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시민의 신문
제55호 / 기획 특집 / 02-05-07
충민공의 발자취 - 삼천리에 전설로 살아있는 외로운 소나무(孤松)
임경업 장군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충주 단월 가까운 대림산 기슭 풍동이라는 설과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라는 설이 그것이다.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는 추모비가 있는데 원주에서 나서 6세 때 충주로 이사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록에 충주태생으로 나와 있고 문중 산 역시 그 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충주태생이라는 것이 정설인 듯 싶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힘도 장사
임경업 장군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으며 힘도 장사였다. 소년시절부터 전쟁놀이를 즐겨 하였으며 항상 대장을 일삼는 꼬마 장군이었다.
하루는 돌을 모아 성을 쌓고 군기를 날리면서 진을 치고 진중에서 놀고 있던 중 경주로 부임차 길을 가던 목사 윤섬의 행차가 그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윤섬이 빨리 길을 비키라고 호령을 하니 임경업이 나와 “사람이 성을 피해야지 성이 어찌 사람을 피하겠소” 당당하게 맞섰다.
이에 윤목사는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 짐작하고 일부러 아이들 돌성을 피하여 먼길을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임경업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용천검(龍泉劍)과 추련검(秋蓮劍)
광해군 10년(1618년), 25세 되던 해에 무과에 급제하여 소농보권관이 되었다.
어느날 큰 연못가를 거닐다가 한 마리의 용이 입에 물고 나온 단검을 얻게 되었는데, 이 칼을 기념하기 위해 즉석에서 ‘용천검(龍泉劍)’이라는 시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三尺龍泉萬卷書(석자의 용천검은 만권의 서적과 같다.)
皇天生我意何如(하늘이 나를 냄은 어인 뜻인가.)
山東宰相山西將(산동에 재상나고 산서에 장수난다는데)
彼丈夫兮 我丈夫兮(저들이 대장부면 나 또한 대장부가 아니냐)
그러나 이 용천검은 일본사람이 훔쳐갔다고 전해지며 지금 충렬사 유물관에는 추련검(秋蓮劍)이 보관되어 있다.
추련검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時呼時來否再來(때여 때는 한번 와서 다시 오지 않나니)
一生一死都在筵(한번 나서 한번 죽는 것은 바로 여기 있네)
平生丈夫報國心(장부의 한평생 나라에 바친 마음)
三尺秋蓮磨十年(삼척 추련검을 십년이나 갈았네)
낙안읍성과 누이설화
낙안면 동내리에는 선정비가 있다. 1626년 5월부터 1628년 3월까지 낙안군수를 지낸 임경업군수 임직후 1628년 군민이 세운 것이다.
낙안면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에 면민이 대제를 지낸다.
낙안읍성은 조선 태조6년(1397)에 왜구가 침입하자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아 방어에 나섰던 것인데 인조4년(1626)에 임경업 장군이 33세 때 낙안군수로 부임하여 현재의 석성으로 중수했다.
전설에 따르면 낙안읍성은 임경업 장군이 큰 칼로 낙안마을 뒤에 있는 금정산의 바위들을 내리쳐 하루만에 쌓았다고 한다.
낙안읍성에 얽힌 또 하나의 설화는 임경업의 누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임경업의 누이는 왜구를 물리칠 궁리를 하는 장군을 돕고자 동생이 성곽을 다 쌓을 동안 군복을 만들겠노라고 제안을 했다. 누이가 군복을 다 지어도 동생이 성을 완공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자 누이는 다 지은 군복의 옷고름을 뜯어 다시 달기 시작했다. 결국 동생이 성을 다 쌓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끝내 동생의 옷고름만큼은 달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한다.
매화나무터 무덤 전설
남한산성 일대에는 임경업 장군을 낳게 한 매화나무터 무덤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남한산성 서쪽 등성이에 커다란 무덤이 하나 있는데 이 무덤이 바로 임경업 장군의 출생과 관련된 무덤이다.
먼 옛날 한양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가난한 임씨 총각이 광주 친척집에 식량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런데 도중에 날이 저물어 산 속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멀리서 보이는 불빛을 따라간 총각은 그 집에서 어여쁜 처녀와 꿈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그런데 그 처녀가 오백년 묵은 암구렁이였던 것이다.
그 처녀는 승천하면서 “제가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이 자리에 비늘 세 개가 떨어질 것입니다. 그 비늘이 떨어진 자리를 이후에 당신의 묘자리로 쓰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자손 중에 나라를 구할 유명한 장수가 꼭 나오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하늘로 올라가자 하늘에서 비늘 세 개가 떨어졌고 그 비늘은 매화 나무 세 그루로 변했다.
