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 Queenborough/BPI/스포탈코리아
[스포탈코리아] '스포탈코리아'는 3회에 걸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유소년 축구 선수 양성 현장을 심층 보도한다. 이번에는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 양성소를 꿈꾸는 유럽 대륙의 비전을 만났다.
글 Neil Billingham 에디터 이민선
#1. 네덜란드
국토의 3분의 1이 해수면 아래 위치해 있어 생존을 위협받는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바로 네덜란드 땅이 그렇다. 다행히 머리 회전이 빠르기로 유명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바다로부터 땅을 지켜내는 불가능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왔다. 축구 분야에서 이뤄낸 성과 역시 기적이라고 할 만하다. 1,500만 명도 채 안 되는 인구, 50년 밖에 안 된 프로 리그 역사, 재정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축구 강대국과 대등한 경쟁을 벌여왔다. 그 비밀은 유소년 양성의 전문화에 있다.
네덜란드처럼 부족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걸출한 선수들을 발굴해 낸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아약스가 유소년 육성에 있어 유럽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실상 이 작은 나라의 구석구석에 최고 수준의 선수를 양성하는 클럽이 존재하고, 그 역사 또한 길다. 스코틀랜드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고 현재는 UEFA의 기술국장을 맡고 있는 앤디 록스버그는 “아약스는 선수를 자체적으로 키워내는 것으로 유명한 팀입니다. 리누스 미셸, 레오 베인하커르, 루이스 반 할과 같은 지혜로운 감독들은 유소년 팀에 많은 관심을 쏟았고, 풀뿌리 축구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리누스 미셸은 클럽의 가장 밑바닥부터 맨 위까지 ‘붉은 실(red thread, 보이지 않은 강한 운명의 끈을 의미)’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아약스의 유소년 시스템이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만이 유일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PSV 아인트호벤의 유소년 아카데미 원장이자 네덜란드 대표선수 출신인 에드워드 스튀링은 최근 유소년 축구선수 양성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5개 팀으로 아약스, PSV, 페예노르트, AZ 알크마르, 헤렌벤을 꼽았다. “연령대를 막론하고 성공적인 팀은 모두 이 5개 팀 산하에 있지만 우열을 가리기가 힘듭니다. 아약스의 프로그램이 굉장히 뛰어나지만 다른 클럽도 뒤지지 않죠.”
록스버그는 그 이유가 단순한 데 있다고 말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아이들에게 ‘훈련’을 시키지 않습니다. 스스로 연습할 시간을 주고 개인기를 연마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유소년 선수 발굴을 상당히 세심하게 준비하죠.”
‘세심한 준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질문을 던지자 스튀링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좋아요, 제 컴퓨터로 설명해드리죠”란 말과 함께 필자를 PSV 유소년 아카데미 내의 호화로운 사무실로 인도했다.
그 후로 20분 간 학창시절 과학 수업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세밀한 코칭 스케줄, 도표, 연령대별 차트가 눈 앞에서 펼쳐졌다. “7세부터 12세까지는 개인 기술 연마에 집중합니다. 그 다음은 일대일 상황을 가르치고, 이후에는 두 명의 공격수와 수비수 한 명이 대응하는 상황을 배웁니다. 그리고 나서는 승패를 중시하지 않는 8대8 경기로 과감한 시도와 공격 축구를 익히죠. PSV 유소년 시스템 출신인 아르연 로번 같은 선수도 이런 식으로 축구를 배웠습니다.”
이 같은 청사진은 PSV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축구협회와 이러한 비전을 신뢰하는 모든 클럽에 의해 만들어지고 명맥을 이어간다. “11대 11로 경기를 할 때는 꼭 4-3-3시스템을 씁니다.” 스튀링이 또 다른 도표를 가리키며 말했다. “좀 난해한 시스템이지만 유연성이 커서 선수들이 쉽게 적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작은 부분에도 신경을 기울인다. 축구협회는 17세 이하 팀에 두 명의 감독을 두도록 규정하고(스튀링은 “소년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힘든 시기니까요”라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기술 전담 코치, 그리고 ‘코디네이션 트레이너(신체 조정 능력을 키우는 전담 트레이너)’를 반드시 두도록 강제한다.
