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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의 역사 스크랩 부흥운동의 역사적 조명
초대짱 추천 0 조회 7 13.11.23 18:2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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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흥운동의 역사적 조명




들어가면서

우리는 평양대부흥운동을 이해하기 위해 '부흥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미국부흥운동의 주역 찰스 피니는 그의 저서, Lectures on Revival에서 '부흥은 하나님을 향한 죄인들의 각성과 회심을 낳는 그리스도인의 첫 사랑의 회복이다'고 정의하였다. 일반적으로 부흥을 뜻하는 '리바이벌'은 보통 침체되어 있는 삶과 신앙을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에서 있는 신앙의 상태를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740년경에 발흥한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과 요한 웨슬리로 대변되는 영국의 부흥운동이 보여주는 것처럼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침체되어 있을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 사실이지만 영적 침체기에만 부흥의 역사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부흥은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다. 어떤 의미에서 1905년 Frank G. Beardsley가 자신의 저서 A History of American Revivals에서 '부흥운동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이다'고 말한 것은 틀린 것은 아니다.

1. '부흥' 어원의 역사적 고찰

하지만 부흥운동이 현대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부터이다. 부흥이란 용어가 역사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청교도들이었다. 1662년 Henry Vane이 The Gre-at work of Christ in America (Ma-gnalia Christ in America )에서 '그리스도에 의한 급하고 비상한 부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이것을 Cotten Marther(1663-1728)가 인용하면서 널리 소개되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드가 그의 저서 Humvle Attempt(1778)에서 리바이벌을 '흘러들어옴'(effusion) 또는 부어주심(outporing)등의 의미로 사용하면서 18세기에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현대적인 의미에서 리바이벌은 종교개혁 후 시대의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랍직하다.
종교개혁 이후 경직된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청교도들과 루터란들이 중심이 된 경건주의 운동이 발흥하여 신앙의 각성을 촉구하기 시작했고, 이와같은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은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과 영국의 웨슬리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태동을 가져왔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1740년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과 영국의 웨슬리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태동을 가져왔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1740년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나면서 '부흥' 이라는 말은 보편화되었고, 그것은 영적각성의 의미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은 부흥운동의 연구에 있어서 하나의 모형이다.

2. 부흥운동과 성령의 역사

부흥운도에 대한 정의와 견해가 어느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부흥운동이 이안 머레이의 지적대로 '성령의 인격 및 사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흥이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부흥에 대해 적어도 세 가지를 기억할 것을 요구한다. 첫째는 부흥 혹은 부흥운동의 주제를 다룰때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부흥 운동을 단순히 머리나 학적으로만 연구하는 것은 부흥운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부흥은 일차적으로 신적인 기원을 가진 다는 의미이다.
부흥운동을 얼마든지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산물이라고 이해한 적도 있고 현재도 부흥사들이 부흥을 가져 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부흥사들을 당신의 부흥의 역사를 가져오시기 위해 이들을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그 부흥은 신적인 기원을 갖고 있으며, 부흥사는 단순히 도구로 쓰임 받을 뿐이다. 부흥이 신적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부흥의 역사를 실제로 경험한 W.W.patton은 '종교적 부흥'에서 부흥은 '성령의 섭리 가운데 어느 한 장소에서 특별한 능력이 임하고 성령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3.두 가지 형의 부흥운동 : 에드워드와 피니

부흥운동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나단 에드워드와 찰스 피니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이 두 사람이 이해한 부흥 개념이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찰스 피니가 부흥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피니가 등장하기까지는 부흥운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라는 구학파 부흥운동 개념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피니가 등장하면서 그 개념이 수정되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부흥 이해

