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새끼
한원준(bdtree@naver.com)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새끼, 그렇게 불러야 합니다. 새끼랑 하는 대화가 본래 그런 식이니까요.
새끼가 밤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며 낄낄거리던 나는 귀찮아하며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야! 좆만아. 니네 집 앞이다. 내려와 한잔하자.”
새끼의 목소리에선 벌써 술 냄새가 풍기고 있었습니다.
“씨뱅이, 텔레비전 보는데….”
“내려와 씹새야.”
나는 툴툴거리며, 츄리닝 상의를 걸치고, 운동화를 꺾어 신고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늦겨울 막바지에 소담스럽게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훈훈한 음식점 나무 탁자에 마주 앉아 파전과 소주를 들이켰습니다. 말없이 서로의 잔을 채우고, 또 비우고, 그러다,
“아줌마, 한 병 더요.”
새끼가 입을 열었습니다.
“씨팔, 눈 좋다.”
새끼가 창밖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알코올로 흐려진 새끼의 눈에 눈물인 것처럼 뿌연 것이 있었습니다.
“새끼, 애냐? 눈 갖고 궁상떨게.”
내가 한 마디 쏘았습니다.
“씹새, 그래도 눈은 좋은 거야. 차 있다고 지랄 떠는 새끼들이 눈 갖고 머라 까는 거지.”
새끼가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새꺄, 먼 바람이 불어서 예까지 왔냐?”
내 말에 새끼가 씩 웃었습니다.
“눈이 오니까. 눈이 좆나 모양 좋게 오니까.”
새끼의 눈이 다시 창밖을 쫓았습니다.
“울 엄마가 씨팔,”
제 다리를 쓸며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새끼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생태 팔았어.”
새끼가 처음 꺼내는 어머니 이야기. 그 이야기가 웃음을 터뜨리게 하지 않을 거란 것을 알았지만, 난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내 앞에 놓인 독을 들이키는 것뿐이었습니다.
“알지? 지금은 생태가 별게 아니지만, 그 땐 씨발, 동태는 흔했지만, 생태는 좆 같이 귀한 생선이었어.”
새끼는 다시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파전을 뜯어 입에 넣을 생각도 않고, 새끼가 말을 이었습니다.
“울 엄마가 생태 한 다라를 떠다가 기차 타고, 냄새난다고 좆나게 지랄하는 버스 운짱 씨뱅이들한테 사정하고, 미안해하며, 버스를 타고 멀리까지 가서 생태를 팔았어.”
“그리고 눈 오는 날, 니미 오늘처럼 눈 좆나게 오는 날, 언덕 넘어 오다 넘어져 죽었어.”
새끼가 다시 한 잔을 비웠습니다. 목소리가 후줄근 젖었습니다.
“엄마가 없어서, 간난쟁이 동생을 내가 업고 툇마루에 나가서….”
새끼가 또 급히 술을 들이켰습니다.
“알지? 내 동생, 지현이. 그 이쁜 기집애.”
새끼가 헛기침을 해 메인 목을 감추고, 또 마지막 잔을 비웠습니다. 술을 청하고, 안주를 집으려는 듯 젓가락을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습니다.
“주정뱅이 아부지는 아랫목에서 저 혼자 술 처먹고 고함지르다 자빠져 자는 데, 울 엄마는 하얗게 눈 뒤집어쓰고 죽었어.”
새끼가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두 눈을 문질렀습니다.
“울 엄마, 좆도 바보인 울 엄마, 그렇게 죽었어, 씨팔. 엄마 묻을 한 뼘 땅도 없어서, 강에다 뼛가루 뿌리고 오는데, 지현이 방긋방긋 웃고, 울 아부지, 그 날도 술 처먹고 취해서, 혼자 울고, 혼자 껄껄거리고, 혼자 노래불렀어, 씨팔.”
난 새끼가 내미는 잔에 소주를 채우려다 멈췄습니다.
“네 어머니 죽인 주정뱅이 아버지.”
내 말에 새끼가 젖은 눈을 들어 날 바라보았습니다.
“지금은 네 새끼가 주정뱅이다.”
내 말에 새끼가 석상이라도 된 듯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새끼의 잔에 다시 술을 따르려고 병목을 가까이 하자, 새끼의 잔이 그냥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습니다.
