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된 진공(眞空)
점(點)
무한(無限)은 어디 있는가? 1, 2, 3, 4, 5, 6, 7, 8, 9……… 각각의 수(數) 사이에도 무한은 가득하다. 무한이 전제되지 않는 수의 확산은 수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즉 무한과 유한은 상보적으로 존재한다. 영원과 찰나의 문제 또한 나는 상의(相)의 관점에서 사유한다. 무한은 유한의 끝 어딘가에 존재하는 섬도 제국도 행성도 아니다. 육체와 정신이 서로를 조건으로 생겨나고 소멸하듯 유한의 세계 속에서 나는 무한을 경험한다. 죽음은 유한의 삶 속으로 무한히 침투하는 잠입자고, 시간은 매일매일 윤회(輪廻)를 반복하여 태어나는 기이한 무한이다. 어제가 죽고 어제의 업(業)이 쌓여 오늘이 되고 오늘의 업은 내일을 결정한다. 물론 나는 결정론자도 운명론자도 아니다. 시간은 자신을 죽여 자신을 부활시키는 무한의 물질이자 에너지다. 그렇다면 일상 속에서 무한은 어디있는가
1일, 2일, 3일, 4일, 5일, 6일, 7일, 8일, 9일..
각각의 날(1) 속에 무한은 이미 들어와 있다. 하루하루가 찰나고 영원이다. 새벽과 저녁은 현실에 실재하는 불가사의한 시간의 몸이다. 서녘하늘에 채색되는 붉은노을은 피부색이 상반된 주야(夜)가 신혼부부가 되어 하나의 육체를 이루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 전율의 합일 순간을 나는 시적 이미지로 포착할 때가 있다. 나에게 시는 물질이면서 반물질이다. 나는 나라는 물질의 전생과 내세 사이에 놓인 하나의 점 좌표다. 점은 수학적으로 둥근 모양이지만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존재다. 크기가 없고 위치만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불안정한 점과 점 사이에 세계가 있고 무한이 있다. 나라는 외딴 점 곁에 당신이라는 외딴 점이 있다. 그 사이에 광대한 무한의 바다가 있다. 그 물결을 타고 일렁이는 작은 조각배, 그것이 나의 시다.
왜? 왜? 왜?
나에게 왜라는 질문은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다. 그것은 <무엇>이라는 대상에 대한 심층적 사유, <어떻게>라는 방법에 대한 비판적 자각을 낳는 모태(母胎)다. 존재와 현상, 죽음과 무에 대한 사유를 촉발하는 기폭제이다. 왜라는 회의를 통해 나는 나를 소멸시킨다. 왜라는 질문을 통해 시는 시를 파괴한다. 왜라는 계산을 통해 수학은 수학을
붕괴시킨다. 수학이라는 생물체의 몸을 구성하는 몇가지 기초 질문들을 떠올려본다. 첫째, 타당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형식적 규칙이란 무엇인가? 둘째, 계산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그 대상은 어디까지인가? 셋째,.인간은 불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어떻게 추론하는가? 그 추론된 결과 값어떤 의미를 합의하는가? 이런 자문(自問)들은 내 몸에 뿌리내린 논리
(Logic), 계산(Computation), 확률(Probability)의 확정된 개념, 그 개념의 형식화에 대한 미시적 접근과 부정의식을 싹트게 한다. 수학은 때로 수학이라는 자신의 육체를 잔인하게 붕괴시켜 자신을 재건설한다. 나는 시를 쓸 때 내 안의 비논리적 논리, 비계산적 계산, 비확률적 확률에 의해 논리, 계산, 확률이 정교해지고 정확도가 높아지는 체험을 하곤 한다. 시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근이 존재하거나 근이 존재하지 않는 어떤 방정식을 푸는 과정과 흡사하다. 그러나 근이 존재하는 방정식에서조차 근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내가 이해한다고 나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것을 내가 확신한다고 나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지진처럼 갑자기 돌출한다. 인간의 몸은 늘 지진 중이다. 삶에는 쉽게 답할 수 없는 무수한 질문들이 돌발적 죽음처럼 나타난다. 왜? 왜? 왜?
