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0일 주일 오전 예배
안식일과 주일에 관한 주제설교 8
성경낭독 : 암 7:7-17; 눅 10:25-37
본문 : 요 1:1-14
제목 :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로서의 안식일과 주일 8 : 진리”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68편 7,8,9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33편 1,3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139편 4,5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9편 3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78편 1,2,3
성찬식 찬송 – 시 65편 5,6 (고정)
폐회찬송 – 시 102편 9 (고정)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로서의 안식일과 주일 8
진리
교부들의 시대에는 ‘제8 요일’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해 보자면 그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날들은 6일째에 해당하고, 그 이후에 일곱째 날에 해당되는 때에 하나님이 쉬실 것이며, “그 날의 끝은 저녁이 아니라 주님의 날, 곧 여덟째의 영원한 날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교부들은 일곱째 날인 안식의 날이 여덟째 날에서 완성될 것으로 여겼는데, 요일로 따져 보자면 일곱째 날인 안식일이 토요일이므로 여덟째 날은 주일입니다. 말하자면 아주 오래 전 교부들의 시대부터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로, 곧 옛 언약 하에서 안식의 날이었던 토요일이 새 언약 하에서 그 완성에 이르면 부활의 일요일로 변화되어 가는 구속사적 진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大) 그레고리 같은 교부는 “주간의 7일들은 땅의 시대를 대표하며 제8 일은 주님이 그의 부활을 통해 나타낸 영원한 삶을 대표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주일은 옛 언약 시대의 안식일을 지나서 부활의 날, 곧 새롭고 영원한 시대로 나아가는 날로 여겨졌습니다.
저는 이번 시리즈 설교에서 의도적으로 ‘안식일’과 ‘주일’을 거의 혼용하여 사용하였는데, 우리가 일요일인 주일을 토요일인 안식일과 똑같다고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안식일 규정을 오늘날의 주일에 성취되고 완성된 것으로 여기며 갖다 적용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에 있습니다.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진전은 언약의 더 나은 방향으로의 성취이며, 이 모든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심과 부활, 특히 부활을 통하여 이루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날이 안식일이며, 그분께서 부활로 이 모든 구속을 이루신 날인 주일이야말로 참된 안식일의 성취’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 참된 안식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8 요일’을 기념합니다. 일곱 번째 날을 뛰어넘는 여덟 번째의 날! 그리고 마지막이면서 영원의 날! 바로 그 ‘제8 요일’을 주일을 통하여 내다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그런 면에서 ‘안식일보다 더 위대한 날’이면서, 우리가 ‘장차 완전을 얻어 영원히 누리게 될 안식’을 미리 맛보며 즐거워하는 그런 날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제8 요일인 이유는 그 새롭게 얻어진 생명, 곧 부활의 생명이 마지막 시대에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눈을 가진 사람들은 평범한 일요일 오전의 예배에서 이 사실을 내다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리즈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하면서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로서의 주일”에 대하여 몇 주간 설교를 듣기를 원합니다. “주일에 모여 예배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하여, 세상의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그 신비를 이 말씀들을 통하여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주일이 가진 독특한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말씀의 내용을 담기 위해 이 질문을 통해 오늘 말씀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주일이 가진 독특한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주일을 ‘단지 준수’하는 사람일 때, 우리는 주일이 가진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지켜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주일이니까 직장에 나가서는 안 돼!”
“주일이니까 예배에 빠져서는 안 돼!”
“주일이니까 돈을 쓰거나 식당에 가서는 안 돼!”
“주일이니까 다른 곳에 놀러가서는 안 돼!”
여기서는 제가 “안 돼”라고만 말했지만, 사실은 “해야만 해”라고 말해도 똑같습니다. ‘그저 강제된 날’이라는 측면에서 “안 돼”의 날이나, “해야만 해”의 날이나 똑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렇게 말할 때는 여기에 ‘주일이 가진 의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일을 통해 누리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일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이나 ‘강제된 것’만 가득하다면, 주일은 정말로 그런 날일 뿐입니까? 주일이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적 안식일처럼 사람을 강제하기만 하는 날이라면, 그 율법주의를 벗어난 기독교의 주일로서의 의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주일을 “지켜야만 한다”는 강제의 날로부터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날인지 이해하는 날로서의 전환’을 일으켜야만 합니다.
그러면 전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그렇다면 ‘하지 말라’이거나 혹은 ‘해야만 한다’로서의 주일이 아닌 주일은
나에게 무엇을 주는 날일까요?”
저는 이것을, 책을 읽다가 좋은 예를 발견했습니다.
