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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회(追懷)
相遇初無語(상우초무어)-우연히 서로 만났지만 초기엔 말조차 없었는데
誰知汝此棲(수지여차서)-누가 알았으리 네가 이렇게 내안에 자리 잡을 줄.
楓經携手處(풍경휴수처)-우리 손잡고 단풍 길 걸을 때
憶染到今迷(억염도금미)-그때 추억조차 물들여져 지금까지 아련하구나!
거촌(巨村)
돼지 김치찌개 로망
오늘 동네 마트에서 돼지고기 세일을 하여 삼겹살 목살 등을 좀 사왔다.
점심때 2년 된 묵은 김치가 김치냉장고에 아직 남아있어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만들었다.
역시 묵은 김치로 김치찌개를 해야 돼지비개와 잘 어울려져 부들부들한 맛이 난다.
김치찌개를 먹을 때마다 약 45년 전 염창동 하숙집 생각이 떠오른다.
김포옥이라는 하숙집 이였다.
아저씨 아주머니가 그 당시 60대 연세 이었는데 살아계시면 100세가 넘었을 것 같다.
약 20년 전에 공항로를 지나가다가 생각이 나서 가보니 동네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지금은 염창동 일대가 큰 도시로 변했지만 40,50년 전에는 지금의 성산대고에서 김포공항가는 길가에 인공폭포가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는 길이 포장도 안 된 시골길이었다.
당시 염창동 일대에 경제개발로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동네에 하숙집도 많이 생겼다.
간간히 초가집도 있을 정도로 이름만 서울이지 시골이었다.
염창동과 목동일대가 전부 논이어서 겨울에는 벼를 추수한 무논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시절이었다.
1967년경 염창동 한 달 하숙비가 평균 2700원이었는데 유독 김포옥은 3000원을 받았다.
별로 반찬을 잘해주는 것도 아닌데 이집에 하숙생이 제일 많았다.
그때 필자를 포함해서 7,8명이 같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집에는 아들 하나에 딸이 셋이였는데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는 막내딸과 그냥 집에서 멋이나 부리고 노는 둘째딸이 있었다.
아주머니를 닮아서 얼굴들이 예뻤다.
특히 둘째딸은 눈이 커서 하숙생들이 별명을 “헤드라이트”라고 했는데 키도 크고 아주 매력 있는 처녀였다.
첫째 딸도 결혼하여 혼자가 되어 친정에 살다시피 하면서 하숙일을 거들었는데 역시 미인이였다.
아마 하숙비가 300원이 비싸도 이집에 하숙생이 많은 것은 예쁜 딸들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필자가 난생 처음 시골 천하 촌놈이 서울에 와서 그냥 찾아간 곳이 이 하숙집이었다.
서울사람이 다된 지금도 옹기같이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 당시에는 표준말을 전혀 못 쓰는 원조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하숙집 부부와 수인사(修人事)를 하고 방을 배정받고 짐을 정리하였다.
낮이라 다른 하숙생들은 회사에 출근하여 없고 감미로울 정도로 상냥한 서울말을 쓰는 하숙집 아주머니가 하숙집 이곳저곳을 안내하여 주었다.
수도가 안 들어와 작두펌프로 우물을 퍼 올려 사용하였다
화장실도 재래식이어서 고향집 뒷간과 같아 낯설지가 않았다.
집에 있는 둘째딸이 검게 타고 촌티가 물씬 나는 내 모습을
“이번 신입생은 전라돈가 충청돈가 경상돈가”하는 호기심으로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지방에서 온 “꼴담살이” 지?
꼴담살이는 쇠먹이 풀을 베거나 농사일을 하는 젊은이를 말한다.
1960년대 후반에는 삼남지방의 젊은이들이 마치 미국 청년들이 황금의 꿈을 찾아 서부 텍사스로 몰려가듯 원대한 꿈을 안고 서울로 몰려들 때였다.
손발을 씻으려고 작두펌프 손잡이를 눌렀는데 물이 나오지 않고 손잡이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필자의 고향은 시골이라도 왜정시대부터 수도가 있어서 작두펌프에 익숙하지 못했다.
퍽퍽 헛소리만 내는 펌프에 난처하고 있을 때
“처음 쓸 때는 한바가지 물을 부어야 해요”
마치 옥이 굴러가는돗한 목소리로 둘째딸이 마중을 물을 부어 주었다
“고맙심더”
이것이 하숙집 딸과 처음 공식적인 대화였다.