대칭(symmetry)
흔히 시인과 수학자는 대립되는 인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내 몸이 이 두 대립자가 동거하는 아름다운 신혼집이라 생각하곤 한다. 나는 대칭을 양립개념이 아니라 공존개념 또는 공생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 장르,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 모두에서 대칭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술에서 추상적 데칼코마니 무늬들은 좌우
대칭을 통해 균형과 조화를 낳고, 자연에서 사람의 신체나 나비의 날개는 대칭구조를 바탕으로 공간이동을 한다. 현대물리학의 두 기둥인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을 지배하는 패러다임도 대칭의 세계이며, 이 대칭구조를 기호로 형식화하는 것이 수학이다. 내가 수학의 방정식에 매료되는 건 아름답고 우아한 대칭의 미감(感) 때문이지만 이 아름다움에 매
혹되어 미궁의 감옥에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현대시는 아름다움과 그로테스크, 존재와 죽음, 생멸(生滅)이 공존하는 고차원 언어방정식이고,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대칭은 지대한 기능을 한다. 갈루아(1811~1832)는 5차방정식이 왜 대수적 공식으로 풀 수 없는지 연구하다가 대칭을 발견한 수학자다. 이후 수학자들은 근호로 풀리는 5차방정식
도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왜 어떤 것은 풀리고 어떤 것은 풀리지 않는지 규명해낸다. 그 과정에서 수학의 새 영토인 군론(群論, Group Theory)이 태어난다. 군론은 현재 우주를 수학적 형식으로 설명하는 현대물리학에서 매우 강력한 개념으로 활용되고 있다. 내 몸은 나만의 거주공간이 아니라 대칭적 타자들의 집합장소이자 밀회공간이다. 그러기에 내가 주목하는 것은 어떤 수학자나 물리학자의 천재성도 아니고 성공한 마지막 결과식도 아니다. 하나의 최종 식(式)을 도출하기 위해 그들이 보냈을 무수한 실패의 시간들, 타자들로부터 무수히 수혈 받았을 이질의 상상력들이다. 실패와 성공은 대립개념이 아니라 동일한 육체에 사는 대칭적 동거자, 아름다운 동반자이다.
논증과 직관
수학은 집합체다. 경계선이 존재하는 집합들의 집합이다. 어떤 동네에 미용실, 빵집, 목욕탕, 감자탕, 호프집, 노래방, 복덕방, 커피숍 등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으로 각각의 고유기법을 갖춘 대수학, 기하학, 해석학, 위상수학, 확률론, 통계학, 삼각함수, 미적분 등이 존재하는 추상적 집합체다. 그러나 수학에 명료한 지리적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류의 목적은 자명하다. 수학의 여러 주제들을 독립된 영역으로 나누면 체계가 생기고 그 체계가 질서를 만들고 교육의 효율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은 머리, 가슴, 팔다리, 등, 배 등의 집합체이지만 각각의 기관들을 따로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오묘한 코스모스다. 수학 또한 그렇다. 따라서 각 기관(영역)의 고유 역할과 연관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 수학은 물질적 국경선이 뚜렷한 세계지도와는 다른 추상적 개념지도이자 우주적 존재지도다. 바다와 산맥 같은 지형이 아니라 논리에 의해 묶이며,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가능과 불가능의 사이에서 무와 무한의 세계를 넘나든다. 이때 단계적 논리와 함께 비약적 직관이 요구된다. 수학의 창조 또한 시처럼 논리를 넘어선 기습적 상상력에 의존할때가 있다. 라마누잔의 증명 없는 식들이 대표적인데 그의 공식들은 직관의 아름다움을 머금은 추상의 꽃이다. 논증이 치열한 전투(戰鬪)라면 직관은 평온한 사투(死)다. 나는 이 두 전장을 오가는 새고 포연이고 바람이고 먼지다.
