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자가 왜 ‘地獄(지옥)’에 갔을까 (28P)
(부자였으나, 결국 지옥 간 사람)
*설날에 ‘地獄(지옥)’ 설교를 하다.
이 설교는 ‘정말 주목할 만한 설교’입니다.
목사님들은 꼭 한 번 읽어 보시고, 그대로 한 번 설교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 2023.1.20.금. 어제 피부과에 가서 50만을 주고 얼굴의 검버섯과 점들을 100여 개 뺐다.
피부가 점과 얼룩으로 엉망이었던 늙어 가는 얼굴이, 다시 美男(미남)이 되었다.
잊지 못할 경험은 내 살이 타는 시체를 태우는 냄새였다.
地獄(지옥)을 미리 경험해 본 것이다.
예수 안 믿고 살다가 죽어 지옥 가면, 그렇게 유황불에 타는 내 몸을 보며 전율하게 될 것이다.
과거 화장장에서 맡은, 그 시체를 태우는 냄새를 내가 내 살을 태우며, 직접 경험했다.
까마득한 옛날 청년 시절, 마산의 화장장에 갔는데, 당시에는 시체를 태우는 모습이 火口(화구) 사이로 훤히 다 들여다 보였었다.
20여 분이면 강한 불길이 머리통을 정면으로 뚫어, 날려 버린다. 그 다음에는 얼굴이 불에 타서 다 날아 가고, 이내 가슴이 불길에 뻥-뚫린다.
머리통, 가슴통, 골반의 중앙 부분까지 하나 하나 재가 되어 날아 가는 모습은 정말 僧侶(승려)가 되기에 딱 알맞은 人生無常(인생무상)의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쯤 지나면, 재만 남는다.
세상 참! 인생이란 게 그런 거다.
피부과에서, 얼굴 피부에 마취 연고를 바르고 30 여분 후에, 레이저로 태워 나가는데, 살을 에이는 아픔도 느껴지고, ‘아하! 이렇게 얼굴 美男(미남)이 되는구나’ 생각하며, 오늘날의 ‘美人(미인)이니, 얼굴이 예쁘니...’ 하는 것은 아무 意味(의미)가 없음을 알았다.
그냥 보기에 좋은 것이다.
레이저로 살을 태울 때 상당한 아픔이 있는데, “뭐! 이뻐진다면, 내 정도 고통 쯤이야...”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드는 걸 알아?
65세 인생을 다 살아 온 내가 이러니, 젊은 아이들이야 ‘이뻐짐’ 에 목숨을 걸지!
그래, 그래!
요즘 이쁘지 않은 애들이 어디 있어?
다들, 고친 얼굴이 아닌가?
코를 고치고, 얼굴 선을 고치고...
흠... 잘 생기고, 이쁜 게 무슨 소용이람!
그냥 눈에 보기에 좋은 건데...
오호라! 人生無常(인생무상)이로다!
내 다시는, 사람의 外貌(외모)로 말하지 않으리라.
나이로 말하지 않으리라.
하기야 나도 ‘잘 생겼다’ 는 말을 평생에 하도 하도 많이 들었었다.
심지어 66세 할아버지인 지금까지도...
지금도 내가 내 얼굴을 보면, 정말 중후한 잘 생긴, 初老(초로)의 노인이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한 얼굴에 다 지녔다.
실제는 아무 것도 없는데...
살도 이 정도로 찐 게 적당하다.
약간 살을 뺄까?
아니, 뭐하러...
그냥 빠진다면 모를까?
하여튼 사람은 자기를 좋게만 본다니까!
그래야 또 정신 건강에도 좋고...
그런 말이 있잖아!
사람은 자기를 항상 남보다 15% 정도 더 좋게 본다고...
다시 말하면, 남을 15% 깎아 내려 대한다는 거지!
한 때, 내 아내도 코를 약간만 고치고, 뻐등니를 고치면, 얼마나 이쁠까를 생각했다.
그런데 워낙 뻐등니가 대책 불가능이라, 포기했다.
사실은 돈의 문제이지!
지금은 이제 그런 생각도 없다.
늙어 가니까!
아내는 유독 빨리 늙어, 주름이 많다.
65세의 이 나이에, 내 오른쪽 뺨의 깊은 흉터를 지울까?
5-6세 경에 작은 누나를 따라 낫을 들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앞으로 엎어지면서 낫이 오른쪽 뺨을 꿰뚫었지!
당시에 눈이나 목을 꿰뚫었으면...
그냥 죽었지...
그 때에 흰 옷을 입었는데, 앞부분이 온통 피로 붉게 젖고, 작은 누나가 실장갑으로 뺨을 막고, 집에 돌아 와 된장을 처바른 기억이 난다. 천연 항생제를 바른 것이다.
아파서 턱을 벌리지 못하니, 배가 고파 누나를 졸라, 건빵을 사 먹었었다. 건빵을 입에 넣고 씹으니, 더 아팠던 기억이 난다.
이 기억은 생생하게 그대로 난다.
정말 인생은 아무 것도 모른다니까!
그냥 하나님이 살려 주시니까 사는 거지 뭐...
生死禍福(생사화복)을 내가 마음대로 절대 못해!
당시에, 동생 배종천 목사가 3살도 안될 때인데, 고추를 내놓고 달랑거리며 뛰어 다니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 동생이 ‘가지’ 를 표나지 않게 나무에 달린 그대로 베어 먹어, 꼭지만 달려 있던 기억이 나는데...
아이 머리 좋은 게, 그 때 벌써 드러난 거지!
그러면 작은 누나는 겨우 8살인데, 어떻게 밥을 짓고, 동생 2명을 돌보았지?
된장 처바르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찢어지게 가난하던 그 시절, 부모는 경남 양산의 개천에 모래 자갈을 파러 가고, 우리들만 살았었지!
