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과 21세기』
제2장 고조선 연구의 역사 - 피와 눈물과 영웅들의 드라마 (3)
정인보
여기서는 정인보를 중심으로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의 원조인 이병도를 함께 논한다. 비슷한 시기의 인물들로 상호관련성과 상호 비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인보의 학문과 대고조선론
정인보는 현대 한국의 가장 유명한 유학자 중 하나이다. 1893년생으로 신채호보다 13살 연하다. 1910년대 초반에서 2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간 중국에 유학했다. 거기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였는데 그중 1인이 신채호다. 아내의 부고 소식을 듣고 또 노모를 봉양하고자 국내로 돌아왔다. 이후 양명학을 연구하는 등 연구와 교육에 종사하다가 1930년대부터 역사 연구에 집중하였다. 당시 일제가 평양의 낙랑유적을 날조하는 것에 의분을 일으킨 것이 동기라 한다.
정인보의 대고조선론은 약간의 편차가 있지만 신채호의 이론을 정리, 발전시킨 것이다. 대신 자료와 서술이 상세하고 치밀하다. 이 연구는 30년대 신문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가 해방 이후 1946~1947년에 『조선사연구』라는 책으로 간행되었다. 이로써 상대적으로 소략했던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나 『조선상고문화사』는 정인보의 『조선사연구』로 단단하고 풍부하게 정립되었다.
정인보의 업적 중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것은 일제가 날조한 낙랑유물을 정밀하게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는 차후 일제와 남한 주류 고대사학계의 낙랑 유물 및 낙랑군 평양 위치설에 치명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정인보의 선구적 연구는 후학들에 의해 강화되면서 윤내현에 이르면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명확해진다. 지금도 주류 고대사학계는 낙랑유물을 근거로 낙랑군 평양 위치설을 일제 강점기 때와 똑같이 주장하지만 예전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윤내현에 따르면 이 유물들은 낙랑군의 평양 위치설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양에 없었다는 증거로 기능한다. 앞서 말했듯 낙랑군의 위치가 어디인가는 고조선 연구에서 핵심 중 핵심이기 때문에 정인보의 연구는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정인보의 학자로서 위상을 기억해 두는 것도 중요하다. 당시의 역사학은 지금처럼 고고학을 포함한 여러 방법론이 없었거나 빈약했으므로 문헌 연구 비중이 컸다. 따라서 최고 수준의 한학자인 정인보의 위력은 역사 연구에서 압도적인 것이었다. 흔히 정인보가 한국 전쟁 때 납북되지 않았다면 한국 고조선사의 운명이 달라졌을 거라는 말을 한다. 쉽게 말해 교과서가 달라졌을 것이고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고조선사도 지금 같은 소고조선론이 아닌 대고조선론이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정인보는 그만큼 대단한 학자였고 그만큼 인망이 높았다.
정인보의 인품도 짚어두어야 한다. 그는 정통적인 선비였고 보수적이었으며 그런 만큼 뜻이 맑고 도의가 높았다. 그런 그였기에 이승만 정권은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고 관료로 끌어들였으나 정인보로서는 부패한 정권의 모습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비리에 대해 직언을 멈추지 않자 이승만 정권은 그를 쫓아내었다. 그 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북한에 의해 점령된 서울에서 비극적으로 납북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병도
현 주류 고대사학계의 태두이자 원조이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사람이다. 일반인에게도 많이 알려진 편이다. 그가 누구인지는 잘 몰라도 이름 정도는 들어본 것이다.
