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장
"올까?"
"물론이지요."
벽하곡.
제갈세가의 본가가 있는 태산 벽하곡이 내려다보이는 계곡 위쪽에 제갈수연과 백무천이 서로를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오지 않겠지만 조천영과 냉추렴이 있으면 오게 되어 있어요. 더구나 아이까지 있잖아요."
"걔는 죽었잖소."
"그거야 우리만 알고 있는 일이고 아버지 되는 자는 모르잖아요."
무서운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다섯 달 된 소령이 이미 죽었다 하면서도 그 애마저 이용하여 함정을 만들고 있었다.
"함정은?"
"백랑! 당신 같으면 사방이 만년한철로 막혀 있는 일 장의 공간 속에서 오십여 개의 광천뢰가 터지는데 빠져나올 수 있겠어요?"
그녀가 백산과 철목승을 잡기 위해 준비한 함정은 광천뢰였다. 하나만 있어도 주위 오 장 정도가 초토화된다는 그런 광천뢰를 오십여 개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백산이 뇌룡현에서 사왔던 그것이 이제는 그의 목을 잡는 함정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맹은 어찌 되었어요?"
함정을 점검하기 위해 화진악을 제거한 뒤 바로 이곳으로 왔기에 그동안의 천무맹 진척사항을 알지 못했다.
물론 밀정들에 의해 소식은 계속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녀가 맹에 대해 말을 꺼낸 의도는 따로 있었다.
"담운천이 전면으로 나섰어."
"구파를 비롯한 천무맹 무사들이 끔뻑 갔겠군요."
"왜 모른 척하나. 본인의 작품이면서."
자신의 말에 제갈수연이 천연덕스럽게 장단을 맞추자 백무천이 비꼬는 표정으로 말했다. 화진악을 제거하면서부터 이미 계획했던 일일 터였다.
천무맹의 패배를 예견하고 있었던 그녀였다.
아니,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손수 화진악까지 제거한 그녀가 아닌가.
그녀의 예상대로 연일 계속되는 패배로 인하여 천무맹 무인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화진악의 전사소식까지 전해지자 맹을 떠나는 인물들까지 생겨났던 거였다. 그때 등장한 사람이 검제 담운천이었다.
더구나 그와 같이 나타난 사람은 소림의 각인대사.
초대 맹주와 십일 대 맹주가 동시에 나타나자 천무맹의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곧바로 두 사람을 태상맹주로 추대하고 천무맹의 모든 전권을 맡겼다.
그날부터 시작이었다. 거의 삼 할 정도의 전력밖에 남지 않았던 천무맹이 천마맹을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담운천의 진가가 다시 한 번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놈들은 연매 때문에 이기고 있다는 걸 몰라."
각인대사가 제갈수연에게 맡긴 혈맹을 이곳에서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혈맹과 그녀가 아니라면 삼 할 정도 남아 있던 천무맹의 병력으로 어떻게 전세를 뒤집겠는가.
그러나 천무맹 무인들이나 구파의 잔존세력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오직 담운천만 신처럼 받들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오늘쯤 내가 맹주대행으로 지목될 거야."
백무천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비록 아직은 최고의 자리는 아니지만 실질적인 명령권자가 되는 것이다. 처음 공동파에 들어가면서 꾸었던 꿈을 드디어 성취하는 순간이 도래했다.
"백랑! 혹시…… 말이에요."
"무슨 말인데, 그래. 해봐."
기분이 잔뜩 고양되어 있었기에 제갈수연을 대하는 목소리에도 활기가 넘쳐났다.
그러한 기분 탓이었는지 제갈수연의 얼굴이 무엇인가를 주저하며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만약…… 만약에 말이에요. 담운천이 저를 맹주대행으로 지목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무슨 소리야? 이미 내가 되기로 언약이 되어 있는걸."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며 백무천이 펄쩍 뛰었다. 얼마 전 장생원에서 담운천과 약속했었다.
자신이 굴복하는 대신 통합 맹주자리를 준다 했던 것. 지금껏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단 한 번도 그 자리를 타인에게 양보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 타인이라는 범주에는 물론 제갈수연까지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일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도와주실 거죠?"
"그럼 도와줘야지. 연매는 내 부인…… 설마……."
백무천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장난으로 묻는 게 아니었다. 이미 언질을 받았기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 인상 쓰지 말고요. 명령만 내 이름으로 나갈 뿐 모든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하는 거예요."
"거절도 안 했을 테지?"
품 안으로 파고드는 제갈수연을 쳐다보는 백무천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자신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들의 제의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분명 남편이 될 자신이 있는데, 백무천이란 사람이 있는데도, 양보할 생각조차 없었을 게 분명하다.
그녀의 야망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자신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여인이 그녀였다.
"아니에요. 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당신을 해친다 했단 말이에요."
백무천의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대답도 미리 생각해두었다.
그의 자존심을 자극해서 모든 분노를 담운천에게 돌리도록 해두는 것. 이젠 자신의 힘없음을 한탄하며 이를 갈아댈 것이다.
그녀의 예측대로 백무천의 두 눈 속에 불길이 일렁대고 있었다. 검제 담운천, 천신가의 가주에 대한 진득한 살기였다.
'두고 봐라, 담운천! 이번의 선택을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마.'
온몸을 부르르 떨며 이를 갈아대는 백무천의 품속에서 제갈수연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사랑과 야망은 별개랍니다, 서방님…….'
그들이 주었던 게 아니고 자신이 요구해서 얻어냈다.
담운천과 각인대사의 표정에서 자신을 더 신뢰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에 다시 한 번 모험을 감행했다.
이곳 제갈세가를 이용하여 철목승과 파멸안을 없애는 조건을 걸고 맹주자리를 요구했던 거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맹주가 되든 백무천이 되든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말 잘 듣는 수하라 생각하고 있을 테이니까.
그녀의 모험은 또 한 번 성공을 거두었고 드디어 오늘 자신에게 맹주대행의 지시가 떨어졌다. 바야흐로 양맹의 초대 통합 맹주가 된 것이다.
'이젠 천무맹이 제갈세가야, 천무맹이…….'
"천마맹에서는 누가 배신하기로 했나."
"조금만 기다리시면 알게 될 거예요."
이미 그쪽에도 손을 써두었는지 백무천의 물음에 빙긋 미소로 대신하고 있다. 아직은 알아서 안 된다는 의미이리라.
'아무리 완전한 조직이라 해도 비상을 원하는 자는 있기 마련입니다. 언제나 이인자의 역할만 해야 하는 자가 있으니까요.'
* * *
복우산(伏牛山).
진령산맥의 동부를 이루는 산맥 중의 한 산으로 하남성 서부의 분수령이다. 이곳 복우산의 철령이라는 계곡에 천마맹의 진지가 있었다.
"어떻게 되었나."
굳은 표정의 검마 요대철이 막 군막을 들어서는 궁유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과거 요대철의 모습이 아니었다.
전면전을 시작한 지 두어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수척해진 그의 얼굴에서 과거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패배자의 모습인 것이다.
화진악을 몰아칠 때만 해도 승리를 거머쥔 것으로 알았다. 도망치는 그를 쫓아 천무맹까지 바로 진격하려 했었는데 뜻밖의 복병을 만나고 말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지금껏 싸우던 천무맹의 무인들과는 전혀 다른 무리들이 자신들을 공격해온 것이었다.