이제 여름입니다. 아니, 여름도 한참 무르익었습니다. 그 후로, 새끼는 소식이 없습니다.
난 새끼의 목소리 듣기도 겁이나 전화도 걸지 않았습니다.
새끼는 술을 끊었을까요?
나쁜 새끼, 전화라도 좀 하지.
([계간수필] 2005 여름)
∣작법해설∣
이 작품의 소재는 눈 오는 밤의 서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서정의 내용이 친구의 술주정이다. 다시 말하면 눈 오는 밤 어떤 아픈 기억을 떠 올리고 가슴 아파하는 친구의 술주정 이야기가 소재가 되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인가? 눈 오는 밤 어떤 가슴 아픈 생각에 취하여 술주정을 하고 있는 친구의 그 가슴 아픈 사연이 무엇인가? 어머니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원관념 소재는 어머니 이야기이고, 그 원관념 소재를 꾸며주는(형상화) 보조관념 소재는 눈 오는 밤 친구의 술주정인 것이다. 즉 이 작품은 어느 눈 오는 밤 친구의 술주정을 통해서 어머니에 대한 한과 그리움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 양식은 소재에 대한 비유 창작과 창조적 구성법에 있다는 창작에세이의 기본 작법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 작품을 이 달의 대표작으로 선정한 까닭은 이 같은 작법이 특별히 뛰어나기 때문도 아니고, 혹은 작품성이 월등히 높기 때문도 아니다. 작법에 관해서라면 오히려 위에서 간단히 피력한 필자의 작품 분석이 맞는 것이라면 이 작품의 제목을 <눈 오는 밤>이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된다는 점을 부기해 두고 싶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이 달의 대표작으로 선정한 까닭은 ‘문학은 정직한 것이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소설이나 영화가 보기 민망한 장면을 주저 없이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흥행에 그 본질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말 할 것도 없이 계산된 흥행 목적의 민망한 장면 묘사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스런 욕지거리나 민망한 장면, 혹은 잔혹한 장면 묘사 등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을 주저 없이 묘사하고 있는 근본 이유는 예술이란 정직한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 경우 예술이란 정직하다고 할 때의 그 정직이란 무슨 정직인가? 그것은 소재에 대한 정직성이다. 예술의 소재는 어떤 장르의 예술이든 경험된 현실에 있다. 경험된 현실이란 곧 인생을 의미한다.
경험된 현실 곧 살아 온 인생에서 소재를 취해가서 어떤 종류의 예술행위를 하든 그것은 그 장르의 예술 양식에 속한 문제다. 그러나 어떤 예술이든 소재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정직성을 떠나서는 아무 진실한 예술행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창작의 본질적 능력이 되는 상상력의 근거가 경험에 있다는 사실이야 말로 예술이 소재에 정직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잘 말 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예술이 인생이라는 것에 정직하지 않다면 그 존재 이유가 무엇일가? 인생에 정직하지 않은 예술작품을 통해서 독자는 무엇을 감상하고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난 현대문학 1세기 동안 기존의 수필은 인생에 정직한 글쓰기를 하여 왔는가? 현대문학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세상에 발표된 수필작품의 수는 다 셀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 가운데서 필자가 읽은 작품은 대강 수 만 편이 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수 만 편에서 필자는 우리 시대의 정직한 현실을 발견 할 수 있었는가? 필자가 ‘붓 가는 대로’를 더욱 강력하게 사이비 이론으로 배척하는 이유가 여기에 또 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수필가들이 살아가고 있는 인생은 이 땅 위의 인생이 아닌 천국에 가 있는 인생인가? 어떻게 대한민국 수필은 하나 같이 다 점잖기만 할까?
다른 예술 장르에서라면, 예를 들어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라면 인생의 현실을 전혀 다른 모양의 작품으로 표현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미술 감상력이 뛰어나지 못한 사람은 화가가 취해간 작품에서 소재의 실체를 읽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수필문학의 태생적 특징은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양식의 문학이라는 데에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대한민국의 수필가들이 쓰고 있는 수필작품에서는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은 “씨팔” 소리가 한 번도 안 나온단 말인가? 상스런 소리는 다 빼고, 민망한 장면들도 다 눈 감아 버리고 고매한(?) 인격만 보여 줄 수 있는 미문만 적어야 ‘수필과 인품이 일치’하는 글이 되는가? 그래서 ‘붓 가는 대로’라는 말의 본래 뜻은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이 아니고 글쓰기의 고매한 경지를 의미한다고 주장 하고 있는가?
