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의 극복을 향한 외재적 접근
수필 <우리, 산책해 볼까요?>를 평하는 것을, 외재적 비평(작품의 외적 환경으로서 철학, 예술, 문화, 자연 등)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내재적 비평(작품속의 구조로서 주제, 플롯, 소재와 문체)은 많은 평자들이 쉽게 접근하기 때문이다.
먼저 주제를 가장 잘 제시하는, 제목을 읽는 순간에 갑자기, 영화 <셸 위 댄스Shall we dance ?>가 떠올랐다. 소위 청유형(~ 해 볼까요)의 제목에서, 생긴 생각이었다. 여기서 남성의 소외극복(희극)과 여성의 소외극복(비극) 그리고 그 결과를 생각하였다.
작가는 소외극복을 위하여, 산책을 선택하였다. 내적인 갈등을 <일월 저수지>에서 만난 대상에 전이(transference. 안나 프로이드의 방어기제)하여, 카타르시스를 실행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인 내재적 접근 방법이다.
다만 본고에서 외재적 접근을 위하여, 특히 주제가 제시된 <2문단>에서 무력감(소외의 일종. 무능력 포함)으로 잡고서, 문학과 회화에 접근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남녀의 무력감을 극복하는 극단적인 소위 <페미니즘> 작품들을 관찰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까레리나』와 호오손의 『주홍글씨』에서, 무력감을 극복(치유)하려는 여성의 사랑이 오히려 파멸로 이끌고 있다.
여성들의 소외 극복을, 『주홍글씨』에서 청교도들의 3가지의 죄의식으로 검토하자면 , 헤스터 프린(폭로된 죄. revealed sin), 딤즈데일 목사(감추어진 죄. concealed sin), 칠링워스 프린(용서받지 못할 죄. unpardonable sin)이 나타난다. 소외에 대한 극복방법을 잘못 선택한 파멸이 뒤따른다.
이와 다르게 남성들의 소외 극복을 영화 <셸 위 댄스>에서, 일상의 무력감을 극복하려는 변호사(리차드 기어역)가, 댄스 강사에 매혹되어 대회에도 참여하였다가, 자신의 부인에게 발각되는 내용이다.
한편 <셸 위 댄스?>는 미술로 확장하여, 인간의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하여, 춤으로 향하는 원초적 욕망을 그린 4편이 있다. 소위 <회화의 군주>로 불리는 화려한 (그리고 위대한 신화 작가로서) 17세기 로코코 화가로서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 – 1640)의 <사랑의 정원>(프라도 미술관)이 있다(남녀의 사랑과 큐피드 신 등장), 이어서 18세기 로코코 화가 앙투안 와토(1684 - 1721)의 <키테라섬의 순례>(비너스의 탄생지 키테라섬. 루브르 미술관)은 프랑스의 풍속도(전원에서의 축제)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루누아르(1841 – 1919. 철학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는다.”)가 그린 <물랭 드 라 갈레트>(무도장 이름. 오르세 미술관)가 있다. 20세기의 광기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 –1944)가 그린 <생명의 춤>(1900.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 고독과 투쟁과 죽음을 향하는 인간본질을 시사함)에서, 흰옷의 과거, 붉은 옷의 현재, 검은 옷의 미래를 상징하는 여인들과 함께 춤을 춘다. (daum. 도광환의 [미술로 보는 세상] “셸 위 댄스” 참조).
소외의 극복은 일상에서 찾아오기 때문에,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다만 의지를 가지고 자신에 맞는 취미생활로 접근 방향을 잡아서 나아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