소수(素數, Prime number)의 세계
소수는 1보다 큰 자연수 중에서 1과 자기 자신만으로 나누어떨어지는 수다. 2, 3, 5, 7, 11, 13, 17, 19, 23, 29, 31, 37, 41 ・・・・・・처럼 1과 자기 자신만을 약수로 갖는 자연수다. 자연수 6은 2×3 또는 16과 같이 곱셈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데 이때 1, 2, 3, 66의 인수라고 한다. 특히 인수가 소수일 때 그 인수를 소인수(prime divisor)라고 하고, 어떤 자연수를 소인수들만의 곱으로 나타내는 것을 소인수분해라고 한다. 수체계에서 소수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소수의 발생 규칙 찾기와 분포도 분석은 계속되어 왔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 에라토스테네스가 자신이 고안한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를 이용하여 소수 찾는 방법을 연구한 이래 소수 찾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럼 가장 큰 소수는 무엇일까? 가장 큰 소수는 과연 존재하는 걸까? 자연수의 개수가 무한이기 때문에 소수의 개수 또한 무한이고, 따라서 가장 큰 소수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추측이지 증명이 아니다.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가장 큰 소수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소수를 P라고 하자. 그리고 모든 소수들의 곱으로 이루어진 엄청 큰 수 N을 상상하자. N=2×3×5×7×11×13×N은 P보다 훨씬 큰 수임이 분명하다. N은 2로 나누어떨어진다. 3으로도 나누어떨어지고, 5로도 나누어떨어지고, P로도 나누어떨어진다. 즉 N은 어떤 소수로도 나누어떨어진다. 그렇다면 N+1은 어떨까? 2로 나누면 1이 남는다. 3으로 나누어도 1이 남고, P로 나누어도 1이 남는다. 즉 어떤 소수로 나누어도 1이 남는다. 그렇다면 N+1을 나누어떨어지게 하는 수는 1과 자기 자신뿐이다. 따라서 N+1은 소수다. 그런데 P가 가장 큰 소수라고 했으니까 모순된다. N이 가장 큰 소수라는 가정이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가장 큰 소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소수의 세계는 무한의 세계다. 끝없이 탐험이 계속될 미지의 우주고 미지의 시(詩)다. 증명은 논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형식체계이지만 그 형식에 미(美)와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창조적 정신, 예술적 상상력이다.
초월수
하나의 원(Circle)이 주어질 때 그 원과 똑같은 면적을 갖는 정사각형을 작도할 수 있을까? 이원적 문제의 해법은 기하학이 아닌 대수학에 있다.
원의 넓이를 계산할 때 사용되는 것이 원주 다. 수론에서 p와 p가 범자연수일 때 분수p/q로 표현되면 유리수, 표현되지 않으면 무리수라고한다. 원주율 는 무리수인데 정수 계수를 갖는 어떤 다항방정식의 해도 아니다. 즉 ㅠ는 대수식을 초월하는 초월수로 그 끝이 확정되지 않는 이 사실은 주어진 원과 같은 면적을 가진 정사각형을 작도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기하학적 작도의 문제가 대수학의 정수론으로 해결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어떤 세계 내의 중대한 문제 해결법이 그 세계밖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우리 현대시의 한계 극복법과 문제 해결법을 연계시키기 때문이다. 시의 문제 해결을 시밖의 세계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더욱 가속화되어야 한다. 나는 초월수의 세계를 지향한다. 나는 초월의 세계를 지양하고 초월의 정신을 지향한다. 내 언어는 끝이 없는 무한의 세계로 가는 유한의 기호들이고 모두 나의 육체다.
수평선
수평선은 목적이 없다. 나는 목적이 전제된 자유를 사랑하지 않는다.