뺨이 뚫린 이 깊은 상처로 인해 젊은 날, “조폭이냐?” 는 소리를 수 백번도 더 들었었다. 이제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없다.
다 늙은 것이다.
아니, 성령으로 이제 얼굴이 변했나?
그럴 리가...
하긴 16세 경 한번은, 집의 전기를 수리한다고 사다리에 올라 갔는데, 1.5m 높이에서 추락하며 옆구리가 나무 사다리 뾰족한 곳을 타격하며 떨어졌는데, 옷이 아니었으면 배가 그만 뚫렸을 것이다.
타격 당한 위치가 바로 심장 옆이었다. 정말 숨이 멎어 죽는 줄 알았다. 그 때의 고통이 내 인생의 최고의 고통이었다.
사실 나는 수 백번도 더 죽을 뻔 했는데, 주님이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 한국교회와 영혼들을 살리라고, 나를 죽이지 않으시고 살려 놓으신 것을 깨달은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오늘 피부 레이저 시술은, 참 좋은 인생 경험이다.
지금 온 얼굴이 새가 쪼아 먹은 것처럼, 흉터 투성이이다.
앞으로 일주일 간 사람을 만나는 일이 없으니, 감사하고 감사하다.
그 다음에는 몰라 보게 이뻐질 것이니까, 얼마나 행복해?
인생은 죽는 날까지 배우고, 경험할 일들이 가득하다.
주님! 날마다 나를 가르치시고, 깨닫게 해 주옵소서. 아멘.
♥ 부자가 왜 지옥에 갔을까?
(부자였으나, 결국 지옥 간 사람)
나 배종부 목사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골방에서 살고,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고, 공부하고, 설교 준비하고, 글 쓰고... 그리고 매일 1-2회 예배 인도하고, 설교하고 강의한다.
오직 내 삶은 그것 뿐이다.
나는 하루 평균 100페이지 가량의 글을 쓴다. 정말 대단한 熱情(열정)이요, 성령님이 주신 나 만의 탁월한 은사이다.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靈感(영감)이 너무나 많이 쏟아져서, 글로 다 정리를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나에게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넘쳐 흐른다. 이를 설교로 직접 다 전할 수 없기에, 오로지 글로 다 남긴다.
나는, 설교 준비가 힘들다 하고, 설교 원고도 쓰지 않고서, 설교하는 목사 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말은 설교자로서의 목사가 기도하지 않고, 말씀과 더불어 살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아니, 다른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내 남은 나날이 얼마 없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 만나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돌아 다니는 것은 인생 낭비이다. 다른 일들을 일체 하지 말라. 시간을 총력 집중하라. 삶이 송곳이 되지 않으면, 뚫을 수 없다...”
“골방에서 말씀을 준비하고, 강단에서 설교, 강의하는 일 이외에, 무슨 모임에 가는 것은 인생과 시간과 영성을 허비하는 소모적인 일이다. 노회, 총회, 무슨 모임... 가능한 한 그런 데 가지 말고, 무슨 책임을 맡지 말라.
무슨 연합회 등의 모임에 사회, 대표기도, 축사, 권면... 그런 것 하러 가지 말라.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하고 강의 할 일이라면, 최우선적으로 달려 가라. 그리고 타협하지 말고, 땅의 淫女(음녀)의 복음을 전하지 말고, 성령의 原音(원음)을 전하라.
당신에게 하나님의 강사비를 드리며 초청하는 목사님과 교회, 모임에 합당하도록, 말씀을 가치있게 증거하는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 되라.”
본문 : 눅16:19-31절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 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그 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 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얘기합니다.
"만일 내가 부자라면 교회도 짓고, 양로원도 짓고, 가난한 자도 돕고, 선한 일들을 정말 많이 할 텐데..."
정말 그럴까요?
거짓말 하지 마세요.
당신의 돈은 전혀 거듭 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돈은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탐욕 가운데 살고, 돈을 神(신)으로 섬기는 사람이지, 진실로 삶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왜 뻔한 거짓말을 하십니까?
당신은 왜 남을 돕는 일에 단 돈 일만원도 함께 하지 않습니까?
누구는 돈이 남아 돌아 남을 돕고, 선교헌금을 드리는 줄 아십니까?
‘피를 철철 흘리며 헌금하고, 남을 돕는다’ 는 말이, 당신이 보기에는 정말 外飾(외식)으로 들려집니까?
당신은 일생 동안 하나님 앞에 얼마나 헌금했습니까?
당신은 일생 동안 순수하게 남을 얼마나 도왔습니까?
이런 문제를 한번 고민해 본 적이나 있습니까?
거짓말과 外飾(외식)을 밥 먹듯 하지 마세요.
지금 당신의 모습이 영원히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삶의 실천이라고는 하나 없고, 말만 번지르르한 당신은 아마 지옥에 갈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와 나사로의 삶’ 에 대한 말씀은 바로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부자는 분명히 복을 받은 사람이고, 그의 행위에 따라서는 천국에서 상 받을 기회도 많은 사람임에 틀림 없습니다.
재물을 잘 활용하면 이 땅에서도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고, 그것으로 사람을 구원한다면, 죽어서 천국에서도 상이 많기 때문입니다.
먼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이 본문의 앞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앞절 1-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한 불의한 직원(청지기)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불의한 직원이 있었습니다.
이 직원은 부자의 재물을 허비하면서, 재산 관리를 잘못했습니다. 주인인 부자가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났습니다. 직원을 불러 말했습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시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이 직원은 걱정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解雇(해고) 당하면 할 일이 없습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러웠습니다.
어쩌면 할 일 없는, 별로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목사로서의 존재가 가치가 별로 없는, 아니 목사지만 목사의 일을 사실상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아니한, 우리 목사들의 삶과 어떻게 이렇게 심정이 비슷할까요?
그러니, 목사들이여!
‘오늘’ 이라는 기회가 있을 때에, 목회를 잘 해야 합니다.
