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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고이래로 세월이 잘 묵어 깊어지면, 세상이 평안하고 행복해지는 법이다. 바람과 햇살을 거스르지 않는 한옥의 지혜로움이, 묵은 세월의 깊은 맛을 보여준다. 사진은 서울 한옥마을 북촌 전경. |
세월이 묵었다는 것은 잘 익었다는 것.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내어보았다는 것.
그리고 쟁여진 일상이
곰삭아 깊어졌다는 것.
자고이래로 세월이 잘 묵어 맛있어지면,
세상이 평안하고 행복해지는 법이다.
계절도 묵어 익은 대로 깊어지는
요즈음, 평소 '이렇게 세상을 늙으면
되겠구나' 생각하던 원로시인 몇이 생각난다.
시인 김규태, 유병근 선생 등
부산 문단 선배와 서울의 시인
조영서, 이유경 선생이 그렇다.
이들은 잘 숙성된 인품을 지닌 데다,
노년의 삶의 방식 또한 그윽하게 무르익어
'참 고운 사람들'이라 생각하며 흠모해 왔다.
서울에 일이 있어 상경하는 김에,
이 두 원로시인을 만나 뵐 참으로
전화를 드린다. 조영서 선생이 반가이
맞으며, 을지로 입구의 단골 일식당인
'가나'에서 만나자 한다.
마침 이유경 선생도 동행하겠단다.
반나절쯤 일을 다 보고도 만날
약속 시간이 넉넉히 남았다.
마침 근처에 북촌이 있어 인사동을 거쳐
북촌으로 향한다. 인사동 뒷골목을 걷노라니,
옛날 생각이 절로 난다. 골목골목 구석구석
마다 숨어있는 술집과 밥집이 얼치기
초짜 시인에게 술도 주고 밥도 주었다.
인사동 한옥에서 문단 어른 말석에 앉아, 향기로운 청주 한 잔 홀짝이던 세월도, 아직 남아있는 카페 '귀천'에서 고 천상병 시인과 마주했던 세월도 모두 허허로운 지금. 그 소중하게 빛나던 세월은 어느 하늘 한쪽에서 반짝이고 있을까?
북촌마을로 들어선다. 북촌은 서울 도심 속 유일하게 전통한옥이 밀집된 곳이다. 많은 사적과 문화재, 민속자료가 밀집되어 도심 속 '골목 박물관'이라 불리는 곳이다. 북촌 골목을 들어서자 고색창연한 우리 집, 한옥이 즐비하다. 서로 이웃하면서도 거슬리지 않게 잘 어우러지는 품이 옛사람의 성정을 닮았다.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부드럽게 뻗은 지붕 용마루도 유려하면서도 힘이 있다. 기와와 기와 사이로 여린 풀잎이 가녀리게 집을 짓고 바람에 가들린다. 바람과 햇살을 거스르지 않는 한옥의 지혜로움이 묵은 세월의 깊은 맛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북촌 골목골목마다
고색창연한 한옥과
사적·문화재·공방
조상의 손때 켜켜이
구수한 한국의 멋…
잘 곰삭은 세월에
익어가는 시어
원로 시인들과 만남
"이름·욕심 다 내려놔
그러면 가벼워지는 걸"
이 북촌은 풍수지리학적으로 배산임수의 명당 터로, 조선 시대 왕족이나 권문세가가 주로 거주하였다. 하여 집 한 채 한 채가 선비정신의 염결함이 서려 있고, 그들의 손때와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묻어 구수하게 묵은 맛을 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촌 언덕바지에서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한옥이 꼭꼭 쟁여진 마을 아래로 높은 빌딩이 숲을 이루고, 경복궁 쪽으로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인왕산 밑으로 삼청동 쪽은 노란 은행나무의 물결이 큰 강을 이루고 있다.북촌의 골목골목을 거닐다 보면, 구석구석 자리하고 있는 전통공예공방과 소박하지만 웅숭깊은 민속생활사박물관들이 자리 잡고 있어, 제대로 묵은 우리 전통문화를 느끼고 체험하기에 좋다. 매듭, 자수, 금박, 한복, 나전옻칠, 민화, 한지, 궁중음식 등의 공방이 있다.