화가 모네는 빌덴스타인 인덱스 기준 1266번부터 1290번까지 25점의 “건초더미 연작”을 그렸습니다. 모네는 농부 퀘루엘 씨의 건초더미가 쌓아올려진 것을 1213번에서 1217번까지 그린 후에 연작으로 그리기로 마음 먹고 1890년 추수가 끝난 때부터 다음해 봄까지 이 연작 시리즈를 그렸습니다. 저는 인터넷에서 그림들을 찾아서 쭉 살펴보았는데요......희한하게도 똑같은 장면을 그린 것인데, 그날 그날의 빛의 양과 질에 따라서 전혀 다른 그림이 되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모네는 제가 읽은 책에 의하면, 자신이 그날 그리려고 했던 특별한 빛의 효과가 그 건초더미들 사이로 나타나는 정확한 그 시각이 지나가면 즉시 그리기를 멈췄다고 합니다. 모네는 자신이 선택한 지점에 여러 개의 캔버스를 가져다 놓고 특정한 빛의 효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그 빛의 효과가 나타나는 순간을 예리하게 캐치해서 재빨리 그림을 그려나갔고, 그 시각이 지나가면 손을 멈추었다가, 다시 다음 날 그 시각에 다시 그 그림을 이어나가는 방식으로 이 건초더미 연작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중요한 시사점이 있습니다. 곧 모네가 마음속으로 그린 어떤 모습이 ‘영원’이라고 한다면, 그 영원은 특정한 시각, 특정한 태양빛의 강도, 특정한 날씨의 양상에 따라서, 이 세계 속에 찰나적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안식에 대한 가장 유명한 고전을 쓴 유대교 신학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안식일에 관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어디에서 찾겠는가? 공간과 하나님의 본질 사이에는 어떤 공통된 성질도 없다. 산꼭대기에도 충분한 자유가 없다. 바다의 심연에도 충분한 영광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영원이 변장하고 나타난 곳인 시간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창조의 주’로 믿으며,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곧 하나님이신 분께서 육체를 입으신 분이신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이 눈에 보이는 세계로 침투해 들어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유물론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이 원소와 물질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지 않으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영적’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믿는 이들에게 헤셸의 말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몽환적인 어떤 유체이탈의 상태일 때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 우리가 직접 누리고 있는 이 시간의 어떤 상황, 공간의 어떤 상황 속에서, 저기 영원에 있는 어떤 것, 저기 영적 세계에 있는 어떤 것을 누릴 수 있도록 투영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영적이듯이, 이 세계 속의 어떤 것들도 한편으로 물질적이지만 동시에 한편으로 영적입니다. 우리는 죽고 없어진 후에야 영원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어떤 방법을 통하여는, 영원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언제이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주일’이 가진 진정한 의미입니다.
주일은 무슨 날인가요? 주일은 ‘무엇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날’이거나, 혹은 반대로 ‘무엇 무엇을 해야만 하는 날’인가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주일은 ‘직장에 출근을 하지 말아야 하는 날’이거나, ‘예배 시간에 참석해서 졸지 말고 앉아 있어야만 하는 날’입니까?
이것은 주일을 ‘육체의 눈’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일을 유물론적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혼 따위는 없고! 우리에게 영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삶이란 육체가 숨쉬고 있는 이 순간 뿐이고, 죽고 나면 썩고 문드러져서 없어져 버릴 뿐이라고만 믿는다면! 주일이 그저 아무 것도 아닌 ‘무엇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날’이거나, ‘무엇 무엇을 해야만 하는 날’이어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 사람은 영적 세계 같은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만약 우리가 영혼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믿으며, 영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또 하나님은 이 세계를 지으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계 속에 육체를 입고 오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헤셸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영원이 시간 속에 변장하고 나타나는 일”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때가 언제일까요? 그일이 언제 일어날까요? 시간 속에 사는 우리가 ‘영원’을 언제 만날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육체를 입은 우리와 언제 조우합니까? 사람이 아닌 영이신 성령님께서 언제 우리 속에서 역사합니까?
주일, 예배 속에서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어떤 역할을 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예배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영원을 만납니까?
우리는 무엇을 통해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는 저 영적 세계의 놀라운 일들을 땅의 예배 속에서 경험하게 됩니까?
우리가 비록 ‘느낌’이나 ‘감정’ 같은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을 만나는 방식이 무엇입니까?”라든가, “우리는 어떻게 영적 세계의 일들을 예배 속에서 경험하게 됩니까?”라는 말을 들으면, ‘느낌’이나 ‘감정’을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통하여 영원을 맛보아야 합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것을 ‘어떤 짜릿한 느낌’, 혹은 ‘어떤 황홀경 같은 것’일 것이라고, 혹 그것이 아니더라도 ‘굉장히 감동적이거나 격한 어떤 감정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말씀을 통하여 교정하고, 또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방법
1)
요한복음 1장에는 특징적인 뉘앙스가 반복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비추고 계시는 빛과,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비입니다.
