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정형 미학 1. 열며 고려 말경에 형성된 시조는 오늘날까지도 그 맥을 면면히 이어 가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별다른 느낌 없이 수용한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 한 번이라도 깊이 있게 돌아보게 된다면 사뭇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때는 크게 융성했던 가사문학이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이즈음에도 시조는 엄연히 문학의 한 갈래로서 빛을 발하며, 그 존재 가치를 여전히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시조의 정형 미학’을 크게 ‘단시조, 연시조, 사설시조’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문학 작품의 참다운 미학은 내용과 형식의 조화와 균형에서 비롯된다. 두 가지 측면의 절묘한 융합과 상호작용을 통해 이룩된 세계의 아름다움을 중점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2. 정형 미학 현대시조의 새로운 미학적 활로는 전통적 형식과 현대적 감각을 결합하여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다가서는 데 있다고 유성호(2005)는 말하고 있다. 지향할 방향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형식은 옛것이되, 3장 6구 12마디라는 기본 율격을 바탕으로 하여 얼마든지 변주와 변용이 가능하다. 한정된 반상임에도 바둑의 수가 무궁무진하듯이 정형의 형식을 어떻게 부리느냐에 따라 다채로운 작품이 창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식과 내용의 밀도 높은 결합을 통해 시조가 구현한 미학적 세계를 이제 구체적으로 살피도록 하겠다. 가. 단시조의 예 단시조는 시조의 본령이다. 초장, 중장은 음수율로‘3/ 4/ 3/ 4’, 종장은 ‘3/ 5/ 4/ 3’이라는 구조를 가진다. 각 마디는 한두 자의 가감이 허용되나 종장 첫 마디는 3자로 불변이고, 둘째 마디는 5이상 7이하가 되어야 정격이라 이른다. 또한 각 장은 4마디로서의 의미 구조를 충실히 갖출 때 비로소 시조의 골격을 이루게 된다. 초장, 중장과는 다른 구조를 가진 종장은 창의적 공간이다. 반전이 있고, 주제가 담긴다. 앞의 두 장이 보통 걸음걸이인 데 비해 종장은 때로 극적인 전기를 보인다. 세 개의 장이 서로 유기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면 한 편의 시로서 소우주의 세계를 이룬다. 시조는 일정한 틀이 있는 만큼 긴장이 뒤따르나, 이 긴장의 정도가 지나치면 경직된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3장 중 어느 한 장은 풀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 작품을 보자. 매화 늙은 등걸 성글고 거친 가지 꽃도 드문드문 여기 하나 저기 둘씩 허울 다 털어 버리고 남을 것만 남은 듯 -조운, 「고매」전문 단어와 조사 어느 하나 헛되이 놓인 게 없을 만큼 절제가 돋보인다. 「고매」는 모든 욕망을 초탈해 버린 조촐하게 늙은 선비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늙은 매화의 단순한 외양 묘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뼈대만 남은 매화의 모습에서 우리는 정신의 극점 혹은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자존을 읽게 된다. 비록 늙어서 성글고 거친 가지요 꽃도 드문드문 피어 있지만, 안으로 도사리고 있는 절조가 느껴진다. 「고매」에서 추구하고자 한 것은 정신의 어떤 드높은 경지일 것이다. 쩌응 터질 듯 팽창한 대낮 고비의 정적 읽던 책을 덮고 무거운 눈을 드니 석류꽃 뚝 떨어지며 어데선가 낮닭소리 -이호우, 「午」전문 초장 ‘쩌응’과 종장 ‘뚝’이라는 말이 서로 묘하게 부딪쳐서 양미간 근처에 우레 치듯 한 울림을 준다. 이 대목은 밀 ‘추(推)’와 두드릴 ‘고(鼓)’ 즉 퇴고에 대한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대낮 고비의 정적’을 깨뜨릴 ‘쩌응’이라는 의성어가 ‘뚝’이라는 말로 변용되어 나타나는 것이 자못 흥미롭다. 이것은 또한 내적 긴장감의 두 축으로써 서로 길항 작용을 하고 있다. 중장은 ‘3장 중 어느 한 장은 꼭 풀어놓아야 한다.’는 정완영의 견해에 잘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다. 이호우의 「午」는 단형시조가 어떤 구조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한 전범을 보여 준다. 음악성과 회화성을 잘 살리고 있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너는 위안이다 말없는 약속이다 짓밟혀서 돌아오는 어두운 사내를 위해 누군가 몰래 두고 간 테라스의 불빛 하나 -이우걸, 「섬」전문 ‘섬’을 노래하면서 ‘짓밟혀서 돌아오는 어두운 사내’를 떠올린 상상력이 예사롭지가 않다. 