목사 노릇을 정말 제대로 해야 합니다.
교회를 제대로 섬겨야 합니다.
외형적인 부흥이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 앞에 ‘영적인 목양’ 을 바로 해야 합니다.
쭉정이, 누룩 염병, 가라지나 돌보는 ‘엉터리 마귀 목회’ 는 이제 더 이상 하지 마세요.
단 하루라도,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짧은 남은 세월은 부디 ‘알곡 목회, 옥토 목회, 성령 목회’ 를 바르게, 제대로 하고 주님 앞에 가세요.
교인은 가라지, 누룩 염병, 쭉정이, 알곡, 종자 등 5종류가 있습니다.
이 중에 가라지, 누룩 염병, 쭉정이는 천국 가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저들을 돌보고 아부하는 엉터리 목회는 헛 목회인 것입니다. 지옥 가는 목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목사님들!
남은 세월은 정신을 차리고 목회하세요.
직원은 고민 끝에 기가 찬 불의한 세상적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주인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불러, 일종의 이중 장부 조작을 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복식 회계 부기’ 를 한 것입니다.
‘기름 백말’ 빚진 자에게는 ‘오십 말’이라고 쓰게 하고, ‘밀 백석’ 빚진 자에게는 ‘팔십 석’이라고 쓰게 했습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들은 ‘노회 상회비’ 를 거짓으로 적어 냅니다.
진짜 이건 말도 안됩니다. 우리 목사들과 성도들은 거짓이 일상이 되어 버린 교회 안에서, 신앙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 가고 있습니다.
저는 상회비를 더 적어, 냅니다.
이런 식으로 주인에게 빚진 사람 들을 다 불러, 일종의 선심을 베풀어서 앞으로 해고 당하면, 그 동안 선심 베푼 사람들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하여, 장래를 준비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빚진 자들에게 얘기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번에 당신에게 선심 베푸는 것이니까, 나중에 나 어려울 때 당신도 나 외면하지 말아!”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판, 사회판, 문화판, 교육판, 종교판... 등이 전부 이런 식으로 돌아 가는 것을 모르세요?
이 직원은 주인의 재물을 가지고 선심 쓰면서, 앞으로의 자기 삶에 대해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주인이 이 모습을 가만히 보면서, 칭찬해 주었습니다.
재물을 허비했다는 사실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남의 재물을 이용해, 앞 날을 준비하는 그 세상적 처신의 삶이 너무 지혜로웠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9절 말씀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남의 재물을 가지고서라도 잘 사용해서 친구를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어려울 때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삶 자체가 불의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란 게 다 이 모양입니다.
그리고 16절은 이 사건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바꾼다면 이렇습니다.
“이렇듯 재물을 잘 사용해, 다른 사람을 하나님 믿게 만든다면, 참 잘한 일이다.”
오늘 말씀은 이 사건 뒤에 바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앞의 사건과 연결시켜서 말씀을 봐야 합니다. 먼저 구성 상의 특징을 봅시다. 부자와 나사로의 사건은 크게 3 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막, 16:19-21절:부자와 나사로의 지상에서의 삶
2막, 16:22-26절:부자와 나사로의 죽어서의 삶
3막, 16:27-31절:현재 살고 있는 부자 형제들의 삶
♥ 제 1막의 부자와 나사로의 삶을 보십시다.
19절, 한 부자가 있어 -
그에 대한 이름을 기록하지 않아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특징은 알 수 있습니다. '고운 베옷을 입고, 자색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의 관심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즐길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매일의 관심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재산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나를 즐겁게 할 수 있을까?’ 가 그의 관심이었습니다.
남이야 홍수가 나던, 지진이 나든, 코로나가 걸리든... 신경 안썼습니다.
어쩌면 현대를 사는 우리의 오늘날의 삶을 이리도 잘 표현했을까요?
무관심, 냉정함, 타인 의식, 가족주의, 이기주의, 편파주의, 편 가르기, 매도하기, 상대방 죽이기, 비난하기, 씹기, 불평 불만 원망하기, 미움 다툼 시기 질투하기, 걱정 근심 염려 두려움 불안 하기...
20-21절, ‘나사로’ 라 이름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거지였고, 무척이나 가난했습니다. 부자의 대문에 누워서 부자의 상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라도 얻어 먹으려고 했습니다. 더구나 '헌데'(질병의 일종)를 앓으며,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 를 핥았습니다. 영양 실조에 불결한 위생 상태로 사니, 피부병이 낫지를 않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살 때에 지지리도 고생하고, 온 몸이 아팠고, 친구 하나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개들이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요즘 사람들과 살지 않고, 개들과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짜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나사로는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원하는 것을 입어 본 적도, 먹어 본 적도. 가져 본 적도 없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세상적 행복을 누려 본 적이 없었습니다. 웰빙의 삶, 힐링의 삶을 즐겨 본 적도 없습니다.
부자의 대문에 살고 있었지만, 단 한번도 부자는 나사로를 먹이거나 챙기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정말 매정하고 나쁜 놈입니다.
지금 이 나라 대한민국의 부자들과 가진 자들과 성공한 자들과 저 더러운 놈의 정치가들과 뭐가 다릅니까?
나사로는 오직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불리려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이렇게 ‘권리 항변’ 을 합니다.
“아니, 남의 집 대문에 사는 것을 허용한 것도 얼마나 큰 사랑인데...”
요즘은 자기 동네에 무슨 소위 말하는 쓰레기 소각장, 화장장, 장애인 학교 등... 혐오 시설을 짓거나, 하다 못해 장애인 아파트, 영세민 아파트만 지어도 데모를 하고, 난리가 납니다.
이런 나사로에게 유일한 위로의 힘이 있었다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나사로’ 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도우시는', 또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나사로’ 는 이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 는 믿음 하나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지금 현실은 이렇게 고통스럽지만, 항상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믿으며, 살았습니다. 정말 하루 하루 살았습니다.