문학은 윤리도 도덕도 철학도 종교도 아니다. 이 고단한 인생에서 위로 받고자 하는 가여운 인생들의 한숨소리가 문학이고, 이 거짓되고 폭력이 난무하는 무질서한 현실에 억눌리고 치여서 울부짖고 있는 인생들의 신음소리가 문학이며, 이 절망적인 삶의 상황 속에서 희망을 갈구하는 인생들의 구원의 손짓이 문학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의 소재 자체를 직접 작품의 제재로 삼는 양식의 문학이라는 수필이야말로 가장 인생의 적나라한 현실을 예술적 사실성으로 들어나게 하는 문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억, 억’ 해 먹은 일이 없다고 딱 잡아떼고 있는 정치보다 더 거짓된 것이 수필이 아닌가? 정치는 꿀꺽한 일 없다고 버티다가도 재판장에서 들통나면 빈 말로라도 국민 앞에 죄송하다고 말 할 줄 알지만 수필이라는 거짓말은 백주 대낮에 ‘수필과 인품은 일치해야 된다’고 주장해 놓고도(정목일) 독자가 묻는 그 말의 뜻에 대한 해명을 하지 않은 채 문협 이사도 될 수 있고, 수필문학을 가르친다는 교수 노릇도 계속 할 수 있으니 이 땅 위에 대한민국 수필 같은 천국이 어디 또 있겠는가?
창작문예수필은 소재에 정직한 문학이다. 인생의 현실에는 거룩한 종교 행사도 있지만 어미 아비를 찔러 죽이는 살인 현장도 있다. 그런가 하면 허기진 배를 안고 폐지를 모아 저축한 돈을 학교 육영사업에 쓰라고 남기고 죽는 외로운 할머니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에는 하느님, 부처, 천사, 성불 같은 거룩한 말들도 있지만 ‘씨팔’이나 ‘씹새’같은 상스런 말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수필이 진정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양식의 문학이라면 이 같은 인생의 현실에 정직한 문학이 되는 것이야 말로 수필의 탄생 이유이고 존재 목적이 아니겠는가.
창작문예수필은 이 같은 인생의 현실에 눈을 가리고 ‘수필과 인품의 일치’를 주장하는 출처불명의 문학 이론이 아니다. 인품에 해를 입힐만한 상스런 소리나 민망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인품과 일치하는’ 문학이라면 오히려 ‘씹새’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하는 천박한 작가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문학이 창작문예수필이다.
예술의 문제는 소재 자체의 선악이나 미추가 아니고 그것을 소재로 취해다가 어떻게 예술 작품화 할 것이냐에 있는 것이다. 한 때 재판장에까지 불려나가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문학의 성담론 문제는 그 같은 작품들이 선택한 소재 자체의 상스러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작품화한 그 예술성이 그 시대의 성문제 상식을 뛰어 넘을 정도가 못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문학인들이 그 당시 문제가 된 작가를 변호하고 나선 이유도 그 작가의 작품이 뛰어났기 때문이기 보다 문학예술의 본질인 사실의 소재에 대한 정직성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작품의 경우 ‘씨팔’ 소리가 귀에도 눈에도 거슬리지 않는 까닭은 작중 인물의 어머니에 대한 한과 그리움의 정도가 ‘씨팔’ 소리를 덮고도 남을 정도로 강력하게 형상화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문학작품은 소리조차도 청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듣는다. 즉 이미지로 듣는다. 이 작품의 ‘씨팔’ 소리도 말 할 것도 없이 독자들은 이미지로 듣게 된다. 그런데 그 ‘씨팔 소리 이미지’가 오히려 어리광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 이유가 위에서 지적한 작중 화자의 어머니에 대한 한과 그리움이 눈 내리는 밤을 배경으로 한 술 취한 청년의 정서와 어우러져 강력한 예술성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