위안이 되기도 하고 하나의 약속이 될 수도 있는 섬은 바다 위에 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맞닥뜨릴 수 있다.이 시에서 섬은 테라스의 불빛으로 이미지의 축소를 보인다. 소쩍새 울던 자리에 턱을 괴고 앉은 적막 그 적막의 뒤뜰 연못 몰래 숨어 달이 뜨면 올 사람 아무도 없는 화롯가에 찻물이 끓는, -민병도, 「9월」전문 종장 결구 ‘화롯가에 찻물이 끓는,’에서 보듯 끝에 반점을 찍어 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제목 「9월」을 다시금 붙여 읽게 된다. 처음 제목을 읽고 나중에 다시 제목을 떠올리게 되는 점에서 수미상관과 엇비슷한 효과를 얻고 있다. 이리저리 귀를 열고 바람 소릴 듣는다 달무리 피어올라 대숲에 숨는 얼굴 아아, 그 가득한 목소리 돌아보는 동백꽃 -오승철, 「섬 동백․1」전문 섬 동백이 ‘이리저리 귀를 열고 바람 소리’를 듣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때마침 달무리는 피어오르고 정겨운 얼굴은 대숲에 숨어든다. ‘가득한 목소리’에 이어 ‘돌아보는 동백꽃’의 이미지가 살아 있다. 아련하고도 긴한 사연이 시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 당좌에 앉은 한 쌍의 풀무치다 당목이 아찔하게 밀려오고 있는데도 머언 산 단풍을 보며 흘레붙은 저 풀무치. -이종문,「근황」전문 시 속의 〈한 쌍의 풀무치〉가 맞고 있는 상황은 몹시 절박하지만, 그들만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당좌란 어떤 곳인가? 종을 칠 때에 망치가 닿는 자리이다. 순식간에 죽을 자리이다. 그것도 풀무치가 쌍으로 앉아 있는 형국이요, 그들은 시방 생명의 연장을 위한 엄숙한 제의를 치르고 있다. 물론 그들은 그곳이 어떠한 데인지 전혀 지각하지 못한 채로 절정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근황」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메시지는 강열하다. 자성을 다그치고 있는 듯하다. 나. 연시조의 예 연시조는 단시조의 확장이다. 한 제목으로 두 수 이상 늘어난 형태를 지닌다. 길어지면서 자칫하면 이미지가 중첩되거나 산만해질 수 있다. 군더더기가 그만큼 덧붙을 수 있으므로 긴장과 절제가 더욱 요구된다. 도끼에 닿기만 하면 선 채로 썩어지는 나무 한 번 보기만 해도 삽시에 연기로 갈앉는 나무 몇 백리 지름을 가진 그런 숲 속에 묻히고 있다 숨을 거두는 향기 속에 멍석만한 꽃이 피고 먹으면 마취되는 아름드리 복숭아 열매 인종은 벌레만 못해, 발도 아예 못 붙인 이곳 칠흑의 머리를 푼 수양버들이 달려오고 휘황한 등불이 매달린 계수나무도 달려와서 구천에 휘장을 두르고 세상밖에 노닐고 있다 -김상옥,「수해」전문 극한의 생명성 즉 자연을 자연답게 그대로 두는 상태를 갈망한 나머지 이와 같은 웅혼한 세계를 열어 보여 주고 있다. 꽃이되 멍석만한 꽃이요, 복숭아 열매도 먹으면 곧장 마취되는 아름드리 크기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과 같이 생각되지만,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이상향의 자연은 현실 속에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의 때나 인위적인 영향을 넘어선 광대한 원시림의 공간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놀라운 비밀을 시인은 범인이 범접치 못할 혜안으로 헤아린다. 한빛 황토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 자는 조약돌을 날 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비쳐 주리라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박재삼,「내 사랑은」전문 「내 사랑은」에서 ‘시름 갈래가 만 갈래’를 ‘달빛도 사립을 빠진’이 수식함으로써 절창에 이르고 있다. 한국인의 한을 이토록 불에 덴 듯 절절히 그려 낼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물론 이 한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달빛과 사립, 시름이 하나로 엮이어 그것이 만 갈래로 나뉘는 곳에 사랑의 실체가 보이는 듯하다. 내가 사는 초초시암은 감나무가 일곱 그루 여릿여릿 여린 속잎이 청이 눈물이라면 햇살은 공양미 삼백 석 지천으로 쏟아진다 옷고름 풀어논 강물 열두 대문 열고 선 산 세월은 뺑덕어미라 날 속이고 달아나고 심봉사 지팡이 더듬듯 더듬더듬 봄이 또 온다 -정완영,「시암의 봄」전문 ‘감나무의 여린 속잎’은 ‘청이 눈물’, ‘햇살’은 ‘공양미 삼백 석’으로, ‘세월’은 ‘뺑덕어미’, ‘더디게 오는 봄’을 ‘심봉사 지팡이 더듬듯’으로 보고 있다. 절묘한 비유이다. 마치 연극을 보듯 청이와 심봉사, 뺑덕어미가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시암’의 정경이 평화롭게 그려지고 있는 점도 놓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강물과 산이 둘째 수 초장에 놓임으로써 공간이 확대되어 제시된다. 