이것이 부자와 나사로의 이 땅에서의 ‘지상의 삶’ 이었습니다.
♥ 제 2막은 6:22-26절 -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22절을 보시면, 거지 나사로가 드디어 죽었습니다. 한 많은 이 세상이 끝이 난 것입니다. 그는 흔적도 없이, 아무도 알아 주지 않은 초라한 장례식을 치루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냥 거적대기에 말아 갖다가, 묻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가요인 민요 <한오백년>을 보세요.※ 후렴 :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한 오백년을 살자는데 웬 성화요①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② 백사장 세(細)모래 밭에 칠성단(七星壇)을 모으고 님 생겨 달라고 비나이다.③ 청춘에 짓밟힌 애끓는 사랑 눈물을 흘리며 어디로 가리.④ 한 많은 이 세상 냉정한 세상 동정심 없어서 나는 못살겠네.⑤ 꽃답던 내 청춘 절로 늙어 남은 반생을 어느 곳에다 뜻 붙일꼬.⑥ 살살 바람에 달빛은 밝아도 그리는 마음은 어제가 오늘⑦ 내리는 눈이 산천을 뒤덮듯 정든 임 사랑으로 이 몸을 덮으소.⑧ 지척에 둔 임을 그려 살지 말고 차라리 내가 죽어 잊어나 볼까.⑨ 으스름 달밤에 홀로 일어 안오는 님 기다리다 새벽달이 지샜네.⑩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런가 왜 이다지도 앞날이 암담한가.⑪ 십오야 뜬 달이 왜 이다지도 밝아 산란한 이내 가슴 산란케 하네.⑫ 청천에 뜬 저 기러기 어디로 가나 우리 님 계신 곳에 소식이나 전하렴.(후략)
그런데 죽음 이후의 상황은 완전히 逆轉(역전), 反轉(반전)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가장 최고, 최대, 최선의 영광의 자리에 들어 간 것입니다.
이유는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겸손하게, 가장 적게 먹고, 가장 감사하며, 진실로 하루 하루만 기도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남에게 눈 한번 부라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멸시, 천대, 박대만 받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천국의 상급이 되냐구요?
이보시오. 사람은 자기의 삶에서 항상 선과 악이 나옵니다.
부자는 부를 가진 그 자체로 인하여 악을 행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권력자는 자기가 가진 권력 때문에 얼마나 악해지는지 아직도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 나라의 정치가들이 하는 짓거리들이 눈에 여전히 보이지 않습니까?
힘 있는 자, 가진 자가 저절로 악해질 수 밖에 없는 이 타락한 사회 구조를 정말 외면하실 것입니까?
왜 눈을 감고 ‘아웅’ 을 하십니까?
♥ 제 2막은 드디어, 부자도 죽었습니다.
화려한 장례식을 치루고, 호사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음부 곧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처했습니다.
아아! 저는 장례식이 화려한 사람은 전부 지옥 간 사람이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땅에서 성공한 사람은 전부 지옥 갔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부자, 성공자, 권력자, 힘 있는 자... 분명 그의 지나 온 보이지 않은 삶 가운에 남을 아프게 하고, 억울하게 하고, 부당하게 하고, 죄를 지은 것이 분명합니다. 종교인도 예외는 절대 아닙니다.
일부러 가난해야 합니다.
일부러 억울하게 살아야 합니다.
일부러 힘이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도록 정말 애써야, 겨우 흉내라도 낼 수 있습니다. 정말 당신이 살지는 못하지만, 그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당신 통장에 돈을 쌓아 두지 말고, 개척교회에 헌금하세요.
어려운 목사님들을 도우세요.
제 눈에는 개척교회와 어려운 목사님들과 가난한 선교사님들 밖에는 정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장례식을 호화롭게 하지 마세요.
죽을 때, 재산을 남기지 마세요.
가능하면 자식을 잘 키우고, 자식을 위해 돈을 남기지 마세요.
그릇된 자식에게 돈을 남기는 것은 정말 악한 일입니다.
슬픈 예화 한 토막입니다.
자식들을 위해 악하게 돈을 벌다가 죽은 아버지가 지옥에 갔습니다.
그 돈으로 치부하며 악하게 살던 자식도 지옥에 왔습니다.
지옥에서 부자가 상봉을 했습니다.
“아니, 이 놈아! 지옥에 오지 말라고, 돈을 벌어 주었더니, 왜 지옥에 왔단 말이냐?”
“아버지가 벌어 준 그 돈 때문에, 지옥에 왔잖아요? 나는 정말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부정, 부패, 횡령이 난무하는 사회나 구호단체에 기부하거나 하지 말고, 진정으로 아름다운 교회나, 귀한 복음 사업이나, 정말 훌륭한 선교단체 등에 다 헌금하고, 죽으세요.
세상 떠나는 얘기를 하니, ‘TV문학관’ 의 얘기가 생각납니다.
6.25 사변 중에 월남한 가족이 離散(이산)하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월남하여 잘 살게 되어, 아들은 의사가 됩니다. 아버지는 독신으로 살며 평생을 아내를 그리워 하며, 찾습니다.
아내는 월남하여 가난하게 살다가, 자기를 거두어 준 어느 리어카를 모는 동네 쓰레기를 줍는 사람을 만나,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오순 도순 살아 갑니다.
아들도 하나 낳습니다.
그런데 자기 동네의 으리 으리한 부자 집 문패가 예전의 자기 남편의 이름이라 유심히 지켜 보다가, 그게 사실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돌아 갈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리어타를 끌고 오가면서, 예전의 남편과 자랑스럽게 자란 아들을 보는 것이 인생의 낙입니다.
드디어 그 아내가 병이 듭니다.
