떠나지 마시고 부형같이 됩소서"(253) 안보이던 김익두의 재현도 이상한데 이제는 술망나니 깡패가 아니고 전도자로 나타났다.
그런데 과거 그에게 매 맞고 장사 패망 당했던 상인들이 "너 오늘 잘 만났다" 하고 덤벼들어 보복적으로 때리고 차고 욕을 보여도 진정으로 잘 맞아주었다. "여러분 나는 김익두입니다. 과거 이 장터에서 여러분을 욕보이고 못살게 굴던 깡패 김익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를 믿고 여러분 앞에 회개하려고 나왔습니다. 나를 실컷 때려 주시오. 과거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한번은 동네에 “김익두 죽다”는 방을 써 붙였다고 한다.
(1) 김익두가 정말 죽었는가 시험하기 위해 어던 사람이 김익두의 얼굴에 구정물을 퍼부었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이내 감정을 다스리고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받는다”고 했다 .
(2) 또 김익두가 전도사시절 부흥회를 인도하려고 고개 너머 교회로 가다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을 때 취객이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느냐며 시비를 걸고 때렸다. 김익두는 아무 말 없이 맞고 있다가 자신이 김익두라고 말하자, 취객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이때 김익두는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받는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을 하고는 취객을 부흥회에 데리고 갔고, 그는 후에 예수 믿고 훌륭한 장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익두는 세례받기까지 2년 동안 결심하고 매일 목욕한 후 성경을 읽었고 아내와 따로 방을 쓰면서 성스럽게 지냈다. 김익두는 스왈렌 선교사의 지도로 1903년 신천 서북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1907년 3월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다. 1911년 제3회로 졸업한 김익두는 그 해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신천서북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
하나님의 종으로 교역생활 시작
김익두가 회개하고 노방전도에 활동하는 소문이 퍼지자, 재령(載寧)교회에서 담임 전도사로 모시겠다는 청빙 교섭이 왔다. 그때마침 어떤 큰 약방에서 그의 정직성을 믿고 점원으로 월급 150원이라는 조건이었다. 재령교회에서 월 사례비는 단돈 30원 그러나 기도하는 중에 이왕 종살이할 바에는 하나님의 종살이가 옳다고 결심하고 서울을 포기하고 재령으로 하나님의 종살이를 떠났다.
당시 재령교회는 교인10명이었다. 부임 즉시 여름성경학교를 했는데 김익두의 설교를 듣고 어린이들의 회개운동이 일어나니 웬 이적인가? 한국교회 역사 중에 어린이 성경학교에서 회개운동이 일어난 역사가 언제 있었는가. 일이 이렇게 되니 어른들의 회개가 자동적으로 뒤따랐다.
재령교회에서 목회가 성공하자 이웃 군 신천(信川)교회에서 청빙을 받았다. 그곳은 교인 신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날마다 철야기도하며 애쓰는 중에 6개월 만에 찾아온 사람은 초라한 옷을 입은 여자요 다리 불구자였다. 6개월이 자나서 또 한 사람의 남자 거지가 찾아왔다. 그 거지도 잘 돌보고 모셨더니, 3년만에 300명 교인으로 대부흥되었다.
김익두는 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기도회 전에 먼저 냉수마찰을 했는데 이 일은 세상 떠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하루 세 번씩 가정예배를 드렸다. 드디어 교인들이 김전도사를 신학교에 보내기로 주선했다.
6년만인 1910년 제3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 목사 장립을 받았다(25명). 27세에 처녀 전도사로 시발하여 38세에 목사 장립을 받았다. 당시의 교인은 이미 700명이 넘었다. 임시 가건물에서 예배할 수 없게 되었다. 새 성전을 건축하기로 작정하고 3일간 금식기도했더니 비몽사몽간에 노아의 방주 모양의 큰 예배당이 환상 중에 나타났다. 교인의 헌금이 부족하자 지역부자들이 "김목사님께서 우리 선천을 위하여 애쓰는데 우리도 돕겠다고 건축이 완성되었다. 그 부자들이 모두 믿는일이 일어났다.