무한의 시공간 속에서 유한의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존재를 보다 뚜렷이 그려 보여 주고 있다. 비범한 조형 능력이다. ‘글썽글썽’과 ‘더듬더듬’이라는 의태어가 적절하게 배치된 점도 보다 명징한 이미지 창출에 도움을 주고 있다. 뎅그렁 바람 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만등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무상의 별빛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김제현,「풍경」전문 풍경을 통해 ‘마음 속 깊은 적막’을 떠올린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무상의 별빛’에서 영원성을 읽는다. 아울러 제한된 삶을 사는 인간과 생명의 무상을 절감하게 한다.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듯이 사람살이에도 다 말 못할 고통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오늘 이 아픔들을 말로 다 못할 것이라면 무심히 그냥 그렇게 겨울강을 가 보아라 은밀히 숨죽여 우는 겨울강을 가 보아라 짙푸르던 강줄기는 얼붙어 멈추었고 산도 굴릴 것 같던 그 몸부림도 멎었어라 누군가 이 뜻 알겠노라면 죽어서 묵도하라 -박시교, 「겨울강」중에서 「겨울강」은 숨죽여 운다. 기실 겨울강을 바라보는 한 사나이가 울고 있는 것이리라. ‘산도 굴릴 것 같던 몸부림’을 내장하고 있던 강이 겨울을 맞아 숨죽이고 있다. 시의 화자는 말한다. ‘누군가 이 뜻 알겠노라면 죽어서 묵도하라’고. 이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묵도’가 주는 의미의 진폭은 크다. 이처럼 「겨울강」은 도저한 정신에 닿아 있다. 아가위 열매 익자 가만 휘는 무게여 잎사귀 뒤에 숨은 고 열매 빛깔까지 벌레에 물린 가을이 가랑잎처럼 울었다 보랏빛 여운 두고 과꽃으로 지는 하루 오늘은 한종일 햇살들이 놀러 와서 마른 풀 남은 향기가 별빛처럼 따스했다 -유재영,「햇살들이 놀러 와서」전문 서경을 통해 감지한 감흥을 세밀히 포착하여 유려한 서정적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정결한 시어들과 따스한 애정이 교직해 놓은 세계는 아름답다. 자연의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낳은 가편이다. 그냥 산이어선 안 돼, 그냥 그런 산이어선 스스로 골짜기를 팬, 그런 속살의 아픔을 아는, 그 온갖 푸나무 자라고 새떼 깃드는 그런 산 마을과 마을을 감싸고 남북 천리를 달리는, 엔간한 철조망이나 까짓 지뢰밭쯤은 가볍게 발등으로 차 버리고 휘달리는 그런 산 -박기섭, 「꿈꾸는 반도」중에서 통일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하나 되는 일에 대해 견지해야 할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극명하게 육화하여 보여 준다. 생략된 후편 두 수에서는 ‘산’이 아닌 ‘물’이 그 대상인데, 역시 그러한 정신을 명징하게 그리고 있다. 통일에 관해 이만한 의지와 염원을 담은 시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온 엽서 한 장 말은 다 지워지고 몇 점 얼룩만 남아 이른 봄 그 섬에 닿기 전, 쌓여 있는 꽃잎의 시간 벼랑을 치는 바람 섬 기슭에 머뭇대도 목숨의 등잔 하나 물고 선 너, 꽃이여 또 한 장 엽서를 띄운다, 지쳐 돌아온 봄에 -이승은, 「동백꽃, 지다」전문 섬세한 서정이 사랑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아름답게 노래되고 있다. 서정시로서 이만한 품격과 미학을 지닌 시조를 만나기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작은 흔들림에도 곧장 마음결에 상처가 날 듯하다. 한라의 흰 눈썹이 꿈틀 용을 쓰면 태산쯤 황하쯤은 완당에 둔다는 듯 기꺼운 조선의 붓들 그 문전에 卒하다 한 채 선을 앉히면 난바다가 이끌리고 한 채 점을 얹으면 산이 와 엎드리고 팔 아래 거느린 세상 만 획이 일 획이니 -정수자, 「혼의 집, 세한도를 엿보다」중에서 「혼의 집, 세한도를 엿보다」는 사유를 요한다. 의미를 생각하며 곱씹어 읽게 만든다. 쉽게 다가오지 않으나, 고절의 정신이 배어 있다. 오래 생각하게 하는 시로서 한 모델이 될 만하다. 다. 사설시조의 예 양식적 확장을 위해서 사설시조의 영역이 필요하다. 그러나 평시조로도 소화될 수 있는 지를 면밀히 따져 보아야 한다. 사설시조는 산문시와는 다른 흐름이 있다. 조운의 「구룡폭포」는 그 점에서 한 전범이 될 만하다. 사람이 몇 생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이나 전화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 수렴 진주담과 만폭동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 안개 풀 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 함께 흘러 구룡연 천 척 절애에 한 번 굴러 보느냐 -조운, 「구룡폭포」전문 「구룡폭포」는 자연을 축사한 작품으로 자연과의 일체를 꿈꾸는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흐름이 어기차고 역동적인 용틀임을 느끼게 한다. 