아들 의사가 무료로 왕진을 옵니다. 어미는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 보며 숨을 거둡니다. 그런데 차마 지나 온 인생의 애환과 서러움에, 눈을 감지를 못합니다.
의사 아들에게 눈으로 말합니다.
“얘야! 잘 자라, 주어 고맙다. 얘가 네 동생이란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 눈물 납니다.
영구차가 나가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탄 자가용이 그 뒤를 따라 골목을 빠져 나갑니다. 기사가 크략손을 빵빵 울리니, 아버지가 꾸중합니다.
“이 사람아! 가신 분에게 예의를 갖추게...”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참 이상하지요. 저 아줌마가 마지막 죽었는데, 나를 바라 보고 죽었어요. 아들이 눈을 감겨도 눈이 감기지 않았는데, 제가 감기니까 눈을 감았어요...”
나사로와 부자의 죽음!
여기서 무엇을 말씀합니까?
모든 사람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한 번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죽어,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옵니다.
23절, 그런데 죽어서는 지상과 전혀 반대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평안히 쉬고,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또 하나 알 것이 있습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의 삶과는 완전 ‘거꾸로’ 입니다.
상전이 부하가 되고,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이 되고, 부목사가 담임목사가 됩니다.
부목사를 잘 섬긴 담임목사는 천국에서도 높은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오직 ‘섬김과 나눔’ 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자꾸 스스로 가난해져야, 천국에서 부유해집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자꾸 낮아져야, 천국에서 높아집니다.
그래서 영원한 천국의 삶을 위하여는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섬기고,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부자가 지옥 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복음 사업을 위해, ‘섬김과 나눔’의 삶을 위해 사용치 않고, 자기의 육신 만을 즐기다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로 영리한 직원이 아니라, 그 많은 재물 가지고도 앞 길도 전혀 준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직원이었습니다.
둘째는, 그 많은 재물은 가지고도 남을 유익하게도 못하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나쁜 놈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렇게 애원합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아니, 긍휼히 여겨 줄려니, 무슨 건덕지가 있어야 긍휼히 여기지요.
하나님이 ‘毫釐(호리)’ 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게 하시는 분이신 것을 아직도 모릅니까?
마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정확하십니다. 무섭게 공정하신 분이십니다. 나에게, 내가 행한대로 착착 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 같은 것 한테 절대 빚지지 않는 분’ 이십니다.
이 괘씸한 부자가 세상에 살 때에는, 자기는 자기 집 앞에 노숙하던 불쌍한 거지 나사로를 단 한번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다가, 지옥에서는 이제 너무나 고통스럽고 답답하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냉정하게 말씀합니다.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야고보서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으로 귀가 열린 여러분!
이 땅에 살면서 남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고, 자기 아까운 것을 자꾸 나누려고 한 사람은 심판을 이깁니다.
부디 당부하건데, 이제 남은 생애는 당신의 피를 뿌려, 돈을 뿌려, 삶을 나누어, 하나님께는 헌금하고, 어려운 이웃에게는 섬기며 나누며 드리며 사십시오.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에 대하여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바로 살아야 합니다. 낮아지며 살아야 합니다. 겸손히 살아야 합니다. 정말 나누고 섬기고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곧 끝납니다. 그리고 바로 영원의 삶이 전개됩니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지나 온 나의 인생의 나날들은 깨달음이 없어 그렇게 살지 못했으니, 이제부터라도 당장 그렇게 살기 시작해야 합니다.
부자는 타오르는 불꽃 가운데서 고민합니다. 지옥의 고통 뿐 아니라, 지나 온 삶에 대한 회한과 후회로 더욱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아니, 지금 당장 목이 너무 말라, 물 한 모금이 절실합니다. 지금 아비규환의 지옥불 속입니다.
이 땅에서 정말 정신을 차리고 잘 살아야 합니다. 바로 살아야 합니다. 오직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 에 대한 정말 실감 나는 간증을 보았습니다.
아래 글은 독립적으로 한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지옥으로 향하는 수 없이 많은 영혼들
주님이 열어 주신 환상
저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너무나 두렵습니다.
예전에 지옥에 대한 생각을 좀 많이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과연 구원 받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아니면 버림 받아 생각 조차 하기 싫은 지옥에 갈까..
두렵고 떨리는 이런 저런 생각으로 하루를 보내다가
집에서 조용한 시간에 골방기도에 들어 갔습니다.
그 날 하루가 너무 피곤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 날 따라 기도에 집중이 안 되어 애를 먹고 있었는데
마귀가 기도를 훼방하려는 것을 눈치 채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는 물러 가라’ 는 대적 기도를 한 다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옥에 대한 말씀을
성경에서 여기 저기 찾은 후에 상세히 읽어 내려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환상이 열렸습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어디를 향해 걸어 갑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저도 얼떨결에 편승해서
같이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가다 보니
강폭의 끝이 안 보이는 어마 어마하게 큰 강이 보이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강이 아닙니다.
마치,
태풍철에 시골의 개울에 가면 집중호우가 내려 개울물이 범람할 정도로
흙물이 섞여 우렁차게 내려 가는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앞 동네 꼬마가 그 범람하던 개울물에 들어 갔다가
물에 휩쓸려 사망한 예도 있었습니다.
제가 본 강은 그것과 흡사했습니다.
무시 무시하게 큰 강물이 엄청난 속도와 물줄기를 형성하며
매우 거침없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좀 달라 보이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 강에 흐르는 것은 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유황!!!
유황이 녹은 끓는 액체가 흐르는 것입니다.
강폭이 워낙 넓어서 그 끝이 보이지도 않았지만,
부글 부글 끓는 유황 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란빛의 수증기 같은 게 위로 쭉쭉 올라 가고 있었습니다.
그 강에 가까워질수록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가
점점 더 심해집니다.
