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과 교육의 중심도시 익산의 옛 지명 ‘이리’에 대한 추억’ 나는 시골에서 관촌초등학교를 다니다 4학년 때 이리초등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어 1970년도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당시 ‘이리’라는 도시에 살게 되었고 그 이후 취업을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익산 17경비대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기 위하여 다시 익산으로 내려와 약 1년 2개월 정도 익산에서 살았다. 그러니 내가 익산에 거주한 기간은 약 10여년 정도 되는 것 같다. 시간으로 보자면 10년이 그리 긴 세월이 아닐지 몰라도 그 기간은 초・중・고 학창시절로 내가 성장해가는 유년과 청소년 시절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상당히 소중한 기간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형님이 익산에 살기 때문에 명절 때면 차례를 지내기 위해 익산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익산은 내가 태어난 곳은 아닐지라도 나에게는 고향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 김제 용지에서 벌초를 마치고 익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부용 인근을 지나면서 부용역은 지금 어떤 모습인가 궁금해서 잠시 들렸다. 물론 역사는 남아 있지만 폐쇄되어 열차도 서지 않은 무인역이 되었다. 내가 부용역에 들린 이유는 1970년도에 처음으로 이리로 전학을 왔을 당시에는 이리에다 방을 얻어 나와 형 그리고 외삼촌 셋이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먹을거리를 부모님이 계신 임실 관촌까지 내려가서 갔다 먹기에는 거리도 멀고 당시에는 교통도 불편하여 김제군 용지면에 소재한 외가로 가서 갖다 먹었다. 당시에 이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비록 한 정거장 거리이지만 부용역에서 내려 용지면 죽순리 외가까지 약 1시간 이상을 걸어서 다녀야했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산골 소년이었던 내가 이리라는 도시로 처음 와서 느낀 것은 아침 등교시간에 검정 교복을 입은 형님들과 누나들의 엄청나게 긴 행렬을 보면서 그 광경에 놀랐던 것 같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이리여고 앞이라 이리초등학교까지 등교하려면 이리여고 정문에서 중앙시장 입구로 가서 좌측으로 꺾어서 마동파출소 방향으로 곧장 올라갔다. 왜냐면 시골 촌놈이라 지름길인 골목길을 몰라서 그렇게 돌아서 다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마주치는 검정색 교복을 입은 형님 누나들의 긴 행렬과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었다. 이리여고 앞길에는 이리여중과 이리여고 누나들, 중앙시장 입구에서는 원여중과 원여상 누나들, 남성여중과 남성여고 누나들 그리고 진짜로 멋진 광경은 이때부터다. 이곳에서 이리남중과 이리농고 형님들은 마동파출소 방향으로 올라가고 나머지는 좌측으로 중앙로 길을 따라 남성중과 남성고, 이리동중과 이리고 그리고 이리공고가 소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중앙로 길을 따라 등교하는 검정 교복을 입은 통학생 형님들의 긴 행렬은 정말 장관이었다. 또한 이 길에는 당시 최고의 명문초등학교인 남성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전부 곤색 교복을 입고 다녔다. 산골 촌놈인 나로서는 초등학생들의 교복 입은 멋진 모습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성초등학교는 사립이라 부잣집 자녀들이 많이 다녔는데 집안에 돈만 많다고 갈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초등학교지만 당시 입학시험을 봐서 성적이 우수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이름난 명문학교였다. 당시 ‘이리’라는 도시는 호남선, 전라선 그리고 군산선이 교차하는 철도교통의 중심지였으며, 또한 교통의 중심지로서 잇점 때문에 많은 중고등학교와 원광대학이라는 교육기관이 소재하고 있어 교육도시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호남선의 경우 아래에는 정읍역, 신태인역, 김제역, 부용역 등에서 많은 통학생을 이리로 실어 날랐고, 위로는 강경역, 논산역, 함열역, 황등역 등에서 많은 통학생들을 실어 날랐고, 전라선에선 삼례역, 대장촌역 등에서 많이 학생들을 실어 날랐고, 군산선의 경우는 대야역, 임피역, 오산역 등지에서 실어 날랐기 때문에 당시 이리는 곳은 지방 도시 중 통학생이 가장 많았던 도시로 유명하였다. 당시 자료를 보면 열차 및 버스를 이용하여 이리로 등교하는 통학생과 이리공단을 비롯하여 직장으로 출근하는 통근객들의 숫자가 약 3만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니 이리라는 도시의 인구가 낮에는 부쩍 늘어났다가 저녁에는 푹 줄어드는 현상이 반복되는 도심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익산시의 인구가 30만이 넘지만 1970년대에는 8만 정도였다고 추정하면 인구의 약 40%가 낮에는 늘었다가 밤에는 줄어드는 것이니 그 정도가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1976년도 고등학교 전기 입시에서 선택을 잘못하여 다른 사람들과 반대로 이리에서 전주로 기차로 통학을 해야만 했다. 열차통학 당시 우리는 새벽에 별을 보고 집을 나서서 별을 보고 늦은 시간에 귀가 하는 힘든 일정이다 보니 환경이 열악하였다. 열차 안에서 책을 보면 되질 않느냐고 할지 몰라도 그러나 현실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과거 어느 교수님이 조사한 기차통학생들에 대한 실태조사 자료를 보면 많은 학생들이 위장병과 수면부족으로 고생하고 있었으며 이런 영향으로 통학생들이 머리는 좋은데 상대적으로 성적이 나쁜 것으로 나타났으며, 또한 탈선의 위험도 컷 던 것으로 보고하고 있었다.