시간에 맞춰 일식당 '가나'에 들어선다. 이미 조영서, 이유경 선생과 권달웅 시인이 자리를 잡고 반긴다. '가나'의 윤권중 대표도 오랜만의 서울행에 반가움을 표시한다. 생활 속 장인을 소개하는 공중파 방송사 프로에, 일식 4대문파로 소개된 분이다. 남도의 진도군 조도 출신으로 서울의 장충동파 이충현(용산 하즈키친), 북창동파 박을용(부산 아하스시), 태평로파 임홍식(영등포 코바치) 등과 더불어 무교동파 대표로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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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숙성된 인품과 삶이 그윽하게 무르익은 원로들. 가나일식 윤권중 대표와 조영서, 이유경, 권달웅 시인. |
단골들에게는 윤 반장으로 불리는 윤 대표는 '숙성회 뜨기'의 고수. 51년 경력의 묵은 칼맛이 세월을 더하면서 더 예리하고 진중하다. 생선살의 결을 따라 파고드는 칼날이 유연하면서도 거침이 없다. 주로 횟감들은 남도에서 공수해와 숙성을 시키는데, 일단 그의 손이 가면 생선회의 색감이 살아나면서 차지고, 쫄깃쫄깃하면서도 감칠맛이 풍부해진다.
"한 50년쯤 됐지? 내가 한 40년 단골이니까." 조영서 시인의 물음에 "50년 넘었지요." 윤 대표가 덤덤하게 받는다. "50년 세월이면 묵을 대로 묵었구먼." "세월의 맛은 묵을수록 좋지요." "그래~ 세월이 편해지지. 욕심도 내려놓고, 이름도 내려놓고… 그러면 한결 가벼워지는 거야. 사람도 음식도…"
하기야 '베레모에 마도로스 파이프'를 물고 조용히 초밥 한 접시 시켜먹고 가던 음유시인 조병화 선생과 현대시학을 창간했던 시인 전봉건 선생이 생전에 이곳의 단골이기도 했으니, 이곳의 세월은 오랫동안 차곡차곡 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묵은 세월의 충만함이 가득하다. 칠십 나이의 주인장과 70~80대의 단골이 서로 묵은 인연으로 마주한다. 50여 년의 인연들이 발효되고 숙성되는데, 이를 바라보는 나그네는 그저 기껍기만 할 뿐이다.
50년 묵은 칼질에 도미, 광어, 참치, 방어, 연어, 숭어, 민어, 농어 등등이 한 접시 모둠 생선회로 탄생한다. 숭어 어란, 자반고등어 구이 등도 맛깔스럽다. 이 모두 세월을 덧칠하고 기다려야 맛이 있어지는 음식이다. 그래서 귀한 음식이기도 하다.
회를 한 점씩 맛을 본다. 광어는 뱃살을 깊이 썰어 고소함과 담백함의 경계를 잘 지켜내고 있고, 도미는 감칠맛이 최고조에 달해 씹을 때마다 육즙이 그윽하게 퍼져난다. 방어는 두툼하게 썰어 차지고 구수하다. 참치는 부드럽게 혀를 감아 돌고, 숭어 또한 식감이 탱글탱글 살아있어 재미난다. 회마다 숙성시간을 달리했는데, 그 숙성의 묘가 절묘하다.
따끈한 청주 한 잔에 숙성된 생선회 한 점이, 잘 묵은 세월을 반영하는 것 같아 참 좋다. 잘 묵은 원로시인들과 칼날에 세월을 담은 요리사와 함께하는 술잔이, 이렇게도 다디단 줄 몰랐다. 늦은 시간까지 그들 세월의 지혜로움에 귀 기울이며, 그렇게 잘 익은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흘러가는 것이다.
cowejo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