더구나 패천마궁과 고루천마가 있던 진영은 전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가장 큰 타격이 패천마궁의 전멸이었다. 그들의 전멸은 곧 보급이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때부터 물러나기 시작한 전쟁이 이제는 더 이상 피할 곳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천마맹이 있는 감숙성으로 사람을 보냈고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감숙성도 이미 맹주에 의해 장악되었습니다."
광뇌 궁유의 얼굴에 참담함이 어렸다. 그도 제삼세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회란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니기에.
그런데 그 세력이 천무맹과 손을 잡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양맹의 양패구상을 노리던 세력이었기에 빠른 시간에 천무맹을 도모하고자 하였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패천마궁만 패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가장 믿을 수 있었던 세력이 패천마궁이었는데 그곳이 패하는 바람에 모든 일이 틀어져버렸다.
설마 파뢰권마(破雷拳魔) 패무극(覇武克)이 패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패무극의 무위는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천마맹에 있는 철목승과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였다. 구마들보다 한 수 위의 무공을 지니고 있는 자였기에,
설사 자신이 있는 곳이 패한다 하더라도 그곳만은 승리하리라 여겼다. 즉 천무맹에는 패무극을 상대할 무인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가 단 한 수에 재가 되었다고 하였다.
백무천.
결코 전쟁의 변수가 되리라고는 티끌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던 그로 인하여 다 잡았던 승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만 없었더라면 새로운 적이 추가되어 나타난다 하더라도 문제될 리가 없었다.
"멈추시오! 커억!"
"무슨 일이냐."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검마 요대철이 자신의 검을 뽑아들며 소리를 질렀다.
"나다!"
"너는……?"
군막 안으로 들어서는 인물을 쳐다본 요대철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철마 지청인.
하남성 북편을 공격하고 있던 철마 지청인이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이다. 혼자만이 아니었다. 검은 방갓을 쓰고 있는 두 사람과 같이 들어온 것이었다.
"이번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요대철!"
"천무맹에 붙기로 했나. 마도인의 꿈을 버리고."
"큭! 마도인의 꿈이라 했나. 착각하고 있군, 요대철. 마도인의 꿈이 아니라 너와 나의 꿈이었지. 그리고 저기 있는 쥐새끼의 꿈이었고."
마도가 뭐고 정도가 뭐란 말인가. 마치 그것들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자신의 꿈을 위해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마도가 득세하면 뭐 할 것이며 정도가 득세하면 뭐 할 것인가. 바뀌는 게 없다. 단지 자신들에게 절하는 사람이 더 늘어난다는 것밖에는…….
그런데.
그런 것도 살아 있을 때야 가능하다. 죽어버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길을 바꿨다.
어차피 최고가 되지 못할 바에야 어디에 있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천마맹이든 천무맹이든, 철마 지청인은 이인자일 뿐이기에.
"잘 가라! 요대철."
검마 요대철을 가만히 응시하던 지청인이 몸을 돌렸다. 요대철은 지금 와 있는 강시들이 처리할 것이다.
자신은 나설 필요도 없다.
반항하던 모든 부하들도 정리를 했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무인들만 남았다. 천무맹과 천마맹을 통합한 하나의 단체를 이끌어갈 인재들.
"허허!"
검마 요대철이 허탈한 웃음을 토했다. 설마 내부의 배신으로 백 년의 세월이 사라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미 전쟁에 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적어도 전쟁터에서 적과 싸우다 죽고 싶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지만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기에 전 병력을 이끌고 나왔다. 백 년의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으면 되었다는 생각.
"저까짓 강시로 나를 잡을 수 있다고 여겼나?"
눈앞에 있는 저것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아마 군막 주위를 포위하고 있을 것이다. 한두 마리 정도면 해볼 수 있다지만 지금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았을 때 적어도 열 마리 이상이다.
'네가 살아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뭐 할 건가.'
멀어지던 지청인에게서 들려온 전음이었다. 부하 한 명도 없고 돌아갈 곳도 없는 백이십의 늙은이가 어디서 무얼 하겠냐는 말이었다.
'오십 년의 세월로 만족하게.'
자결하라는, 비록 반쪽이지만 오십 년 동안 강호를 통치하지 않았냐는 말이었다.
"프! 하하하! 크! 하하하!"
맞는 말이다. 이 나이에 다시 산다 한들,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심산유곡에서 은거한다 한들, 그게 사는 것인가. 죽어버린 삶보다 더욱 비참하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선 살아가는 장소도 강호무림이고 죽어야 할 곳도 무림인 것이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퍼엉!
"으악!"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스스로 자폭하여 시신마저도 없애버린 거였다. 천하를 가져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결코 잡을 수 없는 꿈이었다.
천하란 누가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죽었는지…….
"현명한 선택을 했군."
잠시 후 천막에 들어선 지청인이 궁유의 시신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혼자 죽은 게 아니었다. 궁유마저도 같이 저승 가는 동무로 삼아버린 거였다.
"맹주님께 전서를 보내라, 이곳 일도 끝났다고. 전쟁의 끝이라고."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다.
* * *
지청인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렸고 제갈세가가 있는 벽하곡에서는 그 역사를 위한 첫 제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연매, 왔다."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는 백무천이 저 멀리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제갈수연을 불렀다.
맹주자리는 이미 포기한 듯한 어투였다.
설사 포기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었다. 부인이 될 사람이 맹주자리에 올랐는데 그것을 가지고 뭘 어쩌겠는가. 곁에서 도와주는 수밖에.
"걱정 안 해도 돼요.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으니까요."
빙긋 웃던 제갈수연이 전음을 보내는지 입술을 딸싹거렸다. 그녀가 전음을 보내는 곳은 자신의 부하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 막 계곡 안으로 들어선 백산을 향해서였다.
'아마 당신의 능력이면 내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요. 지금부터 당신 앞으로 오는 자들을 아주 잔인하게 죽여주세요. 아주 잔인하게…….'
"호호! 대단한 년이군."
백산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자신들의 동료를 해쳐달라는 주문이었다.
무슨 이유인지까지는 알고 싶지도 않다. 일단 해달라는 대로 해줄 참이다. 그녀들을 만날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
아니나 다를까, 전방 계곡의 끝에서 두 명의 인물이 백산과 갈태독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먼 길을 오셨소이다, 두 분."
제갈세가의 인물인지 두 사람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천하제일인이라 알려진 철목승을 앞에 두고도 전혀 위축됨이 없었다.
오히려 두 사람을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미 제갈세가의 세상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철목승이 되었든, 아니 그보다 더한 사람이 온다손 치더라도 무서워할 게 없다는 표정.
그러나 그런 생각이 오직 자신들만의 착각이라는 걸 그들은 알지 못했다. 아울러 제갈수연이 자신들을 잔인하게 죽이라 했다는 것도…….
"어디 소속이냐? 제갈년이냐, 아니면 천무맹이냐."
죽음을 다르게 내리기 위해 묻는 것이었다. 천무맹이면 그래도 시신이라도 보존시켜줄 터이고, 제갈세가 사람이면 바로 어육으로 만들어버릴 심산이었다.
"이놈! 감히 통합 맹주가 되실 가주님께……."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백산의 온몸에서 쏟아져나온 열두 개의 비도가 두 명을 난자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조각조각 떨어져 날리는 두 사람의 조각들, 제갈수연의 말대로 할 수 있는 한 가장 잔인하게 처리했다. 굳이 그녀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죽여버리고 싶었던 자들이었다.