예전 성냥 켤 때 구리 구리한 냄새 같기도 하고,
가스가 유출될 때 나는 냄새 같기도 한데,
멀리서는 그저, “그런 냄새가 나는구나” 생각만 했지만
가까워질수록 그 냄새에 썩은 냄새,
그리고 단백질 타는 노린내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풍겨 옵니다.
저는 거의 끝줄에 서서 그들과 걷고 있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그 유황 액체 흐르는 강을 향해 뛰어 들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뛰어 드는 곳 가까이로 향했습니다.
비유하자면..
혹시 철인 3종 경기 보셨는지 모르겠으나
3종 중에 하나인 수영을 하기 위해
많은 선수들이 동시에
바다를 향해 막 뛰어 드는 그런 모습이랄까...
그 많은 사람들이 뛰어 들자 마자
엄청난 비명과 함께 살이 타들어 가서
시커먼 재가 되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 나는데,
뼈 마저 불이 붙어 타들어 갑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로 앞 사람이 유황 액체에 타 죽는 걸 봤으면,
그걸 본 뒷사람은 이를 경계하여 피할 텐데,
앞사람의 그런 처참한 모습이 안 보이는지
그 뒷사람이 다 타 버린 앞사람의 자리를 또 채워 갑니다.
저는 그들을 향해..
거기 들어 가면 다 죽습니다..!!
들어 가지 마십시오..!!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으나
도무지 들으려고 하질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아주 자신만만하게 한 마디씩 합니다.
저는..
그래도 들어 가면 안 된다며,
필사적으로 그들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내 혼자의 힘으로 막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리로 들어 가면 죽습니다. 제발 제 말을 들으십시오.."
제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니
많은 사람들이 짜증 나는지 돌을 집어 저에게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돌에 맞는 게 낫지...
강으로 들어 가면 죽는 것은 뻔하기에
단 한 사람이라도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돌을 맞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막아 섰습니다.
그렇게 옥신 각신하던 중
제 눈에 뭔가 들어 오는 게 있었습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강 사이로
한 줄로 서서 겨우 걸어서 통과할 수 있는
아주 폭이 좁은 다리였는데
그 모양을 비유하자면..
옛날 영화에서 보면
이쪽과 저쪽 절벽을 가로 질러
줄로 만든 다리인데,
바닥은 송판떼기 같은 것을 깔았고
양손으로 줄 난간을 잡고 건너는 데
매우 흔들거립니다.
마치, 인디에나 존스 영화 같은 것에 나올 법한
아주 좁은 그런 다리가 강 양 끝을 연결했는데
폭이 너무 좁았습니다.
일단 제가 그리로 가서 건너 보려고 했습니다.
다리에 올라 서자 마자
다리는 매우 흔들렸고
중심 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뜨거운 유황 액체에 타 죽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기에
다리에서 다시 내려 그 많은 사람들을 향해
"이 다리로 건너십시오. 그러면 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으려고 하질 않습니다.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리가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다리가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제가 다리 줄을 만져 가면서
이거 다리 아니냐고 소리쳤으나,
여전히 거짓말 말라고 하면서, 또 돌을 던집니다.
그래도 여전히 저는 포기하지 않고
다리로 건너라고 악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옥신 각신 사투를 벌이고 있는 차에
저 쪽에서..
원피스 같은 하얀 통옷을 입은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걸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인도로
바로 한 줄로 서서
다리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 인도자는 키가 크고, 몸에서 광채를 뿜고 있었습니다.
그 적은 수의 사람 외에
뒤에 누가 또 따라 오나 봤으나
그게 끝입니다..
더 이상 없었습니다.
딱 3초 정도면 몇 명인지 바로 알 수 있는 극히 적은 수...
유황 강물에 뛰어 드는 사람들의 수는 수천 수만...
뒤통수를 누구에게 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유황 강에 뛰어 드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과
극히 적은 저 사람들의 수를 제 눈으로 오가면서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때서야 눈치 챈 것입니다.
다리를 건너는 저 적은 수의 사람은 구원 받아
천국으로 향하는 영혼 들이고..
유황 액체에 바로 앞 사람이 죽는 교훈을 보지 못하고,
작은 폭의 다리를 보지 못하고,
바로 그 뒤를 이어 유황 액체로 된 강으로 뛰어 드는 이들은
구원 받았다 착각하며 지옥으로 향하는 영혼이란 것을...
그때서야 저는
그들에게 강물로 뛰어 들지 말라고 소리치는 게 아니라,
그 곳으로 들어 가면 ‘지옥’ 이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다리로 건너면, 구원 받습니다.
제발 이 다리로 건너십시오."
아무리 소리 질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지금까지 하던 대로
앞의 영혼들이 뜨거운 유황에 다 타들어 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전혀 개의치 않고 그냥 자기 할 일을 하듯
마치 해수욕장의 피서객들이 바다에 뛰어 들듯
그렇게 계속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절망해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저들을 살려 주십시오.
저들이 죽어 갑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들으려고 하질 않습니다.
주님께서 해결해 주십시오.
위에서 우렁차면서 맑고 슬픈 목소리가 들려 옵니다.
"아들아.. 내가 너의 외침을 들었다."
"나는 저들에게 기회를 충분히 주었고,
선택은 그들이 한 것이란다."
"지옥을 보내는 것은 나 곧 너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저들은 너희 하나님을 구원하는 하나님으로만 알았지,
무서운 심판주 공의의 하나님인 것을 가볍게 여긴 영혼들이다."
"저들은 입으로는 피 흘린 내 아들의 십자가를 의지하며 구원 받았다고 외치고,
안심하며 자만했지만
결코, 십자가에 죽으려고 하지 않은 자들이다.
결코,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은 자들이다.“
"저들이 나를 간절히 구하고 찾았다면,
그들에게 가서 같이 먹고 마실 준비가 되었었단다.
