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나간 서울대총장!
대한민국 서울대학교안에 뙈놈 시진핑의 기념관 35평이 버젓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며칠전에 서울대학교 감사에서 나타난 놀라운 진실! 국힘당 조경태 의원이 서울대 총장 오세정씨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 안에 뙈놈 시진핑의 기념관이 있습니까?" 오 총장이 머뭇거리자, "있어요 없어요?" 오총장, "있습니다." 조의원이 "왜? 뙈놈 시진핑의 기념관이 서울대에 있나요?" 오 총장이 "뙈놈 주석놈이 도서 14,000여권을 기증해서 35평의 기념관을 마련 하였습니다." 조 의원이 다시 "그 서울대학교를 누가 설립 했습니까?" 오 총장, "박정희 대통령이 세웠습니다." 조 의원, "그럼 서울대학교 내에 박정희 기념관이 있어요? 없어요?" 오 총장, "없습니다." 조의원, "아니 그 대학교를 세운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은 없는데 시진핑은 공산주의자인데도 도서 14,700여권,만 기증하면 기념관을 세워준다?
그럼 저가 (조경태) 서울대학교에 도서 15,000권을 기증해도 35평 기념관을 지어 주시겠습니까?" 오 총장, "도서 15,000권을 기증하면 누구라도 기념은 해드리지만 35평은 좀 곤란하다"는 투로 중얼대자. 조의원이 "아니뙈놈 시진핑은 도서 기증했다고 35평 기념관을 만들어 주면서 나는 왜 안됩니까?" 오총장, "도서를 대량 기증하시면 해드린다"고 하자 조 의원, " 좋습니다 내가 도서 15,000권 기증 할테니까 꼭 기념관을 35평 주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육부 직원 나오세요!" "교육부가 정부에서 받는 지원금이 얼마 입니까?" 교육부, "5,700억원 입니다!" 조의원, "뙈놈 시진핑에겐 얼마 지원받습니까?" 답변하기를 "안받습니다." 조의원, "뙈놈 시진핑에겐 한푼 지원도 안받고도 기념관을 운영하고 그 운영비는 대한민국의 재정으로 충당한다? 참 어이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 교육의 현주소 입니다." 참 기가막힌다.... SnS에서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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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폴 보트
캄보디아에서는? 당시 인구가 1000 여 만 명 중에 약 25%에 해당하는 250만 명이 죽었다.
캄보디아의 엄청난 대 학살의 신호탄은 폴 포트가 불란서로 유학을 갔을 때 이미 시작했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수도 프놈펜에 있는 가톨릭 계 중고교를 6년 간 다녔다.
그때 왕실의 부정과 부패 및 무능, 불란서 등 외부 세력의 부패와 파괴 및 종교의 부패상을 보고 조국 캄보디아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특히 왕실에 무희로 있었던 사촌누나를 통해서 왕실과 부유층의 부정부패를 보았다. 또한 불란서를 포함한 외부세력에 대한 증오와 개혁 및 복수를 품었다.
불란서 식민지 아래서 갈등을 극복하기 위하여 전기공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폴 포트는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그곳 파리에서 당시 유럽에 유행했던 스탈린주의에 매료되었고, 공산주의를 공부하여 프로레타리아, 가난한 자의 혁명을 통하여 캄보디아를 부정과 부패에서 구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기존 가치이며 부정의 상징인 학교와 책을 불사르고, 자본가의 공장을 전부 없애버리거나 국유화하고, 지주들의 논과 밭을 다 빼앗아 국유화하고,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을 다 쓸어버려야 할 적으로 간주했다.
공산주의 목표인 공동으로 생산해서, 공동으로 분배하여,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없는, 모두가 잘 사는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캄보디아의 비극은 그때 시작했다.
살아 있을 때 폴포트
폴 포트는 불란서 유학에서 결심한 캄보디아의 적(敵)을 언제 제거할 것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작은 자기들 간의 크지도 않은 의견 조율 실패 과정에서 일어났다. 1976년 소집된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캄보디아 공산당 창설 기념일 결정에 대한 서로 다른 이견(異見)서 시작되었다.
포 포트(Pol Pot)는 1960년 캄보디아 노동당 창당일을 “공산당 창설 기념일”로 할 것을 희망했고, 다른 의견은 1951년 크메르 인민혁명당 창설 날을 기념일로 할 것을 희망하여 두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이에 폴 포트는 1951년 안에 동의했던 두 명의 고위 간부인 케오 미아스(Keo Meas)와 논 수온(Non Suon)을 당 지도부를 배신했다는 죄목을 씌워 체포하여 혁명정권의 악명 높은 심문센터인 뚜올 슬랭(Tuol Sleng)으로 끌어가 처형했다.
이를 시작으로 폴 포트는 악덕 세균이 침투하여 당이 병들어가고 있다면서 세균색출을 지시했다. 이 세균이 파리 유학에서 스타린 주의 이상적인 공산주의를 공부할 때 규정한 적들이었다.
러시아 혁명에서 규정한 그대로 공산국가 건설에 적이 되는 왕, 귀족, 지식인, 자본가, 공무원, 군인들로 이들을 전부 착취계급으로 규정했다.
