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학 바오로 신부
연중 제7주간 목요일
마르코 9,41-50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이오. 다 당신이 어리석어서 빚어진 일 아니오?”
한 TV프로에서 서로의 논쟁에 대한 법적 판결을 다루는 과정에서 주로 표현되는 말입니다.
그 중에 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점원이 계산을 잘못해서 수십만원의 옷을 몇 만원으로
카드결제를 받았습니다. 손님은 그 잘못된 금액을 보고서도 모른 채하고 유유히 그 매장을
떠났습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점원과 손님과의 싸움은
법정 문제로 까지 확대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내용을 보면서 과연 어떤 판결이 나올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왜 그렇게 까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내내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 부터는 분명 자신의 실수나 부끄러운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그들을 화나게 하고 고집스럽게 만들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이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당신께서 그들의 삶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반면 내 제자들에게 죄를 짓게 하거나 자신들 스스로 죄를 짓는다면
‘꺼지지 않는 불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법률적 문제가 아니라 미움, 시기, 질투, 증오에 따른
도덕적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령 꿈이라 하더라도 누군가를 미워했거나, 잘못을 저질렀다면
다음날 직접 그에게 가서 정중히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법적인 문제만 피할 수 있다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떳떳하다는 식의 태도를 보일 때,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 채
‘미움’과 ‘복수’만이 남는 삭막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들고 마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죄를 짓거든 눈을 빼어버리고, 손목을 자르고 라는
끔찍한 모습을 연상하는 표현을 썼지만, 자신의 잘못된 양심을 덮어둔 채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가지고 옳으냐, 그르냐 하고 따지는 세상이더 끔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누군가가 판결에 따라 그 결과에 승복하라고 한다면
과연 그것이 정의로울 까요? 때로는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울지 모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담아둔 것을 사실대로
표현하고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청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너무나 잘못 없이 완벽하게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때로는 자신을 힘들게 하고,
또 허물을 감추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그 때문에 서로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싸움을 일삼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왜 예수님이 그렇게 강한 어조로 마음의 죄를 중요하게 말씀하셨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부산교구 원정학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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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훈 세례자 요한 신부
연중 제7주간 목요일
야고보서 5,1-6 마르코 9,41-50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소금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않되는 것입니다.
고기를 구워먹을 때도, 장을 담글 때도, 국을 끓일 때도, 생선을 보관할 때도 소금은 쓰입니다.
소금을 뿌려서 맛을 맞추는 것을 간이라고 합니다. 국 같은 곳에는 간이 금방 들지만 젓갈류나
생선 또는 배추 김치 등은 오래 둘수록 간이 깊이 배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국 같은 것에는 “간이 들었다”라고 하고, 오래 두어야하는 것은
“간이 배였다”라고 하는가봅니다.
오래 되어 묵은 맛이 배여 나올수록 맛있습니다. 간장, 된장, 고추장, 홍어, 막걸리 등이 그렇습니다.
오래 되어 묵은 맛이 배여 나올수록 좋은 것 중에서 최고는 좋은 친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래된 친구와 이어주는 우정은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옛날 서양 사람들에게도 소금은 음식에 맛을 들이는 것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변치 않는 우정, 성실, 맹세의 상징으로도 나옵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는 다윗과 소금으로 계약을 맺으시고”
(역하 13, 5)라고 합니다. 그리고 불에 태워 바치는 “번제물 위에 소금을 뿌려 야훼께 바쳐야한다”
(에제 43,24)고 하니, 하느님도 싱거운 음식은 별로 입에 맞지 않으셨나봅니다.
하여튼 제물 위에 뿌리는 소금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는 계약의 의미를 가지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변함없는 우정과 성실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제물 위에 소금을 뿌려 계약을 맺은 역사가 수천년이 되니,
간이 배여도 아주 깊이 배여 있고, 묵은 맛도 그 많큼이나 좋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을 한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 대한 깊은 우정을 표현하십니다. 친구에게 좋은 것은 나에게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라고 하시면서 친구 사이를 갈라놓는 이들에게 제자들에 대한 깊은 우정을 과시하십니다.
친구에게 나쁜 것은 나에게도 나쁜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이렇게 오래된 좋은 친구 사이에 배여 나는 깊은 우정을 나타내는 소금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금이 짠맛을 잃으며, 다시 말하면 그 우정이 한쪽의 탓으로 깨어지면
어떻게 그 묵은 맛을 다시 낼 수 있겠습니까?
오래 묵은 것일수록 상하게 되면 그 맛은 아주 않좋은 것입니다.
우정을 깨어버린 쪽도 우정이 깨어진 쪽도 서로 간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고 당부하시는 것이겠지요.
소금에 대해서 집회서에서는 이렇게도 이야기 합니다.
“사람이 사는 데 제일 필요한 것은 물과 불과 쇠와 소금이며, 밀가루와 우유와 꿀, 그리고,
포도즙과 기름과 의복이다. 이 모든 것이 착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이 되고
악인들에게는 악한 물건이 된다.”(집회 39,26)
아무리 좋은 것도 좋은 사람이 사용하면 좋은 것이지만, 악인이 사용하면
악한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좋은 사람들 간의 우정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지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간에 이야기하는 의리라는 것은 보복을 연상케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들은 다른 이들과 나누어 쓸 때는 축복이 될 것이지만,
다른 이들의 아우성을 외면할 때는 녹이 슬어, 우리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젓가락으로 맛을 한번 보시고는 젓가락을 놓고
한마디 하겠지요? “사랑이 식은 게지”
예수님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우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깊은 우정의 묵은 맛을 지켜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 맛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마지막날에 예수님께서 젓가락으로 맛을 한 번 보시고는
숟가락까지 드시면서 한마디 하시겠지요?
“그래! 이 맛이야!”
대구대교구 이병훈 세례자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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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조 대건 안드레아 신부
연중 제7주간 목요일
마르코 9,41-50
어, 너냐?
한 중년 여인이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 갔다.
수술대 위에서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여인은 신을 만났다.
이제 끝이냐고 물었더니 신은 아니라고 하면서 앞으로 30∼40년은 더 살 것이라고 말했다.
수술이 성공하고 차차 낫게 되자 이왕 병원에 온 김에 얼굴을 고치고 몸도 다듬었다.
얼굴 주름살을 팽팽하게 하고 지방도 제거하고 가슴도 키우고 아랫배도 집어넣었다.
머리도 염색했다. 앞으로 30∼40년은 더 살 것이니 이왕이면 젊고 예쁘게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마지막 수술이 끝나고 병원에서 나오다가 달려오는 앰뷸런스에 치여
사망했다. 신 앞에 서게 되자 이렇게 물었다.
“제가 30∼40년은 더 살 거라고 했잖아요?” 신이 대답했다.
“어, 너냐? 미안하다! 너무 많이 뜯어고쳐서 못 알아봤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버려라”
끔찍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한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이다.
손을 잘라내고 안 잘라내고는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죄를 짓고 안 짓는 것도 누가 그렇게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오늘이 즐겁고 안 즐거운 것은 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를 탓하기 전에 내 스스로 내 운명을 개척하고
나의 삶, 나의 하루를 보다 더 가치가있고 행복하게 만들려는 의지가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런 의지가 있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오늘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그나저나 소개된 유머에 나오는 여인의 운명을 바꾼 쪽은 누굴까요?
신일까요? 그 여인 당사자일까요?
대구대교구 김상조 대건안드레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