에드워드는 부흥운동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부흥운동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제시하여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는 칼빈주의와 부흥운동이 모순되지 않으며 얼마든지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에드워드 만큼 철저하게 칼빈주의 전통에 선 사람도 드물 것이다. Perry Miller가 지적한대로 지금까지 '미국을 빛낸 가장 위대한 철학자 겸 신학자'였던 에드워드는 유명한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예일대학에서 최고의 학문적 훈련을 받았다.
그는 가장 탁월한 지성을 가지고 청교도 전통을 가장 휼륭하게 진술하였다. 칼빈이 생각하고 칼빈이 가졌던 것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그것을 수용할 만큼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에드워드의 작품에는 John Fravel, Thomas Manton, John Ownen, Theolo-philus Gale, Samuel Rutherford 같은 '청교도들의 작품들에서 인용한 것들이 풍부하게 나타난다. 그만큼 그는 청교도 전통에 충실했으며, 칼빈의 전통에 확고하게 서 있었다. 개혁주의 신학자 반 마스트리히트(Van Mastricht)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저서들은 '내 견해로는 성경을 제외하고는 세상의 어떤 책보다도 더 휼륭하다'고 말하였다.
1724년 예일 대학 강사에 임명되었고, 1729년에 할아버지 Solomon Stoddard의 뒤를 이어 노댐턴 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후 에드워드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1735~1737, 1740~1744)의 주역으로 쓰임받았고, 미국에 역사적 칼빈주의를 수호하면서도 노댐턴과 뉴잉글런드 지역에 영적각성운동을 저변확대시켜 영적각성운동을 미국 교회사 속에 소중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의 메시지는 너무도 선명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훼손하는 죄의 개인적 각성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깊이 일깨워 1735년부터 노댐턴의 교회와 뉴잉글런드 지방의 교회들에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인간이 의존함으로 영광받으시는 하나님'과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과 같은 설교를 통해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그분을 의지하라고 촉구했다.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뿌리깊고 얼마나 무서운가를 성결을 통해 분명히 제시하고 죄의 문제를 청산하도록 촉구하였다.
이와같은 메시지를 통해 온 청중들은 각성하기 시작했고,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이 그가 시무하는 교회를 통해 발원하기 시작했다. 그는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1737), <하나님의 영의 역사의 특징들>(1741), <부흥운동 론>(1742), 그리고 <종교적 심성>(1746)을 이어 발표해 부흥운동을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는 고함치며 설교하지 않았고 충실한 성경주석을 기초로하여 특유의 청교도적 적용이 있는 교리적 해설을 제시하였다. 사람들에 의하면 그는 꾸밈없고 단조롭게 설교하였다.
그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에서 '내가 이제 주장하려는 하나님 말씀의 관찰결과는 이러하다. 어느 순간에도 전적인 하나님의 의지 외에 악한 인간들을 지옥에서 건져 낼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의자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는, 어떤 종류의 어려움에도 방해받지 않는, 그의 절대주권적 의지, 그의 임의적인 의지, 어떤 측적 의지, 그의 임의적인 의지, 어떤 측면에서 매우 짧은 순간에 사악한 자의 보존에 개입하시는 의지를 의미한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고 있었는가를 말해준다. 부흥운동이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이며, 그것은 그분의 절대적인 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흥운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사모하고 갈망해아 할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흥의 역사가 말씀을 통해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며 그 분의 뜻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 가운데 임하셨기 때문이다.

피니의 부흥 이해

부흥은 성령의 부어주심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와 같은 부흥운동의 견해가 1730년경부터 찰스 피니가 등장하던 1830년경까지 미국 기독교를 지배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견해는 찰스 피니가 등장하면서 일대 수정을 받게 되었다. 그는 부흥운동이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노력에 의해 그것이 발흥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피니는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교회는 부흥을 하나의 기적, 혹은 신적 능력의 개입으로 생각해왔다. 목사들이 일정한 수단을 사용하여 얼마든지 부흥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불과 몇년 전부터이다. ...하나님께서는 부흥을 기적으로 이해하던 이론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신 것이다.'
오늘날의 부흥에 대한 견해는 에드워드의 개념에 근거하기보다는 피니의 견해에 더 기초하고 있다. 부흥에 대한 에드워드와 피니의 견해는 180도 차이가 있다. William McLoughlin의 말을 빌린다면 '조나단 에드워즈와 피니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중세와 현대 사상의 차이이다. 에드워즈는 부흥을 '기도해야 할 것'으로 보았고 피니는 부흥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에드워드는 부흥이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으나 피니는 부흥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피니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왜 부흥을 체험하지 못하는 줄 아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 즉 당신이 부흥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것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고 갈망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위해 별 노력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교회가 해야 할 모든 의무를 다 수행한다면 천년 왕국은 3년 안에 이 나라에 임할 수 있다.
만약 교회가 해야 할 모든 의무를 수행한다면 전 인류 복음화는 머지 않은 날에 완성될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내가 알고 있는 몇몇 목사님들이 계속해 왔던 노력들을 온 교회가 한몸이 되어 함께 하였더라면 지금쯤 이 땅에는 회개하지 않은 완고한 죄인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확신에 기초한 피니는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바치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앞으로 나와서 앞자리에 앉기를 호소했고, 은혜를 받기 위해 즉시 결단할 것을 촉구했다. 그의 주장은 다음 몇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은 복음을 듣는 자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자신의 결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둘째 이를 위해서는 어떤 행동인가를 해야 한다. 셋째 만일 이것을 반대하면 복음주의적 설교를 파괴하는 것이다.
피니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부흥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고, 교회가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역사가들은 피니의 낙관적인 부흥운동의 견해가 원죄를 부인하는 펠라기안적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그의 작품을 검토하면 신학적인 토대가 없어 칼빈주의 교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반대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인간의 원죄와 인간의 전적 부패를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피니가 자주 프린스톤 신학교 출신자들이 부흥운동을 망치고 있다고 혹평했던 것도 그런 이유이다.