자유는 사랑에 빠진 자가 그렇듯 무목적이다. 자유는 수평선을 원하는 새고 수평선을 횡단하는 바람이다. 사랑은 상대를 향한 집착과 공격성을 드러내면서도 근원적으로 헌신이고 이타적이다. 시에서 자유에 대한 내 사랑의 실천의지는 낱말들의 행동, 사물들의 춤, 진동하는 침묵, 우주를 날아가는 새 등으로 나타난다. 내게는 가식적 사랑이 은닉하는 인공의
자유를 살해할 시적 권리가 있다. 현실은 가면의 영혼들, 불구의 말들이 인공의 사건을 만들고 다시 사건을 복잡다단하게 왜곡해 재구성한다. 내가 낱말들과 연인 또는 연적이 되어 세계라는 가면무도회에서 살(殺)의 검무(劍舞)를 추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나는 삶 속에서 피의자 추적자의 쫓고 쫓기는 서스펜스, 긴장된 불면과 악몽을 경험한다. 나는
나로부터 쫓기고 타인으로부터 쫓기고 돈으로부터도 쫓기고 내 문장들로부터도 쫓긴다. 현대인은 누구나 수십 개의 가면을 써야 하는 역할극의 부속물들이다. 우린 모두 가면 쓴 엑스트라들이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부정이 부정되지 않는 현실이 우리가 직면한 자명한 현실이다. 나는 나의 시조차 그런 세태를 띠고 펼쳐지는 또 하나의 현실적 지옥임을 냉혹하게 직시하려 한다. 내가 나의 시에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이미지들의 자유를 승인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나는 가면의 현실 속에서 가면의 말로 가면의 사랑을 나누는 가증스런 나를 목격하고 방관한다. 그런 나를 끌고 말은 자신의 염라국으로 밀입국한다. 상상의 파도를 타고 말은 본능적 충동에 따라 나를 염라국으로 데려간다. 특정 목적지를 상정하지 않는 파도의 율동, 물결들의 애무, 어두운 격랑 속도가 나를 위무한다. 시는 무목적인 연인이고 상처 난 촛대다. 어두운 난파선이고 파도 잃은 밤바다고 벼랑의 묘지다. 바다는 파도를 목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시험하지 않는다. 무목적이 낳은 밀물과 썰물의 흰 눈썹들이 허공에 휘날리고 있다. 내 그림자가 방파제 끝에 나를 내려놓고 유령처럼 홀로 해안선을 걷고 있다.
빅뱅
시의 근간은 무(無고, 모든 시의 궁극은 무의미다. 어떤 시에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휘발되어 있든 시의 미학은 침묵의 구현이다. 침묵을 통한 무한세계로의 전면적 개안(開眼)이다. 무의미화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의미의 의미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의미의 소멸에 따른.무의미 생성과정에 대한 첨예한 고찰이다. 예술성이 뛰어난 시는 단순하
지 않고 획일화되지 않고 인간의 사유와 상상의 카테고리 안에 종속되지 않는다. 언제나 새로운 대륙, 새로운 우주, 새로운 시간을 낳으며 신(新) 공간으로 탈주한다. 좋은 시의 낱말과 문장들은 인식의 울타리를 단숨에 뛰어넘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들이다. 시인의 사고가 의미를 일정한 범주에 가두려 해도 그 구속의 압박을 단숨에 배반하고 다른 영토로 달아난다. 결국 의미의 무한적 확산은 무의미에 다다른다. 내게 무의미는 시의 의미 확산의 최후 지점에서 발생하는 폭발, 시차(時差)와 위상(位相)이 전도된 빅뱅이다. 그 무의 환원상태에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고 새로운 아이들이 태어난다. 내게 의미의 삭제놀이는 처음부터 시의 의미를 포기하고 들어가는 자학적 말놀이가 아니라 세계의 상처와 결핍
을 끌어안고 세계의 심장부로 들어가 의미의 허위(虛僞)를 지우고 무한으로 나아가는 자유의 실천이다. 그러기에 시는 어떤 의미 어떤 목적 어떤 사상 이전에 존재하는 물음이고 부재하는 대답이고 무위(無爲)의 춤이다. 시는 끊임없이 팽창수축을 반복하는 대기고 변화무쌍한 우주고 공중을 흐르는 물이다. 시간이 응고된 육체고 침묵하는 묘비고 자궁 속의 메아리다.