동적 이미지가 ‘흘러’와 ‘굴러’라는 동적 언어와 맞물려서 작품에 역동성을 더한다. ‘샘, 강, 바다, 옥류, 수렴, 진주담, 만폭동, 구름, 비, 눈,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등의 때 묻지 않은 이미지들이 엮음의 수법으로 숨 가쁘게 이어지면서 생명력을 획득한다. 열거와 반복적 율격, 점층을 통해 사설시조의 묘미를 보여 주는 「구룡폭포」에서 그 어떤 인공적인 힘으로부터도 침해되지 않는 원초적인 자연과 맞닥뜨리게 된다. 돌아라, 휘돌아라. 숨이 가쁜 종이 고깔. 더러는 눈칫밥에 한뎃잠 설쳤기로, 논틀 밭틀 한을 묻고 거리죽음 뜬쇠들아, 아픔의 응어리로 북을 때려 시름 푸는, 풍물잡이 시나위는 민초들 앙알대는 목소리다. 짓밟고 뭉갤수록 피가 절로 솟구치는, 투박한 그 외침은 뚝배기 태깔이다. 앙가슴 풀어헤쳐서 열두 발 상모를 돌려라. -윤금초, 「청맹과니 노래」중에서 예로부터 우리나라 민초들은 앙가슴을 푸는 제의로 북을 치고 장단에 맞춰 춤사위를 즐겼다. 장단과 춤은 원한을 풀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청맹과니 노래」는 민초들의 삶에 내재한 자생적인 가락과 몸짓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는 시편이다. 시인은 걸쭉한 입담 한 마당으로 민초들의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다. 단비 한번 왔는갑다 활딱 벗고 뛰쳐나온 저년들 봐, 저년들 봐. 민가에 살림 차린 개나리 왕벚꽃은 사람 닮아 왁자한데, 노루귀 섬노루귀 어미 곁에 새끼노루귀, 얼레지 흰얼레지 깽깽이풀에 복수초, 할미꽃 노랑할미꽃 가는귀먹은 가는잎할미꽃, 우리 그이는 솔붓꽃 내 각시는 각시붓꽃, 물렀거라 왜미나리아재비 살짝 들린 처녀치마, (중략) 간지러 봄바람 간지러 홀아비꽃대 남실댄다. ―홍성란, 「봄이 오면 산에 들에」중에서 생동하는 자연의 변화를 리드미컬하게 묘사하고 있다. 개성적인 가락과 결합된 언어 감각이 돋보인다. 다채로운 식물군의 적절한 배치로 원초적 생명력을 실감케 하면서 시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빨려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설시조의 맛은 이런 데 있을 것이다. 3. 맺으며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시조가 이룩한 미학적 세계는 괄목할 만하다. 앞으로 얼마나 그 위에 공력을 쏟아 붓느냐에 따라 문학적 위상은 달라질 것이다. 시조의 정형 미학은 우리의 삶을 윤택케 하고, 정신의 위의를 드높이는데 그 몫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발전을 위해서 실험정신은 필요하나, 전통적 형식을 허물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지켜져야 한다. 우리 겨레의 호흡과 정서, 사상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담을 수 있는 우리말의 체계에서 뽑아낸 율격인 까닭이다. 시조는 앞으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환경, 개인사적 정황과 더불어 인간의 근원적인 여러 문제에 대한 탐색과 천착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 문학의 중요한 한 갈래로서 그 몫을 다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2007) 다시 생각해 보는 창의적 의미 공간 -단시조를 중심으로 1. 3장 6구 12음보의 단시조에는 다양한 전개 유형이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 이 유형에 대한 연구가 적잖게 이루어졌다. 한 편 한 편의 작품에 시인이 부여하는 틀은 그때마다 언제나 다르게 마련이다. 작품마다 시인의 의도하는 바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요는 형식과 내용이 얼마나 적절하게 잘 맞아 떨어지느냐가 관건이다. 형식적 장치가 우수해도 내용이 따라 주지 못하거나 내용이 뛰어나도 형식에 문제가 드러나면 완결에 이르지 못한다. 흔히 틀에 매이지 않는 것을 두고 형식을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알아야 한다고 이르는데 옳은 말이다. 또한 3장의 틀은 자칫 딱딱한 느낌을 주기가 쉽다. 이 점을 일찍이 간파한 정완영은 3장 중 한 장은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설득력 있는 탁견이다. 그러나 이 말 역시 일괄적용 되는 것은 아니다. 이따금 예외가 있다. 원론적인 이야기이기는 하나 내용과 형식의 균형과 조화에 대해 ‘내용적 균질성과 형식적 고전미(유성호)’를 잘 갖추어야 한다거나 ‘간명한 단시조 형식에 담을 수 있는 시적 심상이 헤아릴 수 없이 깊을 수 있다는 사실(장경렬)’ 등은 핵심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말이다. 시조는 정형률을 가지고 있지만 늘 새로운 율격 체계의 시조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은 시조만이 가지는 매력이다. 