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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 그렇게 만나고 헤어졌다
숱한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얼개처럼 짜인 인연이란 작가가 의도 하는 대로 소설 속에만 등장하는 설정일까.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적 인연도 누군가에 의해 꾸며진 설정일 수 있다. 앞서 말한 누군가는 사람의 운명을 관장하고 떡 주무르듯 할 거라 짐작만 할 뿐 영원히 베일에 싸여 있다. 대개 사람들은 아무래도 소설이니까 우연을 우연으로만 보아 의구심을 갖곤 한다. 허나 눈앞에 현실에선 모든 우연을 망라해 절대적 필연인 양 억지로 잡죄는 사례도 많다. 첫 눈에 반했다, 사랑했다, 라고 고집스레 집착하는 사람들, 경이로움에 겨워 나쁜 인연인지 좋은 인연인지 개입시킬 경위조차 무시하고 만다. 우연한 인연이 필연으로 귀결된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다. 그러나 겨우 스쳐가는 만남으로 그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처음 필연이라 철썩 같이 믿었던 착각에서 계속 연연하게 되고 미련이 크면 큰 만큼 잊지 못해 긴긴날 상처 입은 가슴을 끌어안고 신음하는지 모른다. 무릇 우연은 인연을 낳는다. 또 인연은 우연이란 장치에 힘입어 매듭지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할 것은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맛보지 않아 몰랐다면 몰라도 인연이 아닌 줄 일깨웠다면 스스로의 감정을 거칠게 닦아세워서라도 과감히 마음을 비우는 용기와 지혜가 수반되어야 한다. 더러 사노라면 예외란 게 있어 부득이한 경우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부득이함으로 말미암아 고뇌의 시간을 갖는다면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에 놓인 인연의 끈이라서 설왕설래하는 사이 많은 세월을 갉아 먹는다 해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무 토막 자르듯 할 수 없으니 것 또한 인연이라 믿는 자들의 숙명이고 보면 그 지고지순함만은 높이 살만 하다.
돌이켜 나의 이야기는 수원역(20살 무렵부터 지금껏 내 여행의 시작은 항상 수원역이었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거기서 얼개의 첫코가 잘 못 꿰어지고 미루어 나는 이상기류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발차 시간에서 15분 남짓 남은 시간이었다. 나는 서둘러 수원역 출입구를 빠져 나와 역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쯤에서 담배 한 가치를 입에 물었다. 장장 5시간의 긴 여정 내내 참아야 한다면 얼른 피우고 열차에 오를 참이었다. 그리고 한 두어 모금 연기를 들숨날숨 했을 즈음이었다. 와중에 내가 본 건 계단 대리석 난간에 찍힌 금연 경고였고, 곧 바로 제복 입은 단속반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아뿔사!.. 그러나 이미 레이더망에 걸린 이상 빼도 박도 못했다. 성격상 구차하게 선처를 구걸하지 못해 순순히 신분증을 건넸다. 더불어 사는 사회, 지킬 건 지키며 사는 게 편하다 생각했고 살면서 누구보다 준법정신이 투철하고 공중도덕 관념이 몸에 뱄다고 자부했는데, 담배 앞에서 무너진 자존감은 오랜 작심이 무색하도록 그렇게 하찮을 수가 없었다.
비 내리는 아침나절이었다. 빗줄기가 계단 중간까지 들이치지 않았다면 저 계단 아래까지 내려가서 피웠을까. 글쎄,,,나도 내 속을 몰랐다. 무엇 때문에 생각 없이 굴었는지 그저 멍할 뿐, 단속반은 내 신분증을 보면서 기록에 열심이었다. 2만원자리 스티커가 발부되었다. 3원자린데 2만원자리로 했다는 단속반의 말이 고맙게 들리지 않았다. 역시 생각도, 감정도 없어 무덤덤했다. 건성으로 신분증을 돌려받고 스티커는 고깃고깃 구겨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마침 빗속에로 둥실 떠다니는 생각의 편린들... 그것들이 꺼림칙했다. 일진이 사나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일순 빛을 발했다. 짐짓 내 안에 예지능력이 십분 발휘된 터인데도, 것 또한 무덤덤했다. 돌연 졸음이 쏟아졌다. 지난밤에 밤샘하고 길에 나온지라 그럴 만도 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천성이 운명론자였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 소설책에 코 박고 지내던 시절에, 우연과 인연과 운명이 줄줄이 형상화되는 소설 속 파노라마가 눈에 익으면서, 그로 인해 얻은 증후군이라면 맞을까 모르겠다. 따라서 운명에 입각해 사고하고 행동에 반영함을 주저하지 않았다. 잘되건 못되건 운명에 맡겼다. 우주의 질서가 그러하듯 순리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 딴엔 그것만이 참 인생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매사 운명대로 가겠지 하는 안일한 노파심을 가져본 적은 추호도 없었다. 성의껏, 소신껏, 또는 진심을 다해 응대한 뒤에야 하다하다 안되니까 운명을 방패삼아 수굿했고,.. 설사 진행과정에서 발생한 정신적,``시간적, 금전적 피해가 제아무리 크다 해도 이해득실이나 잘잘못을 따진답시고 골머리를 싸매는 일도 없었다. 돌이킬 수 없다면 뭐든 마음을 비운 뒤에야 편안했다.
목적지는 포항이었다. 포항행은 꽤 오랜 시간 벼르고 벼른 행보였다. 여행 경험을 통틀어 즉흥적 판단으로 행동에 옮긴 게 태만이지만 이번만은 어제 결정하고 오늘 길 위에 서는, 결코 단발성 충동이 아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여행을 위한 도정이 아니었다. 딴엔 중대한 용무차 가는 길이었고 내심 바라던 바 잘 되길 바랐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캠핑카로 자작할 베이스 차량을 매입하기 위해서였다. 차명은 콤비 이동도서관 차량이었다. 출고 당시부터 특수 차량으로 등록 기재된 차이기 때문에 용도에 따른 구조변경 신청을 따로 하지 않아도 검사를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었고, 캠핑카로 이용해도 법적 하자가 없었다. 해서 희소가치 때문에라도 상당 기간 이 차가 매물로 나오기만 기다려왔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현재 차 소유주도 나름대로 캠핑카로 꾸며 탔다고 차량을 소개했었다. 단지 사는 게 바빠 시간이 없어 하구한날 주차 상태로 발이 묵인 터라 할 수 없이 매물로 내놓게 되었다 했다.