발명과 발견
형식주의자와 직관주의자는 수학을 창조로 본다. 수학의 과정을 창조의 과정, 즉 수학자에 의해 전개되는 발명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플라톤주의자의 입장은 다르다. 그들은 수학적 대상을 일종의 이데아로 생각한다. 수학의 실재는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존재하던 것을 찾아내는 것, 즉 어떤 새로운 수학이론이 등장하면 그것은 발견이
지 발명이 아닌 것이다. 왜 그런 걸까? 밑변의 길이가 10이고 높이가 10인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를 푼다고 가정해보자. 이 문제에는 푸는 자가 누구든 상관없이 답이 존재한다. 그 답은 전형적 표준이고 그 표준은 오직 유일하다. 이 유일한 표준을 찾아내는 것이 문제 해결의 전부다. 즉 이들에게는 숨겨진 유일한 보물을 찾아내는(발견하는) 것이 수목
이다. 닭이 여럿인 문제는 여러 개의 표준을 답이 없는 문제는 없음을 발견하는 것이 수학이다. 이 발견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새로운 발상,새로운 수학 이론들이 발명된다. 이때의 발명은 발견을 전제로 한 발견의 부속물로 귀속된다. 난제의 발견되지 못한 답을 발견하기 위한 발명의 과정에서 수학은 발전한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수학 이론들이 등장하여 수학적 발견을 가속화한다. 가우스, 리만, 오일러, 푸리에, 힐베르트 등 위대한 수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새로운 수학이론을 발명해냈다. 수학에 대한 발견의 세계관이 갖는 맹점이 새로운 수학을 낳는 모태가 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수학에서 발견과 발명의 역설 관계는 시의 세계에도 적용 가능하다. 발명의 언어 이면에 발견의 언어가 숨어 있
고, 발견의 언어의 한계점과 부작용에 대한 철저하고도 첨예한 인식이 바탕이 될 때 진정한 발명의 언어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우리 시단은 이점에 대한 뼈아픈 각성이 부족하다. 발견의 언어가 안정적인 전통의 세계를 투명한 언어로 표출한다면, 발명의 언어는 불안정적인 비전통의 세계를 불투명한 언어로 표출한다. 그러나 이 불투명의 세계가 과연 투명의 세계의 한계에 대한 뼈아픈 자리에서 나온 것인지 의문스럽다. 무늬만 발명(明)의 언어인 발병(病)의 언어, 발암(癌)의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
노동의 양식
나는 낮 동안 일을 한다. 몸으로 땀을 흘리면서 내가 쏟은 땀의 흔적들을 바라보면 흐뭇하고 밥맛이 좋아진다. 나는 밤에도 일을 한다. 영혼의 땀을 흘리면서 상상하고 기억하고 내 삶을 되돌아보며 시도 쓰고 동화되쓰고 수학책도 쓴다. 최근엔 초등생들을 대상으로 개념 중심의 수학책을 집필하고 있다. 나는 수학책을 쓰거나 수학문제를 풀다가 혼자만의 엉뚱한 공상에 빠져들곤 한다. 예를 들어, 영을 영으로 나누는 일, 무한을 무한으로 나누는 일, 무한에서 무한을 빼는 일, 영에 무한을 곱하는 일, 영과 무한을 신혼부부처럼 하나의 몸으로 합체해보기도 한다. 시간, 우주,사물, 언어, 세계를 토대로 수학의 일곱 가지 부정형을 상상한다. 세계는 인간이 기이한 부호로 들어 있는 불완전한 수식이다. 세계를 불신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라는 기호를 부정하는 것이다. 나 또한 생명의 존재물이면서 추상의 기호물이다. 기호는 현실, 시간, 존재, 망각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계된다. 수학의 모든 정리들은 추상의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결국은 망각의 영토로 소멸해간다. 그러기에 나는 수학을 추상학문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수학은 인간의 몸에서 발생하는 숨이나 피처럼 일종
의 존재양식이다. 기호들의 기술이 추상으로 비칠 뿐이다. 수학을 이성과 논리의 산물로만 보는 자들은 가련하고 위험하다. 삶도 사랑도 이분법의 세계관으로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수학은 때대로 논리를 초월하는 비논리적 상상력에 의존한다. 비이성적 상상, 공상, 망상은 수학자의 육체 속에서 기생하며 이성을 빨아먹는 거머리가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논리의 정교함을 고양시키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고도 충분한 반대조건들이다. 즉 수학자는 과학자의 집과 예술가의 집을 수시로 오가는 고양이다. 달빛 내리는 지붕에 앉아 몽상중인 고양이다. 나는 지금 달빛 스민 내 몸에 일(1)을 무한 번 곱해보고 있다. 영(0)을 무한 번 곱해보고 있다. 영(0) 에 무한을 곱해보고 있다. 어떤 결과를 도출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친 몸, 피로한 하루를 지우며 나를 위로해보는 것이다. 수학은 자유놀이고 치유고 재생일 수 있다.