물론 이는 정형미학을 훼손하지 않는 테두리 안에서의 일이다. 이 글은 시조의 본령인 단시조 작품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시조 한 편에 축조된 창의적 의미 공간의 다양한 변주와 변용을 조망하는 일은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종장은 시조의 창의적 의미공간의 중핵이므로 결에 해당하는 종장의 구조를 살피는 일은 좋은 시조의 모델을 제시하는 일이며, 실제적 창작에도 도움이 되리라 본다. 2. 하루에 한두 권의 시조집이 배달된다. 그런 까닭에 보내온 책들을 다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몰아서 읽을 때가 많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손길이 가는 책이 있다. 표지와 더불어 첫 장을 펼치면 그 자리에서 다 읽게 만든다. 순간적 직감이기는 하지만 무언가 은밀한 내적 소통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좋은 시조는 자기장을 가지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자체 발광이랄까. 그러한 깊은 울림을 가진 작품은 오랫동안 눈길을 끈다. 형식적․내용적 매너리즘과의 부단한 싸움 없이 기대할 만한 작품을 창작할 수 없다.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새로운 탐구 끝에 우리의 시선을 압도하는 명작은 탄생 된다. 구체적 실질을 획득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정격의 언어와 고전적 태도로 형식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은 시조의 품격과 위의를 지키는 일이다. 요즘 시조문단은 다변이다. 수다스러운 것도 때로 필요할 것이다. 지나치게 산문화 되고 무슨 소리인지 모를 만연체가 넘치는 일부 자유시의 바람직하지 못한 경향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장광설이 시조 고유의 맛과 멋을 떨어뜨리고 있다. 시조를 읽는 이들에게 ‘간결하고도 속 깊은 서정적 언어’를 경험하게 하는 것은 시조시인들의 몫이자 사명이다. 작품 속에 ‘사물과 내면을 유추적으로 상응케 하는 내밀한 상상력’이 선연하게 보일 때 독자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을 것이다. 즉 사물의 외관과 내면의 정서를 견고하게 결속시키는 고유한 힘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다음 작품을 한번 보자.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이우걸,「팽이」전문 사뭇 도전적인 발언과 개성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는가. 이미 첫머리 ‘쳐라,’에서 모든 것은 함축되어 있다. ‘가혹한 매, 무지개, 꼿꼿이, 증언, 무수한 고통, 접시꽃’이 숨 가쁘게 전개되면서 우리의 시선을 강력한 힘으로 한 곳에 집중시킨다. 대체 이 힘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참신한 비유와 독특한 형식적 장치에서 비롯된 것이다.「팽이」는 인생 축약판이다. 더 이상의 설명은 요설일 뿐이다. 초장의 “무지개”와 종장의 ‘접시꽃’의 상관적 유기체계는 이 시조의 완결성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팽이」는 조동일의 탁론인‘자아의 세계화, 세계의 자아화’의 한 전범이다. 한시 이론인‘情中景, 景中情’의 예시로도 설명할 수 있다. 여름날 푸른 줄기에 따닥따닥 피어나는 ‘접시꽃’이 종장에 도입되지 않았다면 이 시조는 그만 맥이 빠져버렸을 것이다. 체험에서 비롯된 시인의 상상력이 이처럼 효과적으로 발현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혹, 증언, 고통’이라는 아주 무거운 낱말이 이 작품 속에 잘 용해되어 있는 것도 ‘쳐라.’가 견인하는 도저한 힘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단시조「섬」이라는 작품 중장‘짓밟혀서 돌아오는 어두운 사내를 위해’에서 ‘짓밟혀서’와 연계지어서 곱씹어 읽을 대목이다. 아랫도리 감싸 쥐고 맨발로 뛰는 바람 고쟁이 올리다가 머리칼 뽑힌 해당화 시퍼런 손톱을 세운 안면도 곰솔 한 그루 -강현덕,「현장」전문 기승전결 즉 시조 고유의 시적 전개 논리(장경렬)에 따른 전개이다. 이 작품은 어느 한 장도 풀려 있지 않은 점에서 앞서 밝힌 정완영의 논조를 비껴간다. 또한 그 점이 이 시편의 특장이다. 초지일관 긴장의 고삐를 다잡아 쥐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각 장의 끝부분이다. ‘바람’과 ‘해당화’와 ‘곰솔’이 각 장의 주체인데 이들의 관계가 미묘하게 설정되어 이 시조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어떤 교과서적 논리에서 벗어난 작품(장경렬)이라는 견해에 공감이 간다. 