차 소유주인 G는 단순히 차량 소개로만 그치지 않고 인터넷 네이버에 등재된 자신의 블로그로 안내하며 캠핑카로 전국 일주 당시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블로그 사진엔 신혼인 듯 젊고 행복에 겨운 부부가 함께 여행하는 모습이 사실감 있게 적나라했다. 한 눈에도 부러우리만큼 선남선녀 커플이었다. 그들 부부 곁엔 항상 동반자처럼 그 차가 있었다. 사진으로 보는 말쑥한 차량 외관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또한 그는 얼마 전에 그토록 까다롭다던 정밀 검사까지 마쳤다고 했다. 정밀검사까지 통관된 차라면 외관뿐만 아니라 성능에서도 흠 잡을 데가 없다는 반증이었다. G는 나에게 차량 인도 날짜가 도래할 때까지 누차 전화나 문자메일을 통해 나에게 연락을 취해 확실성을 기하려 했고, 그런 그의 섬세함과 완벽주의가 어쩌면 신뢰로 작용했는지 몰랐다.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지극히 낯선 타인이지만 블로그 사진으로 보았던 그의 인상이나 전화 목소리로 느끼는 사람 됨됨이랄까, 예의나 경우가 또한 밝아 보였다. 그 사람을 보면 소유한 물건도 주인을 닮은 양, 판단하는데 바로미터가 되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리 믿었다.
차량을 매입하는 그날에 이르도록 자작 캠핑카를 만들기 위해 몇 개월간 따로 돈을 모아왔다는 것도 그동안 깜냥껏 공들인 부분 중에 하나였다. 마침 원래 목표했던 금액이 모아졌을 즈음 운명처럼 그 차가 내 눈에 포착된 거였다. 정말 운명처럼 말이다. 생각 끝에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을 되뇌기도 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어느 날, 그 기다림에 종지부를 찍도록 현실화 되었다는 건 운명적 개시에 필요이상 집착하는 나에겐 이미 그 차가 나의 소유가 된 양 환상에 젖게 했다. 포착되자마자 나는 차량 소유주에게 연락을 취해 본격적인 협상에 돌입했다.
출고 당시 용도자체가 캠핑카로 나온 차라면 엄청난 고가에다 사치품으로 구분되기도 해서 우리 같은 소시민들은 그림에 떡일 수밖에 없다. 그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 캠핑카를 직접 만들어 보기 위해 마땅한 기반이 될 만한 차량을 구입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능력이 있고 자금력이 탄탄하고 한량처럼 한가해서 캠핑카를 굴리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능력도 없고 자금력도 없고 그리 한가하지도 않다. 다만 바쁘게 살아가는 와중에, 일터 찾아 장기간 지방 현장으로 내려가야 할 땐 개인 숙소가 해결될 뿐만 아니라 간간이 빈 시간이 생긴다면 바닷가에 세워놓고 글을 쓰거나 생각에 잠기면 괜찮을 거 같아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고, 차를 매입할 의사에 확신이 생기기까지 과연 반드시 나에게 필요한 차인가 수개월을 고민하고 준비했었다. 때문에 긴긴날 무르익은 숙의 끝에 결실을 보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나는 열차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지난밤을 꼴딱 새운 여파라면 피로도가 가히 짐작 되었다. 끝 간 데 없이 함몰되는 가운데 정신마저 까맣고 아득했다. 포항은 열차의 종착역이었다. 하여 네 활개 느즈러져 맘 놓고 자버려도 목적지를 지나치는 일은 없어서 안심이었다.
G의 말마디는 봄날 귓결을 스치는 훈풍 같았다. 열차에서도 한 번인가 통화했지만, 포항역까지 마중 나오겠다고 하는데, 그의 깊은 배려가 헤아려졌다. 전화 통화만으로 그 깊은 속을 어찌 알까 만은 얼핏 나보다 연장자는 아닌 것 같은데도 생각이나 마음씀씀이는 나보다 훨씬 깊은 듯 했다.
이미 블로그 사진으로 보아서 포항역에서 그를 찾는 건 쉬웠다. 우왕좌왕 운집한 군중 속에서 G의, 그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은 돋보였다. 대체로 그만그만한 사람들 속에서 더러 빛을 먹고 있는 얼굴이 있을 것이다. 그가 그랬다. 한 눈에 그의 얼굴이 내 시야에 쏙 들어왔다. 마치 평소 알았던 사람인 양 나는 큰 걸음으로 그에게로 갔다. 훤칠한 키에 배우 뺌 치게 잘 생긴 얼굴이었고, 아는 척하자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이 미소년처럼 맑았다. 무엇보다 첨 보는데도 전연 낯설지 않아 살면서 한 번쯤은 만나게 될 인연으로 얽힌 존재감이 들었다. 그도 나를 본 소감을 말해줬는데, 낯익은 얼굴인 듯 편안하다고 했다. 서로 전생의 끈이 이어져 낯선 감보다는 친밀감을 우위로 삼은 때문일 것이다. 그와 나는 캠핑카가 주차된 곳에 와서도 정작 차에 관련된 세부사항을 묻고 답하기 보다는 흔히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사는 이야기를 곱씹듯 주로 그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동성끼리지만 연령의 고저를 따지지 않은 채 서로 호감을 느낄 만했다. 그는 말 중간에 자신을 꼼꼼한 성격이라 말했고, 그 말뿐 아니라 여러 가지 정황상 차량 성능에는 하자가 없을 거 같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약 차주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내 나름대로도 요목조목 차량 성능에 대한 체크 목록을 가지고 검사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해관계가 없었던 사람을 첫 눈에 믿어버린 다는 게 어리석은 치희 같고, 후회로 남을 실수일지 모르나, 어떤 사람이건 감별하는데 있어 내 안목에 필요이상 자신감이 있다는 게 크게 작용했다.