오른쪽 풀숲에서 결렬한 파동이 밀려온다. 이미 이곳에 들어서면서부터 감지했다. 다수의 무림인들이 자신과 철목승으로 알고 있는 갈태독을 보기 위해 와 있었다.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와 있는가. 아무 죄 없는 사람을 납치하여 협박하고 있는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한 행위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기 위해서 나와 있는 것인가.
백산과 철목승이 천하에 악인이면 그들의 처와 딸을 납치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개자식들……."
"무슨 일이냐."
갑작스런 백산의 행동에 갈태독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직 조천영과 냉추렴의 생사확인도 못한 상태에서 백산이 흥분해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녀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얼굴을 본 연후에 살인을 해도 해야 할 일이다.
"그 제갈 뭐라는 계집이 시킨 일이오.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자신들의 죄의식을 덜기 위한 행동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따를 것이다. 절대악인이면 어떻고, 지옥에서 뛰쳐나온 야차면 또 어떤가. 시키는 대로 해서 그녀들만 보면 되는 것이다.
"이왕 잔인하게 보일 거 확실하게 해주지."
말과 함께 백산의 손에서 두 개의 철구가 날았다. 방향은 오른쪽 풀숲, 무림인들로 보이는 다수의 인물들이 은신하고 있는 곳이었다.
"피하라!"
진득한 살기를 머금고 날아오는 검은 물체에 무림인들이 기겁을 하며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과앙! 과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미처 피하지 못한 수십 명의 인물들이 그 자리에서 죽어갔다.
'이제 그만하세요. 그리고 차고 있는 광혈지옥비를 풀어놓으세요.'
'살아 있나?'
'서두르면…….'
"큭, 방법이 없군."
양팔을 걷어붙인 백산이 천목환을 사정없이 뽑아내자 팔목의 동맥부분에서 여섯 줄기의 핏줄기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어 두 다리에서도 천목환을 뽑아든 백산이 그것들을 숲 속 멀리 던져버렸다.
'고마워요, 백공자. 이제 들어가셔도 되겠네요.'
언뜻 들으면 정말 고마워서 하는 말인 줄 착각할 정도로 지극히 공손한 말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성취했다는 만족감이 잔뜩 배어 있었다. 모든 것을 성취한 자가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
"엄청나군."
제갈수연이 들어가라는 곳을 쳐다본 백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나의 석문(石門)이 위쪽으로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데 그 두께가 일 장 정도나 되어 보였다.
"갑시다."
"아냐, 나를 보고 가야지."
석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백산을 막아선 인물은 지금껏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백무천이었다. 벽하곡 위에 있던 그가 백산이 천목환을 벗어던지자 그제야 내려온 것이었다.
"왜 안 오나 했다, 쥐새끼."
"아직도 입은 살았군. 어? 철목승이 아니네?"
백무천이 놀라운 얼굴로 갈태독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철목승으로 알고 있었는데 다른 인물이 아닌가. 갈태독을 응시하던 백무천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마치 어떤 기회를 잡은 자의 득의만만한 표정과도 같았다.
'쿡! 아직 기회가 있는 건가?'
"비밀로 해주지. 그렇지만 너는 좀 맞아야 돼, 반항은 하지 마라. 잘못하면 네 마누라들이 전부 죽는다."
퍽! 퍼억!
붉은 화기를 머금은 백무천의 한 팔과 두 발이 백산의 온몸에 작렬하기 시작했다. 정말 지겹도록 더러운 악연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만상투인루에서부터 시작된 악연이 결국은 군림의 자리까지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이놈이 파멸안이 아니었던들,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상대 가능한 놈이었던들, 담운천이 통합 맹주를 제갈수연에게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놈 때문에 통합 맹주자리마저 없어져버렸다.
자신의 이를 뽑아버린 치욕을 심어준 놈이었는데 마지막까지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다. 한갓 버러지라 여겼던 놈이…….
"이봐, 그래 가지고 맹주가 될 수 있겠어? 좀더 세게…… 더 세게 쳐보란 말이다."
무자비하게 얻어맞으면서도 가슴을 꼭 껴안고 있는 팔을 풀지 않으며 이죽거린다. 거의 비슷한 경지에 올라 있는 백무천의 주먹이었기에 금강불괴의 몸도 소용이 없었다.
온몸으로부터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시원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실컷 맞기라도 했으면 했는데 백무천이 그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젠 얼굴을 한번 뭉개볼까?"
진기를 이용해서 끌어당긴 백무천이 오른손 정권을 입 안으로 박아 넣었다. 과거 자신이 당했던 방식 그대로 갚아주려 하는 것이었다.
"크윽!"
"아직 멀었다, 버러지."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해서 이어지는 백무천의 주먹에 백산의 얼굴이 피투성이로 변해갔다.
"아, 당신은 가만히 있는 게 나아. 저 위에 있는 제갈수연에게 들키면 만사 도로 아미타불이니까."
보다 못한 갈태독이 나서려는 것을 백무천이 제지했다. 만일 철목승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조천영과 냉추렴을 죽이게 될 것이라는 협박인 것이다.
"퉤! 그렇군. 쥐새끼 네놈도 철대협이 필요하겠구나.
그래야 저 계집으로부터 맹주자리를 빼앗을 수 있을 테니까. 계집 품에 산다고 나를 욕하더니 네놈도 별수 없구나, 쥐새끼."
백산에게서 백무천을 비웃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제야 놈이 갈태독을 보고도 모른 체하고 있는 이유를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개자식! 이게 그년들 줄 것이더냐. 잘 봐라, 버러지."
"멈춰! 한 발만 더 움직이면 죽인다."
화환을 밟으려는 백무천의 행동을 보던 백산의 몸에서 전율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아울러 눈도 붉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백무천! 광혈지안이 무엇인지 보고 싶으면, 붉은 눈을 보고 싶으면 밟아라. 어차피 이곳에 살기 위해 온 게 아니다."
지금껏 아무런 반항 없이 맞아준 백산이 아니었다. 자신이 생명처럼 만들어온 화환을 밟아버리면 죽여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이익!"
얼굴을 붉히며 백산을 노려보던 백무천이 다시 한 번 백산의 얼굴에 정권을 박아 넣은 다음 절벽 위로 올라가 버렸다.
다 잡아놓은 대어를 놓치기 싫어서였다.
진정 백산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쟁을 각오하면 자신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몸이 정상이었을 때도 졌던 놈인데 지금은 한 팔마저 없지 않은가.
"괜찮으냐?"
"쿡, 외려 시원하오."
바닥에 버려진 화환을 소중히 챙긴 백산이 석문 안으로 몸을 움직였다.
"영감!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돌아가시오."
첫 번째 문을 지난 백산이 두 번째 문이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들의 눈은 다 속였고 더 이상 따라올 필요가 없다. 차라리 남아서 사부를 도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산아……. 내 나이가 백오십이다. 살 만큼 살았다. 나도 소령이가 보고 싶구나."
한 줌의 가능성이라도 잡아보기 위해 따라왔지만 이곳에 와보니 그게 아니었다. 지금 자신들이 가고 있는 곳은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기관이 아니었다.
제갈세가 기관의 총채가 바로 이곳이었다.
만겁불회귀역(萬劫不回歸域).