그 후 그는 처녀의 말대로 무덤을 매화나무가 있는 자리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니 그의 자손 중에서 유명한 장수가 태어났다. 바로 임경업 장군이다.
속리산 입석대와 경업대
속리산의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입석대도 임경업 장군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바로 그가 7일만에 세웠다는 것이다.
입석대 밑에는 경업대가 있는데 임경업 장군이 무술연마 등을 한 수련도장으로 삼았다고 해서 그의 이름을 따라 경업대라 부른다.
이 경업대로부터 5걸음 떨어진 곳에 뜀금바위가 있는데, 임경업 장군이 이 바위를 뛰어 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장군이 공부하던 토굴 아래의 명천은 장군이 마시던 물이라 하여 장군수라 부른다는데, 불로장생하는 약수로 알려져 경업대를 찾는 관광객은 누구나 이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다.
원주지역의 임경업 전설
임경업 장군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원주지역에도 임경업 장군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임경업 장군의 부친인 임황이 한 때 원주감영의 옥사장으로 있었다. 그는 비록 말단직에 있었으나 그의 성품은 의협심이 강하고 인정이 두터웠다.
어느 날 지극히 선량해 보이는 청년이 딱하게도 살인혐의로 붙잡혀 들어와 그를 도망치게 하였다.
그 후 옥사장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고 사는데 어느 날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였다.
그러더니 그 스님이 “이 집이 임옥사장 집이 아니오?” 하고 물었다. 알고 보니 그 스님은 살인혐의를 쓴 청년이었다.
그는 그동안 큰 스님이 되어 있었다.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그 스님은 평촌마을 건너편 산기슭에 조부의 묘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 후 태어난 아이가 임경업이다.
연평도 풍어제
연평도 풍어제는 파시(고기가 한창 잡힐 때 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시장)를 앞두고 매년 열리는 연평도 어민들의 전통 행사이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전쟁에서 명을 돕기 위해 출정했던 임경업 장군은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는 도중 부족한 식수와 식량을 얻기 위해 연평도에 잠시 내렸다. 섬에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자 안목과 당섬 사이의 바다에 가시나무를 촘촘히 박아 물이 빠진 뒤 이곳에 걸린 조기를 건져 식량으로 사용했다.
주민들은 특이한 조기잡이 방법을 가르쳐준 장군의 지혜와 덕을 흠모하여 장군의 시호를 딴 충민사라는 사당을 건립했다. 이듬해부터 매년 조기잡이가 시작되기 전에 마을주민들이 모두 모여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정조와 김홍도, 그리고 임경업 영정
정조는 자신이 특별히 존경하였던 임경업 장군의 초상화를 김홍도에게 새로 옮겨 그리도록 했다. 이렇게 국왕이 각별히 아꼈던 까닭에 김홍도는 화원으로는 큰 출세라 할 수 있는 경상도 안동 지방의 찰방(察訪, 지금의 역장 겸 우체국장과 유사함)과 충청도 연풍의 현감(縣監)까지 지냈던 것이다.
김홍도가 그렸다는 임경업 영정에 대해서는 전해진 바 없다.
마천동과 투구봉길, 그리고 고송길
서울 송파구에도 임경업 장군과 관련된 흔적들이 많다.
송파구에 있는 마천동(馬川洞)이라는 지명도 임경업 장군설화에서 유래한다.
임경업 장군이 백마를 타고 마산을 지나다가 백마물이란 곳에서 물을 먹었는데 이 곳은 아무리 가뭄이 와도 물이 계속 나온다고 하여 마천동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가락2동 투구봉길과 장지동 고송길도 마찬가지이다.
투구봉길은 임경업장군의 갑옷과 투구가 이 지역에서 나왔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고, 고송길은 임경업장군이 태어났다는 전설을 가진 두 댐이 인접해 있으며 또한 이 부근에서 임경업장군이 병자호란때 큰 활약을 하였으므로 그 호를 따서 고송(孤松)길로 지은 것이다.
이렇듯 충민공에 관한 이야기는 남한 땅 곳곳에 전설로 남아 있으며 아직까지 그를 기리는 행사가 적지 않다. 북한에도 충민공의 발자취가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이는 데 그 자료가 복원될 것을 기대해 본다.