서로 양도 절차에 따라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으며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 되었다. 꼼꼼하다더니 차량이전에 필요한 갖은 서류들이 완벽했다. 나는 몇 차례 손수 차량 등록이나 이전해 본 경험이 있어 주무관서에서 원하는 서류 중에 일반인들이 모르고 혹 빠트릴 수 있는 서류가 없다 체크했지만 그것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렇게 양도 절차를 잘 마무리 하고 악수를 나눈 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포항-동대구간 고속도로 포항 나들목에서 그를 돌려보냈다. 나들목으로 진입하기 전에 연료부터 가득 채워 벅찬 장도에 오르는 첫 시동까지는 아무 걸림돌이 없었다. 보통 한 두 번은 양도 과정에서 생각 차 때문에 엄발나기 마련인데 지나치게 순조로워서 매입한 캠핑카와 나와의 좋은 인연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폐일언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만 강조 되는 게 아니라 사람과 물품과의 궁합도 어느 정도 맞아야 순탄한 법이라 했거늘....내심 이런 경우를 두고 일컫는 것 같아 흡족했다. 최소한 그 황당무계한 사고가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운명적 소유욕에 해답을 제시해 주듯, 매사 순탄했고 뿌듯했고 흡족했던 순간순간은 일테면 폭풍전야의 고요일 뿐이었다. 느닷없고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도록 마음이 가리가리 찢어진 건 장도에 오르고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일어나고 말았다. 나는 포항나들목을 지나 도로 갓길에 쓰여 있는 대로 6킬로 지점을 막 지나고 있었다. 도로는 한산했고, 무덤 속처럼 조용했다. 쭉 뻗은 4차선 고속도로가 활주로 같아서, 나는 순간 비상하고 싶은 생각까지 했을까 몰랐다. 조용한 가운데 시트 아래에서 들려오는 엔진소리 만이 우렁찼다.
헌데 장히 우렁차고 매끄럽게 들리는 엔진 소리가 듣기 좋다 생각할 그때였다. 뻥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일순 차체가 요동쳤다. 차량이 바들바들 떠니까 내 몸도 바들거렸다. 돌연한 폭발음은 마치 내 심장이 터지는 것처럼 아찔했다. 뒤이어 매캐한 연기가 엔진이 위치한 운전석 시트 옆 바닥에서 솟구쳤고, 덮개가 들썩거렸다. 연기인 줄 알았는데 뜨거운 증기였다. 더운 증기는 삽시에 실내를 가득 채워 부연 안개 속 같았다. 실내로 차오르지 못한 증기는 도로 바닥으로 냅다 깔리거나 또는 바깥으로 분출되면서 차체를 중심으로 사방이 또한 안개지대를 방불케 했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듯, 가장 가까운 데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고 즉각적인 파장이 거세게 일었지만 혼겁한 나머지 한차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때 빼고는 나는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어쩌면 위급하다 판단될수록 잠재된 기능이 작용하는 동물적 본능처럼. 나는 차분하게 능숙하게 여타 차량들의 진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차를 갓길에 바짝 붙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엔진이 작살났다 싶은데도 시동이 꺼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찰나에 시동까지 꺼졌더라면 미끈하게 잘 빠진 고속도로에서 대형 사고는 불 보듯 뻔했다. 도로에 통행 중인 차가 거의 없었다는 것도 그나마 행운이라면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숱한 차가 왕래하는 고속도로였고 위험하다면 한 없이 위험한 곳임에도, 순전히 다른 제 3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고, 나와 차만의 문제로 일단락 지어졌다. 갓길에 세움으로 그 문제는 일단 덮었다. 나는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후속 대책을 곰곰이 타진했다.
만에 하나를 감안해 전방위적인 경우를 취합하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예로 들며 믿음을 쌓긴 어려워도, 그 믿음이 깨지는 것은 공든 탑이 우지끈 무너지듯 한순간이었다. 한 눈에 반했다 해도 무방하도록 잘나 보이기만 했던 차량이지만 그때 이미 차량은 내 마음에서 멀리 떠나보냈으리라. 인연이란 생각에 믿었건만 믿음으로 화답하지 못한다면 상호 존재에 대한 신뢰는 자연히 와해되는 것처럼.
일이 터지고 얼마간 지난 뒤에야 자욱했던 증기도 한풀 잦아들었다. 엔진 열도 내린 것 같자 나는 덮개를 열고 엔진을 살폈다. 역시 예상대로 어수선했다. 굉장했던 거친 파열음이 말해 주듯 산산이 찢긴 고무 파편이 에넘느레했다. 보아하니 엔진 과열로 인해 라지레이터 고무호스가 열과 가스를 견뎌내지 못하고 그만 터져버린 상황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엔진 냉각계통에 치명적 결함이 있었고, 결함은 오랫동안 차를 방치했으므로 비롯된 실상이었다. 일테면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듯, 오랫동안 라지레터에 고인 채로 흐름이 제한된 냉각수에서 발생한 녹물이 쌓이고 쌓여 주름 같은 코일이 막혀버렸다면 번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온도 게이지 상승으로 확인할 수 있다던가, 운전자가 체감할 수 있는 예비 증상이 있기 마련인데, 모든 것을 생략한 채 불시에 호스가 터질 정도라면 내 판단에도 워낙 드문 현상이었다. 따라서 엔진 냉각계통에 대대적인 점검이 필요할 것 같았다. 단지 터진 고무호스만 교환하는 차원의 수리는 이미 벗어나 보였다. 게다가 엔진몸체라 할 법한 주물로 된 엔진블럭도 과열된 이상 모든 수리가 끝난다 해도 엔진 성능은 현저히 떨어질 터였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자동차 정비 상식의 전부였다. 나의 섣부른 진단이 정확한지 어떤지는 확신할 수 없어도, 그나마 군에서 운전병으로 복무한 때문에 이만큼이나마 짐작할 순 있었다.
우선 실질적 차주인 G에겐 전화를 넣어 사고 경위를 설명했다. 나는 그때 이미 심리에 끼친 작은 데미지를 지워버렸는데 그의 걱정스런 호들갑이 귓전을 때렸다. 심각한 상황이긴 하지만 직접 당사자인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무던한데 그는 상상력이 풍부한 때문인지 대형 사고를 예상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그도 나처럼 냉정을 찾고 보험사 긴급출동 서비스로 견인차를 수배해 보내겠다고 했다.