제갈세가에만 있다고 하는 전설의 금역의 이름이다.
들어갈 수는 있어도 나올 수는 없는 곳, 그곳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미 전부 다 산다는 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가봅시다."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백산이 전방을 향해 몸을 날렸다. 거의 열 개의 석문을 지나고 다시 오십여 장 정도를 전진하자,
만겁불회귀역의 심장부에 도착했는지 새하얀 철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영감, 내 얼굴 괜찮소?"
철문 앞에 선 백산이 갈태독을 쳐다보며 물었다. 백무천에게 많이 당해서 얼굴이 엉망일 거라고 생각해서 묻는 것이었다.
"이놈아, 네 얼굴이야 원래 망가진 얼굴 아니냐."
말은 그리하면서도 자신의 옷을 찢어 백산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 있다.
"퉤!"
"더럽게 무슨 짓이요."
"피가 말랐잖아, 이놈아!"
마치 신부를 맞으러 가는 새 신랑의 얼굴을 닦아주는 양 정성스럽게 닦던 갈태독이 빙그레 웃으며 백산을 쳐다본다.
"최고다!"
"고맙소."
철문으로 다가선 백산이 온 힘을 다해 문을 밀어보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들어 올려봐라."
지금껏 왔던 문이 전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으니 이것도 그러리라는 생각에 하는 말이었다. 갈태독도 만겁불회귀역에 대해서는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만년한철이구나."
외벽을 감싸고 있는 철의 재질을 알아본 갈태독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단지 문만이 철로 된 게 아니라 외벽 전체가 만년한철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만년한철로 되어 있다면 백산의 무기가 없는 이상 힘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야압!"
커다란 고함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내부의 광경.
폭이 일 장 정도인 정방형의 방 한가운데 역시 똑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의자가 두 개 있고 그 위에 두 사람이 등을 기댄 채 묶여 있었다.
문 쪽을 쳐다보며 앉아 있던 조천영이 먼저 백산을 발견하고 눈물을 쏟았다.
'왜! 왜 오셨습니까, 님이여! 어이하여 이곳으로 오셨단 말입니까.'
"에궁! 얼굴이 많이 상했네. 내 이럴 줄 알고 먹을 것을 준비해왔어."
환하게 미소를 머금으며 조천영에게 다가간 백산이 냉추렴을 돌려 앉히며 품속에 있는 것을 꺼냈다.
이미 식어버린 만두였다. 백무천에게 얻어터지면서도 끝까지 가슴을 감싸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조천영과 냉추렴에게 줄 만두, 그 만두를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서 두 손을 가슴에 붙이고 몰매를 맞았다.
"일단 물부터……."
만두와 같이 꺼내든 물을 두 사람의 입으로 조금씩 넣어주는 백산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울지 않으려 했었는데, 웃으며 같이 가고자 했었는데, 그렇지 못할 것 같았다.
두 여인의 아혈(啞穴)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천영이의 품에 안겨 있는 소령이에게서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부인이 되었다는 죄 때문에, 백산이라는 바보 같은 남자를 사랑했다는 죄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만든 그들보다 자신의 운명이 더 저주스러웠다.
그깟 파멸안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인간의 운명이 도대체 무엇이관데 이 죄 없는 여인들이 고통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어차피 일어난 일,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시간 동안을 최고로 살면 되는 것이다.
설사 일각의 시간밖에 없다 할지라도 백 년이든 천 년이든, 그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이번엔 만두. 천천히 조금씩, 그래 조금씩.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고."
만두를 조금씩 떼어 두 여인의 입에 넣어주는 백산의 손이 자꾸만 떨려왔다.
"죽을 좀 만들어올 걸 그랬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두 여인을 쳐다보았다. 십여 일 이상을 굶은 사람들인데 너무 자기 생각만 했던 것에 대한 자책이었다.
"어버……!"
"알아! 당신들 손을 떼어내면 안 된다는 것도. 다 먹고, 전부 먹고, 그때 떼어줄게."
만년한철을 이용해서 만든 족쇄를 채워 아래쪽에 고정시켜두었는데 그곳에 뭔가 있다는 말이었다.
"어버버……."
"소운이는 어쩌고 혼자 왔냐고?"
백산의 물음에 조천영과 냉추렴이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운이 있었기에 마음 놓고 이곳으로 왔다.
그녀라면 백산을 잡아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오고 말았다. 구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왔다.
"재미있게 원 없이 놀았어. 사랑도 나눴고. 눈이 왔잖아. 눈 속에서 하루 종일 뒹굴고 또 업어주고, 더 이상 바랄 게 없도록……. 그래도 조금은 미안해.
세 사람을 전부 사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가봐……. 하지만 다른 세상에서 다른 얼굴로 다시 만난다 해도 알아볼 수 있을 거라 했어.
천영 당신도, 그리고 추렴 당신도, 그리고…… 소령이도……."
소령을 말하는 백산의 얼굴에 고통이 묻어났다. 소령이…… 그 애가 태어날 때 얼마나 기뻐했던가.
죽음의 나락에서 다시 돌아온 두 모녀였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는데 자신보다 먼저 저승으로 가고 말았다.
"괜찮아, 이제 전부 같이 살게 될 테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갈태독이 더 이상 볼 수 없었는지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괜스레 왔다 싶었다. 저들 넷을 그냥 보내주는 게 더 나을 듯싶은데 쓸데없이 자신이 끼어들고 있는 것 같았다.
결코 죽음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가장 행복한 아이들이다.
곧 죽어갈 아이들임에도 결코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수십 년을 같이 살아온 사람들보다 더 행복한 표정들이다.
"누님, 이 만두 생각나? 고뇌의 바다도. 나 그때 정말 멋있었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 멋진 말이었어.
아마 일생을 통틀어 그때보다 더 멋진 말은 못해낼 거야. 고뇌의 바다 한 마디에 그 얼음 같았던 빙혼마녀가 홀라당 넘어온 거 아니겠어?"
백산의 말에 조천영과 냉추렴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어렸다. 불과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누가 나에게 혼자서 백 년을 선택할래, 아니면 당신들과 함께한 일 년을 선택할래 하고 묻는다면 당연히 일 년을 선택할 거야.
당신들이 없는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거든……."
"어버…… 어버버……."
"당신들도 그렇다고? 당연히 그래야지, 이 백산 같은 신랑감이 어디 흔한가. 어이구, 배가 많이 고팠나보네? 만두를 벌써 다 먹었어."
만두를 가져왔던 천을 버린 백산이 이곳으로 오면서 만들어왔던 화환을 들어 조천영과 냉추렴의 머리에 하나씩 씌워주었다.
그리고 하나 남은 작은 화환은 잠자는 듯 눈을 감고 있는 소령이의 얼굴에 가만히 놔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조천영부터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깊숙한 입맞춤. 아마 이승에서의 마지막 입맞춤이 될 것이다. 길고 긴 입맞춤을 끝낸 백산이 두 여인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냈다.
"어버버……! 어버버……!"
"사랑한다고? 나도 사랑해, 영원히. 소운이 그랬어. 눈을 감는 게 아니라고. 눈을 뜨라 했어. 영감도 미안하오."
"이놈아, 나도 한마디 하자!"
백산에게 고함을 지르며 갈태독이 세 사람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젠 그의 얼굴에도 아픔의 빛이 없었다. 목숨까지도 같이하는 세 사람을 축복해주고 싶었다.
