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을 가르며 다음 踏査地(답사지)를 향해 치열하게 力走(역주)하고 있는 어허라*
굵은 땀방울, 거친 숨소리,뜨겁게 뛰는 搏動(박동) 소리,.........
무릇 청춘이란 신체적인 나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그리고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이라 하지 않았던가?
나는 오늘도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불타는 열정, 두려움 없는 挑戰 精神(도전 정신)으로 무장한 채 지칠질 모르며 불꽃 같은 열정을 불태운다
***********************************************************************************************
***********************************************************************************************
新羅(신라)는 고구려,백제보다 일찍 胎動(태동)하여 기원 전 57년~935년까지 무려 千年 王國(천년 왕국)을 지속하였다 그 千年 王國(천년 왕국), 신라의 수도인 경주는 古代 王國(고대 왕국)의 흔적들이 온통 시내 전체를 뒤 덮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 자체가 "경주 유적 지구"로, 月城 地區(월성지구), 皇龍寺 地區(황룡사 지구), 山城 地區(산성 지구),南山 地區(남산 지구), 大陵苑(대릉원 지구)의 5개 지구로 나뉘어,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되었을 뿐 아니라, 양동 마을 또한 안동의 하회 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그래서 경주는 어디서나 땅을 파면 遺物(유물)이 나온다고 할 만큼 전체가 露天 博物館(노천 박물관)인 것이다
市街地(시가지) 곳곳에 솟아 있는 거대한 封墳(봉분)들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없는 경주만의 異色的(이색적)이고 獨特(독특)한 모습이다
현재 경주 도심에는 높이가 23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皇南 大塚(황남 대총)부터 地上(지상)에서 거의 식별이 어려운 신라 고분까지 총 200여기의 봉분이 남아 있댜 ************************************************************
*五陵(오릉:사 적 172호)*
삼국 유사에 의하면,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가 昇天(승천) 하였다가 五體(오체)로 나뉘어 地上(지상)에 떨어졌는데, 그 屍身(시신)을 合葬(합장)할 때, 큰 뱀이 쫒아와 방해를 하므로 五體(오체)로 각, 각 나누어 장사를 지냈으므로 "五陵(오릉)"이라 하였다 한다. 또한 이 五陵(오릉)은 뱀이 쫒아와 방해를 하였으므로 "蛇凌(사릉)"이라고도 일컫는다
*신라 五陵(오릉) 정화사업 기념비*
또한 이 다섯 개의 封墳(봉분)의
五陵(오릉)은 박혁거세 왕,알영왕비, 남해 왕,유리 왕,파사 왕과 같은 박씨 왕가의 초기 능묘라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
고분의 형태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원형 토분이다
가운데 하나를 두고 나머지 네 무덤이 한쪽 면에 치우쳐 있다
*崇德殿(숭덕전:문화재 자료:254호)*
五陵(오릉) 동남쪽에 있는 崇德殿(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閼英井(알영정)*
五陵(오릉)의 崇德殿(숭덕전)뒷 편에 있는 閼英井(알영정)은 신라의 첫 왕후인 "알영 왕비"가 태어난 곳이다
빅혁거세가 알에서 나온 바로 그날, 이 곳 五陵(오릉)의 閼英井(알영정)에서는 계룡이 나타 났는데, 한 노파가 가 보니 계룡이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는데, 후에 그 아이의 인물이 뛰어나게 훌륭해 박혁거세의 왕비가 되었다 한다
閼英(알영)의 우물에서 나왔으므로, 이름을 閼英(알영)이라 불렀고, 훗날 박혁거세의 왕비가 되었다
"新羅 始祖 王妃 誕降 遺址碑(신라 시조 왕비 탄강 유지비)"란 碑(비)가 세워져 있다
*天官寺址(천관사지)*
절도 스님도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적막한 빈터....폐사지.