【아래 그림】부용역의 예전 모습 부용역은 익산역과 김제역의 중간에 위치한 역으로 현재는 여객의 감소로 인해 역무실을 폐쇄하였고, 모든 여객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있다. 【아래 그림】부용역의 현재 모습 부용역은 김제시 백구면 소재지에서 떨어져 있고 역세권이 미약하여 현재는 여객이나 화물의 왕래가 없다. 당시에 부용역에서 열차에 오르는 통학생의 숫자가 4백이 넘었다니 많은 숫자이다. 【아래 그림】부용역의 현재 모습 출입문도 폐쇄되어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다. 춘포역이나 임피역처럼 내부를 복원하여 문화재로 등록해서 관광객들을 유치해 볼만도 한데 방치되어 있는 게 안타깝다. 【아래 그림】부용역에서 바라본 부용 읍내 부용역에 열차가 서지 않으니 부용 읍내의 거리도 한산하고 사람이나 차량의 왕래도 거의 없는 것 같다. 【아래 그림】황등역 황등역은 호남선 익산에서 대전, 서울 방향으로 나있는 첫 번째 역으로 한때는 여객, 화물 취급을 모두 중지한 무인역이었으나, 호남고속철도 건설공사로 인해 이웃 익산역의 구내가 장기간 축소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구내를 확장하여 조차장 및 화물 취급 기능 일부를 넘겨받아 보통역으로 환원되었다, 개인적으로 예전에 이리에서 전주로 함께 통학하던 친구가 이곳에 근무한 적 있다. 【아래 그림】황등역 가수 나훈아 씨가 불러 국민 애창곡이 된 ‘고향역’의 배경무대가 황등역과 익산역이다. 전북 순창출신 임종수 작사·작곡가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삼기면에서 황등역을 거쳐 익산역으로 통학하다 철길 옆 코스모스를 보고 고향의 부모님과 동무들이 보고 싶어 노래로 지었단다. 임종수 선생도 열차통학생이었다. 【아래 그림】임피역 임피역은 현재 열차가 서지 않은 무인역지만 건축당시 농촌지역 소규모 간이역사의 전형적 건축형식과 기법을 잘 보여주고 원형 또한 비교적 잘 보존돼 건축적, 철도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아래 그림】임피역 임피역은 일제강점기 호남평야의 쌀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세워진 역사로 군산 지역 수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아래 그림】임피역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긴다. 나는 당시 전기입시에서 장학금을 받기 위해 군산의 어느 고등학교에 지원하여 당시 5만 원짜리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가서보니 나와는 인연이 아닌 것 같아 포기하고 후기에 전주로 갔다. 【아래 그림】임피역은 오산리와 대야 사이에 있는 역이다. 당시 고등학교를 군산으로 같으면 군산선 열차가 나와의 인연이었을 텐데 전주로 가는 바람에 전라선이 나와의 인연이 되었다. 【아래 그림】임피역 현재 임피역은 여객 및 화물의 운송이 끊긴 상태인데도 관광자원으로 조성하여 역사 및 부속 시설들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건축사적으로나 철도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어 철도관광지로 부각되고 있는 곳이다. 【아래 그림】춘포역에서 춘포역사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역사(驛舍)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단다. 촌포역도 현재는 열차가 서지 않는 무인역으로 오래 전 역무원도 떠났고 역만 홀로 남았다. 춘포역 또한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군산으로 실어 날랐다. 【아래 그림】춘포역에서 세워놓은 조형물 제목이 "칙칙폭폭 사랑 이야기"다.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사랑의 하트를 들고 있는 저 소년의 모습이 나의 학창시절 모습 같아 보인다. 나는 고등학교시절 이리에서 전주로 열차통학을 했던 통학생이었다. 춘포역은 당시 역명이 대장촌역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는 통학하던 시절의 역명인 그냥 ‘대장역’이란 역명이 좋다. 왜냐하면 대장역은 나에게는 특별히 가슴속에 그리움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도 50대 중반을 넘어 나이 들어 이곳에 와서 보니 이수인 선생의 “내 마음의 강물”이란 노래의 한 소절이 내 맘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그날 그땐 지금 없어도 내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 ♪♬ 나의 짝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아래 그림】몇 해 전에 예전에 이리에서 전주로 통학했던 친구들과 자리를 함께 했던 사진인데 이 중에는 벌써 저세상으로 간 친구도 있으니 인생 참으로 무상하다.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이화구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