이 주제는 이 복음서의 시작부터 바로 나타나는데, 제일 첫 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 곧 이 분께서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다”라는 이야기를 하자마자 이 주제가 등장합니다. 1절에서 4절까지 “그분이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한 직후에 곧바로 5절에서 “하지만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였다”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다. 그리고 어두움은 깨닫지 못하였다.”
이때 여기서 “깨닫다”라는 말은(헬. 카탈람바노) “자신의 소유로 만든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단어가 정확하게 반대로 쓰인 예를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볼 수 있는데,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입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 사도가 “내가 잡으려고” 할 때에도 같은 단어를 쓰고,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이라고 할 때에도 같은 단어를 씁니다.
즉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는데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그 빛이 ‘어두움의 것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빛을 ‘취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두움은 빛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빛은 여전히 빛으로 있고, 어두움은 여전히 어두움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것은 우리 일상에서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은데, 왜냐하면 어두움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빛이 들어오는 순간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은 그래서 ‘자생적’, 곧 ‘스스로 존재하는’ 무언가라기보다는 ‘무엇이 없는 결핍’이라 할 수 있습니다(최근에 청년들 독서 모임에서 다루었음). 즉 우리는 일상에서 ‘빛이 없는 것’을 ‘어두움’이라 하는데, 그것을 여기 접목시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두움인데 빛이 비취었는데 그 빛이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어두움인 사람들이 빛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 ‘자기의 것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를 달리 말하자면 어두움은 ‘빛의 있음’이 자신 속에 전혀 스며들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어두움인 채로 있습니다.
2)
요한복음 1장을 읽어보시면, 이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다”를 다른 말로 표현한 곳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깨닫다”라는 말이 ‘자기의 것으로 만들다’라고 했는데, 비슷한 의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무엇인지를 한 번 찾아보십시오.
네! “알다”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앞부분에서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동사를 바꾸어서 다른 방식으로 말합니다. 9절과 10절을 보십시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사실 요한복음 1장을 주도면밀하게 읽으면, 이 9절과 10절 이야기는 실은 앞의 이야기의 반복입니다. 4절과 5절 이야기의 반복이 9절과 10절입니다. 단지 동사만 바꾸어 놓았을 뿐입니다.
“빛이 세상에 비취었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다”
“빛이 오셨으나 세상은 알지 못하였다”
둘은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처음 말씀드렸던 그 주제가 요한복음 1장의 중심 주제라는 것을 이제 쉽게 알아차리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 부분의 주제는 명확합니다. 하나님은 저기 빛으로 계시되, 심지어 그 하나님께서는 여기 이 땅에도 빛으로 오셨으되, 사람들은 혹은 세상은, 그 빛을 깨닫지 못하였다, 알지 못하였다, 그것이 이 요한복음 1장 앞부분의 주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요한복음 1장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이 말씀을 살피기 직전에 ‘주일에 우리가 겪게 되는 영원, 이 영적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말씀은 우리들에게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제시해 줍니다.
이 대답의 첫 번째 단계는 이것입니다.
“빛이 계시고, 심지어 비취어 여기 땅에까지 오셨으나,
어두움은, 곧 세상은 깨닫지, 알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의 앞부분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사실은 ‘저 극복될 수 없는 괴리’입니다. 제가 이것을 교회학교 엄마모임에서는 ‘무한한 질적 차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빛이 계시되 어두움에게는 취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만 그분은 알려질 수 없습니다. 둘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3)
하지만 여기에, 그 다음 단계로서의 반전이 있습니다. 곧 이 어두움 속으로 돌파하여 들어오는 빛! 알려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시기 위하여 하나님 편에서 행하신 일! 그것이 여기 그 다음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곧 어두움인 사람들을 향하여 행하신 일, 그래서 이 세상으로 하여금 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혹은 이 하나님을 깨닫다, 곧 “자기의 것으로 만들게” 하시는, 방식을 이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을 함께 읽읍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아멘!
우리는 이 14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알려질 수 없는 어둠을 돌파하시는 방식’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이렇게 말씀을 들었지요?
“사람들은 흔히 영원을 겪는다, 영적 세계를 경험한다 하면 주로 느낌이나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요한복음을 배우는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영원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느낌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영적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은 감정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말씀이 육신이 되시는 방식으로’우리에게 ‘은혜와 진리로’ 오셨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 ‘저 영원’을 여기 이 땅에서 현실 속에 받아들이게 되느냐?
그 매개가 무엇이냐?
오늘 설교의 제목에서처럼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 속에서 진리와 조우할 때!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 속에 들어오시고, 자기 백성들 가운데 계시며, 어두움 속에다 빛을 비추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에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영적 의미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지적인 작업’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은 내려오시되, 무엇으로 내려오시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려오십니다.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신 것이지만, 오늘날에도 “말씀이 육신이 되시는” 방식이 무엇입니까? 저기 하늘에 계시는 ‘말씀’, 영적 세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경험될 수 없는 그 ‘말씀’이
우리 귀에 들리도록,
우리에게 경험되도록,
여기 울려퍼질 때, 바로 거기 오늘날의 성육신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저 영원을 경험합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이 됩니다!