기획취재<충민공 임경업 장군>“충민공 13대에 장군이 난다”
임경업의 12세손 임대규 씨
임경업 장군의 12세손 임대규(68세)씨. 충민공 별묘 옆에 살면서 여태껏 제사를 모시고 있는 그는 “충민공 13대에 장군이 난다”는 예언의 신봉자이다.
종손 임창옥(林唱鈺)씨는 서울에 거주하고 있기에 임대규씨가 제사를 모시고 있는데 충주시 살미면 별묘 바로 옆집에 거주하고 있다.
명나라 황제가 화사를 보내 직접 그렸다는 초상화 두 점 가운데 한 점은 황제에게 바치고 나머지 한 점을 보관하고 있다는 별묘에는 신주가 모셔져 있는데 관직이 많아 글씨가 깨알같다는 설명이다.
수백년 전의 진품을 대하는 느낌이 마치 임경업 장군을 직접 대하는 것 같아 사뭇 숙연해졌다.
“6.25 때는 아버지랑 다른 것 다 놔두고 이 영정과 신주를 등에 지고 피난을 갔어요”
제사를 직접 모시는 후손다운 미담이었다.
천추만대에 걸쳐 제사를 지내라는 임금의 명으로 지금까지 제사를 모신다고 하는데 이를 불천위 제사(不遷位 祭祀)라 한다. 이 불천위에는 국가에서 지정한 국불천(國不遷), 유림에서 지정한 화불천(和不遷)이 있다.
어쨌든 임경업 장군은 시제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매년 음력 6월 19일 직접 제사를 모시고 있고 그 백일 후에는 돌아가신 할머니 제사까지 지낸다고 한다.
충민공의 13세손인 그의 다섯째 아들 회용(會庸. 36세)씨가 육군소령이라니 예언을 기대해봄직 하다. 또한 손자 가운데 한 명도 현재 육군사관학교에 재학중이라니 장군의 후예답다.
기획취재<충민공 임경업 장군> 충신과 열녀, 효자의 가문
타고 다니던 말조차 따라 죽어
임경업(林慶業. 1594∼1646)의 자는 영백(英白), 호는 고송(孤松),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도시조(都始祖)는 임팔급(林八及)이고 중시조는 고려말에 세자전객령(世子典客令) 겸 연희궁 부사(衍禧宮副使)를 지낸 임세춘(林世春)이다.
임경업은 임세춘의 12세손이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임황(林篁)의 네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달리기에 뛰어났던 그는 무과에 급제, 첨지중추부사, 낙안군수 등을 지냈고, 이괄의 난 때에 공을 세워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이 되었으며 후에 병마절도사 겸 안주목사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는 도처에서 적군을 무찔러 영웅적이고 전설적인 용명을 떨쳤으며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고대소설「임경업전(林慶業傳)」이 있다.
경업의 형 형업(亨業)도 병자호란 때 모친상을 당한 관계로 피난을 못 가 청군에게 붙잡혔으나, 청군이 ‘효자는 해칠 수 없다(孝人不可害)’라고 찬탄할 정도로 효성이 뛰어나 효자·충신의 정문(旌門)이 고향에 세워졌다.
임경업은 명나라 말기 주청파인 김자점에 의해 무참히 죽임을 당하였으나 숙종23년(1697년)에 특명으로 복관되고, 숙종32년에 충민공(忠愍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임경업이 금교역에서 탈출한 후 청은 그 가족들을 모두 잡아 심양까지 끌어갔다가 처만 남겨 놓고 모두 돌려보냈다. 처만은 임경업의 행방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매일 고문을 하였으나 장군의 아내답게 “우리 주인은 대명(大明)의 충신이요, 나는 그 충신의 아내이다. 오랑캐의 옥중에서 욕을 보며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가 있는가” 하고 품에서 칼을 꺼내어 자결을 하였다.
또한 타고 다니던 준마도 임경업이 잡힌 후 고삐를 풀어놓아 보냈는데 그 후 말은 마굿간에 돌아왔다가 주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길게 세 번 울부짖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한다.
영조 2년(1726년)에 호서지방 사람들이 충열사(忠烈社)를 세웠고 이듬해(영조3년)에 사액(賜額)을 내리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정조15년(1791년)에는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으니 ‘어제달천충열사비’이다.
낙안축제, 소외된 임경업 장군의 후손
후손빠진 제향, 후손없는 부임행차
정월 제향과 5월 축제 때 초청해야
제9회 낙안민속문화축제에 즈음하여 본지에서는 낙안군수로 재임 시절 낙안읍성을 축조하였다는 임경업 장군에 대한 기획취재에 나섰다.