추상의 시
서구문명사에서 피타고라스 이후 수학의 언어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초월적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에게 수학은 종교적 신념이 내재된 진리 언어에 가까웠는데, 그들은 수학을 인간세계의 모든 지식을 하나로 결합하는 근본 동력으로 보았다. 즉 그들에게 수학의 언어는 세상의 진리를 밝히는 등불이자 나침반이었고 빛의 지도였다. 그러나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와 정반대의 견해, 수학을 인간과 자연의 세계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보았다. 그는 수학과 논리학을 물리학의 하인으로 규정하고 데카르트를 신랄하게 공격한다. 그러나 베이컨의 견해는 수학을 물리학 실험 과정 및 결과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제한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물리적 자연현상이 수학의 언어로 표현된다고 해서, 물리학과 수학을 갑을관계로 보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수학은 물리적으로 의미가 있는 대상만을 다루는 제한적 학문이 아니라,순수추상의 영역까지 아우르는 보편언어(universal language)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순수물리학자였다.
그러나 일반상대성이론을 수학적 모델로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그는 물리적 사고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물리학 개념은 경험될 수 있는 실제 현상과 명백하고 확실한 관계를 가질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
이후 그는 철저하게 수학자가 된다. "순수수학적 방법을 사용해서 개념만이 아니라, 그 개념들을 서로 관련시키고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중략) 창조적 원리는 바로 수학에 있다"고 솔직한 심경을 밝힌다. 아인슈타인의 경우처럼 많은 이론물리학자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활용가능한 모든 자료의 데이터를 분석한 다음에는 철저하게 수학자가 된다. 수학자가 되어 도출해낸 이론의 최종 결과를 최소 공식으로 요약한다. 이처럼 수학은 물리적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든 불변하는 내용을 담아내려는 최소의 언어를 지향한다. 극소를 지향하여 극대의 효과를 노린다는 점에서 시(詩)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즉 수학의 언어는 과학의 언어이면서 예술의 언어고, 극사실의 언어이면서 상상력의 언어다. 수학자는 구심력과 원심력을 동시에 펼치는 고독한 행성이고, 수렴과 발산을 끝없이 반복하는 외로운 진자다. 수학은 인간이 이해하는 방식을 넘어선 독립된 세계에 존재하면서 인간의 세계에 긴밀하게 관여한다. 인간의 시공간 내에 존재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존재와 죽음에 깊게 관여한다. 수학은 꿈의 언어이자 존재의 언어다.
천국과지옥 존재와 무가 내재된 추상의 시다.
논리, 직관, 형식
19세기에 등장한 비유클리트 기하학의 충격은 엄청났다. 수학의 근간을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학자들은 수학의 토대를 기하학에서 수론(論)으로 옮겨 수학의 기초를 재건하려 한다. 수론 중에서도 집합론에 토대를 두려 한다. 당시 칸토어가 발견한 집합론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버금갈 정도로 막강한 수학세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집합론은 칸토어자신의 역설과 러셀의 역설에 타격을 입어 흔들리게 되고, 흔들리는 수학의 기초를 다시 바로잡기 위해 논리주의, 직관주의, 형식주의가 등장한다. 프레게와 러셀로 대표되는 논리주의는 논리학을 통해 수학의 기초를 세우려 하지만 수학 전체가 논리만으로 환원되기에는 너무 방대하다는 점 때문에 실패한다. 논리주의에 반대하며 등장한 것이 브로우베르의 직관주의다. 직관주의는 직관을 수학의 기초로 삼으려 하지만, 수학을 지나치게 축소시킨다는 점 때문에 실패한다. 힐베르트의 형식주의
학을 형식체계로 일반화하려 한다. 내용보다 기호들의 질서와 결합방식에 중점을 두고 탐구한다. 그들에게 수학은 일종의 놀이, 규칙에 의한 게임이다. 수학을 기호들이 만들어내는 형식놀이 또는 게임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점이 형식체계의 무모순성을 밝혀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등장하면서 형식주의는 심대한 타격을 받고 수학의 기초 정립에 실패한다. 이처럼 수학의 기초에 대한 논쟁은 논리, 직관, 형식이라는 세 꼭짓점을 가진 삼각형 모습으로 시각화될수 있으며, 각각의 꼭짓점을 중심으로 작도되는 원의 크기를 통해 영향과 파장을 상상해볼 수 있다. 나는 어느 쪽을 선호하며 편향되어 있지는 않은가?