각 장의 끝을 체언으로 맺는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기법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과감하게 활용한 것은 시적 효과를 배가하고자 하는 고도의 테크닉이다. 물론 이런 유형의 시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현장」은 또한 정적 풍경화가 아니라 역동적인 풍경화를 완성하고 있다. 자칫하면 이러한 작품은 정적 풍경 묘사에 머물기 쉽다. 그러나 시인은 뛰어난 언어 감각과 시적 상상력을 통해 역동적인 인간사의 한 단면을 반영한 살아 있는 풍경화(장경렬)로 되살리고 있다. 그간 동적인 인간사의 면면을 담는 일에 소홀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큰 의의를 가진다. 앞서 살핀「팽이」와 일맥상통하는 흐름을 가지고 있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조는 결코 초월적이고 정적인 상징의 세계를 지향하는 시적 장르만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동적인 우의의 세계야말로 시조시인이 시조를 통해 탐구해야 할 대상(장경렬)이라는 견해를 두 작품이 잘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풋잠과 풋잠 사이 핀을 뽑듯, 달이 졌다 치마꼬리 펄럭, 엄마도 지워졌다 지워져, 아무 일 없는 천치 같은 초저녁 -박명숙,「초저녁」전문 「초저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정경은 이채롭다. 남모를 아픔과 그리움이 깊게 배어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모두 이와 유사한 유년기의 체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까마득한 과거의 기억을 이렇듯 생생하게 복원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한 회상 차원에 머물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각 장마다 한 번씩 사용한 ‘,’은 이 시편의 독특한 흐름에 장애가 아니라 유기적인 구조에 이바지하고 있다. 달이 지는 것을 두고 ‘핀을 뽑듯’이라고 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펄럭’과 ‘천치’이라는 말을 배치하고 있는 점도 적절하다. ‘달’과 ‘엄마’의 소멸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지다, 지워지다, 뽑다’와 ‘펄럭’과 같은 동적 이미지가 ‘풋잠, 핀, 치마꼬리’ 등과 맞물려서 깊은 울림을 주고 있는 점은 역동적이다. 그러고 보니「팽이」,「현장」과 같이 동적이다. 유성호는 이 작품을 두고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와 그 안에 농밀하게 축약된 서사, 그리고 시인의 암시적 인 해석적 개입으로 단수 미학의 범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울어가고 지워져 가는 존재자들을 통해 초저녁이라는 소멸 직전의 시간을 통해 소멸 지향의 상상력을 완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초저녁」은 삶의 알 듯 모를 듯한 슬픔을 우리에게 제시함으로써 아름답고 애잔한 情調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해장사 해장 스님께 산일 안부를 물었더니 어제는 서별당 연못에 들오리가 놀다 가고 오늘은 산수유 그림자만 잠겨 있다, 하십니다 -조오현,「산일․2」전문 「산일․2」는 속인이 노래하기 어려운 시편이다. 속진이 묻어 있지 않은 서정시로서 선적인 경지를 열어 보이고 있다. 산일에 대한 안부에는 스님의 개인사는 드러나지 않는다. ‘어제는 서별당 연못에/ 들오리가 놀다 가고’와 ‘오늘은 산수유 그림자만/ 잠겨 있다’에서 보듯 해장 스님이 눈으로 본 것만 알려주고 있다.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결국 동식물의 움직임을 유정하게 살피면서 ‘산일’의 삶을 구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들오리’와 ‘산수유’를 통해 이미 우리는 해장 스님의 일상을 눈에 보듯이 다 읽어낸 것이다. 언뜻 수수방관하는 듯한 언사로 일관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시적 기술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때 놓아준 것들 안부가 그립고 진물 마른 그루터기 앞에서도 글썽여지는 이런 날 누군가 등 뒤에 와서 눈을 감길 것만 같아 -서우승,「이런 날」전문 매우 특이한 서정적 구도를 가진 작품이다. ‘그때/ 놓아준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 안부가 그리운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공감을 하게 된다. 마른 그루터기 앞에서도 ‘글썽여지는 이런 날’ 시인은 ‘누군가 등 뒤에 와서 눈을 감길 것만 같아’서 그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린다. 이 때 시인과 독자는 혼연일체가 된다. 하나가 되어 함께 그 순간을 애절하게 기다리게 된다. 