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오소백(吳蘇白)外
오소백선생
김광한
인생을 오래 살건 적게 살건 지난날들을 회고해보면 가끔 생각이 나는 감동적인 인물이 몇분이 있게 마련이다.지금은 모두가 세상에서 물러난 분들이다.나는 잡지사에서 오래 동안 근무를 했다. 그래서 기사가 될만한 인물들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만났다.그 인물들은 대부분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면서 그 직업이 갖는 사회성과 공익성, 그리고 정의감을 실현하려 애쓴 지사(志士)형 인물들이었다.언론인 오소백선생,70년대 중반 그분의 사무실이 있던 충무로 대한극장 옆에서 그분과 장시간 대화를 나눈적이 있다.주로 그분이 신문사에 있을때 경험한 이야기를 그분은 했고 나는 들었다.
그분이 한 이야기 가운데 지금도 인상이 깊었던 것은 어느 직책에 있더라도 사람은 정의감을 감추지 말고 불의와 야합해서 물질적이거나 권력적인 이득을 취하는 자는 인생을 잘못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부문에서 지사적(志士的)인 생각을 해야한다고 했다.지금은 모두가 세상에서 물러난 분들이다.
그분이 서을 신문 사회부장으로 있을때 문둥이 시인’ 한하운(韓何雲·1920 ~1975)이 ‘문화계의 간첩’ 논란에 휘말린 사건이 있었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아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았던 때다. 국민의 정서와 나라 형편이 피폐한 상황이었다. 발단은 10월17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와 함께 그의 근황을 알리는 기사였다.
기사가 나간 후 ‘문화계에 간첩이 있다’는 주장이 떠돌고 국회에서 대책 촉구 발언이 나올 정도로 의혹이 확산되자 시인은 경찰 조사를 받았고, ‘서울신문’ 사회부장 오소백(吳蘇白)과 차장 문제안(文濟安)이 신문사를 떠나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필화(筆禍) 차원을 넘어 1950년대 문단과 언론계를 짓누르고 있던 적색 알레르기 분위기를 가늠하게 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한하운 필화사건의 뇌관에 불을 붙였으며 결국 피해자가 된 오소백은 신문사를 떠나 1954년 2월부터 대중잡지 ‘신태양’에 ‘올챙이 기자 방랑기’를 연재하고, 이듬해 7월에는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도 출간해 일반에도 널리 알려진 언론인이다.한하운 시인이 쓴 보리 피리 가운데 <인환 人環의 거리><機山下기산하>같은 용어가 처음 들어본 단어이고 이것은 필시 간첩들이 쓰는 용어가 아니냐고 해서 붙은 필화 사건이었다. 그러나 한하운이 중국 모대학 농대를 졸업해서 중국어에 능통한 것을 몰랐던 자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오소백 선생은 한하운을 감싸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언론인으로서의 의인(義人)이었다.
법관 김홍섭(金洪燮) 역시 법관이었지만 가장 인간적인 우리의 이웃이었다. 그는 천주교에 입도해서 바오로란 세례명을 받앗고 혹시나 자신이 판결한 죄수가운데 질못된 것이 없나 항상 자신에게 묻던 사람이었다. 사형수의 대부(代父)가 되어주고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때 그는 사형수 묘지가 있는 퇴계원에 묻혔다.
검사 오제도(吳制道),그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국가를 수호하는데 한치의 오차도 남기지 않은 대한민국의 파수꾼이었다.그가 있으므로서 간첩은 항상 조바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대한제국 말에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한탄해서 아편을 먹고 자결한 매천(梅泉) 황현 역시 그른 것을 보지 못하던 선비의 올곧은 마음이 퍼렇게 살아있기에 오늘까지 그의 이름이 오르 내린다.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 목로주점 비탄의 테레즈,정부 나나 등 시회성 짙은 소설을 써서 약자의 권익을 보호했던 그가 유명한 것은 당시 드레퓨스란 유태인 포병 대위의 간첩 사건을 목숨을 걸고 파헤쳐 드레퓨스를 무죄로 석방시킨 일이었다.
글을 업으로 하는 작가나 법을 업으로 하는 법관이나 언론인 등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퇴치하고 불의에 굽히지 않는 지사 정신이 있어야한다 그래야만 나라가 올바른 길을 간다.올바른 국가관과 미래를 위한 청사진(靑寫眞) 그러나 지금은 지사나 협객이 없다 온통 양아치 파렴치한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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