신유의 기적과 부흥회 인도
기적의 부흥사로 명성을 떨친 김익두도 그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한 번은 길가의 앉은뱅이를 보고, 베드로의 이적을 연상하며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사실 그 때 마음속에 의심이 일어났고, 확신이 없이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결국 1주일간 금식하고 다시 도전하여 앉은뱅이를 일으켰다. 베드로의 이적을 연상하며 전적으로 믿고 나섰기에 성공했다. 이 일은 성전 헌당식을 한 직후였다. 그 후 39년간 수십만 명의 병자들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가 지속되었다.
김목사는 교인들에게 성경을 많이 읽도록 강권했다. 교인들이 어려운 성경을 갑자기 물어도 언제든지 척척 대답하셨다. 그는 구약성경을 100독, 신약성경은 1,000독했다. 언제나 설교의 결론은 성경을 많이 읽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신앙생활의 기본이요 방식이었다. “나는 목음서를 읽을 때마다 한번도 울지않은적이 없습니다. 금식의체험, 기적체험, 부흥집회도 많이했지만 그러나 성경을 읽고 받는 은헤보다 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서울 승동교회 연합부흥회(1920. 10), 2주간 1만여 명이 모였는데 예배당 내에 감당할 수 없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옥외에 모였다.
헌금외에 현품(반지, 비녀 등 귀금속)이 5,000여 점이었다. 일간지인〈동아일보〉제58호,〈매일신보〉사회에 크게 소개하였다.
국내 부흥집회 통계
* 총 집회 수 : 258개 처, 면 단위까지 776처
* 총 설교회수 : 28,000회
* 연 집회 참석 인원 수 : 15,000,000명
* 새 신자 수 : 2,880,000명
* 헌금 누계 : 185,000,000원
* 새 교회당 건축 수 : 150여 개 처
* 증축 교회당 수 : 140여 개 처
* 유치원 신설 : 120여 개 처(증수 : 110여 개 처)
* 불구자 치유자 수 : 10,000여 명
* 전도해서 믿고 목사된 자 : 58명* 믿음의 아들로 키운 목사 : 주기철, 유원봉, 유해천, 유만식, 오윤호, 김정묵, 양석진, 김재준, 이성봉, 전재선 등
이와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았지만 시대적인 몇가지 논란의 있다.
1. 신사참배 했느냐 여부?
1938년 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요, 국민의 의무라고 가결했다. 주기철 목사는 전후 5차례나 구속되고, 전후 7년간 옥중 고초를 치르다가 끝내 옥중 순교했다(1944. 4. 21). 기타 최봉석, 박관준 등도 옥중 순교했다.
김익두 목사는 서울 승동(勝洞)교회를 8년째 시무하던 중, 종로경찰서에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협박, 애원까지 했으나 끝내 거절하자, 강제로 체포 연행하여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몽둥이로 개 패듯 두드려 때리고, 고춧가루 탄 물을 주전자에 넣어 코구멍에 붓는 등 갖은 잔인한 방법을 계속하기를 1개월. 이제는 김목사가 빈사상태가 되자 가족에게 연락 "승동교회에서 설교를 못한다. 목사직은 파면이다. 서울을 떠나라"는 조건부로 연락하였다.
황해도 피아꼴 산골 벽촌으로 유배로가서 농사를 지으며 큰 바위 위에 기도를 계속했다. 45년 신년벽두 "충성된 종아, 내가 네 충성을 아노라, 내가 네 인내를 아노니 너의 소원을 들어주리라"는 음성을 듣고, 광복의 날이 임박한 것을 알았다
어느 날 집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일본인 경찰들이 달려들어 김목사를 강제로 신의주신사당으로 끌고 강제로 김목사의 머리를 억눌렀으나, 김목사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하늘로 뻗치며 속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경찰은 본서에 돌아와서 서장에게 "김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했다"라고 거짓 보고를 했으므로 경찰서장은 친일파 목사들을 불러 놓고 "김익두 목사가 신사참배를 했다"라고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렸다.
1945년 조국 해방의 날이 돌아왔다. 평양을 위시한 전국교회 지도자들의 감격은 말할 수 없었다. 평양신학교 대강당에서 일제 때 강제에 의해 신사 참배했지만 이를 참회하고 새 출발의 부흥회가 열리어 많은 목사들과 성도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때 김익두 목사가 강사로그때일이 오해를 해명하자. 출옥성도 채정민(蔡廷敏) 목사가 강당으로 올라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듣기 싫다. 당장 내려가라"라고 호통을 치며 김목사에게 대들었다. 김목사는 침착하고 웃는 얼굴로 "형님, 내려가시오. 왜 이러십니까? 조용히 말씀으로 하세요"라고 했고, 동석자들이 채목사를 만류하여 하단시킴으로 오해를 풀었다.