중심 없는 무한공간
존재하는 것은 각각이 모두 중심이고 과녁이고 무덤이다. 중심은 무수하고 무수히 많다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세계는 없는 중심들을 전체 원소로 하는 기이한 무한집합이다. 세계는 불가능한 시고 이 불가능성에의해 세계는 다시 열린다. 시인은 각각의 독립국가 불가능성을 불꽃처럼 발화하는 양초들이다. 현실은 늘 단절이 만든 굴곡의 마디로 이어진다. 세계는 대나무 칸칸의 마디처럼 시간이 기나긴 직선으로 착시되는 장소이다. 이 불가능성과 착란을 제 살의 내피로 삼으려는 시들이 있다. 가능성과 이성적 질서를 제 몸의 근육으로 삼으려는 시들이 있다. 나는 나의 시가 중심을 희원하는 욕구를 방기(棄)하지 못한다. 나는 나의 시와 삶이 근육만 무성한 육체미 선수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나 자신에게 내리는 준엄한 검열이자 심판이다. 그렇다면 근육 없는 신체의 시는 가능한가? 유한으로 무한의 구현이 가능한가? 무한의 존재는 인간의 이성의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유추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근육의 세계가 아닌 혈액의 세계를 통해 접근해야 한다. 무한은 인간이 인간의 우월적 존재를 포기하면서 발아하는 미지의 시공간 너머다. 인간은 다른 사물들의 존재가치와 동등한 하나의 입장이고 일시적 호몰로지일 뿐 우월하지도 무한하지도 않다. 무한에 대한 시적 접근에서 이해와 해석보다 필요한 선결조건은 존재와 무에 대한 통념 비판, 유한성에 대한 뼈아픈 자기각성이다. 불규칙적으로 반지름이 계속 늘어나는 반고체 의 구체(體) 시, 불규칙적으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가스덩어리 시,공간의 벽을 계속 파괴하면서 중심 없는 새로운 무한공간으로 나아가는
기하학적 시를 상상한다.
진공묘유(眞空妙有)
불교에서 공(空)은 수행자의 이해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깨달음의 궁극이다. 현대물리학에서 이와 흡사한 개념이 진공(眞호, Vacuum)이다.
진공은 흔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가리킨다. 그러나 영국의 물리학자 디랙(Dirac, 1902~1982)은 진공을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그는 양자역학에서 자유 입자가 갖는 에너지 중, 입자의 질량이 음수(陰數)값을 갖는 E=mc2을 주목한다. 마이너스 질량을 갖는 입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관측되지 않을 뿐이며, 나아가 마이너스 입자들이 진공을 빈틈없이 꽉 채우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 또한 시를 미묘한 진공의 우주,소립자들의 군무(群舞)의 세계로 생각할 때가 있다. 입자언어-반입자어가 쌍으로 결합한 채 끝없이 움직이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고 상상한다. 가시적 문장의 세계에 사는 이미지와 의미는 헛것이고, 비가시적 여백의 세계에 사는 반물질이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묘유 아닐까? 묘유는 나무는 없고 나무 그림자만 일렁이는 호수에서 지느러미를 흔들며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다. 시는 문장의 탄생과 죽음, 인간의 자궁과 무덤 사이에 뚫린 치명적 구멍일 수 있다. 현대의 시인은 언어로 진공에 구멍을 뚫어 진공을 붕괴시키는 자이고, 그 파괴된 진공을 복원하여 새로운 우주를 그리는 자이다.
*시는 어떻게 오는가 p2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