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서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
농부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야 할 기회가 가끔 있다. 농사를 잘 지어놓고도 제값은 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잘 알기에 농산물 판매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간절함으로 강의를 준비한다. 취미로 텃밭 가꾸는 정도가 아니라면 농사도 사업으로 보아야 한다. 즉 ‘수지타산’이 맞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어려운 점은 농산물의 경우 시장 변화에 따라 가격등락의 폭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또한 농산물 소비 트렌드 변화에 발을 맞추는 것도 필요한데, 작목을 전환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경우가 많다. 이제 오랫동안 안정적인 가격을 보장해줄 수 있는 작목은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고객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예전에는 ‘장터’가 그런 역할을 했었다. 장터는 물건만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의 ‘정’을 나누는 공간이었다.
순천 아랫장 파장 무렵 봄비 내렸습니다.
우산 들고 싼거리 하러 간 아내 따라 갔는데
난장 바닥 한 바퀴 휘돌아
생선 오천 원 조갯살 오천 원
도사리 배추 천 원
장짐 내게 들리고 뒤따라오던 아내
앞서가다 돌아보니 따라오지 않습니다
시장 벗어나 버스 정류장 지나쳐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비닐 조각 뒤집어 쓴 할머니
몇 걸음 지나쳐서 돌아보고 서 있던 아내
손짓해 나를 부릅니다
냉이 감자 한 바구니씩
이천 원에 떨이미 해가시오 아줌씨
할머니 전부 담아주세요
빗방울 맺힌 냉이가 너무 싱그러운데
봄비 값까지 이천 원이면 너무 싸네요
마다하는 할머니 손에 삼천 원 꼭꼭 쥐어주는 아내
횡단보도 건너와 돌아다보았더니
꾸부정한 허리로 할머니
아직도 아내를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꽃 피겠습니다
―〈아내의 봄비〉, 김해화
‘빗방울 맺힌 냉이가 너무 싱그러운데’ ‘이천 원이면 너무 싸’다며 ‘봄비 값까지’ 얹어주는 인정이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진다. 시인의 아내가 ‘할머니 손에 삼천 원 꼭꼭 쥐어주는’ 모습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장터의 정이 그립긴 하지만 농사를 사업으로 접근하려고 하면 이제 장날 돌아오기만 기다려선 수지타산을 맞출 수가 없다. 더구나 지금은 ‘감성 소비’의 시대이다. 단순히 농산물 자체를 판매하기보다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과정의 가치’를 제안할 수 있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요즘은 SNS를 통해서 소통을 많이 하고 판매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농촌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다만 인터넷 공간에서는 사람의 정을 직접 나눌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지리산 자연밥상 고영문 대표는 온라인마케팅 전문가이기도 한데, 가끔 만나 이런 고민들을 나누곤 한다.
그러던 와중에 알게 된 곳이 의신마을 흑백사진관이다. SNS에 가끔 올라오는 주인장 사진과 글을 읽어보곤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개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에 있는 의신마을은 육십여 가구가 모여 사는 아름다운 곳이다. 눈이 조금만 와도 고립되는 고지대에 있다 보니 청정 지역으로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얼마 전부터 공기를 주입해서 파는 공장도 생겼다. 그 마을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고, 노닥노닥 곰다방도 있다. 청년들이 주관하는 문화 행사도 자주 열린다. 그리고 오래 묵은 집이 주는 정겨움과 사진관 아저씨의 낯설지 않은 푸근함을 덤으로 맛볼 수 있는 ‘지리산 꽃꿀 흑백사진관’도 있다.
연휴 기간에 찾아가 사장님에게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고 사진관 차린 연유를 넌지시 물었다.
“양봉을 하는데 꿀을 전시해서 판매할 공간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길가에 오래 비어 있던 집을 수리해서 사진관을 열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사진 일을 했기 때문에 ‘사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고객과 만나면 재미있을 것 같았지요.”
무려 ‘사진관’이라는 공간에서 고객들과 직접 만나는 농부라니, 멋지지 않은가. 주중에는 벌 돌보느라 주로 주말과 공휴일에 문을 연다고 했다. 가족사진 한 컷 찍는데 오천 원이다. 가족, 친구들과 함께 와서 사진도 찍고, 마루에 앉아 차도 마시면서 두어 시간 보내면 지리산의 안온한 기운이 가슴 깊이 들어오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토담농가’도 2003년에 처음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고사리와 매실을 인터넷으로 팔기 위해서였지만, 고객들과 소통을 많이 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사람에게 커뮤니티 중심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게시물을 많이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홈페이지 제작자는 내가 생각지 못했던 제안을 했는데 ‘민박합니다’라는 소개 페이지를 넣으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층에 빈방이 두 칸 있는 것을 알고 그렇게 제안한 것이었는데, 설마 손님이 오겠나 싶으면서도 그러자고 대답을 했다. 캠프파이어 사진 한 장에 ‘아이들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즐겁습니다’라는 문구가 전부였고, 방 소개나 방값에 대한 정보도 하나 없는 숨어 있는 페이지였다.