이병도는 1896년 생으로 정인보와 동시대 인물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했으며 악명 높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에게 배우고 국내로 돌아와서는 일본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 복무했다. 덕분에 그는 한국 최초의 현대적 역사학자라는 칭호를 받는다. 해방 직후 국사학계의 친일 잔재 청산 논란으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으나 무사히 넘기고 자그마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창설에 참여한다. 반민특위를 말 그대로 때려잡은 이승만 정권 이후 이병도는 승승장구한다. 온갖 직위와 훈장을 받고 이승만 정권 붕괴 이후 과도정부 문교장관까지 역임한다. 그는 주류 고대사학계의 초월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고, 이런 저런 비판이 있었다곤 하지만 그의 소고조선론은 지금까지도 모든 소고조선론의 중추를 이룬다. 특히 그의 낙랑군 한반도 위치설과 일본 임나일본부설은 현재도 요지부동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병도가 심하게 친일을 한 것은 아니고 고대사에서도 일제 식민사학자들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납득할 수 없는 말이다. 그가 이광수나 최린처럼 앞서 광분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의 그들처럼 거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병도 같은 피라미는 일제 선전에 별 효용이 없으므로 가져다 쓸 필요가 없었다. 일제 식민사학을 넘는 소소한 노력을 했다는 것도 국내의 시선을 의식해서 보인 제스처일 가능성이 높다. 거물급 친일파처럼 부귀를 누린 건 아니지만 엄혹한 일제 강점기 때부터 해방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안락하게 살아왔던 그를 변호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처음부터 일관되었던 그의 소고조선론은 1976년 『한국고대사연구』로 집약된다. 이병도의 학설이 중요한 이유는 80년대 윤내현이 등장할 때까지 남한 주류 고대사학계의 유일한 이론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른 학자들이 일부 다른 의견이나 보충 의견을 제시했지만 그야말로 일부에 불과하다. 고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병도 학설 외에 없었다. 주류 고대사학계는 윤내현이 이후에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바빠졌다. 하물며 북한의 고조선 연구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아무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학계의 안락한 이권과 사회적 명망을 누렸다. 견제와 감시가 없는 권력은 국가 지도자에서 일개 가정의 가장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 학계는 학문이라는 그럴 듯한 후광에 숨어 더욱 알 수 없는 음지가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수구처럼 썩어 들어갔다.
누가 옳은가
주류 고대사학계의 주요한 전략 중 하나는 신채호나 정인보를 옛 시대의 구닥다리 학자라고 암암리에 선전하는 것이다. 대신 그들의 이론을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다루는 법이 없다. 그래서 강만길이 그랬듯, 온 국민이 신채호와 정인보는 애국심은 높았으나 학문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랬듯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렇게 세뇌되는 것이다. 반면 주류 고대사학계의 태두인 이병도는 뭔가 현대적인 학자 같다. 그의 후계자들이 늘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말했듯 이병도는 정인보의 3살 연하로 완전한 동시대 사람이다. 따라서 그가 써놓은 글을 읽어보면 문체나 서술 방식이 정인보보다 구닥다리면 구닥다리지 더 새로울 리가 없다. 이병도가 가진 새로운 것이라면 일제 관변사학자들이 우기고 왜곡한 고고학 유물, 그러니까 그 악명높은 낙랑유물 보고서뿐이다. 나머지는 모조리 문헌 연구와 해석이다. 따라서 그가 얼마나 옳은가를 확인하고 싶으면 당대 시각으로 당대의 정인보와 비교해야 한다.
그런데 정인보는 평생 한학을 공부한 사람이고 다시 반복하지만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게다가 일제의 낙랑유물을 뼛속까지 훑어낸 사람이다. 정인보와 이병도가 단 둘이 마주 앉았다고 상상해 보라. 그렇게 둘이 논쟁한다면 속된 말로 이병도는 뼈도 못 추린다. 같은 한문 사료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 정인보가 뒤질 리 없다. 또 이병도는 일제로부터 통제를 받고 보상을 받았으므로 수동적임과 동시에 학문적 왜곡의 가능성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외적 풍모와 내적 인품, 사람들 사이의 인망에서 이병도는 정인보와 비교가 안 된다. 실제로도 그렇다. 정인보가 정통 사학자라면 이병도는 말장난이나 하는 변설가에 가깝다.
소싯적에 배운 소고조선론의 선입관을 잠시 배제하고 이 장면을 상상해 보라. 둘이 논쟁하면 누가 이길 것 같은가. 누가 옳을 것 같은가. 상황이 공정했다면 이병도는 정인보와 한 테이블에 앉지도 못한다. 이병도가 정인보에 비해 현대적 사학자라니, 일제의 지원과 이병도의 후계자들이 만든 환상이 어지간하기도 하다. 우리는 이 허깨비가 허깨비인 줄을 모르고 산다.
출처: 『고조선과 21세기』, 김상태, 2021. 86~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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