전화상으로 견인차가 출발했단 소린 들었지만 1시간이 지나도 견인차는 오리무중이었다. 위치 확인 차 묻는 견인차 기사에게 나는 거기가 포항에서 6킬로 지점이란 것밖엔 말해 줄 수 없었다. 낮은 야산이 듬성듬성 있고 대체로 허허로운 데다 교량 위라서 위치를 증명할 만한 아무 것도 없었다.
요즘 새로 건설된 도로마다 왜 그리도 직선주로를 고집하는지 내가 알기로 신설 된지 얼마 안 된 동대구-포항 간 고속도로 역시 당장 비행기의 이착륙이 가능하게끔 넓고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때문인지 바람처럼 달리는 차량은 경주용 차 같았고 자주 후폭풍이 몰아쳤다. 한낮에 무더위를 경험했는데도 몇 차례 후폭풍을 감당할라치면 겨우내 황야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시간도 지나 세상 속으로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냅다 달리는 차량 머리가 부리부리했다. 볼라치면 어둠 속에서 더욱 무섭게 노려보는 맹수의 눈처럼, 홉뜬 눈을 앞세운 차량들이 간단없이 달려오고 획 지나갔다.
보험회사에서 접수 뒤 10분이면 온다던 견인차가 1시간이 지나고 30분이 더해져도 오지 않고 있었다. 두어 번인가 G로부터 견인차가 왔는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확인 차 묻는 전화가 왔을 뿐이었다. 소식 없는 견인차를 기다리며 답답하다던가 암담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기다림에 익숙한 삶이었던 만큼, 곧 온다고 했으니 올 때가 되면 오겠지 하는 생각에 외려 느긋했다.
이날 입때껏 이따금 내 입에서 터진 주문이 있었다. ‘긴긴 기다림에도 웃어 반기는 건 그리움 때문이다.’이런 말을 거듭 떠올리지 않더라도 인내하며 기다리는 게 나에게만은 어쩌면 삶의 미덕처럼 굳어 버린지 오래였다. 나는 지금 무언가 기다리고 있고 견인차는 그리움의 대상이었을까...생각을 잡고 보니 뜨악했다. 어이없단 생각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때 마침 휴대전화에서 ‘편지 왔어요..’하고 문자메세지가 도착했다. 귀염성 많은 아이의 목소리로 알려주는 시그널이었다. 아이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니 문자로 소식을 묻는 지인이 반가운지 몰랐다. 캠핑카를 포섭하러 간다고 미리 귀띔했던 지인으로부터 궁금해 하는 문자였다. ‘ 올라가는 길에 차 퍼졌다’라고 답장했다. 답문을 쓰는 중에 이제는 기다리던 견인차가 도착했다.
차량 견인준비를 마친 레카기사 말로는 보험서비스로 10킬로는 무상이지만 그 외에 넘는 거리는 킬로미터 당 3천원이 부과된다고 했다. 굳이 미리 말해주는 건 견인거리가 적잖은 때문이었다. 고속도로상이다 보니 포항으로 다시 견인해 가기 위해서는 영천 나들목으로 나갔다가 다시 포항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거리상 수십 킬로가 상회했다.
내가 대략 얼마쯤이나 될 것 같으냐 물으니
“정확히는 몰라도예 90킬로는 될 거 같심더. 어쩔 수 없는 기라요. 고속도로만 아니라모 별 문제 없을낀데 여서 영천까지가 만만찮심더.”
“그럼 말이죠. 이럼 어떨까요. 차를 구태여 포항으로 다시 끌고 갈 필요 없이 영천에 있는 정비공장을 수배해서 맡길 수도 있잖아요.”
“ 제 구역이 포항이라 영천에는 아는 정비공장이 없심더. 주말이고 이 시간에 문 연 데는 거의 없을낀데요. 영천 시내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것도 무리지 싶습더.”
여기까지 레카기사와 견인 요금에 따른 제반 대책을 강구해 보다가 일단 차주인 G에게 전화를 넣었다. 물론 일이 터진 이상 견인요금은 그가 부담해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에게 저간의 사정을 통보하고 상의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일이 요래 된 이상 선생님께 염치가 없심더. 입이 열 개라도 지는 할 말 없으예. 견인 요금이나 정비 비용 같은 건 염려 마시고 선생님 뜻대로 하이소. 사고로 선생님 몸이 상하지 않은 게 저로선 천만다행인기라요. 정말 죄송스럽게 됐심더. ”
다른 건 모두 차후로 하더라도 내 몸 상하지 않은 것만을 강조하는 그의 말이 고마웠다. 앞서 사고 후 사고 발생 경위를 설명할 때도 G는 ‘ 을매나 놀라셨능교. 어데 다친 덴 없심니꺼? ’하고 내 몸 상태를 먼저 걱정해 주었고, 내가 괜찮다 하니까 저편에서 안도해 하는 한숨이 전파를 타고 묻어왔었다.
주된 관심사인 차량 문제로 최악의 결과를 낳은 상황이지만 그가 보여준 마음씀씀이는 보통사람이라고 아무나 지닐 수 있는 품격이 아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게 사람임을, 그는 한시도 가벼이 하지 않았고 말끝마다 나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묻곤 했다. 이런 그의 인간미 넘치는 처세가 아니더라도 애당초 나는 그를 탓할 맘이 없었다. 사고든 머든 세상 살다보면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고의가 아닌 이상 예견된 사고였다면 충분히 대처했거나 절대 발생하지 않았으리라. 만사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듯이, 일어 날 수도 있는 일이라 치부하면 그리 마음 상해 할 일도 아닌 것이다. G가 나에게 양도한 차량이야 그렇다 쳐도 그깟 차 때문에 삿된 감정까지 갖는다는 옳지 않았다. 처음 차를 팔겠다고 한때부터 지금껏 그의 언행은 한결같았고 언행만큼이나 마음도 한결 같으리란 믿음과 신뢰가 두터웠다. 사람이 사람을 못 믿으면 사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 자체가 의심투성이인데다 사사건건 적대적 반감만을 조장할 것이다.
