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미 해병대에 대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소수 병력인 미 해병대에서 전투를 경험한 병력은 10퍼센트 미만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10퍼센트가 주로 장교와 부사관에 집중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해병대 지휘관들은 전쟁이 어떤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대부분이 자원병으로 구성되어온 해병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육군에 피해을 입힌 조직 개혁을 피해갔다. 전쟁 동안 미국 대중은 육군에 대해서는 들고일어났지만, 육군에 비해 20배는 작고 폐쇄적인 해병대에게는 너그러웠다.
1950년, 미 해병대 장교는 역시 장교였으며, 해병 부사관은 로마 카이사르 시대 이래로 훌륭한 부사관이 해왔던 대로 행동했고 허튼 짓을 하지도 용납하지도 않았다. 또한 해병대 지휘관들은 유일한 임무이자 근본 임무가 전투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았다.
해병대는 그곳에 복무하는 해병대원들을 편한하게 놔두지 않았다.
해병대는 예전에도 그렇듯이 언제나 힘들고, 더럽고,잔혹한 훈련 방식을 고수했다. 이 방법 외에 병사들을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전투 공포에 대비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1950년에 해병은 현역이든 예비역이든 전장에서 죽을 준비가 육군보다 훨씬 더 잘 되어 있었다.
합참의장이 완전 편성이 이루어진 1개 사단을 요청했을 때, 해병대는 미 해군 해병 전력의 1해병사단에서 오직 1개 여단밖에 편성할 수 없었다. 해병대는 모자라는 병력을 충원하게 위해 함정 근무자와 육상 근무자를 샅샅이 뒤졌고, 모든 지상 예비역을 현역으로 소집했다. 해병대는 준비되지 않은 병사들이 전투에 투입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지만, 우선적으로 임무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50년 여름 이후 요구 수준이하로 훈련을 받은 신병들이 동양으로 떠났다. 민간인의 삶을 막 시작했던 다수의 예비역들 또한 여느 군의 예비역들처럼 헌역 전환 명령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였다. 타군과 마찬가지로 해병대 내에 억울해하는 정서가 남아 있었지만,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좋든 싫든, 전쟁의 이유를 믿든 안 믿든 간에 해병대는 전쟁터로 떠났고 명령에 복종했다.
낙동강 돌출부의 혈투
미 5해병연대의 레이먼드 머레이 Raymond L. Murray 중령은 남쪽의 먼지 자욱한 마산에서 밀양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머레이 중령과 크레이그 장군이 공격 계획을 논의하는 동안 피곤하고 땀에 젖은 해병들은 흙빛을 띠고 흐르는 밀양강에서 목욕을 했고, 끈적끈적한 논흙이 묻어 형편없게 된 전투복과 장비를 대체할 새 피복과 장비를 지급받고서 어떤 임무를 받을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 해병대원들은 한국 남쪽에서 제한적인 전투만을 치렀지만 태평양을 건너며 배에서 붙은 살은 이미 땀으로 다 빼낸 뒤였고 여름 열기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작렬하는 태양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기는 해병대도 육군과 거의 마찬가지였지만, 이들은 육군과 다르게 서서히 적응하고 있었다. 인종에 상관없이 죽거나 죽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해병들은 해병에 복무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이들은 동료가 쓰러지도록 그냥 놔두지 않았다. 해병에게는 군기가 있었다. 군기의 본질은 명령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현명하게 명령을 완수하는 것이다.
해병대의 인적 자원은 일반 사회의 구성원보다 특별히 더 나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해병은 반복되는 망치질을 받으며 새로운 형태로 연마되었고, 계속되는 불길을 견디며 강해졌다. 해병은 미국이 보유한 부대 중 고대 로마'군단'과 가장 유사한 부대였다. 이들은 고향 바닷가부터 보헤미아의 바닷가까지 해병의 깃발을 따라서 어디서든지 잘 싸웠다.
해병의 공격순서가 정해졌다.
해롤드 로이즈 Harold Roise 중령의 2대대가 선봉에 서고, 이후 5연대 1대대, 5연대 3대대가 순서대로 그 뒤를 따랐다. 8월 17일 자정이 지나자 5연대 2대대가 오봉리 능선 앞 집결지로 이동했다. 해병여단에 지급된 지도는 1950년에 유엔이 사용했던 모든 지도들처럼 옛 일본의 측량을 근거로 한 것이라서 부정확했다. 해병들은 자신들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D중대와 E중대는 항공기와 야포의 공격준비사격이 끝나면 2개 소대를 앞으로 보내 8시에 공격하기로 했다.
제1파로 전방에 보낼 가용한 병력은 오직 120명에 불과했다.
이제 동해 먼 바다에 있는 미 해군 항공모함인 바도엥 스트레이트 Badoeng Strait 와 시실리 Sicily가 역풍을 헤치고 해병 F4U 코르세어 Corsair 전투기 총 18대로 이루어진 2개 비행대대를 출격시켰다. 날개가 마치 갈매기 날개처럼 생기고 무거운 폭탄을 장착해 꼴사나운 모습의 코르세어는 연료탱크가 부족했기 때문에 네이팜탄을 장착할 수 없었다.
10분 동안 24사단 포병은 오봉리 능선 후방으로 나 있는 접근로들과 능선의 후사면을 따라서 타격했다. 포병이 사격을 멈추자, 해병 항공대가 마치 벌떼처럼 고지 위로 날아와 오봉리 능선을 따라 폭탄을 퍼부었다.