그러나 저들은 입술로는 '주여, 주여' 했으나,
나를 간절히 찾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 곧 너희 거룩한 하나님을 부담스러워 한 자들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12장 14절)
"나 곧 너희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저는 궁금한 게 있어서, 주님께 외쳤습니다.
"저들은 앞 사람이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도,
왜 그 자리를 또 채우기 위해 뛰어 드는 것입니까?"
"아들아....
저들은 눈이 가려져
앞 사람의 멸망은 보이지 않는단다.
자신도 그 자리를 채우고 나서야
앞 사람의 존재가 보인단다.
그러나 그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주님... 그러면 저들에게 왜 저 작은 다리가 보이지 않습니까?"
"육에 속한 자들은 내가 만든 다리가 보이지 않는단다.
나와 먹고 마시는 내 자녀에게만 보이는 다리란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으니라."
(마태복음 7장 14절)
"사랑하는 나의 주님!
지금이라도 저들을 살려 주십시오."
"늦었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한번 심판이 결정되면, 돌이킬 수 없단다."
주님... 주님...
저 불쌍한 수 많은 영혼들을 제발 살려 주십시오.
한번 들어 가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곳으로부터,
저들이 저 곳에 들어 가지 못하도록 도와 주소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나 곧 너희 하나님을 볼 수 없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5절)
더는 주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지옥에 들어 가는 그들을 보면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중에,
저 혼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
눈을 떴을 때는 시간이 좀 흐른 후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구원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 들이라야 지옥을 면합니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성도라야,
성령께서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마태복음 7장 21절)
저는 그들의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쓰려 와서
가슴을 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 가는 자가 극히 적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여기지 마십시오.
아무리 저마다 '나는 구원 받았다' 자신한들
그건 당신의 생각일 뿐입니다.
매일 매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무서운 결과는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장 12절)
저는 예전에 가끔 목욕탕에 가면,
한증막에 들어 갑니다.
큰 맘 먹고 30분만 견뎌 봐야지 하고 결심하지만,
10분을 못 채우고 결국 뛰쳐 나옵니다.
겨우 그 정도도 못 견디는 게 고통에 대한 사람의 내성입니다.
하물며 영원히 계속되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그 고통을
어찌 감당하시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분을 닮은 삶을 살면,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핍박이 들어 옵니다.
반드시 세상과 충돌이 일어 납니다.
이 충돌이 없이 무난하고 그들과 잘 어울려 산다면,
내 믿음을 의심해야 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4장 11절)
그리스도가 침 뱉음을 당했듯,
우리도 핍박을 당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듯,
우리도 내 더러운 모든 것이 십자가에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듯
우리도 거듭나 새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다시 태어남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남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는 부활입니다.
이 과정이 없이는
그 누구도 천국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제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장 27절)
사랑하는 여러분...
지옥은 여러분의 상상을 불허하는 아주 무서운 곳입니다.
한번 가면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 머무는 시간은 영원이라는 것에 비하면 순간입니다.
한 순간의 안락을 위해 천국과 지옥을 바꾸지 마십시오.
부디...
입술이 아닌 간절한 심령으로 주님을 찾으십시오.
아버지!!!!!!!!!!
오~~~ 주님!!!!!!!!!!
이전에 사역을 잠간 쉬고 있을 때...
어느 날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주님께서 나에게 호통을 치시며
하시는 말씀이 '너 무엇하느냐! 지옥 가는
영혼들이 줄 지어 섰는데...' 하셔서
얼마나 두렵던지..
주님! 저 일할께요. 사역지 주세요! 하고 기도했고
곧바로 사역지가 연결되어서
삼산동에 있는 장로교단 ㅇㅇ교회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 당시 주님이 역사하시므로
수 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인도되었고
새신자 양육을 지도케 하셔서
알곡 성도로 주님이 자라게 하셨습니다.
나는 순종만 했고, 주님이 다 하셨습니다.
그 때 새벽에 하셨던 주님 말씀
'지옥 가는 영혼들이 줄지어 서 있다는 것...'
그런데 윗글 본문에서는
지옥으로 향하는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이
불신자가 아니고 구원 받았다 착각하며
지옥으로 향하는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예수를 믿는다는 신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벌벌 떨립니다.
큰~ 미혹입니다.
우리는 크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미혹 받는 자도..
미혹하는 자와 함께..
오호라!
예수를 믿는다 해도,
실제로는 천국으로 갈 수 없는데...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교회 다녀도,
예수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이 주인 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주인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은 후로는
나 자신의 생각과 이론을 모조리 내려 놓고
오직 주님이 하신 말씀 만을 좇아 가야
공의의 하나님께서 말씀의 법으로 심판하실 때
그 믿음으로 행한 대로
상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 영접만 하면 구원 받았다고,
천국 간다고,
지옥은 절대 안간다고 가르칩니다.
너무 너무 심각한 왜곡된 한국교회의 현 상황입니다.
참된 진리를 사랑하는 맘으로
전해 주면 이단이라,
행위 구원론 자라,
시한부 종말론 자라 하며 멸시합니다.
주님이 멸시 받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게요.
그러니 받을 심판이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들어 갈 때까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멸망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교만, 자만' 때문입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주님이 보는 눈,
듣는 귀,
깨닫는 마음을 주시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은혜를 날마다 주셔서 결국에는
천국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상 목사와 교회들이 교인들을
지옥으로 인도합니다.
지금 우리의 세대는 무관심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 가고 있는 데도 무관심 합니다.
불쌍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해도, 무관심 합니다.
나하고 상관이 없는 일은 철저하게 외면을 합니다.
더욱 두려운 무관심이 있습니다.
영적인 무관심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이러한 말씀은 누구나 한 번 이상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이 없습니다.
전도지도 한 번 읽어 보지도 않고, 버립니다.
이렇게 무관심 속에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결국 죽음을 맞게 됩니다.
죽음 이후에 지옥의 자리에 있을 때,
오늘의 무관심은 절규로 바뀝니다.