그가 스스로를 꼼꼼하다 했고 나름대로 관리에 만전을 기했다고까지 주지시켰어도 정비 상식이 풍부하지 않다면 엔진 속까지 점검한다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고 포항에서 수원까지 끌고 갈 것을 감안해 엔진 양호 여부를 진단한답시고 장거리 시운전을 해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차 상태가 불량하다 해서 무조건 차주에게만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이유인 즉, 그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 견인 요금도 만만찮고 하니까 일단 영천으로 가서 정비공장 문 연 데 있음 한 번 문의해보고 내가 다시 전화 드리죠.”
“그러시겠다면 선생님 편한 대로 하이소. ”
나는 스스로 수고로움을 떠안았다. 돌아가는 사정이 이 지경이라면 그가 사고 현장으로 득달같이 달려와야 옳지만 어차피 잠시나마 내 소유랍시고 내가 몰고 가던 차이니 만치 좌시할 순 없었다. 비록 내가 피해 당사자이긴 해도 내 입장이 있음 뭐라 말은 안 해도 저쪽 입장 역시 만찬가지였다. 서로 한 발 씩 물러나 공동체적인 생각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게 마땅했다.
견인차에 동승해 보긴 난생 처음이었다. 내가 몰던 차가 무장해제 된 채 견인차 꽁무니에 매달려 비실비실 따라 오고, 왠지 보기 딱해서 앉은 자리가 불편했다.
영천나들목를 빠져나와 조금 가다보니 아직 불 밝힌 카센타가 있었다. 나는 마중 나온 정비사에게 거두절미하고 차량 상태부터 세세하게 설명했다.
“ 저흰 힘들겠심더,..우예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더만 더 들어보나마나 엔진헤드 쪽 문제 같심더.”
“엔진헤드요?”
“갑자기 호스가 터졌다해가 그리 보입니더.”
“헤드 쪽이면 정말 난감하네요.”
하는 수 없이 카센타를 뒤로 하고 견인차는 포항 쪽으로 핸들을 감아 돌렸다. 고속도로로 진입하고서도 견인차의 진행 속도는 지루하리만큼 더뎠다. 견인차에 맞먹는 육중한 쇠 덩어리를 매달고 가는 터이니 오죽하랴만 견인차가 감당한 무게가 내 맘을 압박하는 무게 같았다.
엔진헤드라...엔진헤드라...텅 빈 생각에 입짓에 올리며 이따금 엔진헤드를 떠올려 봤다. 실상 사고가 터진 직후 나와 차량의 인연은 거기서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인연을 만들 수도 있으리라 희미하게나마 미련의 끈을 잡고 있었는데 엔진헤드가 의심된다는 정비사의 진단이 있었던 이상 실낱같은 미련도 접어야 할 판이었다. 그만큼 엔진헤드의 손상은 전체적으로 중요하고도 치명적이었다. 예전에도 한 번인가 화물차 엔진헤드 수리를 맡겨 본 경험이 있었는데, 수리비만도 7,8o만원 정도 드는 큰 고장이었다.
견인차 기사가 거래한다던 포항시내 정비공장에 닿은 시간이 얼추 밤 10시에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이미 연락을 취해놔서 그쪽 정비공장에서도 퇴근하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기다렸다기보다는 공장 마당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차를 한쪽에 내려놓고 견인차 기사와 더불어 나도 술판에 끼어들었다. 그럴 때 마시라고 술이 있는 것처럼 술맛이 달았다. 헛된 수고에 노독까지 겹친 마당이라 더한 듯했다. 첨 본 사람들이만 술판에선 모두가 친구인 것처럼 분위기가 좋았다. 견인차에 매달려온 차가 캠핑카라는 소리에 어떤 이는 내 쪽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목소리를 키웠다.
“하이코, 마.. 젊으나 젊은 사람이 참말 멋지게 삽니데인..캠핑카라예 하모 좋지예..”
“아닙니다. 이 차 오늘 부로 종쳤습니다. ”
“와 그란데예?”
“ 뭐 있나요. 인연이 아닌 거죠.”
“허긴 듣고본께네 맞는 말 같심더. 그란다캐도 전 차주한테 수리해 달라케가 찰떡 인연 만들모 안 되겠심니꺼? 들어보이까 수원에서 포항까지 저 차 살라꼬 온 열정이 대단심더. 여까지 와가 빈손으로 돌아가모 에로버 우야노. ”
“열정요..하하하 ...저야 머,,,다리 품 좀 팔고 고생스러워도 좀 감수하면 반드시 좋은 차를 얻지 싶었는데 현실이 내 편이 아닌 걸 어쩝니까. 그냥 접는 쪽으로 정했습니다. 인수 포기해야죠. 포항으로 여행 온 셈 치면 되고요.”
“ 참말 생각 한 번 편케 하시네요.. 그라이소 마,,,정비밥 먹고 잔뼈 굻었지만 서도 장담은 몬하겠심니더만 저런 차 잘못 샀다간 두고두고 속세길지 누가 아는교. 한번 맘이사 어긋난 거 어쩔 거이요. 전 차주와 확실히 쇼부 보고 낼사나 함 진단해 보임시더.”
정비공장 공장장이라고 소개 받은 사람에게 공장에 오자마자 진단부터 받아보자는 내 제안이 있었던 터지만, 내가 인수 포기 쪽으로 가닥을 잡자 시간이 시간이니 만치 그는 모든 걸 내일로 미뤘다. 나 역시도 구태여 밤늦은 시간에 진단 받자고 설레발 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공장장인 그가 말한 거와 내 생각과 거의 흡사한 태도를 보인 것도 그랬다. 당장 수리야 하면 괜찮을지 몰라도 항차 문제의 여지가 줄줄이 사탕처럼 영글지 말란 법도 없으니 초장에 깨끗하게 접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얼렁뚱땅한 술판도 술이 떨어지자 하나 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 나만 홀로 남겨졌다. 누군가가 일러준 대로 하룻밤 유할 곳을 찾아 돌아서다 말고 나는 차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언뜻 멀쩡해 보여도 의지가지없는 처지에다 지독한 속병을 앓는 것처럼 딱해 보였다. 정비공장 후미진 귀퉁이에 너부러진 차가 나만큼이나 쓸쓸하다면 심히 동병상련 어린 심정이었다. 살뜰한 애정은 없어도 이 차를 인수하기 위해 적잖은 날 동안 건몸달아 했다는 것만으로도 짐짓 애처로웠다.‘웬만하면 진득하게 깊은 속내를 감추지 왜 터트렸누..나와 인연 맺기 싫었던 게야.’나는 속으로 말하고 차에게로 다가가 혹시 몰라 문단속을 했다.
