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성씨
우리 나라의 역사서 삼국사기 에는 삼국시대 인물들 의성씨가 많이 보인다.
고구려 건국의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 라고 하였는데, 주몽은 충신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소실(小室)씨 등을 사성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중국의 한서에는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고, 장수왕 때에야 장수왕 이
름을 고연(高璉)으로 기 록하면서 처음으로 고구려왕실의성을고(高)씨로 기록하였으며, 장수왕 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高翼), 마루(馬婁),손참구,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성을사용하고있다.
고구려에는 고주몽,즉 동명성왕이 신하들에게 내려주었다는 극(克중실(仲室),소실(少室)씨 등의 성과 유리왕이 사성하였다는 위(位),우(羽)씨, 또 대무신왕이 사성하였다는 낙(絡), 부정(負鼎),대실(大室)씨 등이 나온다. 또 제3대대무신왕 때 의 을두지 (乙豆支), 송옥구(松屋句 )를롯하여 이후재상급만도 목도루(穆度婁), 고복장(高福章), 명림답부(明臨答夫),을파소(乙巴素 ),고우루(高優婁), 명림어수 (明臨於漱),음우,창조리,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의 이름이 있고, 왕비나 왕모의 성으로 예(禮)송(松), 우(于),연(椽),주(周)씨 등이 나오고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씨 중에서 고구려에 연원을 두는 성씨는 극히 드물다. 고 (高)씨는 고주몽의 후손이 강원도 횡성지방에 약간 산재한 다고 전해지고, 그 외의 고씨는 모두 탐라 고씨계이다. 오직강(姜)씨가고구려의 장군이었다는 강이식(姜以式)을 시조로 하고 있다. 백제는 왕실의성을 처음엔우씨(宇)에서 여(余)라 하였다가 뒤 에여씨(餘氏) 또는 부여씨 (夫餘氏, 扶餘氏 )로 썼다. 이는 시조인 온조왕이 고대 국가인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한다.
백제 초기에 왕권은 이른바 8 대 성의 귀족에 의해 크게 제약을 받았다. 그 8대성이란사(沙),연 (燕),이,해(解),진(眞),국(國),목(木), 백씨의 8족을 말한다. 이외 에백제에는 '흘(屹)' 씨 가 있었고,목리만치, 조미걸취, 제중걸루, 고이만년, 흑치상지 등의이름이보인다.
그런데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는 백제의 왕명을 쓸 때 모두 성을 쓰지 않 고 이름만 기록하다가 13대 근초고왕 부터27대 위덕왕까지는여(餘)씨로,29대 무왕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에 남아있는 백제 계통의 성씨로는 온조(溫祚)를 따라 남하하여 백제 건국에 공을 세우고십제공신 (十濟功臣)이 되었다는 전섭
(全攝)과 마여(馬黎) 가 있다. 또 개루왕 때의 인물인도미(都彌)를 선계로 하는 성주도씨 ( 星州都氏 )가 있으며, 백제가 망하자 당나라로 망명하여 당고종으로부터 서(徐)씨로 사성받고 웅진도독이 되어귀국했다는 부여융 ( 夫館隆 )을 시 조로 하는 부여 서씨 (夫餘徐氏 )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성은 아무래도 통일국가인신라에서 연원 한 것이 많다. 신라 계통의 대표적인 성은 박(朴), 석(昔),김 (金)3성과 이(李), 최 (崔), 손 (孫), 정 (鄭), 배 (裵), 설 (薛)의 6 촌성이다. 그러나 3 성과 6 촌성이 처음부터 이러한 한자식의 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후 대에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중국식 성을 사용하게 되면서 각각 계보를 소급하여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 예로 네 곳의 진흥왕의 순수비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수행자 명단을 보면 이름만 기록되어 있고 성이 없으며, 대신에 그 사람의 출신부명이 기록되어있는 것을 들수 있다.