그렇게 하면서도 사실 별다른 기대는 없었는데, 뜻밖에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예약 문의가 이어진 것이다. 컴퓨터도 없는 산중 생활을 하던 우리 가족에겐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낯모르는 사람이 예약을 하고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는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니 우리 부부는 마냥 신이 났다. 이웃 없는 산중 생활이 외로워 산 아래로 이사 왔는데, 전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과 친구가 되는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실내 화장실도 없는 방 두 칸이 모자라 살림집에 딸린 여분의 방까지 내주었다. 결국 이듬해에는 손수 황토방 세 칸을 더 지었다. 우리 산에서 소나무를 잘라다 귀틀집 형식으로 지은 집이었다.
화장실과 주방을 실내에 넣지 않았다. 손님들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황토방 본연의 향내를 더 많이 즐길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황토방 짓는 과정을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이걸 본 사람들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겠다며 찾아왔다. 그런데 가끔 주변 식당에서 소개를 받고 온 손님들은 반응이 달랐다. 실내에 주방과 화장실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다음에 오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 예쁜 외양과 시설을 갖춘 유럽풍 펜션들과 경쟁하기에 우리 황토방은 초라해 보였다.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글 한 꼭지를 올렸다.
편리하지 않습니다
토담농가는 편리함만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자연 가운데에는 편리함만 찾다 보면 편안함을 잃을 수도 있거든요.
개수대에서 올라오는 냄새 대신 방 안 가득 솔향을 채웠습니다.
냉장고 팬 돌아가는 소리 대신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를 돌려드리겠습니다.
아빠 손 잡고 바깥 화장실을 다녀보는 유년의 추억을 아이들에게 만들어 주고 싶으신 분들,
찻상 하나 덜렁 놓인 단순함 속에서 고요와 평화를 맛보고 싶으신 분들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편리하지 않다는 것을 더 큰 소리로 알린 셈이다. 그리고 다녀가는 손님들 사진을 찍어 글과 함께 올렸다. 반응이 뜨거웠다. 글을 읽고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실내 화장실과 싱크대를 문제 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대신 황토방에 들어서면 은은하게 풍기는 소나무향에 감탄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손님들은 자연스레 차실로 모였다. 각자 다른 곳에서 왔지만 모여서 차를 마시다 보면 손님들끼리도 친구가 되었다. 하룻밤 쌓은 정이 두터운지 그네들끼리 의기투합해 다음에 날짜를 맞춰서 다시 황토방으로 모여드는 일도 더러 있었다.
차실은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 공작소’가 되었다. 민박 손님들이 오면 인사를 하고 맨 먼저 하는 말이 “짐 푸시고 차실로 오셔서 차 한잔하세요”가 됐다. 손님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차실 덕분에 지난 십칠 년 동안 좋은 분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이만하면 민박으로 성공했다 해도 괜찮을 듯하다.
농부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 나는 방 한두 개를 마련해 민박을 해보라는 권유를 하곤 한다. 민박을 통해 부가소득을 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맺은 관계는 고객을 넘어 친구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일인 미디어 시대이다. 뉴스를 보고 듣기만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뉴스를 만들고 전파하는 생산자가 되었다.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전하면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찾아온다. 이야기란 가만히 있지 못하고 퍼져 나가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의 발생지를 찾아가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비싼 세를 주고 목 좋은 곳에 점포를 얻지 않아도 된다. 사람냄새 진하게 배어 있는 진솔한 이야기, 내면의 깊은 욕구를 자극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그곳을 목적지로 사람들이 찾아가니 농촌에서도 사업하기 좋은 시대가 된 셈이다.
삼십 년을 농촌에서 살다보니 청년들이 창업할 아이템이 곳곳에 보인다. 농촌은 청년들에게 블루오션이다. 농사를 지어도 좋고, 가공을 해도 좋고, 유통을 해도 좋다. 아니면 농가 카페나 식당을 해도 괜찮다.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격이 있는 스토리텔링을 할 수만 있다면, 어디에서 어떤 아이템으로 창업을 한다 해도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무엇보다 청년들이 농사지으며 흘리는 땀 배인 이야기는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매력적인 콘텐츠가 될 것이다.
이곳 지리산에도 젊은 농부들이 많아져 활기찬 삶을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게 요즘 나의 꿈이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나는 그 동안의 경험을 기꺼이 나눌 생각이다. 농촌에 정착하고 싶은 청년들이 있다면 아내가 가진 몇 가지 아이템과 솜씨를 제공하겠다는 약속도 이미 받아두었다.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하는 농촌 정착 전략은 내가 도와줄 생각이다. < ‘바람이 수를 놓는 마당에 시를 걸었다, 공상균 산문집(공상균, 나비클럽, 2020)’에서 옮겨 적음. (2022.10.12.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