2. 기독교도연맹 총회장 문제
조국이 해방되었으나 불행하게도 북위 38도선으로 남북이 분리되었다. 불행하게도 북한 지역에는 김성주라는 청년을 만주에서 한국독립군을 통솔하던 김일성 장군으로 사칭하여 그를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그런데 공산정권이 북한을 통치하는 데 제일 걸림돌이 기독교였다. 당시 북한에 기독교는 3, 4십만의 교인이 있었고, 교인들은 이미 민주주의 생활 훈련이 잘 되어 있고 또 단체적 행동이 수월했다. 더구나 공산주의는 무신론에 근거하고, 기독교는 절대 유신론이라 쉽게 공산 정체에 순응하지 않았다. 교회지도자들은 감언이설로 유혹하고, 무력으로 위협 공갈해도 불응하니, 김일성은 자기 친척 중에 목사 출신이요, 외조부 격이 되는 강량욱(康良煜)을 내세워 기독교도연맹을 날조하여 기독교의 이름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는 데 이용하였다.
그러나 북한에는 이미 5도연합노회(五道聯合老會)가 조직되어 산하 교회를 지도 통솔하고 있었다.
보다 앞서(1946. 11. 3.)북한에서 첫 대의원 선거에 고의적으로 주일을 투표일로 정하자 기독교가 전면 반대 불참하여 실패하자, 북한 오도연합노회 간부격인 지도자 목사들을 여러 가지 구실을 잡아 모조리 체포 구금함으로, 이렇게 상황을 만들어 놓고 기독교도연맹은 자기네가 교회의 최고 지도자라고 나서서 총회를 구성했다.
여기에 총회장으로 추대된 분이 곧 김익두 목사이다. 회원들이 총회로 모여서 투표하여 당선된 것도 아니고, 또 총회장이 되었으니 취임식을 한 것도 아니다.
한 번은 강양욱이 신천으로 김익두 목사를 찾아왔다. 신천서부교회 교인들 앞에서 "김목사님은 우리 중앙 정부에서 가장 존경하는 어른이시다. 그래서 이번에 총회장으로 추대되었다"라고 자랑스럽게 광고했다. 교인들도 "총회장이란 무슨 소리냐?"라고 따져 물었더니, "이것은 다만 명예직이니 아무런 부담을 가지지 마시고 그저 가만히 앉아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총회장이라고 해서 오시오, 가시오 하는 일도 없고 그저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저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김목사가 계속하여 추궁하자, "오늘은 중앙에 중요한 일이 있어 시간이 없으니 후일 다시 찾아와서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하고 그 후에 강양욱은 평양에 돌아가서 김익두 목사가 총회장 취임을 승낙했다고 널리 선전했다. 그렇다고 해서 김목사가 어느 방송국에 가서 총회장이 아니라고 거부방송이나 또는 신문지상을 통해서 해명 성명서를 낼 수있는 처지도 못되어 결국 꼼짝 없이 당하고 말았다.
강양욱과 기독교연맹 간부들은 권위 있는 총회장 김익두의 이름을 팔아 산하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기독교도연맹에 가맹을 강요했고, 가맹을 거부하면 목회를 못하도록 추방하거나 불법 검거에 나섰다. 그러기에 이런 실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김목사를 오해하여 비난하고 심지어 욕까지 했다.
김목사의 자녀 가운데 장남 김용식 씨가 서울에 있으면서 김목사의 월남을 간청했으나, "신천서부교회 500명 교인들을 어떻게 하고 나 혼자 남으로 가겠느냐? 76세의 노인이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고 하시면서 교인들과 고락을 함께 하신다고 거부하셨다.
