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을 접으며
최영미
엉망인 세상을 내 손으로 정리할 순 없지만
수건은 내 맘대로 접을 수 있지
수납장과 서랍의 질서를 나는 사랑하지
일요일 오후에 빨래 걷기를 잊지 않으면
인생이 순항할 듯,
일주일을 견딜 속옷을 접는다
내 손을 거치면 어떤 모양의 옷이든
작은 사각형이 되지요
세상과 맞설
투쟁의지를 불태우며 수건을 접는다
매일 아침 깨끗한 속옷을 입을 수 있다면
누구든 상대해주마
빨래 접기가 귀찮아지면
미련없이 떠나야겠지
내게 더러움만 보연준 땅.
흐린 하늘, 최루탄과 미세먼지에 유린당한 눈.
너무 맑은 날에는 눈물이 났지
한 번뿐이던 화창한 봄날,
그에게 배운 대로 세로로 수건을 말아
수납장에 세워둔다 포개진 기억들.
벌써 이십 년 전인데
너는 내게 영원히 젊은 남자
(엄마에게 그를 보여주진 않았지)
그와 헤어진 뒤, 하얀색만 입었지
내 헐렁한 팬티를 그는 싫어했지
할머니 같다고 놀렸지
나는 흰색
엄마는 누런색
건조대에서 흰색을 골라내느라
누런 수건을, 어머니를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미안해 엄마,
엄마는 이제 수건을 접지 않는다
혼자 머리를 감지도 못한다
내가 당신을 씻겨줄 토요일만 기다리는 엄마
토요일이 너무 빨리 다가온다고 투덜대는 나
어머니의 누렇게 바랜 내의를
비닐봉지에 널기 전에 냄새를맡는다
아무도 해치지 않고
사나운 고기를 싸는 상추 잎처럼
순하게 살아온 당신
날이 갈수록 작아지는 엄마
드럼세탁기도 없애지 못한 죽음의 냄새
엄마 수건과 내 수건이 섞이는 게 싫어,
위생관념이 철저했던 어미가 물려준 결벽증 때문에
어미의 세균을 1회용 비닐에 밀봉하고
돌아서, 터지는 소리
시리아를 공습한 미사일의 섬광처럼
어둠을 찢으며
가슴이 갈라지며
오래 벼르던 언어가 폭발한다
엉망진창인 세상을 정리할 순 없지만
쉼표와 마침표의 질서를 나는 사랑하지
- 최영미 시집 『다시 오지 않을 것들 』중에서
첫댓글 저도 엉망인 지금의 세상을 정리할 수 없어서 가끔 수건을 접으며 많은 생각을 합니다.아내와 내가 접는 수건의 방식이 달라 몇번 다투기도 했지만,지금은 아내가 원하는대로 수건을 접습니다. 싸우기 싫어서~^^
쉼표와 마침표의 질서는 어떤 것일까.말할 수 없을때는 쉼표처럼 뜸을 들이고 곤란하면 입을 꽉 다물고.우리들의 남편 모습이 아닐까.서랍장에 차곡차곡 정리된 수건이나, 입을 다문 남편들이나.
작은 사각의 마침표를 위해 엉망진창인 세상인 청리되지 않은 수건을 때론 쉼표인 자세로 개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절실해 보이네요.^^
접은 수건은 펴야 쓸 수 있고다 쓴 수건은 다시 빨아 접어야 하듯사는건쉼표와 마침표 사이의 끊임없는 질서를 유지하는 과정 같습니다
첫댓글 저도 엉망인 지금의 세상을 정리할 수 없어서 가끔 수건을 접으며 많은 생각을 합니다.
아내와 내가 접는 수건의 방식이 달라 몇번 다투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내가 원하는대로 수건을 접습니다. 싸우기 싫어서~^^
쉼표와 마침표의 질서는 어떤 것일까.
말할 수 없을때는 쉼표처럼 뜸을 들이고 곤란하면 입을 꽉 다물고.
우리들의 남편 모습이 아닐까.
서랍장에 차곡차곡 정리된 수건이나, 입을 다문 남편들이나.
작은 사각의 마침표를 위해 엉망진창인 세상인 청리되지 않은 수건을 때론 쉼표인 자세로 개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절실해 보이네요.^^
접은 수건은 펴야 쓸 수 있고
다 쓴 수건은 다시 빨아 접어야 하듯
사는건
쉼표와 마침표 사이의 끊임없는 질서를 유지하는 과정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