이러한 예는 진지왕 때 세위진 대구의 무술오작비 (戊戌塢作碑)나 진평왕 때 세워진 경주의 남산신성비 (南山新城碑)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으로 신라에서 7 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직 성씨가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왕실에서는 24대 진흥왕 무렵부터 김씨라는 성을사용한것으로 보여진다. 중국 「 양서 ( 梁書 )」 의 「 신라전 ( 新羅傳 )」 에는 " 신라왕 모태 ( 募泰 )가 처음 사신 을 보내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모태란23대 법흥왕을 가리킨다. 그러다가 북제서(北濟書)에 진
흥왕을 김진흥 (金眞興), 진평왕을 김진평(金眞平)이라고 기록 하고 있다.그 밖의 6촌성들은 이보다 훨씬 뒤인 중기에야비로소 등장하며, 신라 말에서 고려 고려 초에 이르러서야 많은 새 성의 등장을 보게 된다.
고려의 성씨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부터 성씨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후삼국을 통합했다고는 하지만 고려 개국 초기에는 중앙집권적인 정치 제도도 확립되지 않았으며 각 지방은 신라 말기에중앙의 통제력의 약화로반란이빈번하던 무렵이라 각 지방을 근거로 독자적인 기반을 닦고성장한 토착세력이 사병을거느리고 농민으로부터 조세를거두어 들이는 등독 립적인 지위를 누리는 호족들에게 지배 되고있었다.
이에 태조 왕건은 개국 초기부터 왕권의 강화와 호족세력의 견제와 회유를 목적으로 새 왕조를 수립하는데 공을 세운 중앙세력과 지방호족들에게 성을 많이 하사하였다. 오늘날의 우리 성씨 중 많은 수가 이와 같은고려 개국공신의 후예들이다. 고려의 대표적인 개국공신인 홍유는 악게 홍씨 (岳溪洪氏), 배현경은 경주 배씨 ( 慶州襄氏 ), 신숭겸은 평산 신씨 (平山申氏), 복지겸은 면천 족씨(沔川
卜氏)의 시조가 되었다.
또한 왕건이 세력을 점차 넓혀가면서 각지에서 일어나 고려 창업하는 데 공을 세운 호족들도 많았는데, 명주 (溟州:강릉)의 왕순식 (王順式 ), 벽진 (碧珍 ; 성주)의 이총언 (李悤言), 고울부 (高䖇府:영천)의 황보능장 (皇甫能長)등이 각각 사성받았다.
왕순식은 명주의 호족으로 맏아들 수원 ( 守元 ), 다른 아들 장명 (長命)을사병과 함께 보내 태조의 왕궁을 숙위하였고, 후에는 자신도 태조를 배알 하여 왕씨 성과 관직을 받았다. 이총언은 아들 영(永)에게 군사를 이끌고 왕건을 돕게 했으며, 황보능장은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우고 영천 부원군에 봉해졌는데, 이들 모두 자신의 근거지를 본관으로삼아 이총언은벽진이씨(碧珍李氏),황보능장은 영
천 황보씨 (永川皇甫氏)의시조가 되었다.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시조인 유차달 (柳車達)은 황해도 유주 (儒州 ; 문 화)의 부호였는데 왕건이 견훤을 칠때 1천 량의 수레를 동원하여 군량을 보급해 주었다고 하며, 전의 이씨(全義李氏)의 시조 이도 (李棹)는 왕건이 남하할 매 금강의 물이 넘쳐서 군사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자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주었고, 양천 허씨(陽川許氏)의시조허선문 ( 許宜文 )은 공암(孔巖;양천) 의 부농으로서 왕건의 군사들에게 군량을 대어 주었 다고한다.