한 가지 특기할 것은 기독교도연맹의 이름을 빙자하여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지는데(매달 첫 목요일) 교회 청년을 비밀히 망보게 하고 공산당 간부들이 접근을 예방하고 마음이 통할 수 있는 목사들을 비밀히 모아놓고 서울에 다녀온 분의 국가 안보에 대한 시사해설, 비밀히 청취한 남한 방송에 내용을 설명하며 역이용하였다. 그 자리에 자주 참석한 분들은 최지학(崔志學), 임채윤(林采允), 김정묵(金正默), 오윤호(吳允浩), 전재선(全在善), 윤여현(尹汝鉉), 류해천(柳海天), 정한용(鄭漢鏞), 임재형(林載衡)이었다. 또 인민군에 끌려 나갈 반공청년들 8명을 오랫동안 유치원 지하실에 비밀하게 숨기고 식사를 제공하느라고 많은 신경을 썼다고 전해진다.
2 김익두 목사의 노동절 가짜 연설문제
6·25전쟁이 나던 전해 1949년 5월 1일은 북한에서 가장 성대하게 지키는 '노동절'이다. 강양욱은 “이번 노동절에 김일성 수상께서 특별 초청을 하니 반드시 참석하시라”는 간곡한 전달을 하고 돌아갔다. 참석도 불참 불참도 안할 수없어 일간의 금식기도 끝에 참서하였다.
약 5:1-6 성경 본문을 다 봉독한 후 김목사는 "이 성경 말씀은 노동자들의 노임을 주지 않고 부자들이 떼어 먹은 그 노임이 소리지른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부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라고 간단히 설명을 해놓고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
"북조선에 김일성 씨를 정치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요, 남조선의 이승만 씨를 정치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것입니다." 김목사는 이어 "내가 말하려는 것을 내 앞에 여러분이 다 하였으니 지루하게 할 것 없고, 만세나 부릅시다." "노동절 만세"라고 고함쳤다. 뒷자리로 돌아가면서 김일성에게 "목사가 성경말씀 외에 다른 말을 알아야지요" 했더니 김일성도 맞받아 "목사가 목사 냄새 피웠으면 잘했지요." 그것으로 연설은 끝났다. 돌아가는 길에 김목사는 김일성에게 "예수를 믿으시오." 전도했더니 김일성은 "예 믿겠습니다"라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노동절 행사가 끝난 2일 후부터 평양방송에서"노동절 만세"가 아니라 "위대한 김일성 장군 만세"가 우렁차게 흘러 나왔고, 뒤이어 인민공화국의 정치를 찬양하는 반면에 남조선의 이승만 도당을 비난하고 성토하는 내용으로 나왔다. 김목사의 음성을 채취하고, 그 음성을 닮은 성우(聲優)를 시켜서 김목사의 연설인 양 꾸며 가지고 며칠 동안 방송을 했다. 김목사는 사실과 다르다고 방송을 할 수도 없고, 신문을 통하여 해명을 할 수 없었기에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 해 가을 어느 날 이른바 정치보위부에서 김목사를 찾아와 다른 교회에서는 모두 김일성 장군의 사진과 스탈린 수상의 초상화를 걸었으니, 이 교회에도 걸어야 하겠다고 강요하는데, 이 때 김목사의 용모가 분노에 차서 눈에 열기가 오르고 손을 펴서 당신의 목을 베는 형용을 하면서 "내 목을 칼로 자르라, 우리 교회 강단에는 예수님 사진도 안 거는데 누구의 사진을 걸어, 이 김익두가 누군지 알고 왔느냐?"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오히려 보안부원들이 벌벌 떨다가 달아났다. (이 사실은 그 당시 같이 있던 교회 집사 韓泰善 집사의 증언이다-한집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월남하여 천호동 廣星敎會 장로로 봉직했다)
3. 인민군 무기구입 자금을 헌납한 김익두 목사
훗날 여기에 대한 역사가들의 해석들이 분분하지만 연설을 마친 김 목사는 단상에서 실제로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쳤고 그 실황 중계가 며칠 동안 라디오 방송으로 전국에 녹화방송 되기까지 했다.