“7~12세 팀의 가장 큰 과제는 볼 컨트롤과 신체 조정입니다.” 스튀링은 여태 풀어놓은 이야기를 실전에서 설명하기 위해 우리를 밖으로 안내했다. 연습구장에는 빨강과 흰색의 대비가 뚜렷한 셔츠, 검은 바지의 PSV 유니폼을 입은 12세 소년 4명이 있었다. 한 손으로 공을 던지고 받는 연습을 할 때만 축구공이 사용됐다. 그 외에는 고무공으로 하는 공놀이나 물구나무서기, 옆으로 재주 넘기를 했다. 토털 사커가 아닌 토털 트레이닝이 진행 중인 셈. “자신의 몸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그것부터 가르치죠.”
현재 네덜란드 출신 지도자 중 최고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거스 히딩크 ⓒJavier Garcia/BPI/스포탈코리아
하지만 톱 클럽들만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저변을 지배하는 지역의 축구 열기가 없다면 소수의 노력은 고전할 수밖에 없다. 네덜란드에는 학원 축구가 없는 대신 2,500여 개의 지역별 클럽이 있고, 그 중 95%가 유소년 시스템을 운영한다. 주말마다 7세부터 19세까지 다양한 연령별로 경기가 열린다. 축구 선수도 많고, 축구 경기도 많다. 스튀링은 “네덜란드의 축구 피라미드 구조는 거대합니다”라며 손으로 삼각형을 만들어 보였다. “이 작은 나라에 그렇게 많은 지역별 클럽이 있다는 게 대단하죠. 피라미드의 밑단이 크니까 당연히 최상위에서 좋은 자질의 선수가 계속 나오는 겁니다.”
유소년 분야만을 볼 때 네덜란드는 질과 양 모두 우수하다. 원석을 가공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정상급의 지도자가 네덜란드 출신이라는 데 이견을 제기할 사람은 몇 안 될 것 같다. 1999년, FIFA는 리누스 미셸을 ‘세기의 감독’으로 명명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는 마르코 판 바스턴(네덜란드), 거스 히딩크(호주), 레오 베인하커르(트리니다드토바고), 딕 아드보카트(한국) 등 4인의 네덜란드 출신 감독이 참가했다. 잉글랜드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위트레흐트 외곽의 제이스트에는 세계 유일의 감독 아카데미가 있다. 30년 이상 세계 최고의 감독을 양성해온 곳이다. 현재 전 세계에는 100명 이상의 네덜란드 출신 지도자가 활약하고 있고, 그 중 대표주자로 거스 히딩크를 꼽을 수 있다. 히딩크는 “우리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뛰어난 창의력이 필요했습니다. 어린 선수들의 장점을 최대한 끌어내고, 다년간 힘겨운 감독 양성 과정을 시행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네덜란드에서 유소년 지도자는 인정받는 직업군이다. 특히 클럽 산하 유소년 기구 관련직은 대단히 존중받는다. 아약스, 페예노르트, PSV의 유소년 지도자는 절반이 선수 출신이다. 스튀링은 “좋은 감독이 되려면 가장 기본적인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저도 모든 연령대의 팀을 거쳤습니다. 실수를 저질러도 그 대안을 시도해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죠. 처음부터 성인 팀을 맡으면 실수 자체가 용납이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
모든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이런 의문이 생긴다. 최고의 지도자와 최고의 유소년 시스템을 가진 네덜란드는 왜 월드컵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을까? 여태까지 해왔던 이야기와는 정반대로, 네덜란드의 유소년 시스템이 기술, 테크닉, 개인기에 지나치게 집중한다는 지적이 있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들을 배출했지만, 세계적 수준의 네덜란드 수비수를 꼽아보라고 하면 떠오르는 선수가 없다. 네덜란드 축구 잡지인 '하드 그라스(Hard Gras)'의 에디터 헹크 스판도 해답을 찾느라 힘겨워했다. “로날드 쿠만은 수비수라기보다 ‘리베로’에 가까웠죠. 