맺은 말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책임, 인간 자신의 역할, 결단 여부가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견해는 기독교를 인본주의의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거부하고 인간의 결단 여부를 강조하는 결과 찰스 피니는 데이빗 웰스의 말을 빌린다면 자유주의로 이어져 가는 브릿지 역할을 하고 말았다.
찰스 핫지가 지적한 것처럼 '죄인들이 스스로 거듭날 수 있으며, 자신들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회개하고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이 교리처럼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교리는 없을 것이다'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는 에드워드의 견해는 부흥관이 인간의 책임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권적인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자는 말씀과 기도와 실천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는 사실은 동시에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해야 하고 말씀대로 살며 이 나라와 이 민족 가운데 놀라운 부흥운동의 역사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며 은혜이기 때문에 더욱 그 하나님께서 나와 교회와 이 민족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겸손하게 간구하고 열망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한번 시들어 가는 영적 부흥을 안타까워하며 외쳤던 로이드 존스의 다음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부흥이 갈수록 자주 일어나지 않는 것은 칼빈주의의 쇠퇴 때문이다. 칼빈주의가 더 강력해진다면 우리는 영적 부흥과 대각성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들어가면서

우리는 평양대부흥운동을 이해하기 위해 '부흥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미국부흥운동의 주역 찰스 피니는 그의 저서, Lectures on Revival에서 '부흥은 하나님을 향한 죄인들의 각성과 회심을 낳는 그리스도인의 첫 사랑의 회복이다'고 정의하였다. 일반적으로 부흥을 뜻하는 '리바이벌'은 보통 침체되어 있는 삶과 신앙을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에서 있는 신앙의 상태를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740년경에 발흥한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과 요한 웨슬리로 대변되는 영국의 부흥운동이 보여주는 것처럼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침체되어 있을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 사실이지만 영적 침체기에만 부흥의 역사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부흥은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다. 어떤 의미에서 1905년 Frank G. Beardsley가 자신의 저서 A History of American Revivals에서 '부흥운동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이다'고 말한 것은 틀린 것은 아니다.

1. '부흥' 어원의 역사적 고찰

하지만 부흥운동이 현대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부터이다. 부흥이란 용어가 역사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청교도들이었다. 1662년 Henry Vane이 The Gre-at work of Christ in America (Ma-gnalia Christ in America )에서 '그리스도에 의한 급하고 비상한 부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이것을 Cotten Marther(1663-1728)가 인용하면서 널리 소개되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드가 그의 저서 Humvle Attempt(1778)에서 리바이벌을 '흘러들어옴'(effusion) 또는 부어주심(outporing)등의 의미로 사용하면서 18세기에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현대적인 의미에서 리바이벌은 종교개혁 후 시대의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랍직하다.
종교개혁 이후 경직된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청교도들과 루터란들이 중심이 된 경건주의 운동이 발흥하여 신앙의 각성을 촉구하기 시작했고, 이와같은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은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과 영국의 웨슬리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태동을 가져왔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1740년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과 영국의 웨슬리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태동을 가져왔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1740년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나면서 '부흥' 이라는 말은 보편화되었고, 그것은 영적각성의 의미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은 부흥운동의 연구에 있어서 하나의 모형이다.