저녁때가 되어서 하숙집 아주머니가
“총각 식사 때에 다른 하숙생들과 한상에 같이 식사를 하는데 총각은 처음이라 이틀정도는 혼자 상으로 식사를 하세요”
하면서 조그마한 밥상을 방에 차려 주었다.
서울서 처음 받아보는 밥상이었다
밥은 하얀 쌀밥이었는데 몇 가지 반찬을 먹어보니 도저히 싱거워서 입에 맞지가 않았다.
김치도 색깔은 좋은데 먹어보니 감칠맛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경상도 김치는 멸치젖국에 양념을 걸쭉하게 하는데 서울김치는 새우젓을 넣는다.
국도 아욱국으로 기억하는데 싱거워서 입에 맞지가 않았다
경상도의 짜고 매운 음식에 길들여진 내 입맛에 맞을 리 없었다.
그런데 밥그릇 가까이 황토색 김치에 돼지고기가 섞여있는 것이 김을 모락모락 내면서 한 대접 푸짐하게 놓여 있는데 우거지 국도 아니고 된장국도 아니다.
난생 처음 보는 음식이다.
우선 젓가락으로 삶은 배추김치를 입에 넣어 보았다.
순간 시큼한 맛에 얼굴이 찌글어 지는 것 같았다
입이 걸어서 왼만한 음식은 가리지 않고 잘먹는 식성인데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종이를 찾아 뱉어내어 쌌다.
필자가 입사할 회사의 면접일이 이틀 여유가 있어서 하숙집에 그대로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밥상이 들어왔는데 세상에 어제 저녁 밥상보다 돼지고기가 더 많고 더 수북이 김치찌개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도 손도 안대고 그대로 상을 내 보냈다.
점심때가 가까이 오자 아주머니가 조용히 불렀다
“총각 왜 음식이 입에 안 맞아요?”
“아닙니더, 맞 있음니더”
“그런데 왜 김치찌개는 젓가락도 안대고---”
김포옥에서 2년간 하숙을 했다.
후일담이지만 아주머니는 처음온 하숙생이라 아주 신경을 써서 좋은 묵은지 배추김치에 돼지 비개를 많이 넣고 특별히 만들어 주셨다.
처음 밥상에 김치찌개를 안먹고 나오자 “혹시 맛이 없어서인가”
하고 아침밥상은 돼지 비개를 더 넣고 아주 맛있게 상을 차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서부경남(다른 지방도 마찬가지라 생각하는데--) 진주 지방에서는 “김치찌개” 를 해먹지 않았다.
그러니 필자의 입에는 김치찌개가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둘째딸이
“김치찌개 잡수시는 걸보니 서울사람 다 되셨네. 돼지고기값 오르겠네”
하며 농담을 나눌 정도로 김치찌개와 친숙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당시는 어려울때라 돼지고기가, 쉽고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김치찌개”를 만들어 먹기에는 너무 귀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김치찌개 없는 지방이 없이 보편화 되어 있는 음식이다.
마치 반찬이 유별나게 많은 “전라도 반상”이 전국적으로 보편화 된 것 같이----
그 당시는 남진의 “가슴 아프게”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노는 날 필자가 서투른 기타를 치면 하숙생들이 “당신과 나사이에--” “베삼에 무쵸‘를 합창하면 마루 앞을 왔다 갔다 하는 둘째달이 콧소리로 따라 불렀다.
그때는 월급을 일당으로 계산 하던때라 하루 일당이 150원이었다.
둘째딸에게 “영등포에 영화 보러 가자”고 할 정도로 하숙생들과 친숙해졌다.
“코로나로 모시면 가죠 흥 !”
우리나라 최초의 택시인 “새나라택시”가 들어가고 새롭게 “코로나 택시”가 갓 선보일 때였다.
코로나 택시를 한번타면 우쭐해지고 저녁에 술자리에서 코로나 택시 탄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때였다.
200원을 가지고 둘째딸을 코로나 택시에 여왕처럼 모시고 영등포 “영보극장”에서 케리쿠퍼, 잉그리트 버그만등이 출연하는 서부영화를 구경하고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고 코로나로 염창동으로 오면 200원이 모자라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나는 늙어 있지만 둘째딸은 지금도 옛날 그모습대로 있을 것이다.
지금 만나면 그랜즈 개인택시를 태워 줄것인데--
김치찌개 하숙집 밥상 그 시절이 그립다 !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