"나도 그동안 행복했다. 백오십 평생 가장 행복한 일 년이었다. 그것만 알아주라."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그래, 이놈아."
갈태독이 힘차게 백산의 어깨를 잡았다.
'산아, 위에서 지붕이 내려온다.'
백산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갈태독이 전음을 보냈다. 지독한 기관이었다. 만년한철로 된 벽에 이제는 아래로 내려오는 천장까지…….
갈태독의 말을 들은 백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절반으로 나눠진 애명환을 꺼내 두 여인의 손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사라랑! 사라랑!
"사랑해!"
백산의 손으로부터 붉은 수강이 뿜어져나와 두 여인의 손을 묶고 있던 만년한철의 아래쪽을 강타하고 동시에 갈태독의 입에서 천지를 울릴 듯한 일갈이 터져나왔다.
"지옥전륜대능력!"
자신의 모든 내력을 짜내서 백산의 몸을 휘감았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성공할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에게 최고의 인생을 맛보게 해준 녀석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 나머지는 하늘에게 맡기는 것일 뿐…….
과앙! 과아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만년한철로 된 문이 터져나가고 동굴이 무너져 내렸다.
갈 길을 잃은 화염의 폭풍은 백산과 갈태독이 들어왔던 석문들을 차례로 찢어발기며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나갔다.
슈아악! 콰앙!
마침내 마지막 석문을 뚫어버린 불길이 거친 굉음을 토하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전율스러운 광경이었다. 제갈세가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만겁불회귀역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백랑, 기쁘지 않으세요? 당신의 복수를 했는데."
뿌옇게 솟아오르는 먼지구름을 응시하던 제갈수연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백무천을 쳐다보았다. 야망을 성취한 자의 만족스런 미소였다.
더 이상 거칠게 없다는 얼굴 표정.
"나의 복수가 아니라, 당신의 야망을 위한 것이겠지."
할아버지인 제갈장령을 잊기라도 했는지 그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언급하지 않는 제갈수연의 독심에 놀라고 말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할아버지를 부르며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러나 제갈수연은 미소를 짓고 있다.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미소를. 점점 변해가고 있다는 의미인 게다.
과거에는 심지가 굳고 고집이 있었지만 이야기를 하다보면 훈훈한 정 같은 게 느껴졌었다.
문득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자신의 몸을 태워 불을 밝히는 촛불처럼 보였다. 타인을 위해서 타오르는 불이 아닌 오직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를 불태우는 촛불.
"저만의 야망이 아니라 백랑과 수연의 꿈이에요."
"허!"
제갈수연의 얼굴에 피어나는 화사한 미소를 보며 백무천이 탄성을 자아냈다.
꽃봉오리가 만개(滿開)하는 것처럼 생기가 넘치는 웃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자신이 줄 수 없는 미소이기도 했다.
"일비! 광혈지옥비는?"
차갑다. 백무천에게 요염한 미소를 흘리던 그녀가 다시 냉랭한 얼굴로 돌아가며 일비를 찾는다.
제116장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맹주님!"
일비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제갈수연 앞에 나타났다. 분명 백산이란 놈이 무기를 던진 직후, 곧바로 그곳을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혹여 다른 사람이 있나 싶어 주변을 살폈으나 그도 아니었다.
"무슨 소린가, 그곳엔 아무도 없었는데……."
일비를 향해 고함을 지른 제갈수연이 고개를 돌려 백무천을 쳐다보았다.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하는 눈빛이었다. 이곳은 제갈세가 영역이다.
그녀가 허락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들어올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당연 광혈지옥비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백무천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젠 날 의심하는 건가?"
"그럼 왜 철목승이 오지 않았다는 걸 말하지 않는 거죠?"
'헉!'
백무천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설마 그것마저 알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알기로는 제갈수연이 철목승을 확인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또한 벽하곡 위에서 육안으로 확인하기에는 불가능한 거리였다. 자신마저도 버러지 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아낸 사실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그녀가 알고 있었다 함은…….
"일부러 그냥 둔 거예요."
"그럼 담운천을 상대하기 위해서?"
백무천의 표정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철목승을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담운천을 견제하고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철목승, 아니 마신가의 후예가 살아 있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철목승을 견제하는 역할이야 자신들이 하게 될 터이지만 담운천으로부터 그만큼 자유스러워진다는 의미가 된다.
더구나 광혈지옥비까지 원한다 함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단지 몇 번의 만남과 신가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 강호를 정복하지 못했던 담운천의 약점을 찾아냈다.
백무천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늪 같은 여자였다.
무공의 고하(高下)를 떠나 그녀의 늪에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 그 늪에 빠져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백무천 자신이었다.
"전부 흩어져서 광혈지옥비를 찾아라."
일비가 찾아보았다면 가능성이 없지만 혹여 하는 마음에 세가의 인원을 총동원하여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한 시진이 지나고 두 시진이 지나도 광혈지옥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누구란 말인가. 그자의 동료들이 나타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제갈수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산이란 자의 동료들이 나타나려면 아직 하루 정도 시간이 남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내가 할 일을 누가 대신하고 말았군."
그러나 광혈지옥비라는 절대적인 무기가 없어졌음에도 제갈수연의 얼굴은 그리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담운천을 견제할 또 하나의 장치가 바로 광혈지옥비였다.
그들이 광혈지옥비를 겁내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절대적으로 원하는 물건이었기에 더더욱 가져다줄 수가 없었다.
광혈지옥비 또한 철목승처럼 담운천을 묶어두는 역할을 위해 필요했을 뿐이었다.
적당한 기회를 이용하여 광혈지옥비를 강호에 풀어버리려 했었는데 그녀보다 선수 친 자가 생겼다.
물론 원하는 대로 되었고 아주 자연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녀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시야를 벗어나서 일이 진행된다는 사실이 못내 걸렸다.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계획에 입각하여 하나씩 발생해야 하건만 이미 그전에 광혈지옥비는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거였다.
"언젠가는 나타나겠지……. 또 그래야 하고."
크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세상을 거머쥐었다. 모든 사람들이 되고자 하는 부처님이 된 것이다. 강호무림이 손바닥 안에 들어왔다.
손을 흔들 때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매달리는 그들의 모습을 즐길 참이다. 그러기 위해 이 자리에 올라섰지 않았는가.
"가요, 백랑!"
"기다렸다가 버러지 놈의 동료들이 나타나면 쳐야 되지 않나?"
빙긋 웃으며 몸을 돌리는 제갈수연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백무천이 물었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있고, 그 산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적이라도 줄여야 할 때다.
더구나 버러지 일행은 장차 가장 큰 적으로 등장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태연하게 자리를 뜨는 제갈수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왕 제거를 했으면 뿌리까지 완전하게 뽑아내야 함이 무림의 생리가 아닌가.
"그들은 전쟁이 완전히 끝난 후에 써먹을 거예요. 백산이란 자의 시체, 아니 살점 몇 개라도 찾을 시간을 준 후에."
"너무 앞서 가는 것 아닌가?"
"백랑! 들어봐요. 조금 전 백산이란 자가 던진 광천뢰 보았죠?"
"참! 그런데 무림인들은 왜 데리고 왔나."
그 또한 백무천이 갖는 의문 중의 하나였다. 지금 상황에서 버러지 놈을 잡는 데에 무림인들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제갈수연은 무림인들을 데리고 와서 버러지의 잔인성을 일부러 부각시켰다. 숨은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그로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세력이 될 자들이에요."