뿌리째 뽑힌 주춧돌 몇 개가 모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고, 무성히 자란 잡초들이 나와 키를 재려한다
그 엣날의 호화로운 영화도 이 잡초들이 송두리채 덮어 버려 나의 마음을 절로 스산하게 만든다
조용히 발부리에 걸리는 돌맹이 하나 일 없이 뒤집어 보며 한 많은 사연들을 귀담아 들어 보았다
佛家(불가)의 空(공)개념이 저절로 다가오는 듯 하다
경주 도당산 서쪽 기슭 논 한 가운데에 있는 이 "天官寺址(천관사지)"는 현재는 기와장만 나딩굴고 있는 황량한 廢寺址(페사지)이지만, 화랑 金庾信(김유신) 장군과 기생 天官(천관)의 가슴 아프고, 애틋한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 오고 있다
天下(천하)를 호령하고 세상을 주름잡던 英雄 豪傑(영웅호걸)인 金庾信(김유신)도 당시 天官(천관)이라는 기생의 치마폭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어머님의 심한 꾸중으로 다시는 天官(천관)을 만나지 읺겠다고 맹세를 하고 있었던 어느 날,
술에 취해 말을 타고 눈을 감은 채, 앞 날을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잠겼는데, 갑지기 말이 멈춰 눈을 떠 보니 천관의 집 앞이었다
金庾信(김유신)은 깜짝 놀라, 纖纖玉手(섬섬옥수)의 天官(천관)의 손길을 뿌리치며,말의 목을 베어 버리고, 냉정하게 그곳을 빠져 나왔다
*황량한 벌판으로 변해 버린 天官寺址(천관사지)* 김유신이 떠나버린 후
충격을 받은 天官(천관)은 자살을 하고 마는데
후에 늙은 金庾信(김유신)은 자신의 행동을 몹씨 후회하고, 천관이 살던 집에 "천관사"라는 절을 짓고 香(향)을 피우며 두 무릅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면서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한다
이 때 天官女(천관녀)가 김유신의 무정함을 원망하면서, 지은 鄕歌(향가:신라 때 불리던 민간 노래)가 저 유명한 "怨詞(원사)"이다
안타깝게도 이 鄕歌(향가)는 제목만 내려 올 뿐 그 내용은 전해 내려 오지 않아
고려 가요인 "가시리"로 바뀌어 불리어 지고 있다 한다
가시리 기시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어찌 살라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가시렵니까, 가시렵니까, 나를 버리고 가시렵니까
나더러는 어찌 살라 하고 나를 버리고 가시렵니까
붙잡아 두고 싶지만 서운하면 아니 올까 두렵습니다
서러운 임 보내 드리니 가시자 마자 ,곧 돌아 오십시오
............
*財買井 碑閣(재매정 비각:사적 제246호)*
金庾信(김유신) 장군의 집 터라고 알려진 "財買井(재매정)"이라는 우물 터는 남천을 끼고 반월성에서 서쪽으로 4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財買井(재매정: 사적 제 246호)*
신라의 金庾信(김유신) 장군 터에는 화강암을 벽돌로 쌓아 올려 만든 우물이 있는데
이 일대가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이 財買井(재매정)이란 우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三國 史記(삼국 사기)에 전해져 내려 온다
金庾信(김유신) 장군이 오랜 기간을 戰爭(전쟁) 터에서 보내고 돌아 와, 다시 전쟁 터로 떠날 때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가족을 보자
자신의 집 우물 물을 떠오게 하여, 내리지 않고 말 위에서 마시고는 "우리 집 물 맛은 엣날 그대로구나!~"하며 결연한 의지를 보이며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校村(교촌:교동 마을,최씨 부자댁) 마을
校村(교촌:교동 마을) 마을은 요석 공주가 살았다는 瑤石宮(요석궁)이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校村(교촌:교동 마을) ) 마을로 불리게 된것은 鄕校(항교)가 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대에는 유명한 "경주 최씨 고택"이 남아 있다
"경주 최씨 고택(최씨 부자 집)*
*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벼슬을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이렇한 원칙을 세우고 소작인들에게 破格的(파격적)인 小作料(소작료)를 받았고, 또한 임시 정부에는 자금줄 역할을 하는등 한국판 "노블레즈"를 실행한 경주 최부자는 병자호란 이후 300년동안 民衆(민중)의 사랑을 받아 왔다
허나 해방 뒤 경주 최씨 종가집 "최준"은 전 재산을 투입 해 "대구대"를 설립한 후. "최고 대학을 만들겠다"는 삼성 그룹에 무상 양도를 하였으나, 이병철은 이 약속을 저버리고, 대구대를 박정희에게 헌납을 하고 말았으니........
