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감로수한잔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철학과 문학,인문학 스크랩 50.오스만 투르크제국
카페지기 추천 0 조회 165 14.01.11 23: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성립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 전경지금까지 보아온 이슬람세계는 비록 십자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고, 맘루크나 아타벡 들에 의해서 분열과 상호간의 항쟁을 거듭했다.

 

하지만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폭풍처럼 휘몰아친 무지막지한 침략자를 동쪽으로부터 마지하게 되면서 사정은 급변했다.

 

이름하여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칭기즈칸이 본격적인 서정(西征)에 오른 것은 1221년, 목표는 호레즘(Khorezm)왕국 타도, 이유는 호레즘 왕국에 보냈던 칭기즈칸의 사절을 학살한데 대한 보복.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북서부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아무 강이 아랄 해로 흘러 들어가는 유역에 자리잡은 기름진 델타지역으로서, 일찍부터 이란계 주민들이 사막이나 초원지대와는 전혀 다른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1세기에 이르러 말리크 샤 밑에서 주방장으로 지내다가 이곳 총독으로 부임되어 온 투르크계 노예인 아누시 티킨이 셀주크왕조의 분열에 편승, 샤를 자칭하였고, 그 후손들도 샤를 칭하면서 세력을 팽창, 13세기 초에는 바그다드와 어깨를 견줄정도의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호레즘 정복으로 시작된 칭기즈칸과 그 후손들의 서아시아 정복에 관한 이야기는 앞서 이야기되었고(칼럼 제 26호. 칭기즈칸의 등장과 몽골제국의 성립), 칭기즈칸은 샤머니즘을 신봉했을 뿐 이슬람교도는 아니였기에 닥치는데로 죽이고 빼앗기를 식은 죽 먹듯 했다.

 

이런 참혹한 살륙과 약탈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삼십육계 줄 행낭, 이래서 서 아시아 일대에서는 작게는 씨족단위에서 크게는 부족단위로 떼를 지어 살길을 찾아 이리저리 몽골군사들을 피해 다니는 기이한 현상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투르크계 오구즈족의 일파인 카유족의 족장 에르투룰 베이(Ertugrul Bey)도 몽골의 만행을 피해 부족원 4백 여명을 이끌고 코니아에 있는 룸 셀주크왕조에 의지하기 위해 유프라테스강을 건넜을 때, 일단의 무리들이 싸우는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마침내 치열한 싸움에서 한쪽이 기울자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발휘, 싸움에 끼어들어 강한 쪽을 쫓아 버렸고,...구세주처럼 나타나 은혜를 입은 것은 그가 의지하기 위해서 찾아가던 룸 셀주크왕조의 술탄 알라딘(Aladdin)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에르투룰베이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소유토(Syut, Asyut) 일대 영주가 되었다.

 

그의 아들 오스만 1세(Osman I : Ottoman I / 1299∼1326)는1288년 족장으로 선출되어 이웃의 빌레지크·이네괼·예니셰힐 등 비잔탄제국에 속하는 그리스도교 제후의 영지를 병합하였고, 예니셰힐을 본거지로 하여 오스만제국의 기초를 확립하고 연이어 룸 셀주크왕조의 멸망(1308)을 기회로 삼아 급속히 영토를 확장하여 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그의 아들 오르칸(Or khan)은 비잔틴 제국 여러 곳을 점령해서 제국의 기초가 더욱 튼튼해 졌다.

 

(2)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발전과 동로마 제국의 멸망

 

오스만 제국의 영역오르 칸의 아들 무라드 1세(Murad1 : 1362 ~ 1389)는 소아시아 방면의 투르크계 여러 왕국을 병합하고 발칸반도로 진출, 로마교황과 보스니아, 세르비아, 헝가리 연합군을 격파하고(1363),

 

수도를 아드리아노플로 옮기고(1365) 20년간 발칸반도를 공략하다가 1385년 6월 세르비아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 뒤를 이은 것이 티무르의 강적 바야지드, 그도 부왕의 뜻을 따라 콘스탄티노플 주위를 하나씩 정복했는데, 이에 겁을 먹은 이 지방의 영주들이 사마르칸트의 영웅 티무르에게 구원을 요청, 이래서 두 사람은 운명의 앙카라 전투를 치루게 되었다(1402) (칼럼 45 ~ 46호 티무르제국과 무굴제국 참조)

 

이 전투에서 바야지드는 티무르의 포로가 되어 따뜻한 대접을 받았으나 이듬해 홧병으로 죽고 오스만 제국은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되었는데, 전쟁터를 간신히 빠져 나왔던 바야지드의 아들 무하마드 1세(1413 ~ 1421)는 다른 3형제를 제거, 제국을 수습 재건하고, 그의 아들 무라드 2세(1421 ~ 1451)에게 물려주었다.

 

1451년 무라드 2세의 아들 무하마드(메호메드 혹은 메메드라고도 함) 2세(145 ~ 1481)가 22살의 나이로 7대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꿈은 조상 대대로 염원했던 콘스탄티노플 점령, 이를 위해서 먼저 국가 재정을 튼튼히 다진 후 드디어 1453년 4월 육군과 해군을 동시에 동원하여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넜다.

 

5월 21일, 무하마드(메호메드) 2세는 비잔틴황제 콘스탄티누스 12세에게 항복 조건을 제시, "...황제는 펠로폰네소스왕으로 삼고, 떠날 사람은 자유롭게 떠나도록 신변을 보호해 주며,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과 재산을 보장해 주겠다...."