어느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날’과 맞닥뜨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최남선의「혼자 앉아서」를 떠올리게 한다. 눈 감으면 별이 뜨는 내 하늘의 모롱이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난 이의 주소에도 다정한 우표가 되어 찾아가고 싶어라 -김복근,「가을 입구」전문 소박한 서정시편이다.「이런 날」과 분위기가 엇비슷하다.「가을 입구」의 정서는 가을이었기에 가능한 감상이다.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난 이에게 앙갚음을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가을이기에 그렇게 떠난 이의 주소를 찾아 다정한 우표가 되어 찾아가고 싶은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가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용서와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계절의 초입에서 시인은 한 점 티도 드러내고 있지 않은 가을 하늘 같은 마음으로 이러한 시편을 빚은 것이다. 어제는 물안개에 꽃향기에 취했더니 아침 햇살 빗질하는 새소리에 문을 연다 빈집도 파도에 닳아 맑은 악기 되느니 -김연동,「욕지」전문 ‘욕지’는 적지 않은 섬이다. 섬 생활에서 얻은 시다. 공감각을 잘 살리고 있다. 서정의 결이 아주 곱다. 흉어의 소식과 젊은이들이 떠난 갯가 빈집의 아픔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물안개, 꽃향기에 취했던 어제가 가고 오늘은 아침햇살이 빗질하는 새 소리에 문을 연 인적이 사라진 빈집은 파도에 닳고 있고, 그 닳음으로 말미암아 맑은 악기가 된다. 새로운 노래를 연주하지만, 그러나 그곳에 사람들은 살지 않는다. 상실의 이미지를 잔잔하게 그려 보여 줌으로써 섬의 후미진 단면을 통해 사람살이의 진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녹두꽃 진 자리에 일어선 한 줄기 바람 세상을 바꾸려는 뜻 천지를 휩쓸었건만 소나무 휘인 가지에 옹이로 굳어 있다 -김정희,「아버지」전문 아버지의 생애를 통해 역사적 사건을 은연중 상기시킨다. 녹두장군 전봉준이나 나의 아버지나 ‘녹두꽃/ 진 자리에/ 일어선 한 줄기 바람’으로 세상을 한번 바꾸어 보려고 힘을 다해 보았지만 여의치 못한 채로 한 생을 다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소나무 휘인 가지의 ‘옹이’에서 아버지의 초상을 읽게 되었으리라. 전통서정에 충실한 시편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누군가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불 밝혀 남아 있는 일이라고 출근 길 우산 속에서 뇌어보는 비 오는 날 -하순희「걸음․12」전문 이 작품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치 않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전언을 담고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을 두고 ‘누군가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불 밝혀 남아 있는 일’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인연의 결정을 이름이리라. 원하든 원치 아니 하든 때로 그렇지 않는 일들을 우리는 종종 겪는다. 몸과 마음이 다 젖어드는 날이었기에 이러한 생각이 불현듯 들었을 것이다. 어려운 말 한 마디 없이 우리의 심금을 조용히 울린다. 그리고 사람살이에 대해 오랫동안 묵상하게 한다. 그래도 나는 쓰네 손가락을 구부려 떠나는 노래들을 부르고 불러 모아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 -이달균,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전문 흡사 시조 쓰는 일을 두고 노래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도 나는 쓰네’라는 구절은「팽이」에서 ‘쳐라, 가혹한 매여’와 같은 도치와 같은 경우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쓰겠다는 것은 굳은 의지의 표상이다. 오래 전 어떤 한 이론가는 시조가 ‘떠나는 노래’, 아니 ‘이미 떠난 노래’라고 말하면서 시조 무용론을 거론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2,000여명의 시조시인들은 ‘저무는 가내공업’과도 같은 시조 한 편을 직조하기 위하여 각자의 골방에서 가내공업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다.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도 불철주야 시조 창작에 매진하고 있는 지구촌 곳곳의 시조시인들의 ‘영혼의 한 줄 시’를 우리는 기대를 하고 기다려도 좋을 것이다. 3 이왕 단시조 미학을 짚어 보았으니 창의적 의미 공간의 중핵인 종장의 구조에 대하여 얼마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적지 않은 시조시인들이 종장의 자수율에 대하여 무감각한 측면이 있다. 