행사의 하이라이트 가운데 하나인 낙안군수 부임행렬에 임경업 장군의 후손이 참여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자료를 조사하던 끝에 춘계제향을 올린다는 충주 충렬사로 달려갔다.
4월 29일, 해마다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린다는 충주 유림들을 만나 취재하던 끝에 제사를 받들고 있다는 차종손(次宗孫) 임대규(. 68세)씨를 만날 수 있었다. 임경업 장군의 12세손이었다.
순천에서 왔다 하니 대뜸 낙안에서 왔냐고 되묻는다. “낙안에서 기자가 왔대요!” 하는 소리에 여기저기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다가선다.
악수를 청하는 그들의 주름진 손에서 낙안군민을 반기는 임경업 장군의 손길을 느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들에게서 낙안은 ‘장군할아버지’(임경업 장군에 대한 후손들의 호칭이다)에 대한 새로운 추억거리였다.
낙안에 가도 안내해 주는 이 없고
“낙안에 서너번은 가봤지. 관광삼아... 장군할아버지 제사도 지낸다 해서...” 누구랄 것 없이 다투어 낙안 이야기를 꺼낸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낙안은 관광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장군할아버지 제사를 지낸다 해서 가봤더니 안내해 주는 사람도 없고...”
대종회 재무일을 맡고 있다는 임병기(林炳起. 77세)씨의 말이다.
7순 노구들을 이끌고 설레임에 천리길을 나섰을 그 분들이 허탈하게 돌아갔을 것을 생각하니 괜한 안쓰러움에 몸둘 바를 몰랐다.
낙안읍성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이면 낙안민속마을보존회(회장 송상수)에서 제향을 모시고 있고, 5월 초에는 민속문화축제에서 부임행차를 재현한다.
“올핸 이미 늦었으니 내년부터라도 반드시 초청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왕이면 임경업 장군의 후손이 부임행차를 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처음보는 젊은이들의 약속에도 그들은 마냥 좋아했다.
안동에서 왔다는 임윤규(林允奎. 70세)씨도 “낙안에 여러차례 갔다”며 임경업 장군으로 하여 기자에게 무척이나 친근감을 표현하였다.
‘장군의 손자들’이라 그런지 다들 70 노인인데도 혈색이 좋고 정정하다.
동생 아들을 양자로 혈통 이어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임경업 장군은 혈손이 없다.
북한에 임경업 장군의 혈손이 있다는 일부의 주장도 있지만 사실확인은 되지 않고 있다.
“쉰 셋에 돌아가셨는데 왜 후사가 없었을까요?”
“관직에 나가고 전쟁터를 돌아다니느라 후사를 볼 틈이 있었겠어요?”
기자의 질문에 그들은 한결같이 장군할아버지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한다.
임경업 장군의 부친이신 임황(林篁)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는데 임경업 장군은 그 넷째 아들이었다. 결국 여섯째 아들인 준업(俊業)의 장남 중번(重蕃)을 양자로 하여 그 후손들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충주시립중앙도서관에 근무한다는 손정석(孫正錫. 41세)는 “임경업 장군에 흠뻑 빠져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며 자료제공은 물론 친절한 안내까지 해주어 충주시 공무원에대한 친절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장군묘에 용접봉이 박혀 있기도
충주시 풍동에 있는 장군묘로 안내해 주신 분은 임병훈(林炳薰. 67세)씨였다. 장군할아버지에 관한 일이라며 비가 오는데도 산길을 마다 않고 안내해 주신 분이다.
그에 의하면 인근에 정인지 묘소가 있는데 몇 년전 명산명소에 일본인들이 칼을 꽂고 쇠말뚝을 박은 것이 보도되던 무렵, 공군부대의 도움을 받아 정인지 묘와 임경업 묘 등에 대한 지뢰탐색에 나섰는데 커다란 용접봉 등이 나와 경악을 금치 못한 적이 있다고 한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평택 임씨 대종회에서는 충주시 호암지라는 호수가에 있는 우륵당에서 김생, 우륵 동상 옆에 자리한 임경업 장군 동상제막식 준비에 분주하였다.
첫댓글 이렇게 좋은 글이 있었네요.
일전에 충렬사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드디어 글이 올라 오는군요.현재님 감사하게 잘 보았습니다.
이글을 중원의 문화유산으로 옮깁니다.
좋은글 올려주셨네요 임경업장군의 작품을 쓰는사람으로 참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