이제는 최씨 고택도,선산도 모두 영남대(대구대 후신) 소유가 되어 先山(선산)에 있는 墓(묘)도 移葬(이장)을 해야할 형편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瑤石宮(요석궁)*
이 요석궁은 요석 공주가 살았다는 궁이다
瑤石 公主(요석 공주)는 무열왕의 딸이자, 설총의 어머니로, 元曉 大師(원효 대사)를 만나기 전에 金歆運(김흠운)이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으나, 남편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를 하는 바람에 과부가 되고 말았다
이 때 백성들의 삶 속에서 참 修行(수행)의 길을 찾으려고 했던 元曉大師(원효대사)는
저잣 거리를 떠돌면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준다면, 내 기필코 하늘을 떠 받칠 기둥을 베어 오라라!"하며
노래를 하고 다녔다
이 노래를 들은 요석 공주의 아버지인 무열왕은 "자루 없는 도끼"가 과부가 된 자신의 딸인 "요석공주"를, '하늘을 떠 받칠 기둥"은 "賢人(현인:후에 설총)"을 뜻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瑤石 公主(요석공주)와 元曉 大師(원효 대사)를 맺어 주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무열왕의 王命(왕명)에 따라 하산한 元曉大師(원효대사)는
이 곳 瑤石宮(요석궁)에 이르자, 갑자기 냇가의 물속으로 뛰어들어 옷을 흠뻑 적셨다
이를 핑계로 옷을 말리러 瑤石宮(요석궁)에 들어가 瑤石 公主(요석 공주)와 단 사흘 밤을 같이 지냈는데
이 때 태어난 이가 유명한 설총이다
요석 공주가 살았던 요석궁은 경주 최씨 부자의 소유가 되어 전통 음식점(최 부자집 가정식)으로 변신을 하였는데
지금도 전직 대통령등 각계 유명 인사와 외국 관광객의 필수 코스로 경주의 대표적인 전통 음식점으로 유명하다
*月淨橋(월정교:사적 457호)*...복원 공사 중
月淨橋(월정교)는 춘양교와 함께 경덕왕 19년(760년)에 건립된 다리로 月城(월성) 서남단과 동북쪽을 연결하여 남산과 왕궁을 잇는 교통로이자, 화려한 왕궁의 다리였다
2009년 길이 66 미터,폭 9 미터, 높이 8 미터 규모로 복원되어 웅장하고 기품있는 또 다른 경주의 명소가 되었다
현재는 복층의 樓閣(누각) 공사를 하고 있다
*경주 鄕校(향교 ) 입구*
*경주 鄕校(향교 :유형 문화재 제191호,대성전 :보물:1727호)*
월정교 옆의 교동에 위치한 경주 鄕校(향교)는 신라 문무왕 때 국가의 최고 교육 기관인 "國學"이 있었던 자리로 후에 고려 조정에 의하여 향학으로 개편 되었다
祭香 空間(제향 공간)인 大成殿(대성전)은 보물 제 1727호다
*경주 司馬所(사마소)*
경주 교동에 위치한 이 司馬所(사마소)는 조선 중기 지방의 生員(생원), 進士(진사)들이 설립한 자치기구로 司馬試(사마시) 출신의 젊은 儒林(유림)들이 지역 여론을 장악하고 자 세웠다
*경주 교동 법주*
경주 교동 마을에 요석궁, 경주 촤씨 고택과 바로 이웃하고 있는 "경주 교동 법주"는 만석꾼으로 유명한 경주 최씨 집안의 家釀酒(가양주:집에서 빚은 술)를 말한다
술을 빚는 시기와 방법이 정해져 있어 "法酒(법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래 "궁중 술"이었는데 술을 빚던 사람이 경주로 내려와 빚던 것이 이후 에 조선의 "國酒(국주)"라 불릴 만큼 유명해졌다
*奈勿王陵, 仁旺洞 古墳群(내물왕릉,인왕동 고분군)*
경주 김씨의 시조인 金閼智(김알지)가 태어 났다는 說話(설화)가 있는 17대 왕인 奈勿王陵(내물왕릉)이 鷄林(계림)의 끝 부분에 위치해 있다(사진은 경주 향교에 바라 본 내물왕릉)
奈勿王(내물왕)은 경주 김씨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 체계를 마련 하였고, 최초로 麻立干(마립간:으뜸가는 품계라는 의미)왕 명칭을 사용한 경주 김씨 두 번째 왕이다
첨성대에서도 훤히 바라볼 수 있는데
奈勿王陵(내물왕릉)을 포함하 총 5기의 고분이 있어 仁旺洞 古墳群(인왕동 고분군)이라고도 한다
Tip:신라 왕들의 무덤 위치.. 朴(박)씨,昔(석) 씨.