폴 포트 정부가 완전한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하여 공산주의 건설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러시아 혁명, 중국의 문화혁명, 북한의 주체사상과 한국의 6.25 과정을 통해서 배운 완전한 공산주의 건설의 과정을 배워 그들의 혁명을 실천했다. 지금도 수도 프놈펜에는 김일성 거리가 있다.
1970년 – 1975년 사이에 캄보디아 공산당에 가입하여 무산계급의 혁명을 교육 받으며 기존 착취계급에 대한 증오를 키웠던 가난한 하층민의 10대들로 15살 정도의 어린 소년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다.
공산주의 이상 국가 건설, 즉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해서 잘 사는 사람도 없고, 못 사는 사람도 없는 모두가 평등한 지상낙원을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사상을 반대하거나 다른 의견을 낼 것 같은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순박한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캄보디아를 이끌어 왔던 기존 인물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악덕 세균 집단으로 간주된 사람은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 당내 반 혁명분자, 전 정권의 관리와 군인들, 전 현직 교수 및 교사, 지식인, 의사와 약사, 잘 사는 사람, 불교의 승려, 중산층이 그 대상이었다.
중국의 문화혁명에 영향을 받은 폴 포트는 전 공무원, 교사, 영어를 하는 사람, 영어 및 외국어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물론 안경을 쓴 사람은 노동을 하지 않은 지식인 같다고, 손바닥에 고생한 흔적이 없는 사람, 외국 서적을 가진 사람, 양담배를 피운 사람들을 공산주의 건설에 적으로 보고 다 잡아다 죽였다.
국교가 불교였던 캄보디아에는 절과 승려가 많았다. 종교를 거부하는 공산정권은 절을 폐쇄하고 많은 승려들을 처형했다.
한번 끌려와서 심문을 받은 사람은 자기 아는 사람 중에서 반공산주의 혁명분자 3명의 이름을 자술서에 쓰도록 했고, 또 들어오는 사람은 다시 3명을 쓰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불려온 사람들은 반혁명분자로 분류되어 처형되었다.
감옥에서 어린애가 운다고, 감옥에 독사를 풀어 넣어 죽이고, 서로 때리기 시합을 하여 죽이고, 작은 방에 30명씩 넣어 더위에 찌들어서 죽게 하고, 하루 죽 한 그릇으로 굶겨 죽이고, 죽창이나 대검으로 찔러 죽이고, 살아 있는 사람을 개미굴에 묶어서 개미 독에 죽어 뜯어먹게 하고, 죽은 시체는 토막을 내서 바나나 걸음으로 썼다고 한다.
심지어는 어린애를 다리를 잡고 머리를 나무에 후려처서 죽이고, 어린애를 공중에 내던지고 사격을 하여 죽였다. 사람 죽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이런 만행을 저지른 곳이 전국에 20.000 여 곳에 이른다.
당시 부서기장이었던 누온 찌어의 “반동분자 처형에 정신적 고통이 심하다.”는 말이 폴 포트 귀에 들어갔다. 그 답은 “오히려 영광이라고 생각해야지. 그놈도 반동이야. 그놈을 처형해라.” 폴 포트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앞으로 정적이 될 것이라고 간주되는 측근도 모두 죽였다.
노동가치설을 신봉하는 그들은 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노동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반 혁명분자로 간주하여 특히 도시민을 강제로 전부 농촌으로 추방하여 노동을 하게 하였다.
2-3백 만 명의 도시민과 승려들이 신분이 농부로 바뀌어 시골지역으로 이동되었다. 그들의 긴 행군대열은 15세 정도의 공산 혁명군에게 감시를 받았으며, 말라리아, 댕기열 등 풍토병에 시달려 도중에 많이 희생되었다.
중국 문화혁명 즉 홍위병 사건을 배웠다. 책은 전부 불살라 태웠다. 1974년 대학을 폐쇄했다가 1991년에나 17년이나 지나서 다시 문을 열었다.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와 책이 다 없어졌다. 토지 개혁을 위해 토지대장과 지적도를 전부 불태워 지금까지 큰 사회문제가 되어 토지를 둘러싼 마찰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8. 결 론
지구상에 고약한 공산주의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왜? 자유민주주의를 목숨을 걸고 지켜야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세계의 공산화 과정에서는 반드시 잔인하고 무서운 “암살과 학살”이 따라갔기 때문이다.
본인은 6.25 때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으로 경기도 포천에서 공산치하의 인민재판과 학살의 현장을 목격했다. 그 후 월남전에 참전하여 월남이 패망하는 과정을 체험했고, 전후방 근무를 하면서 무장간첩과 교전을 하고, 군 교육기관과 대학에서 전쟁사를 강의하면서 평생 북의 대남 적화전략을 걱정하면서 살았다.
남남 갈등에서 야기되는 보안법 철폐와 주한미군 철수 등 국가 안보 문제에 고민하고 걱정하면서 살고 있다.
이 시점에서 확실히 인지해야 할 국민적 과제는 북이 “혁명의 성숙기”가 도래했다고 오판하여 남침이나 적화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 오판은 6.25와 같은 비극을 가져온다. 대한민국을 이어갈 젊은 세대들이 공산화 과정에서 발생했던 끔찍한 “암살과 학살”을 확실히 인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 이는 나라 걱정 뿐 아니라 너와 나, 우리 가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끝......
[출처] 캄보디아에서는?....|작성자 서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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