아까 어떤 이가 가르쳐준 <포항온천> 찜질방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찜질방으로 가는 중에도 G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의 한결같음은 또한 내 잠자리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웃음엣소리로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말했듯, 여행 중이라고 맘을 다잡은 이상 잠자리가 좋고 나쁨은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그냥 어디로든 이슬만 피할 곳에 가서 하룻밤 신세지면 그만이었다. 어디서건 새우잠인들 못자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단한 하루였다. 사우나에서 묵은 피로를 씻어내듯 박박 씻었고, 체내 속속들이 낀 피로까지도 뽑아내듯 땀까지 흠뻑 흘린 뒤 녹녹한 기분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은 감았어도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한동안 뒤척이다 당최 안 되겠으면 흡연실로 기어들어가 담배 한 대 피워 물곤 했다. 그런 식으로 담배를 서너 대 피운 뒤에 겨우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늦게사 잠을 청했지만 나는 이튿날 새벽 댓바람에 눈을 뜨고 망연했다. 희붐하게 깔리는 새벽 여명이 찜질방 통유리 창으로 여실했다. 저편으로 지난밤에 몰랐던 동해바다가 출렁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새벽 풍경은 바람도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적요한데 파도는 나울나울 산마루를 이루고 있었다. 어쩌다 눈이 떠지긴 했어도 몽롱한 내 의식은 오복조르듯 잠을 원했다. 해서 다시 누워 눈을 감았지만 역시 괜한 짓이었다. 이윽고 나는 찜질방에서 나와 버렸다. 나오긴 나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커피 한 잔 뽑아 들고 찜질방 앞 피크닉테이블에 앉았다.
정비공장이 문 여는 시간이 9시쯤이니까, 그때 보자고 어제 밤 술판 중에 공장 직업이 말해줬었다. 때문에 6시에 찜질방에서 나온 나는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 그때 마침 중년 여자가 머리가 젖은 채로 찜질방 출구로 나오고 있었다.
“저, 바닷가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죠?”
“ 그라모예 저짝으로 가가 또 저짝에서 우회전해가 쭉 가모 되는데예.”
딴엔 부지런히 설명을 하는 거 같은데 도통 어디로 어찌 가라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럼요. 대충 방향만 잡아주세요? ”
“저짝인데예...어데서 오셔스예?”
“수원요.”
“먼 데서 오셨네예..”
여자는 살짝 미소 한 모금 쏟아 놓고 제 갈 길로 갔다. 역시나 내 행색이 여기서도 여행 온 사람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나는 중년 여자가 일러준 방향대로 길을 더듬었다. 한적한 새벽 거리, 대로 옆을 터벅터벅 걷는 내 옆으로 지나는 택시로부터 빵빵 소리가 몇 차례 들려왔다. 듣기로는 단순한 경적소리가 아니었다. ‘손님, 가시는 데 어디로든 모셔다 드리니까 일루 타이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저들이 알은 체 하건 말건 번번이 묵살했다. 9시까지는 나빠야 할 하등 이유가 없었다. 많은 생각을 머리에 이고 천천히 걷는다는 것,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트예프스키가 역설했듯 느림의 미학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거였다. 하여 이처럼 값진 여유를 택시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
찜질방 창밖으로 보았던 바다인지라 거리상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진 않은데도 워낙 느리게 걷다 보니 바닷가에 왔을 땐 시간이 꽤나 흘러 있었다. 오는 길목에 차를 맡긴 정비공장도 있었다. 나는 간밤 내내 이슬을 입고 서 있었을 차를 힐끗 쳐다보고 내처 바닷가로 향했었다. 그 차가 안 보일 땐 모르겠더니 또 그렇게 보니 마음 한 쪽이 헐어버린 느낌이었다.
조성 된지 얼마 안 된 듯싶은 해맞이공원 앞 바닷가에서 해감내가 훅 끼쳤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저절로 코끝이 찌릿했다. 반사 신경이 반응하듯, 움찔 콧방울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바다 특유의 그 냄새는 비리척지근하면서도 쉬척지근한 바다 속 해산물이 부패되면서 풍겨오는 냄새일 터였다. 그러고 보면 냄새는 바다만의 잘못만은 아닌 듯싶었다. 일견 공생관계랍시고 공업도시를 끼고 면면히 이어져온 탓도 무시 못했다. 이처럼 해감내의 또 다른 공급원이 분명하듯, 해안도로 넘어 발 아래로 철썩거리는 검푸른 파도 빛이 증명해 주었다. 대략 동해의 바다 빛은 서해와 달리 바다 고유의 색상을 지녔다 생각해 왔지만 포항 앞바다는 서해의 흙빛 파도보다 더욱 조잡한 감빛을 띠고 이었다.
나는 해안도로 따라 작은 이름 모를 포구에 들어섰다. 포구에 와서는 곧게 뻗은 방파제 끝선 턱진 데로 올라갔다. 높은 파도가 넘어 오지 못하게 방파제 위로 1일터 정도 보호벽이 쳐져 있는데 나는 그 위에 올라타 곡예 하듯 걸었다. 바다 쪽에서 높은 파도가 힘차게 방파제를 때린 뒤 포탄 파편 튀듯 부셔졌다.
더는 걸어 갈 수 없는 방파제 맨 끝에서 해원 멀리 시선을 쳐들었다. 기운껏 포악을 떤다 싶은 파도만 빼고 세상 면면이 아직은 잔잔한데 먼 바다 위로 먹장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머잖아 한바탕 비를 뿌릴 것만 같았다.
“인연이 아닌 게야...인연이 아닌 게야...인연이 아닌 게야...”