신라는 朴(박)씨,昔(석) 씨, 金(김)씨가 王位(왕위)를 돌아가며 계승을 하였는데, 金(김)씨인 奈勿王(내물왕)이 세습 체계를 마련한 후, 김씨 성을 가진 왕이 계속 되었다(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 직전인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은 예외로 박씨 왕임)
그래서 朴(박)씨로서 왕위에 오른 왕들의 무덤은 박혁거세 왕릉이 있는 "경주 오릉", 혹은 박혁거세 탄생 설화가 있는 "나정"부근에 있고, 金(김)씨와 昔(석)씨의 왕들의 무덤은 경주 시내에 散在(산재)하여 있다 현재 경주 시내에는 총 200여기의 신라 陵墓(능묘)가 있다
*鷄林(계림:사적:제19호)*
경주시 교동 마을에 있는 울창한 느티 나무와 왕 버들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鷄林(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金閼智(김알지)가 태어난 곳"이자, "서라벌에서 가장 오래된 숲"인데, 이 후 鷄林(계림)이라는 말은 신라 전체를 뜻하는 이름이 되기도 하였다
신라 건국 초기부터 있었던 숲으로 2 천년의 세월을 이어 온, 수 많은 나뭇 가지와 둥치를 보고 있노라면 妙(묘)한 神秘(신비)로움과 神聖(신성)함이 느껴진다 이곳은 원래 이름이 "始林(시림)"이었지만, 김알지가 태어나서 부터 "鷄林(계림)"이라고 부르기 시작 하였으며,
지증왕 때 국호를 "신라"로 확정한 후에도 별칭으로 鷄林(계림)이 통용 되었다
첨성대와 경주 월성, 그리고 한옥 마을인 교동 마을을 지나가는 길목에는 느티나무, 물푸레 나무, 싸리 나무등의 古木(고목)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다
닭이 울었다 하여 닭 鷄(계), 수풀 林(림)을 써서 "鷄林(계림)"이라 하는데, 신라의 國名(국명), 한국을 가르키는 별칭으로 오랫동안 쓰여 왔던 것이다
*鷄林 碑閣(계림 비각:사적:제19호)*
鷄林(계림) 숲 안에는 순조 3 년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碑(비)가 세워져 있다
탈해왕 4년에 始林(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탈해왕이 臣下(신하)를 보내 살피토록 하였는데
금으로 된 조그마한 궤짝이 나뭇 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어 궤짝을 열어 보니, 사내 아이가 있어
王(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고 하여 그를 太子(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와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은 "김씨"되어 "김알지"가 되었다 후에 알지는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후에 알지의 7대손이 왕위에 오르니,그가 곧 미추왕이다
鷄林(계림)은 신성스러운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瞻星臺(첨성대:국보:제31호)(1)*
옛날 사람들은 天圓 地方(천원 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뜻)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첨성대는 하늘을 떠 받치고 있는 받침 기단은 정사각형이고. 몸통은 원형이다
안정감 있고 아담하며 操身(조신)한 모습의 이 첨성대는 몸체가 27단으로 선덕여왕의 제27대와 공교롭게 맞아 떨어진다
즉, 선덕 여왕 때 만들어진 동양 최고의 천문 관측대인 것이다
*瞻星臺(첨성대:국보:제31호)(2)*
新羅人(신라인)들의 과학 정신을 반영한 건축물인 이 瞻星臺(첨성대)는 돌 하나 하나에 고도의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으며, 각 石段(석단)을 이루는 원형의 지름이 점차 줄어 들면서 유려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둥근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을 적절히 配合(배합)하여 아담하고 안정감 있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전체 높이 9.17 미터 ,아래 지름 5,17 미터, 지대석 1변의 길이 5,35 미터의 규모이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基壇部(기딘부)위에 술병 모양의 圓筒部(원통부)를 올리고, 맨 위에 우물 정(井)자형의 頂上部(정상부)를 얹은 모습이다