김일성 정부를 지지 김 목사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이 사흘 만에 서울 중앙청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에는 평양에서 ‘조선인민군 서울 탈환 환영예배’를 주최했다. 그뿐 아니라 1950년 8월 5일, 북한 전역의 목사, 장로, 전도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쟁 승리를 위한 궐기대회’를 열었으며 이 자리에서 6.25 전쟁을 언급하며 “정의의 전쟁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스러운 성전”이라고 강조했다. “불의와 죄악을 제거하기에 어떤 것도 아끼지 말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정의로운 우리의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영웅적 우리 인민 군대에게 비행기, 탱크, 함선을 더 많이 헌납하기 위한 기금 거둘 운동을 신도들 사이에서 더욱 맹렬히 전개하자!”고 호소하던 그는 필승을 기원하는 예배와 합심기도를 앞장서서 주도했다.
연이어 김익두 목사는 사흘 후인 8월 8일에 열린 궐기대회에서 “미제의 무력 침공을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전쟁 무기(軍器)를 구입할 자금을 후원하기 위해 당시 액수로는 상당한 거액인 10만원을 자원하여 헌납했다.
닷새 후인 8월 13일에도 궐기대회를 열고 침략자인 미제국주의자들과 망국노 이승만 도당을 완전히 소탕하는 전승 기원의 날’로 정할 것을 제의했다. 이날 평양 신양리교회에서 시작된 그의 열정적인 기도회는 새벽부터 불이 붙어 이북 전 지역으로 ‘전승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확산되었다. 평양 시내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군기헌금 모금과 전쟁 독려를 위한 전승기도회가 연달아 열렸으며 그 기세를 남한까지 몰아 인민군 점령 지역과 도시들에서도 궐기대회와 전승기도회를 열었다.
4. 마지막 순교에 대한 곡해와 해명
일방적으로 불법 남침했던 괴뢰군들이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한 달 만에 남한 전역을 휩쓰는 것 같았으나, 국군이 정비를 갖추고 유엔군이 참전하여 반격을 개시하자 전세는 바뀌었다. 낙동강변에서 괴뢰군 주력부대가 전멸하자, 나머지는 북으로 후퇴하기에 바빴다. 아군이 9월 28일에 서울을 탈환(수복)하고, 38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진격해 갈 무렵
김익두 목사가 거주하는 신천(信川)지구는 북한에서도 반공세력이 가장 강력한 지역이었다.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 온다는 정보에 발맞추어 10월 13일에 궐기하기로 내정이 되어 있었다. 13일 하루 종일 의거한 아군과 패주하는 괴뢰 잔당들과의 전투가 종일 벌어졌다
김목사는 반가운 이 소식을 듣고, 너무 감격하여 14일 새벽종을 치자 50여명의 만입이 내게 있으니 찬송하고 교인들이 모여들어 새벽예배를 마치고, 국군이 곧 입성할 것이니 환영회를 하자는 광고까지 마치고, “하나님만세 예수님만세” 만세3창,, 환영회를 하자고 고아고가 끝나고 김목사와 20여 명의 교인들이 계속 남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패잔해 가던 괴뢰군 일단이 교회당 담 밖에 숨어서 김목사의 광고 소리를 모두 듣고 교회로 습격해 들어왔다.
그리고 강단에서 기도하는 김목사에게 총격을 가하고 다른 교인들에게도 사격하여 현장에서 6명이 숨을 거두고 몇 사람은 중경상을 입고 생명을 유지했다.
김목사는 6·25 전에도 월남하기를 강권했으나, "죽어도 양떼와 같이 죽어야지 목자만 살겠다고 월남하겠나?" 말씀하시며 언젠가는 순교하리라고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사님의 시신을 교회 뜰에 가매장하였다가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하고(10월 19일), 치안이 유지될 때인 11월 29일에 정식 장례를 치렀다. (당년 76세)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분은 위대한 주의 종입니다. 그런 분들의 피와 희생과 가르침으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만큼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편하게 예수님믿고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민족이 일본압제에 시달릴 때, 그리고 공산주의의 무서운 전쟁에서 시달릴 때 그런 환란을 당하면서 그의 이러한 의문들과 그의 죽음은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을 잘 지키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정조를 지키다가 잘 인생을 마무리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가지 더한다면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한경직 목사님은 일제 신사참배를 한 분으로 후일에 결국은 “나는 신사를 참배한 죄인입니다”하고 공개자복하고 용서를 빌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사무엘상16장의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속 중심을 보시느니라”는 말씀을 강조 하였다고합니다. 그러나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은 출애굽기 20장의 “하늘과 땅과 땅아래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는 말씀을 외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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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운영자 사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