 

그러나 이 조건은 비잔틴제국에 의해서 거부되었고, 1453년 5월 28일 밤 무하마드 2세는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전투는 29일새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비잔틴의 저항 역시 완강하여 난전이 계속, 결국 오스만 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성 노마노스 문이  뚤렸다.

 

전투를 진두 지휘하던 비잔틴 황제콘스탄티누스 12세는 누군가가 휘두른 칼을 맞고 쓰러졌다.

 

이로서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천년을 이어왔던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은 막을 내리고, 쌍두 독수리의 동로마제국 깃발대신 오스만 투르크의 초승달 깃발이 콘스탄티노플의 하늘을 펄럭이게 되었다.

 

한 낮이 되어 시가지로 들어선 투르크 병사들은 미친듯이 시내를 누비고 다녔는데, 성 소피아 성당에서는 이때까지 수 천명이 모여 문을 굳게 잠그고 최후의 순간에 천사가 내려와 그리스도의 적들을 물리칠 것을 믿고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문을 부수고 나타난 것은 천사가 아니라 피 묻은 도끼를 든 투르크 병사들, 이들은 서슴없이 성당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살육하자, 조금 늦게 이곳에 도착한 무하마드 2세는 대경 실색, 큰 소리로 이들의 만행을 나무라고, 사제들에게 정중히 사과한 후,

 

이슬람 학자 한 사람이 단상에 올라 코란을 낭독하자 술탄도 대리석 제단에 무릎을 꿇고 알라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기원전 7세기 그리스의 식민 폴리스 비잔티움으로 건설되었던 이 도시는,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뀌었고(330),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395) 동로마제국의 수도가 되어 천년을 지탱하다가, 다시 투르크인들의 수중으로 넘어가(1453) 이름도 이스탄불로 바뀌고 오스만투르크의 수도가 되었다. 오스만제국의 뒤를 이어 1921년 터키공화국이 수립되고 수도자리는 앙카라에게 내 주었으나 터키 제1의 도시로서 지금도 명예와 번영을 동시에 누리고 있다.

 

이렇게 해서 동방정교회의 사원은 이슬람의 모스크로개조되는 등 로마적인 요소는 사라지고, 이슬람적인 요소가 자리잡았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학자들은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로마적인 요소는 다시 러시아로 건너가 전통의 맥을 잇게 되었다.

 

(3) 오스만 투르크의 쇠퇴

 

역사의 순환은 참으로 묘한 것으로 동쪽에서는 기독교세계의 한 축을 이루었던 비잔틴제국이 무너졌으나 서쪽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이슬람의 나스르왕조가 멸망하고,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서는 기독교를 상징하는 은십자가 세워졌으며, 콜럼버스는 부와 명예를 찾아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 갔다(1492)

 

1498년 5월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 선단이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 캘리컷에 도작, 인도 항로의 길을 열었으며, 이로써 지중해 무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동시에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빛을 잃은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오스만 투르크의 중요 재원이었던 중계무역도 더 이상제국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었다.

 

1517년 독일에서는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의 막이 올랐을 때, 오스만 투르크의 셀림 1세는 이란, 시리아, 아라비아, 이집트를 정복하고 아바스왕조의 칼리프를 물려 받아 술탄-칼리프제도를 확립하여 이슬람세계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스텝 기마전술에 의존하여 발칸반도 일대와 헝가리까지 지배하는 위력을 과시, 10대 술탄 쉴레이만 1세(1520 ~ 66)때 전성기를 고비로 레판토해전(1571)의 패배로 많은 영토를 잃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레판토 해전(Battle of Lepanto)은 투르크가, 키포로스섬을 빼앗자, 로마 교황을 주축으로 베네치아, 제노바, 이스파냐 등이 신성동맹을 결성하고 1571년 10월 코린트만에 위치한 레판토 앞 바다에서 투르크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갤리선을 축으로 한 육탄전에서 쌍방이 3만명 이상의 많은 희생자를 내고, 일개병사로 참전했던 동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왼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을 입은 것도 이때였다.

 

에스파냐가 동원한 범선 여섯 척이 큰 위력을 발휘하여 결과는 오스만 투르크의 참패, 다시 17세기 말에는 헝가리의 대부분을 오스트리아에게, 18세기 후반에는 러시아와 싸워 패배하고 흑해 연안 크림반도 북부 일대를 잃었으며,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이집트가 분리되었고 그리스가 독립하는 등 영토가 계속 축소되어 대국으로서의 위력을 상실하였다.

 

1차 세계대전(1914 ~ 18)에서는 독일의 동맹국측에 가담했다가 패배, 세브르조약(1920)을 받아들여 영토는 아나톨리아 고원에 한정되고, 지금은 군사적인 프레이드로 관광수입이나 올리면서 강대국의 대열에서 멀리 떨어지고 말았다.

 

오스만 투르크의 쇠퇴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고 있으나, 1차적인 원인은 총포의 등장으로 기마전술이 더 이상 전술로서의 가치를 잃었고, 교육과 산업을 등한시 하여 새로운 산업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길을 열지못했으며, 제도 및 관습의 개혁 없이 서구의 기술문명만을 모방한 탄지마트라는개혁의 실패 등을 꼽고 있다.

 

그러나 정작 더 큰 이유는 쓸모없는 버린땅 중동지방에서 유전이 발견되고 석유가 치솟자 서구 열강의 침입과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도 빼 놓을 수 없는 이유라고 한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