진흙, 먼지, 그리고 화염이 능선 전체를 뒤덮어버렸다. 이를 지켜보던 처치 장군은 마치 연기 속에 떠 있는 느낌을 받았다.
폭탄을 모두 사용한 코르세어는 굉음을 내며 멀어져갔다. 8시. 병력이 충분치 않은 해병 4개 소대가 계곡을 가로질러 900미터 떨어진 능선으로 진격했다.
논3개를 가로질러 목화밭 가장자리까지 도달한 해병들은 능선 위가 아닌 측방에서부터 자동화기 사격을 받았다. 사격이 더 치열해지자 공격하는 소대들 사이에 간격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민군 박격포탄이 이들 머리 위로 떨어졌다.
마이클 신카 Michael J. Shinka 소위가 지휘하는 D중대 3소대만이 능선 정상에 도달했다.
오봉리 꼭대기에 오른 해병 20명은 양 측방에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이들은 인민군이 판 빈 참호선을 발견했다.오른쪽에 있는 적 진지로부터 기관총탄 세례가 시작되자, 해병은 모두 참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에는 적 진지로부터 수류탄 여러 발이 공중으로 솟아 올라 능선 후사면으로 굴러들었다. 참호에서 나오면 누구든 기관총을 맞았다. 불과 몇분 만에 마이를 신카는 병사 5명을 잃었다.오른쪽에도 왼쪽에도 그를 지원해줄 수 있는 해병들은 없었다.
적의 총알 폭풍은 오봉리에 공세를 펼치던 미 해병대 전체를 산산조각 냈다. 15시 무렵까지 투입된 해병 240명 중에서 23명이 전사하고 119명이 부상을 입었다.
수많은 병사가 전사했으나 오봉리 능선을 점령하지 못했다.
16시에 뉴턴 Newton 중령이 지휘하는 1대대가 전방에 있던 5해병연대 2대대 잔여 병력과 교대했다.
오봉리 능선을 지키는 인민군 18연대를 지휘한 장규덕 대좌는 상황이 점점 절망적이 되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낮 동안 그의 휘하에서는 사상자 600명이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클로버리프 고지를 지키던 인민군 16연대는 장규덕 대좌를 지원하기 위해 1개 대대를 보내야했다. 탄약보급은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에게는 의료 물자도 없었기 때문에 부상병들은 치료를 받지 못해 그냥 죽어가고 있었다. 장규덕 대좌는 미군 항공기와 야포가 계속 두들겨대는 가운데 새로운 미 해병들이 능선을 다시 공격하면 단 하루도 더 버틸 수 없음을 잘 알았다. 그는 미 해병대의 주파수에 맞춰진 미군 SCR-300 무전기를 노획했기 때문에 미 해병 1대대가 오봉리 전방에서 미 5해병연대 2대대와 교대한 것을 알았다. 그리고 미 해병들은 수많은 이야기를 무전기에 대고 주고받았기 때문에 대략 어디쯤에 미 5해병 1대대 예하 중대들이 있는지도 알았다.
장규덕 대좌는 여느 인민군 고급 지휘관들처럼 소련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중일전쟁에 참전한 노련한 인물이었다. 그는 미 해병이 인민군 18연대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미군을 격파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병력도, 식량도 부족했지만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것은 탄약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앞에 종심이 얕게 배치된 미 해병대 방어선 중 원하는 장소에 우세한 전투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8월 17일 어둠이 내리자. 그는 공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2시 30분이 되자, 어둠 위로 녹색 조명탄 한 발이 솟아올라 오봉리 위에서 터졌다. 밤새 조명탄 빛과 파열음이 이어졌다. 적 분대들이 해병들을 향해 돌진해오며 수류탄을 던지고 자동화기를 미친 듯이 쏘아댔다. 분대마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 쓰러지면 그 뒤로 새 분대다 공격을 반복했다. 인민군은 A중대로 밀고 들어와 돌파했지만, B중대 방어선 돌파에는 실패했다.
2시간 뒤 날이 밝 시작했다. 동쪽 하늘이 밝아오면서 공격이 완전히 멈추었다. 흐릿한 아침 태양 아래서 해병대 2개 중대 진지 앞에 흩어져있는 인민군의 시신은 200구가 넘었다. 기어서 도망가거나 또는 실려갔을 부상병의 수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인민군 18연대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미군 역시 대가가 만만치 않았다. 전날 저녁, 석양을 지켜봤던 미 해병의 절반은 더 이상 대지 위에 서 있지 못했다.
8월 18일 오후가 되자, 인민군 4사단 전체가 도주 중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육군과 해병은 적을 서쪽으로 밀어붙여 강가로 몰았고, 낙동강 도하지점에 겨속해서 포탄이 떨어졌다.
8월 19일 이른 아침에는 해 해병대와 미 34보병연대가 강안에서 조우했다.
해병대의 첫 전투는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인민군 4사단은 3,000명 미만의 병력만이 다시 강을 건너갔다. 4사단 예하 연대마다 실질적 병력은 300~400명에 불과했다.이들은
1,200구가 넘는 시신을 남겨두고 왔고, 미군은 이를 매장해야했다. 이들은 야포 34문, 기관총 수백 정, 소총 수천 정을 버리고 왔다.
실질적으로 '서울'사단은 격멸당했다.
현재까지가 이 책 823페이지 중 248페이지까지 저의 의견 한 글자도 추가 없이 요약 발췌한 것입니다.
너무 방대하여 다음편에서 전쟁 포로 문제만 다루고 마칠까 합니다.
첫댓글 역시 재미있다.
요약한 내용이지만 그래도 Real 하네.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만큼 재미있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