에스겔과 하박국에서
이 진리와 생명의 관계를 성경의 두 본문들을 통해 확인하겠습니다.
에스겔 37장과 하박국 3장 말씀입니다.
1)
먼저 에스겔을 봅시다. 37장 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아마도 성경에 익숙한 분들이시라면, 이 말씀 한 구절만으로도 이 본문의 정황이 무엇인지 쉽게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 이끌리어 어떤 골짜기로 갑니다. 거기에서 그가 본 광경은 “뼈가 가득한”(1절) 것이었습니다. 뼈는 이미 바짝 말라 있었고(2절),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물으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하나님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뼈들에게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라고 말씀하실 때, 이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두 가지 단어로 요약합니다. 그것은 “살리라”와 “알리라”입니다. 6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우리는 여기에서 ‘사는 것’, 곧 ‘생명’과 ‘아는 것’과의 연관성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방금 살폈던 요한복음 1장의 주제와 같습니다. ‘생명’은 ‘말씀이 육신이 되시는 곳에’ 있습니다.
2)
다음으로 볼 곳은 하박국 3장 말씀입니다. 3장 2절을 읽겠습니다.
합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 3장은 하박국이 하나님께 물었던 일의 결국을 다 깨닫고 난 후의 말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왜 하나님의 백성에게 멸망이 임하는지, 또 왜 그 멸망을 더 악한 이방인들로 인하여 시행되게 하시는지를 하나님께 물었고, 3장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깨닫고 난 후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 “듣다”가 두 번 나옵니다. 우리 말로는 “소문을 듣고”라고 되어 있지만, “소문”도 ‘듣다’이기 때문에 직역으로 말해 보자면 “들리는 것을 들었다” 정도로 하면 되겠습니다. 선지자는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놀랐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선지자는 자신의 소망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이고, 둘째는 “수년 내에 나타내옵소서”이고, 셋째는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입니다.
여기에서 이 말씀을 살피는 이유는 하박국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할 때 “부흥케 하옵소서”와 “나타내옵소서”라고 말하였는데, 이 두 말이 우리가 조금 전에 에스겔에서 보았던 뼈들이 살아 일어나게 될 때의 단어들과 똑같은 단어들입니다. “부흥케”라고 번역한 말은 “살다”, 곧 ‘생명’을 말하는 단어이고, “나타내옵소서”는 직역하면 “알게 하옵소서”입니다.
말하자면 하박국의 정황과 에스겔의 마른 뼈의 환상은 같은 정황입니다. 이스라엘은 죽고 멸망당해 마른 뼈 같이 되어 있었고,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생명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환상으로 또 말씀으로 대답하셨고, 그때 둘 모두에게 함께 언급되는 사실은 ‘생명’이 ‘아는 것’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하박국 2장 14절 말씀도 함께 보시면 더 좋겠습니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알게 되는 것”(역시 같은 단어)이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반응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정이나 느낌은 유익한 때도 있지만 우리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면이 있습니다.
즉 감정이나 느낌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육에 더 가까운 기능들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알려주는 하나님의 임재, 우리의 영적 생활, 영원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말씀들은, 모두 ‘우리의 앎’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기초에 대하여 들을 때부터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 10:17)
라는 말씀을 너무나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능을 하는지를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저기 영원의 세계, 저기 영적 세계의 일들을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 속에 투영하실 때, 우리로 하여금 홀로그램을 보게 하시거나, 황홀경에 접어들어서 온몸이 전율할 만한 어떤 느낌을 주시거나, 아니면 아예 이 땅에 있지 않은 것과 같은 느낌들을 주시는 대신에, 아주 담담하게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땅의 삶에서 놓임 받아 전혀 새로운 영적 세계로 전진하게 된 많은 사람을 봅니다. 이들은 무엇을 만났던 것일까요?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과 그 마을의 사람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이전 삶 전체를 포기하고 그분을 따랐던 예수님의 제자들
이들은 무엇을 통해 ‘그분이 빛’이심을 확신했을까요?
그분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영원을 맛봅니다. 비록 피부에 와 닿는 짜릿함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저기 영적 세계가 여기 땅에 내려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언제 그렇습니까? ‘사람의 지식’, ‘사람의 도리’, ‘인생이 땅에서 겪고 살고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그런 저곳의 놀라운 진리들이, 예배를 통해 우리들에게 쏟아 부어질 때 말입니다.
말씀을 듣는 일을, 단지 공부처럼 여기지 마십시오. 예배와 그 가운데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아브라함 헤셸의 표현처럼 “영원이 변장하고 시간 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