은빛 야경은 황홀하게 관람객들을 취하게 만든다고 한다
*월성(반월성:사적 제16호)(1)* 月城(월성)은 신라 시대의 궁궐이 있었던 곳인데,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 하여 "新月城(신월성),또는 "月城(월성)"이라 불렀으며
王(왕)이 사는 성이라 하여 "在城(재성)"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부터는 "반월성"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月城(월성)은 하늘에서 바라보면 초승달 내지 반달 모양으로 생겨서 붙은 이름인데, 이 궁궐 터 바로 북 동쪽에 東宮(동궁)과 月池(월지)가 있다. 원래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그 사이로 7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어 두 지역이 나뉘어 버렸다
또한 남동쪽에는 국립 박물관이 있는데, 이 터도 "南宮(남궁)의 터" 라는 學說(학설)이 있다
月城(월성)안에 있었던 수 많은 宮闕(궁궐) 건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월성 서쪽에 있었던 석빙고(보물 1호)만이 이곳으로 옮겨져 외롭게 월성을 지키고 있었다
*월성(반월성:사적 제16호)(2 )*
경주 박물관 정문을 나서 길을 건너면 월성(사적 16호)가 나온다
신라 5대 파사왕 때 축성한 王宮(왕궁)으로 지금은 소나무 숲과 잔디만 남아 있다
월성은 초승달 모양의 지형으로 남쪽에는 남천이 흐르고, 동,서,북은 垓字(해자)를 만들어 적의 침략에 대비 하였다
신라 왕궁은 정확히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삼국 유사에 따르면 蘿井(나정)이나 五陵(오릉)이 있는 서남산 일대라고 추정된다
삼국 사기에는 파사왕 22년(101년)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하였고, 왕이 옮겨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월성은 왕궁의 중심으로 추정하고 있다
*石氷庫(석빙고:보물:제666호)*
조선 영조 때 만들어진 얼음 저장고로 그 규모나 기법 면에서 傑作(걸작)으로 꼽힌다
삼국 사기에 신라 제 22대 왕인 지증왕 때 얼음을 저장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어, 이미 삼국 시대 부터 얼음 저장고가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현재는 조선시대 것만 남아 있다
얼음을 넣어 두던 倉庫(창고)인 이 石氷庫(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 잡고 있다
*東宮(동궁)과 月池(월지:구 안압지:보물 18호)(1)*
화려한 불교 문화를 꽃 피우며, 거침없이 질주를 하였던 신라가 敗亡(패망)하고. 조선 시대에는 東宮(동궁)과 月池(월지)가 廢虛(페허)로 변하여, 화려했던 宮闕(궁궐)은 온데 간데 없고 기러기와 오리들만이 날아 들게 되자, 詩人 墨客(시인 묵객)들만이 쓸쓸히 시를 짓게 되었고, 이 때부터 東宮(동궁)과 月池(월지)는 기러기 "雁(안)" 오리 "鴨(압)"을 써서 "雁鴨池(안압지)라 부르게 되었다
안압지는 통일 신라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절묘란 굴곡으로 인해 어느 곳에서 서서, 어느 곳을 바라다 보더라도
못 전체의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다
신라 왕궁이었던 반월성과 가까운 이 東宮(동궁)과 月池(월지)는 신라 왕궁의 別宮(별궁)으로
삼국 통일후, 문무왕이 황룡사 서남쪽 372 미터 지점에 조성을 하였다
큰 연못 가운데에는 3 개섬을 조성하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巫山(무산)을 나타내는 12개 봉우리로 된 산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동양의 神仙 思想(신선 사상)을 상징하는 것이다
섬과 봉우리에는 이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동물을 길렀는데
신라의 대표적인 苑池(원지)였던 것이다
서쪽에는 臨海殿(임해전) 건물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