2. 부흥운동과 성령의 역사

부흥운도에 대한 정의와 견해가 어느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부흥운동이 이안 머레이의 지적대로 '성령의 인격 및 사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흥이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부흥에 대해 적어도 세 가지를 기억할 것을 요구한다. 첫째는 부흥 혹은 부흥운동의 주제를 다룰때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부흥 운동을 단순히 머리나 학적으로만 연구하는 것은 부흥운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부흥은 일차적으로 신적인 기원을 가진 다는 의미이다.
부흥운동을 얼마든지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산물이라고 이해한 적도 있고 현재도 부흥사들이 부흥을 가져 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부흥사들을 당신의 부흥의 역사를 가져오시기 위해 이들을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그 부흥은 신적인 기원을 갖고 있으며, 부흥사는 단순히 도구로 쓰임 받을 뿐이다. 부흥이 신적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부흥의 역사를 실제로 경험한 W.W.patton은 '종교적 부흥'에서 부흥은 '성령의 섭리 가운데 어느 한 장소에서 특별한 능력이 임하고 성령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3.두 가지 형의 부흥운동 : 에드워드와 피니

부흥운동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나단 에드워드와 찰스 피니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이 두 사람이 이해한 부흥 개념이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찰스 피니가 부흥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피니가 등장하기까지는 부흥운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라는 구학파 부흥운동 개념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피니가 등장하면서 그 개념이 수정되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부흥 이해

에드워드는 부흥운동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부흥운동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제시하여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는 칼빈주의와 부흥운동이 모순되지 않으며 얼마든지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에드워드 만큼 철저하게 칼빈주의 전통에 선 사람도 드물 것이다. Perry Miller가 지적한대로 지금까지 '미국을 빛낸 가장 위대한 철학자 겸 신학자'였던 에드워드는 유명한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예일대학에서 최고의 학문적 훈련을 받았다.
그는 가장 탁월한 지성을 가지고 청교도 전통을 가장 휼륭하게 진술하였다. 칼빈이 생각하고 칼빈이 가졌던 것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그것을 수용할 만큼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에드워드의 작품에는 John Fravel, Thomas Manton, John Ownen, Theolo-philus Gale, Samuel Rutherford 같은 '청교도들의 작품들에서 인용한 것들이 풍부하게 나타난다. 그만큼 그는 청교도 전통에 충실했으며, 칼빈의 전통에 확고하게 서 있었다. 개혁주의 신학자 반 마스트리히트(Van Mastricht)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저서들은 '내 견해로는 성경을 제외하고는 세상의 어떤 책보다도 더 휼륭하다'고 말하였다.
1724년 예일 대학 강사에 임명되었고, 1729년에 할아버지 Solomon Stoddard의 뒤를 이어 노댐턴 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후 에드워드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1735~1737, 1740~1744)의 주역으로 쓰임받았고, 미국에 역사적 칼빈주의를 수호하면서도 노댐턴과 뉴잉글런드 지역에 영적각성운동을 저변확대시켜 영적각성운동을 미국 교회사 속에 소중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의 메시지는 너무도 선명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훼손하는 죄의 개인적 각성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깊이 일깨워 1735년부터 노댐턴의 교회와 뉴잉글런드 지방의 교회들에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인간이 의존함으로 영광받으시는 하나님'과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과 같은 설교를 통해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그분을 의지하라고 촉구했다.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뿌리깊고 얼마나 무서운가를 성결을 통해 분명히 제시하고 죄의 문제를 청산하도록 촉구하였다.
이와같은 메시지를 통해 온 청중들은 각성하기 시작했고,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이 그가 시무하는 교회를 통해 발원하기 시작했다. 그는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1737), <하나님의 영의 역사의 특징들>(1741), <부흥운동 론>(1742), 그리고 <종교적 심성>(1746)을 이어 발표해 부흥운동을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는 고함치며 설교하지 않았고 충실한 성경주석을 기초로하여 특유의 청교도적 적용이 있는 교리적 해설을 제시하였다. 사람들에 의하면 그는 꾸밈없고 단조롭게 설교하였다.
그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에서 '내가 이제 주장하려는 하나님 말씀의 관찰결과는 이러하다. 어느 순간에도 전적인 하나님의 의지 외에 악한 인간들을 지옥에서 건져 낼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의자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는, 어떤 종류의 어려움에도 방해받지 않는, 그의 절대주권적 의지, 그의 임의적인 의지, 어떤 측적 의지, 그의 임의적인 의지, 어떤 측면에서 매우 짧은 순간에 사악한 자의 보존에 개입하시는 의지를 의미한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고 있었는가를 말해준다. 부흥운동이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이며, 그것은 그분의 절대적인 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흥운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사모하고 갈망해아 할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흥의 역사가 말씀을 통해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며 그 분의 뜻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 가운데 임하셨기 때문이다.