그러나 늦었습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무관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선의 관심을 가지세요.
여러분의 영혼이 죽고 사는 일이 여기에 달렸습니다.
예수 믿는 일에 관심을 가지세요.
영적 무관심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천국에서 영원히 삽니다.
―에벤에셀 刊 조현삼 목사 著 [캔 콜라와 예수님] 中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무서운 메시지를 듣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우리 삶에 대한 평가와 심판이 냉정하게, 분명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비유나 예화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실제 상황입니다.
25절의 아브라함의 대답은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여기서 고민을 받느니라."
부자는 자기의 유익 만을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제 좋은 것만 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기쁘게 못했습니다.
이게 무슨 죄냐구요?
특별히 악하게 산 것이 없다구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것이 가장 큰 악입니다. 불의입니다.
부자처럼 사는 자들 떼문에, 그래서 세상에 지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살아서 고난을 받았기에, 여기서 위로를 받습니다.
나사로가 천국 갈 일을 한 게 없다구요?
오히려 악하고 게으르다구요?
제가 앞에서 계속 설명했잖아요?
부자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준비했더라면, 이 같은 후회와 고민의 날은 없었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부자에게 보낸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2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건너 갈 수도 없고, 건너 올 수도 없느니라."
빤히 보이는 천국과 지옥!
천국에서는 지옥이 안보입니다.
만약 보인다면 천국은 그대로 지옥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지옥에서는 천국이 생중계 됩니다.
이게 사람을 진짜 미치게 합니다.
이 절망적인 비교 의식...
지옥의 진짜 고통은 그 뜨거운 불 속에서, 진짜 열 받는 것입니다.
제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선교를 갔습니다.
점심 식사 시간에, 현지의 10대 어린 아가씨랑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그 어린 아가씨는 제 앞에서 부끄러워 했습니다. 비교 의식입니다. 저는 당장 수저를 버리고, 손으로 음식을 같이 집어 먹었습니다.
손발로 대화하면서...
우리 삶에 대한 평가가 한번 내려지면, 이미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다.
한번 더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면 천국, 지옥이면 지옥 둘 중의 하나이지, 천주교의 煉獄(연옥)이란 없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도 또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착각하는 것입니다.
제 3막은 16:27-31절에 있습니다.
지상에 아직도 살고 있는 부자 형제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27-28을 보시면,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애원합니다.
"...나사로를 보내어, 내 형제 다섯에게 증거하여, 이 고통 받는 속에 오지 않게 하소서..."
지상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도 이 부자처럼 '자기 만' 위해 살고 있음이 틀림 없습니다.
사람의 성품과 못됨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늘 욕심을 부립니다.
음란, 간음하는 자가 늘 음란, 간음합니다.
시기, 질투하는 자가 늘 시기, 질투합니다.
남을 씹는 자가 늘 남을 씹습니다.
남을 해치는 자가 늘 남을 해칩니다.
남을 죽이는 자가 늘 남을 죽입니다.
권력자가 늘 권력을 부립니다.
불의하고 악한 자가 항상 불의하고 악합니다...
장래 그들이 지옥 올 것이 뻔하다고 느꼈던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서 천국 지옥을 생생히 증거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지금 지옥에 있다는 것에 대한 고통 + 앞으로 형제들이 지옥 올 것에 대한 고통까지 같이 겪고 있습니다.
부자는 지상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동생아! 누나야! 형님아!
아들아! 딸아! 손자야! 손녀야!
너희들은 정말 지옥 오지 마라.
부디 예수 믿고, 이웃을 돌보아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말아라...
얘들아! 지옥은 있단다.
정말 있단다.
살았을 때 부디 예수 잘 믿고, 어려운 이웃을 최대한 돌보고, 좋은 일 많이 하거라...
이 고통은 나 하나로 족하다.
더 이상 지옥에 오지 마라... 제발 제발...”
이러한 부자의 절규하는 음성이 들리십니까?
지금이라는 시간에 예수님을 믿고, 진짜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영혼의 구원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29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목사가 있고, 전도자가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으니, 그들이 전할 때,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나서 전도한다 하더라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30-31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찬 말씀입니까?
전도가 왜 안되는지 아십니까?
그 만큼 사탄이 덮은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를 폐쇄하고 예배를 폐쇄하는 이 악하고 불의한 정권 자체가 아예 사탄입니다. 대 놓고 교회를 탄압하고, 폐쇄하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전도를 원천적으로 가로 막습니다.
이제 전도하면 고발 당합니다. 내 시대에 이런 정권의 악함을 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심판의 기준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예수님을 믿었느냐, 얼마나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며 살았으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이 부자는 천국 갈 기회가 많았습니다. 또 재물을 통해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할 여건도 되었습니다. 재물을 통해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많이 가진 것이 복이요 특권이기도 했지만, 제대로 올바로 쓰지 못해서 부자 된 것이 재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나이 들어, 진실로 고백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주님! 제가 큰 교회 목사가 되지 못한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가난한 것이, 너무 행복입니다. 어쩔 수 없이 겸손해야 하고, 낮아져야 하고, 힘 없고 가난하고 아프고 서러운 목사님들과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살게 하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는 가장 행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하나님과 남을 유익하게 못하면, 죄 짓는데 사용되기 쉽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남을 살리는데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섬김과 나눔’ 의 삶을 사십시오.
부자는 재물을 믿고 살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여, 지옥에 갔습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하나 강조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부자는 “믿지 못하여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지 못하여 지옥에 갔다.” 는 사실입니다.
나사로는 재물은 없었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천국에 갔습니다. 그의 삶은 저절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자가 덤으로 받는 축복입니다.
재물 있는 불신 보다, 가난하지만 믿음을 선택하시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지금 현재의 삶을 통해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에는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믿는 자의 책임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 침묵하기 때문에, 또 다른 부자들이 지옥에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입을 열어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