앞으로 생겨날 맹을 키우기 위한 그녀의 계획이었다. 어차피 전쟁이 끝나고 나면 천마맹이나 천무맹의 잔존세력은 얼마 남지 않는다.
담운천이 바라는 일이기에 그렇게 해야 하지만 껍데기밖에 없는, 말 그대로 빈집의 통합 맹주는 그녀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백산 일행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광풍대원들이 도망을 치도록 풀어준 후 추격대를 구성할 참이었다.
그렇게 되면 두 맹에 소속되어 있지 않던 새로운 무리를 자연스럽게 강호상으로 나오게 할 수 있을 터이고, 그들을 통합맹의 세력으로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담운천의 세력을 반감시키는 역할도…….
"버러지의 동료를 없애는 데에 혈맹을 쓰겠다는 말인 줄은 알겠는데 일단 전쟁을 끝내야 되지 않나."
제갈수연의 포석은 대단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다. 현재의 상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일단 천마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갈수연의 행동은 이미 전쟁이 끝났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미 끝났다고 보시면 돼요."
백무천의 물음에 담담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제갈수연이 걸음을 옮겼다. 힘찬 발걸음이었다.
강호무림의 새로운 지배자로서, 제갈수연의 발걸음은 그녀의 고향인 산동성 제갈세가의 본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갈수연의 말대로 팽무도와 광풍대원들은 다음 날 벽하곡에 나타났다.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발견된 광경은 폐허로 변해버린 벽하곡이었다.
"만겁불회귀역입니다."
제갈세가에서 자랑하는 최고의 비전이 만겁불회귀역과 천라만상대혼진이다. 만겁불회귀역이 '기관'의 걸작이라면, 천라만상대혼진은 '진'의 걸작을 일컫는 말인 게다.
"알고 있네. 만겁불회귀역이 저 정도로 무너질 정도면 녀석들이 잃어버린 광천뢰가 쓰였겠구먼."
팽무도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조금씩 일렁였다. 분노했음이다. 한때는 형제의 가문이었던 제갈세가가 아닌가.
같은 오대세가의 일원이었기에 만겁불회귀역에 대해 말도 들었고 그 위력도 알고 있다. 또한 결코 외부에서는 파괴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도…….
그런데 아예 동굴이 없었던 것처럼 처참하게 무너졌다 함은, 이들의 물건이었던 광천뢰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겠느냐. 시신이라도 찾아보겠느냐, 아니면 바로 천무맹으로 가겠느냐."
광풍대원들에게 결정하라는 말이었다. 그들이 간다 했기에 데려왔고 원하는 대로 해줄 참이었다. 자신의 입장이야 한 줌이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백산의 시신을 찾고 싶었다.
하다못해 머리카락 하나라도 들고 천무맹을 향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도 아버지와 똑같이 자식을 죽게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숨지 않을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라 할지라도 복수를 시도할 것이다.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합니다."
소살우가 굳은 표정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확인해야 한다. 광천뢰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 터졌다 할지라도 찾아야 한다.
숨이 끊어졌는지, 아니면 조각조각 부서져서 사라졌는지를 두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전까지는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 있기에 찾아야 한다.
툭! 툭! 툭!
다시 광견조원들의 죽음의 내기가 시작되었다.
전부 열세 개의 주머니. 뱁새와 찍새는 갔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살아 있기에 그들도 내기에 참여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가 더 늘었다. 바로 백산의 주머니인 것이다.
"명심해라. 가장 오래 버티는 놈이 전부 먹는 거다. 가장 많이 치우고 가장 오래 버티는 놈이……."
광견조원들의 얼굴에 살기 어린 미소가 생겨났다.
이미 본인들의 것으로 만들었던 그 웃음이 양자강에서, 황산에서 보여주었던 미소로 또다시 바뀌었다.
다시 웃옷을 벗어젖힌 광견조원들이 온몸에서 붉은 혈광을 흘려대며 동굴의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너진 동굴의 잔해는 너무 많았다. 광견조원 열 명이 달려들고 그들이 지치면 다른 조원들이 전력을 다해 움직이고 있는데도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장 오래 버티는 놈이 다 먹는 거다!"
소살우가 고함을 질러대며 눈앞에 있는 바위를 향해 자신의 도를 뿌렸다. 붉은 혈광이 어리고 바위가 잘리면 옆에 있던 섯다와 모사가 재빨리 밖으로 던져낸다.
결코 쉴 수가 없다. 며칠이 걸리든 백산의 모습을 확인해야 한다.
팽무도와 남궁세우도 광풍대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연거푸 심검을 날려대며 앞을 막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했다.
어느새 해가 떠올랐다 저물고, 달이 떠올랐다 다시 지기를 몇십 번 반복하며 오직 하루에 단 한 번의 운공만으로 체력을 보충하면서 작업을 해나가고 있었다.
"아직도 오십 장이 더 남았습니다."
남궁세우가 걱정스런 얼굴로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개방 인물들에게 벽하곡 외부 감시를 부탁해두었지만, 제갈세가가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나야 우리 차례가 아니겠나."
팽무도의 얼굴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동굴 속에 묻혀버린 가족들의 시신을 찾을 시간이 없을까봐 그게 더 걱정되는 것이었다.
전쟁이 조금만 더 길어졌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어차피 강호공적으로 선포될 터이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사부님!"
"왜 그러느냐?"
"접니다."
고개를 돌려 모사를 쳐다보던 팽무도와 남궁세우의 시선에 금의위 복장을 한 석숭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쩐 일인가? 한창 바쁠 시기일 텐데."
"전쟁이 끝났습니다. 천무맹의 승리로요."
"무슨 소리인가, 벌써 전쟁이 끝나다니."
"천마맹의 철마 지청인이 배신했습니다."
백 년간 한솥밥을 먹던 동료의 배신으로 천마맹이 끝장났다는 것이다. 석숭이 부랴부랴 금의위와 군사들을 이끌고 벽하곡으로 온 이유였다.
비록 황제의 귀환을 준비하느라 바쁘기는 하지만 강호의 일 또한 등한시할 수 없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황제를 변방으로 떠돌게 만든 자가 바로 검제 담운천이 아니던가.
앞으로 황제의 가장 큰 적은 담운천이 있는 무림이 될 것이기에 천무맹의 동향은 가장 큰 우환거리이자 관심사였던 것이다.
"고맙네."
"일단 백공자를 보고 나서 이야기를 하지요."
"자넨 살아 있을 거라 보는가."
"천오백 년 전 세상을 멸망시킨 사람의 후옙니다. 이까짓 동굴로 어쩔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더구나 갈어르신까지 옆에 있었다면……. 저는 살아 있다는 데 걸겠습니다."
두 사람을 쳐다보는 석숭의 얼굴에 확신이 서렸다. 막연히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백산 혼자였다면 몰라도 갈태독이라는 거물이 바로 옆에 있었다.
백산과 거의 동수를 이루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며 백산을 보호하려 했다면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분명합니다. 죽지는 않았을 겝니다."
* * *
"파멸안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백산의 생존을 예측하는 사람은 석숭 말고 또 있었다.