피니의 부흥 이해

부흥은 성령의 부어주심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와 같은 부흥운동의 견해가 1730년경부터 찰스 피니가 등장하던 1830년경까지 미국 기독교를 지배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견해는 찰스 피니가 등장하면서 일대 수정을 받게 되었다. 그는 부흥운동이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노력에 의해 그것이 발흥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피니는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교회는 부흥을 하나의 기적, 혹은 신적 능력의 개입으로 생각해왔다. 목사들이 일정한 수단을 사용하여 얼마든지 부흥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불과 몇년 전부터이다. ...하나님께서는 부흥을 기적으로 이해하던 이론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신 것이다.'
오늘날의 부흥에 대한 견해는 에드워드의 개념에 근거하기보다는 피니의 견해에 더 기초하고 있다. 부흥에 대한 에드워드와 피니의 견해는 180도 차이가 있다. William McLoughlin의 말을 빌린다면 '조나단 에드워즈와 피니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중세와 현대 사상의 차이이다. 에드워즈는 부흥을 '기도해야 할 것'으로 보았고 피니는 부흥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에드워드는 부흥이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으나 피니는 부흥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피니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왜 부흥을 체험하지 못하는 줄 아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 즉 당신이 부흥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것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고 갈망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위해 별 노력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교회가 해야 할 모든 의무를 다 수행한다면 천년 왕국은 3년 안에 이 나라에 임할 수 있다.
만약 교회가 해야 할 모든 의무를 수행한다면 전 인류 복음화는 머지 않은 날에 완성될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내가 알고 있는 몇몇 목사님들이 계속해 왔던 노력들을 온 교회가 한몸이 되어 함께 하였더라면 지금쯤 이 땅에는 회개하지 않은 완고한 죄인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확신에 기초한 피니는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바치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앞으로 나와서 앞자리에 앉기를 호소했고, 은혜를 받기 위해 즉시 결단할 것을 촉구했다. 그의 주장은 다음 몇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은 복음을 듣는 자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자신의 결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둘째 이를 위해서는 어떤 행동인가를 해야 한다. 셋째 만일 이것을 반대하면 복음주의적 설교를 파괴하는 것이다.
피니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부흥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고, 교회가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역사가들은 피니의 낙관적인 부흥운동의 견해가 원죄를 부인하는 펠라기안적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그의 작품을 검토하면 신학적인 토대가 없어 칼빈주의 교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반대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인간의 원죄와 인간의 전적 부패를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피니가 자주 프린스톤 신학교 출신자들이 부흥운동을 망치고 있다고 혹평했던 것도 그런 이유이다.

맺은 말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책임, 인간 자신의 역할, 결단 여부가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견해는 기독교를 인본주의의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거부하고 인간의 결단 여부를 강조하는 결과 찰스 피니는 데이빗 웰스의 말을 빌린다면 자유주의로 이어져 가는 브릿지 역할을 하고 말았다.
찰스 핫지가 지적한 것처럼 '죄인들이 스스로 거듭날 수 있으며, 자신들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회개하고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이 교리처럼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교리는 없을 것이다'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는 에드워드의 견해는 부흥관이 인간의 책임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권적인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자는 말씀과 기도와 실천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는 사실은 동시에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해야 하고 말씀대로 살며 이 나라와 이 민족 가운데 놀라운 부흥운동의 역사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며 은혜이기 때문에 더욱 그 하나님께서 나와 교회와 이 민족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겸손하게 간구하고 열망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한번 시들어 가는 영적 부흥을 안타까워하며 외쳤던 로이드 존스의 다음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부흥이 갈수록 자주 일어나지 않는 것은 칼빈주의의 쇠퇴 때문이다. 칼빈주의가 더 강력해진다면 우리는 영적 부흥과 대각성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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