얼마 전 보내온 단시조로만 엮여진 시집을 한 권 조망하면서 이 점을 여실하게 읽게 되었다. 종장의 정형미학에 대한 철저한 인식의 결여 탓이 아닌가 한다. 예문을 보자. 모두 종장 후구 끝마디이다. 1) 불현듯 그 물 속으로 뛰어드는 벌레 한 마리 2) 한 송이 空華였구나 산방에 비 오시려나 3) 바람에 그저 떠도는 버들잎의 그림자일 뿐 4) 여보게! 뒤돌아보면 날아가는 賓雀 한 마리 5) 흰 새가 꽃이 됩니다 그 꽃 다시 새가 됩니다 6) 살며시 내민 손끝에 쏟아지는 반생의 눈물 7) 지순한 하늘의 묵례 일곱 빛깔 곡진한 눈물 8) 하현의 뺨을 오가는 손에 꼭 쥔 강물 한 조각 9) 하얗게 날리는 꽃잎 그대 지금 보고 있을까 10) 물속에 잠긴 하늘로 미망을 지우고 있다 11) 온기만 남은 벤치에 꽃그림자 다가옵니다 12) 꿈에 본 그리운 나라 그 바다를 향하고 있다 시조는 첫머리를 ‘3’으로 시작하여 끝마디 ‘3’으로 마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좋은 시조가 요구하는 자연스러움에 가장 근접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종장 자수율 ‘3/ 5/ 4/ 3’은 반전으로서 대단히 혁신적이다. 이러한 마무리는 최상의 품격을 담보한다. 물론 부득이한 경우에는 얼마든지 가감이 필요하겠지만, 위의 예처럼 별 다른 자각 없이 느슨하게 처리하게 된다면 시조의 고유의 맛과 멋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조의 율격에 대한 기초를 다지지 않으면 아니 되리라 본다. 종장의 매력을 살리지 못한다면 굳이 시조를 써야 할 까닭이 없다. 또 한 가지는 근간에 다시금 대두된 단장시조와 양장시조 문제이다. 기본적인 전제에 충실하자면 시조는 3장의 유기체계이다. 그러므로 한 장이 없거나 두 장이 없는 것은 굳이 시조라고 부를 수 없고 다만 시조 가락을 가진 1행시, 2행시로 규정하는 것이 더 옳을 듯 하다. 태생 때부터 3장의 틀을 가진 시조가 한 장 또는 두 장을 상실한 상태의 시를 두고 시조라고 고집하는 일은 언어도단 즉 어불성설이다. 단시조의 확산이 연시조․사설시조로 나아갔다면 축소도 일종의 확산이라고 볼 때 양장시조나 절장시조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논리를 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데서 판가름 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름 문턱에 맞지 않지만 겨울 정경을 아름답게 그린 한 편의 단시조를 소개하고 이 글을 맺고자 한다. 모든 걸 덮겠다는 약속은 잊었나요 하늘과 땅의 경계 그마저 허물더니 내 눈길 닿은 곳으로 다시 길을 여는 당신 -김미정,「눈길」전문 단순히 자연 현상에 대한 시인의 느낌으로만 읽히지 않는 시적 장치를 보인다. 즉 ‘눈길’에서 ‘눈’은 시인의 눈이자 자연의 ‘눈’을 가리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층의 의미 읽기를 가능케 하는 점에서「눈길」은 단시조이지만 그 어떤 형태의 시조보다 깊이와 무게를 느끼게 한다.(장경렬) 그렇다. ‘약속’과 ‘눈길’과 ‘당신’이 묘한 일직선상에서 서로에게 강한 울림을 안겨주면서 의미의 진폭에 깊이와 넓이를 더한다. 단시조의 한 좋은 본보기이다. 장경렬은 현대시조의 미학적 가능성에 관한 글에서 ‘절제, 간명, 함축의 공간으로서의 단시조’를 논한 바가 있다. 단시조는 긴장의 시 형식으로서 가장 적절한 시의 그릇이라는 것이다. ‘절제된 언어, 간명한 시적 이미지, 함축적인 시적 진술’을 시조미학의 요체로 보고 시조시인들에게 열정과 정성을 요청한 바 있다. 새겨들을 논지이다. 지나치게 장광설을 늘어놓기보다 본령에 충실한 창작을 통해 이와 같은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는 단시조 창작에 주력함으로써 시조문단을 더욱 두텁게 하고 윤택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단수 미학의 심미적 완결성을 위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미학적 진경을 펼쳐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시간이나 공간의 형상을 가장 구체적이고 독자적인 감각으로 신생시키는 일에 대한 다각도의 노력과 천착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 현대시조가 새롭고 개성적인 감각으로 쓰일 수 있는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일은 온전히 시조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눈앞에 자기 갱신과 새로운 도전의 길이 넓게 열려 있는 것이 환히 보인다.(2010) |
출처: 정음시조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이정환 |
첫댓글 시를 쓰든 시조를 쓰든 좋은 시를 많이 접해봐야
한 편의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