천무맹의 장생원. 검제 담운천도 백산의 죽음에 반신반의(半信半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광혈지옥비를 제거했다고는 하여도 비도를 이용하여 받아들인 기운을 전부 쓰지 않았다면 몸이 스스로 방어를 했을 터이고 더구나 마신가의 후예인 철목승까지…….
파멸안의 죽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부상을 당했을지언정 완전하게 죽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광천뢰가 오십 개입니다. 그 속에서는 신이라 해도 살아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외벽은 만년한철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갈수연의 생각은 담운천과 달랐다. 비록 외벽만 만년한철로 쌓여 있지만 그 효과는 엄청나다.
밖으로 터져나가야 할 충격을 일시적이나마 막아버리기에 거의 모든 폭발력이 중심으로 쏠리게 된다. 한순간이지만 인간의 신체 정도는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철목승이 없었습니다. 철목승을 가장한 갈태독만 있었을 뿐."
다시 한 번의 승부수.
마신가의 후예를 잡지 못했다고 하면 담운천은 분노할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말을 해야 했다.
철목승이 건재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아니면 알릴 시간도 없을 뿐더러 나중엔 밝힐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담운천을 묶기 위한 그녀의 술수인 것이다.
"감히 나를 기만했더란 말이냐?"
담운천의 몸에서 흘러나온 엄청난 기운이 제갈수연의 전신으로 몰아쳤다. 자칭 신이라는 그가 철목승의 생존소식에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만큼 마신가라는 신가가 주는 부담이 크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크읍! 금의위가…… 오고 있었기에 시간이 없었습니다."
비명을 토해내면서도 한 치의 물러남이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준비해둔 대답이었기에……. 또한 담운천의 입장에서 자신을 위협할 수는 있어도 해치진 못한다는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광혈지옥비도 회수 못하고 철목승도 잡지 못했다는 말이구나."
"회수는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담운천의 얼굴처럼 제갈수연의 표정도 담담하게 변했다. 아니, 담운천을 대하는 어투가 조금 전보다 더 당당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도권을 잡았다는 자신감이었다. 자신 아니면 광혈지옥비가 되었든 철목승이 되었든, 상대할 수 없다는 확신.
"그럼 금군이 없다면 광혈지옥비를 바로 가져올 수 있겠구나."
"무슨 수로…… 설마 그들을 치려는 건……."
제갈수연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담운천을 쳐다보았다. 황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 하고 있다.
아무리 자신들을 신이라 생각하는 자들이지만 너무 무모한 사람이 아닌가. 이까짓 무림을 정복했다고 명(明)이라는 대제국을 우습게보고 있다.
비록 그들이 일반 무인들에 비해서 약하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개인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그들의 인원수가 삼백만이 넘는다. 또한 그들의 무기는 어떻게 막을 것인가. 접근전에 유리하다 해서 전쟁에 이길 수 있는 건 결코 아닌 것이다.
수많은 화포와 포탄 등 화약을 이용하는 무기가 널린 곳이 바로 제국의 군대이다. 사정거리가 삼 리에 가까운 무기들까지…….
무림을 정복했던 많은 세력들이 황실을 넘보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자는 너무 쉽게 황실 정복을 말하고 있다.
"너 따위가 나를 판단하려느냐?"
수그러졌던 담운천의 기세가 다시 삼엄해지며 제갈수연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상했음이다. 하찮은 인간 나부랭이가 자신을 훈계하는 듯한 언행이 귀에 거슬렸다는 의미이리라.
"잘못했습니다, 천주님."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한발 물러났다.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자와 두뇌싸움을 할 때 가장 피해야 하는 일이 상대방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일이다.
더구나 담운천은 본인 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가. 이런 유형의 사람이 가장 못 견뎌하는 게 타인과 비교해서 저울질당하는 것이다.
제갈수연이 재빠르게 굽히고 들어간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들을 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냐."
"광혈지옥비를 찾게 되면 그들이 갈 곳은 감숙성 한 곳밖에 없습니다."
"감숙성에서 한꺼번에 처리하자……."
"그렇습니다, 천주님."
"좋다, 그건 너의 재량에 맡기도록 하마. 금군이 물러가면 바로 시행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무릎걸음으로 물러나려는 제갈수연을 불러 세운 담운천이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의 본분을 잊지 마라. 나의 종들 중 가장 비천한 신분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천주님."
담운천을 향해 깊숙이 머리를 조아린 제갈수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굴욕감. 과거의 기억이 다시 살아났음이다.
구파일방에서 받았던 그 치욕이 다시 부활했다.
그러나 구파일방은 제갈세가라는 가문이 무서워서, 세력이 커지는 걸 막기 위해 무시를 했지만 담운천은 아니다. 아예 인간 취급을 해주지 않고 있다.
단지 자신을 위해 일을 해주는 노예로만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두고 봐라, 담운천! 반드시 네놈을 무너뜨리고야 말겠다.'
천무맹의 맹주가 되었기에 어느 정도 야망을 이룬 것이라 생각했다. 가문의 숙원과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여겼는데, 아니었다.
그 위에는 과거보다 더 높은 산이 버티고 있었다.
돌아가고자, 넘지 않고 우회하고자 했었는데, 그 길이 너무 멀고 험한 길이었다. 살아생전에 끝까지 갈 수 있다는 장담을 하지 못할 정도로 먼 길.
결국 짓밟고 넘어가는 방법밖에 없다. 그 산 뒤에는 또 무엇이 있을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우선 바로 앞에 있는 산에 길을 뚫어야 함이다.
그 길을 만들기 위해선 다시 침묵하고 기다려야 한다.
"왜 일이 잘 안 풀리나?"
얼굴이 붉어진 채 천무전으로 돌아온 제갈수연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며 백무천이 나지막이 비아냥거렸다.
그녀의 요구대로 모든 전달사항이 남진룡에 의해 처리되고 있는데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고 독대를 청한 행위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아직 담운천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은 결코 상식이 통하는 그런 자들이 아니다. 오직 자신들의 의도대로 모든 게 이루어져야 만족해하는 그런 자들이 아니던가.
"아이! 백랑까지 왜 이러세요. 그렇지 않아도 심란해 죽겠는데."
백무천의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금세 표정을 바꾸며 환한 미소로 그에게 매달리고 있다.
이래서 여자란 요물이란 말이 나왔는지도.
그런 제갈수연의 모습에 백무천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많은 세월을 그녀와 같이 했지만 요즘처럼 변화무쌍한 제갈수연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백랑이 해줄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인데 미천한 소생에게 부탁을 하는 거요?"
"놀리지 마시고요. 공적선포 준비를 해주세요, 그들에 대해서요."
"남궁세가와 팽가도 같이?"
"너무 급하면 안 된다 했잖아요."
백무천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을 벌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들이 강호로 나갔을 때 추적하면서 자연스럽게 밝혀야 하는 거예요."
일단 벽하곡에 있는 광풍대원 일행을 먼저 공적으로 만들어두고 강호무림인들이 추격하는 사이에 남궁세가와 팽가를 그들의 배후로 지목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추격대는 가장 약한 자들로 구성해야 돼요. 인원은 많을수록 좋구요."
"담운천의 세력마저 줄여보겠다, 이건가?"
백무천의 얼굴에 감탄의 표정이 어렸다. 단순한 일임에도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다.
언제나 자신에게 뭔가 득이 되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해나가는 그녀의 머리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일들임에도 마치 그녀가 꾸민 일처럼 보이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인지…….