어쩌면 아직도 잠재의식 한편에서는 미련을 떼어내지 못해 스스로를 환기시키는 주문이었다. 쌓아온 믿음이 커서였을까, 내 자신도 모르는 애착이 지대해서였을까. 아닌 건 어떻게든 아닌 거라, 다짐하듯 노상 꾹꾹 눌렀어도 무언가 모를 아쉬움이 있는 것 같았다. 눈 닿은 대로 바다를 보고 있지만 눈으로 보는 바다와 생각에 번지는 무늬는 근본부터 달랐다. 해도 바닷가에서 오래도록 바다를 보고 있으면 어느새 평정을 찾고 일정한 파장이 마음결을 대신해 주었다. 눈에 넣은 바다와 시원한 바람이 언제나처럼 주효한 때문이라면 역시 바다는 내가 의지하기에 가장 좋은 벗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같은 바다. 그런 바다를 자주 가까이 하기 위해 캠핑카를 생각했는데, 이제 만사 공염불이었다. 기대가 커서 실망도 큰 경우라면 내내 마음 언저리에 남아 지분거렸으리라.
나는 포구를 등지고 돌아섰다. 바다에 기대어 보고 생각하는 사이 또한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정비 공장 문 여는 시간에서 벌써 30분 전이었다. 느낌을 부여잡고 한마음인 양 느린 템포로 보조를 맞추는지라 시간도 마디게 갈 거 같은데, 한 번 몰입하고 나면 시간은 빠른 걸음으로 달아나 있었다.
포구에 오는 길에 편의점에다 휴대전화 급속 충전을 맡겨놓았는데, 나는 그걸 찾아 들고 빠르게 재우쳤다.
생각에 다소 서둔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비공장은 여일하게 공활했다. 공활한 속에 가만히 있기도 뭣해서 공터를 왔다리갔다리 노니는 와중에 마침 홀쭉한 배에서 신호가 왔다. 까맣게 잊고 있던 아침 끼니를 부르는 소리였다. 여태 잠잠하더니 끼니도 다 때가 있었다.
정비공장 옆 건물에서 다음다음 건물에 개시한 설렁탕집이 있었다. 설렁탕은 여느 설렁탕과 달랐다. 맛이 다른 게 아니라 내용물에서 약간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까 국에 말아야 할 밥은 보통 공기 밥에 반에 반도 안 되는데 면사리만 따로 푸짐하게 나왔다. 해서 나는 밥그릇을 들어 올리며‘ 왜, 밥을 푸다 말았네요’ 했더니 주인은‘사리가 많다 아닙니꼬’ 하는 거였다. 나는 더는 군소리 없이 국물에 모조리 처넣고 우적우적 먹기 시작했다. 밥알이 많이 씹혀야 하는데 대신에 사리가 많아 국밥을 먹는 게 아니라 아침부터 국수를 먹는 기분이었다. 아무러하든 그렇게 또 한 끼를 때웠다면 향후 배에서 신호가 올 때까진 언제까지든 끼니를 모른 척 할 수 있었다. 경험상 다음 끼니는 모르면 몰라도 저녁 무렵이나 돼야지 싶었다.
다시 정비공장에 와보니 다들 출근 뒤 정비 준비에 바빠 보였다. 그런데 직원들이랍시고 어제 밤에 본 사람들이 아니라 못 보던 사람들 뿐이었다. 해서 물었더니 어제 밤에 내가 본 사람들은 인근에 사는 공장장 동무들이라고 했고 공장장은 아직 출근 전이라고 했다.
나는 캠핑카 차주인 G를 전화로 호출했다. 어제 밤에도 인수 포기 쪽을 염두 해 넌지시 입질을 했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 했다. 정확한 진단을 떠나 공장장의 어림짐작 또한 엔지헤드 손상이 직접적인 영향일 거라고 한 마당에 더 이상은 질질 끌 수 없었다.
G는 가까운데 사는지 생각 보다 빨리 왔다. 오자마자 그는 양손으로 내 손부터 덥석 잡았다.
“ 머라 드릴 말씀이 없심더..정말, 미안합니더...”
그의 표정에는 진심으로 사죄하는 빛이 영역했다.
“ 정밀검사도 무사히 맞췄고 해가 엔진에는 별 문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예 공교롭게도 일이 이리 돼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심더.”
“머, 그럴 수도 있죠. 누가 알고 그랬겠습니까.”
“글도 그게 아니지 싶습더. 저 땜에 안 해도 될 고생까지 하시고 잠자리는 어데서 했는교. 불편하진 않았는교? ”
“ 여행 다니는 놈이 잠자리를 타박하면 진정한 여행자가 아니죠. 찜질방에서 아주 편하게 잘 잤네요.”
“ 어찌 했스모 되겠습니꺼?”
“뭘요?”
“ 어찌 하모 좋을지 뜻대로 하이소. ”
“네에,,,어제도 미리 운을 떼었듯이 저와는 인연이 아닌 모양입니다. 인수 포기할 생각입니다.”
“알겠심더. ”
G는, 딴에도 마땅하다는 듯 체념한 낯빛이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한 여자가 나란히 섰다. 보아하니 G의 차에서 내리는 걸로 보아 그의 아내인 모양이었다. 자세히 봤더니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차를 소개할 때 보여준 네이버 블로그에서 보았던 얼굴이었다. 사진에서도 그렇게 보기 좋은 커플이더니 실제 나란히 세워 놓고 보니 더욱 보기 좋은 한 쌍이었다.
“여보야? 인사 해라..”
그의 말이 무섭게 여자가 미소 띤 얼굴로 꾸벅 머릴 숙였다.
그의 아내는 가선 진 선한 눈매에 볼 살이 적당히 올라 참한 듯 귀여운 듯,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미모였다.
“지 와이프가예. 형님처럼 좋은 분은 흔치 않다 했더니 함 뵙고 싶다 해가 대려 왔심더. 딴 사람 같음 차가 말썽이모 노발대발 할낀데 형님은 오히려 좋게 생각하시고 말 한마디한마디 좋게 대해 주셨셔 얼매나 고마운지 모립니더. 솔직히 제가요 형님이 어찌 나오실지 가슴 많이 졸렸다 아닙니꺼...하하하”
“별 말씀을,.. 과찬이네요. 세상에 사람 힘으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는데 감정만 앞세운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 않죠. 저두 선생님을 처음부터 좋게 보았고, 탓할 맘은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네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차가 저렇다고 한 번 신뢰했던 사람, 도매급으로 매도할 순 없는 거 아닙니까. 차와는 별개로...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이랄까,,왜 그런 게 있겠죠.”
“형님요? 한 번 안아 봐도 되겠는교? ”
G는 그리 말하자마자 대뜸 나를 안아 버렸다.