이밖에도고려 개국공신으로 각성씨의 시조가 된 이들이 많다. 안동 권씨 (安東權氏) 의 시조 권행(權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시조 김 신평 ( 金宜平 ), 청주 한씨 ( 清州韓氏 )의 시조 한란(韓蘭), 남양 홍씨(南陽洪 氏) 의 시조 홍은열 ( 洪殷悅 ), 홍주 홍씨(洪州洪氏)의 시조홍규(洪規 ), 인동 장씨(仁同張氏 ) 의 시조 장정필(張貞弻 ),남양방씨(南陽房氏)의 시조 방계흥(房手洪), 원주 원씨(原州元氏 ) 의 시조 원극유(元克猷),파평 윤씨(坡平尹氏)의 시조 윤신달(尹莘達 ), 용인이씨(龍仁李氏 )의 시조 이길권(李吉 卷 ),청주
이씨(清州李氏)의 시조 이능희 (李能希), 면천 박씨(沔川朴氏 ) 의 시조 박술희(朴遠希), 아산 이씨(牙山李氏)의 시조 이서 ( 李舒 ), 동주 최씨 ( 東州崔氏 ) 의 시조 최준웅 ( 崔俊邕 ),풍양조씨(豊壤趙氏) 의 시조 조맹 ( 趙 孟 ), 영광 전씨 ( 靈光田氏 ) 의 시조 전종회(田宗會), 선산 김씨(善山金氏)의 시조 김선궁
( 金宜弓 ), 해평 김씨 ( 海平金氏 ) 의 시조 김훤술 ( 金萱述 ), 봉화 금씨( 奉化琴氏 ) 의 시조 금용식 ( 琴用式 )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가운데 권행은 원래 김씨였으나 권씨 성을 하사받았고, 그 외에는 성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아 고려 건국 이전부터 사용하던 성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새 왕조에 협력하지 않은 채 남아있던 향리의 호장들의 경우 각각의 향리의 장으로 삼아 강제로 새 왕조에 귀속시켰다.
그 예로는 신라에서 벼슬을 살던 성주 이씨 (星州李氏)의 조 이순유 (李純由)는 고려가 건국되자 이에 불복하고 이름을 극신(克臣)으로 고쳐 경산(慶山:성주)에 숨어살다가 경산부의호장으로 강제로 귀속되었고,역시 신라의 신하였던기계유씨 (杞溪兪氏)의 시조 유의신(兪義臣)은 기계현의 호장이 되었다. 이밖에도 호장이었던 인물을 시조로 하고 있는 성씨로는 광주 이씨 (廣州氏 ), 한산 이씨 (韓山李氏 ), 진성 이씨(眞城李氏), 합천 이씨 (陝川李氏),덕산 이씨 ( 德山李氏 ), 고흥 유씨 ( 高興柳氏 ), 단양 우씨 (丹陽禹氏 ), 고령 신 高靈申氏 ), 순창 조씨 (淳昌趙氏), 동래 정씨(東萊鄉氏), 봉화 정씨(奉化鄭氏), 창녕 성씨(昌寧成氏),예안 김씨 (禮安金氏), 반남 박씨 (潘南朴氏), 양주 조씨 (楊州趙氏),무송윤씨 (茂松尹氏), 목천 상씨(木川尚氏 ) 등이 있다.
위에 든 성씨 이외에도 고려 초기의 인물을 시조로 하고 있는 성씨가 많은 것으로 보아 신라 말부터 고려초에 이르는사이에지방 호족이나 고려 공신들이 대부분 왕으로부터 성을 하사 받거나 성을 만들어 가졌다고 보여지며, 고려에 들어와서는 성씨 앞에 세력의 본거지인 지역을 본관을 표시하여 혈족 계통을 구별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성씨는특권층만의 것이었고 일반화되지는 않았는데,1055년(광종9)에 이르러서는 응시자의 성명, 본관,4대조까지의 이름을 써서 풀로봉하여 미리 시원(試院)에 제출하도록 하는 봉미(封彌)제도가시행되었다. 이로써 성은 신분의 상승과 유지에 필수요소가 되었고이로서더욱 널리 확대 보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