"보면 볼수록 당신은 무서운 여자야. 알겠습니다, 맹주님. 바로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최고가 되기 위해섭니다. 살아남는 길이기도 하고요.'
백무천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내심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부터는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 즉 담운천과의 싸움인 것이다.
아주 긴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비록 통합 맹주라 하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전쟁으로 인하여 양맹의 인원은 거의 사라졌고, 이제 기댈 곳은 공적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영웅들을 영입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아울러 담운천의 혈맹세력을 최대한 줄여야 하는 일까지.
'담운천, 똑같은 조건으로 다시 시작한다.
그대와 나, 서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일단은 묵안혈마 일당을 추격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다. 당신의 세력을 줄이는 작업은…….'
* * *
"어찌하면 좋겠나. 산이가 살아 있다면."
천무맹에서는 야망을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마저 이용하고 있는 제갈수연이 있었고,
그 제갈수연의 본가가 있던 벽하곡에서는 살아남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팽무도와 남궁세우, 그리고 석숭이 백산의 생존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고 있었다.
"감숙성으로 아니면 황제폐하가 오시고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석숭의 말이었다. 지금 강호에서 천무맹에 대항할 수 있는 무림단체는 철목승이 있는 천마맹밖에 없고 나머지는 황제가 있는 곳이다.
결국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둘 중 한 곳을 선택해야만 한다.
"감숙성이라 해서 안전한 곳이 아니질 않는가."
감숙성이란 말에 남궁세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철목승이 버티고 있는 곳이라 하지만, 천무맹이 노리는 게 바로 그것일 것이다.
"맞습니다. 천무맹에서도 그걸 노리고 있겠지요. 결국 갈 곳은 황상이 있는 곳, 한 곳밖에 없습니다."
원래부터 석숭이 원하던 바였다. 황제가 돌아오면 곧바로 천신가와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광풍대원 전원이 금의위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 엄청난 전력이 될 것이다.
어쩌면 광풍대원을 포함한 금의위 힘만으로 천신가를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다섯 대의 마차를 준비해두었습니다. 여기서 서북쪽으로 십 리 정도 가면 그곳에 있습니다."
금의위로 하여금 이들을 호위하면서 움직일 작정이었다. 일부는 황상을 마중 나가고, 나머지는 북경에서 황제를 맞을 준비를 위해 남아야 한다.
"고맙네, 신세만……. 저기 전령 아닌가?"
석숭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운 표정을 짓던 남궁세우가 저 멀리서 달려오는 인물을 가리켰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하얀 거품을 가득 머금은 말과 잔뜩 굳은 표정으로 정신없이 채찍을 휘두르는 군관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석숭이 급히 군관이 오고 있는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급할 일이 전혀 없는 황실이 아니던가.
황제의 평생 숙원이던 옥새도 찾았고, 또한 원의 잔당도 거의 퇴치하여 더 이상 문제가 될 소지가 전혀 없는 황실이 되었다.
"영반, 급보입니다."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쓰러진 말을 박차 오른 군관이 석숭 앞에 내려서며 첩지를 내밀었다.
"이럴 수가……."
첩지를 펴든 석숭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하며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폐하!"
황제가 있다는 달탄 쪽을 향해 절을 하는 석숭에게서 통곡소리가 흘러나왔다.
영락제 붕어.
군관이 가지고 온 첩지의 내용이었다.
조카인 건문제를 폐위시키면서까지 황권에 욕심을 보였고, 수차례에 걸친 친정으로 새롭게 태동한 명나라의 반석을 굳건하게 하였던 정복황제인 그가,
다섯 번째 친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달탄 서북의 유목천이란 곳에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이제야 진정 보위에서 당신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사옵니까."
석숭의 통곡소리가 벽하곡에 메아리쳐 울렸다.
옥새를 찾았기에 더 이상 친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원하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는데, 끝내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렸다.
"금의위는 들으라! 전력을 다해 황궁으로 돌아가서 모든 업무를 비상체제로 돌리고 태자전하를 보호하라! 서둘러라!"
금의위를 향해 추상같은 명령을 내린 석숭이, 하남성이 있는 쪽을 향해 이를 부득부득 갈며 살기를 쏟아냈다.
"담운천, 이놈!"
이건 분명 놈들의 짓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순간에 황제폐하를 시해하여 다시 정국을 혼란으로 만들어가려는 의미인 것이다.
이미 무림은 평정했다고 생각한 그가 드디어 황실로 손을 뻗친 것이다.
"대체 이게……."
남궁세우와 팽무도가 얼이 빠진 얼굴로 석숭을 쳐다보았다. 황제가, 대명제국의 천자가 시해되는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는 말이 아닌가.
일개 무림문파의 문주가 살해되어도 온 무림이 떠들썩하니 난리가 나는데, 이 나라의 주인이 피살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석숭의 표정으로 보건대 그 또한 천무맹에 있는 담운천의 짓으로 보고 있다.
만일 영락제의 피살이, 천무맹이 저지른 것으로 확인되면 무림은 바로 끝장이다. 모든 것에 우선하여 무림이 도륙되는 일이 발생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
"죄송합니다, 더 이상 도와드릴 수 없겠습니다."
"아니네, 석대인. 어서 가보게."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어쩌면 저희를 이곳에서 떼어놓기 위해 저지른 일인지도 모르니까요."
"설마……."
"설마가 아닙니다. 신가나 저의 천가인들에게는 황제보다 더 공포의 대상이 파멸안입니다. 결코 재림해서는 안 될 존재인 게지요."
자신의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별반 피해도 업었던 구룡천가에서마저 파멸안의 재림을 경계하고 살아왔는데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인 신가들은 더욱 심했을 것이다.
지금껏 황제의 측근에 암살자를 배치해두고 이제 와서 일을 저지른 것만 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무림을 정복한 현 상황이 담운천에게 최대의 기회라 할 수 있겠지만, 아직 무림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벌인 게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었다.
"그럼 행운을……."
그로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백산이고 또 그가 필요하다 할지라도 북경의 일이 먼저였다.
북경이 제대로 서지 못하면 신가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두 사람에게 목례를 한 석숭이 몸을 날려 멀어져갔다.
"서둘러라, 백산이 살아 있다. 백산 때문에 놈들이 몰려온다."
석숭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팽무도가 광풍대원들을 독려하는 고함을 내질렀다.
믿어야 한다. 적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물며 가족 되는 자들이 죽었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살아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함이다.
"이제 십 장만 더 가면 된다."
"사부님, 적입니다. 적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빌어먹을 십 장, 십 장 남았는데."
남궁세우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자신들이 있는 위치 때문이었다.
동굴 속에 있는 자신들이고 벌써 이십여 일간의 작업으로 체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인데 적까지 들이닥치면 방법이 없다.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하는가."
백산이 죽었는지를 확인하고 천무맹으로 달려가려 했었는데,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차피 살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지만 자식의 상태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 더욱 가슴이 저며왔다.
"어쩔 수 없지……."
포기하는 심정으로 밖으로 나가던 남궁세우의 귓전에 기적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입니다. 형님이 여기 있습니다. 살아 있습니다. 맥이 뛰고 있다고요."
소살우의 희열에 찬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아직 십여 장 정도가 남았는데 백산의 동체가 발견된 것이었다.
온몸에 화상자국이 가득했지만 죽은 게 아니었다. 미약하게나마 맥이 뛰고 있었다.
"오! 하늘이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