“형님요? 나중에라도 꼭 한 번은 다시 뵜으면 합니더.”
“ 살다가 기회가 되면 뵐 날이 오겠죠. 여행을 좋아하신다 했으니 반드시 다시 볼 사람들이라면 아무래도 여행 중에 보아지겠죠. 제가 포항에 올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하모요. 맞심더...”
“제 생각 한마디만 드리죠.”
“얼마든지 말씀 해보이소.”
“지금 두 분 부부와 차를 나란히 놓고 보니까 제 생각엔 저 차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두 분인 듯싶네요. 언뜻 보기 좋은 조화랄까. 저와는 인연이 될 차가 아닌 것도 분명해 보이고요. 차를 어디 내다 팔 생각 마시고 잘 수리해서 캠핑 여행도 많이 하신다면 캠핑카와 함께 두 분의 인연이 더욱 빛날 것 같네요. 세상사 모든 게 인연은 이미 따로 정해져 있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심더. 이 참에 꼼꼼하게 수리 해가 타던가. 팔더라도 요번처럼 낯부끄러운 실수는 두 번 다시 안하겠심더. ”
“제 보기엔 수리비가 많이 나올 거 같아요.”
“그케도 어쩔 수 없심더. 형님에겐 참말 죄송하고 고맙심더.”
그는 어느 순간부터 깍듯하게 윗사람 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한 번 보고 다시 보지 않을 사람에게 손윗사람 대하듯 한다는 것은, 성격 좋아 붙임성 있는 처신은 둘째 문제로 하더라도 나를 그만큼 맘으로 가깝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양도매매 계약서를 쓸 때 내가 마흔 살인 걸 알고 그는 깜짝 놀랬었다.
“참말 마흔인교? 첫눈에 저와 연배가 비슷하던가 많아야 한두 살 위 인 줄 알았심더. 젊게 사시니까네 글케 보이는가 봅니더. ”
그렇게 말하는 그는 삼십 초반이었다.
이제 막 출근했던지 우리 쪽으로 정비공장 공장장이 다가왔다.
“ 어제 밤에 또 2차 가서 떡이 됐다 아닙니꼬. 많이 기다리셨는교?”
공장장은 나를 마주보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에게는 내가 여전히 어젯밤에 맡긴 차의 고객이었다.
“공장장님? 이제부턴 모든 일처리는 제가 아니라 이 분에게 하세요. 어젯밤에도 말씀 드렸듯 이 분이 원래 차주거든요. 전 여기서 이만 빠집니다. ”
“아..그래 하시기로 했는교..알았심더. 서운하기겠심더. ”
“서운하긴요..”
“바로 수원으로 가실라꼬요?”
“아뇨,,,여행 온 기분 내기로 했으니까. 포항에서 바로 뜨면 여행 온 재미 없겠죠. 포항여객터미널에서 배편으로 울릉도나 한 번 갔다 가야겠네요.”
“울릉도요? 좋지요,,,근데요...오늘 비 엄청 온다는데 그케도 가실라꼬요? 날을 잘 못 잡았다 아닝교.”
“듣고 보니 그러네요..할 수 없죠 머,,그럼 그냥 가야죠.”
나는 공장장과 작별 악수를 했다. G와는 차에 관련된 거래 서류와 금액을 되 물림한 후 역시 작별 악수를 나눴다.
포항역까지 가는 길에, 아니나 다를까 공장장 말대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나는 길에 여객터미널이 보였다. 많은 여객선들이 부두에 정박해 있을 뿐, 바다로 향하는 뱃머리는 없었다.
지난밤부터 울릉도를 염두하고 있었는데 것 또한 만사 수포로 돌아갔다. 우정 포항까지 올 수 없으니 이왕 온 김에 아직 가보지 못한 울릉도는 마침 좋은 기회였는데 역시 일진이 사나운 날은 뭘 해도 순조롭지 않았다. 또한 포항역에서 티켓을 끊는데도 마찬가지였다. 휴일인지라 차편이 신통찮은 거야 빤한데도 사사건건 머피의 법칙이었다. 할 수 없이 포항에서 동대구까지 무궁화로, 동대구에서 대전까지는 ktx로, 대전에서 수원까지는 새마을호로 노상 갈아타며 꼼짝없이 시간에 갇힌 채로 길을 열었다. 이렇듯 이어달리기 하듯 차편을 수배하는데도 매표 직원과 한참 실랑이를 했지만, 그나마 매표직원은 차편 때문에 사정하는 나의 투정을 웃는 낯으로 다 받아주었다.
캠핑카에 대한 열망 하나로 기다리고, 실행에 옮기고, 그 실행이 헛수고로 끝나고, 종내 빈손인 채로 되 올리는 길,...휑한 맘에 돌이켜보면 어처구니없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실실 웃음이 났다. 웃고 있지만 찰기 없는 헛헛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생각 한편으론 찬란한 경험이라 자평했다. 자주 이런 일이 생긴다면 안 되겠지만 사는 동안 더러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고, 혹 생긴다면 삶이 그리 싱겁지 않으리란 결론에 도달했다. 소위 글 쓰겠단 놈이 이런 경험을 터부시 한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글감을 얻겠는가. 때문에 쓰린 경험일지라도 찬란했다, 고마웠다,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와 글쓰기는 생의 마지막에 이르도록 함께할 확고한 인연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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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흥미를 갖게 하는 전개와 세련된 표현에서 글의 품격이 느껴집니다. 문학하시는 분이군요. 반갑습니다. 마치 소설을 읽듯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읽으며 내내 불안처럼 다가왔던 반전이 젊은 부부의 친절이었는데 그나마 다행입니다. 때론 처음 목적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가져다주는 삶의 가르침, 결국 정신의 충만은 경험의 충만과 맞먹는다고 말해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글쓰기를 통해 확고하고 아름다운 인생의 것들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길을 가르쳐주는 중년여자의 대목에서 킥 웃었습니다.^^
솔직히 너무 길어서 못읽었습니다...나눠서 글을 올려주시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마루님의 댓글로 대충줄거리 짐작합니다 ㅎㅎ
글자체를 바꾸면 어떨까요? 글씨 자체가 딱딱한 느낌을 주어서 읽다가 지루함을 느낌니다. 잘 보고 갑니다.
글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