칼리트 불라루즈가 현역 네덜란드 수비수 중 최고라고 하지만 첼시에서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네덜란드가 세계무대에서 고전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스판은 “네덜란드 인은 ‘아름다운 축구’에 대해 지나친 애착이 있습니다. 꼴 사납게 이기기보다 차라리 멋지게 지겠다는 생각이 강해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오를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2010년 월드컵에서는 형편없었지만 프랑스의 축구는 늘 예술이었다 ⓒJavier Garcia/BPI/스포탈코리아
#2. 프랑스
멋진 축구를 하면서도 세계 정상에 올랐던 나라로 프랑스를 꼽을 수 있다. 지난 10년만 따져보아도 월드컵(1998년), 유럽선수권(2000년)에서 우승했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결승에 진출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선수 양성이란 면에서 다른 유럽 국가들을 훌쩍 앞서 나갔기 때문. 2007년 챔피언스리그 기간 중 경기가 열렸던 하루의 통계를 내보니 32명 선발 명단에 가장 많은 선수를 내보낸 나라는 총 65명이 출전한 브라질이었다. 그 다음은 37명을 내보낸 프랑스. 포르투갈 24명, 이탈리아 22명, 네덜란드 15명, 스페인 15명, 잉글랜드 14명에 이어 독일은 12명에 불과했다.
오늘날 프랑스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수의 실력파 선수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조르주 불로뉴의 공이 가장 크다. 그는 1966년에 프랑스 축구협회와 만난 자리에서 프랑스 대표팀의 실력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1973년 프랑스 아카데미 시스템을 창설했고, 25년 후 ‘레 블뢰’가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 초석을 마련했다. 현재 프랑스에는 각 클럽별 아카데미와 더불어 전국에 9개의 지역별 엘리트 센터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클레르퐁텐은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 최고의 재목들은 주말에 각자의 클럽으로 돌아갈 때를 제외한 주중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다. 선수들은 클럽 아카데미와 지역별 센터에서 거주하며 축구 수업과 정규 학업 과정을 병행한다.
한 때 모나코 소속으로 뛰었고, 스코틀랜드 대표팀의 미드필더를 거쳐 현재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하이버니언 FC의 감독으로 재직했던 존 콜린스는 아카데미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한 것이 프랑스의 어린 선수들에게 가장 큰 호응을 얻었다고 말한다. “선수들이 아카데미에 거주해야 하기 때문에 교육에 특히 중점을 두었습니다. 14세 때 아카데미에 들어온 학생들은 훈련과 수업을 쉴 틈 없이 반복합니다. 완벽한 통제 하에서 학과 성적도 잘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나코 경기장 안에만 무려 14개의 교실이 있었죠.”
프랑스의 어린 선수들은 12세에서 16세가 될 때까지 아카데미에 4년간 머무르면서 잉글랜드 유소년 선수의 2배에 이르는 총 2,304시간의 훈련을 이수한다. 양적, 질적으로 모두 우수하다. 앤디 록스버그는 “제라르 울리에가 생각해낸 ‘프리포메이션(preformation, 앞서서 형성하기)’ 훈련이라는 제도를 도입했어요. 13세부터 16세 연령을 지도할 때는 개별적 훈련과 기술 개발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제라르는 16세를 넘을 때까지 기술적 토대가 형성되지 않았으면, 그 뒤로는 따라잡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죠.”
물론 아카데미에서만 축구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한 크루이프나 조지 베스트는 길거리에서 축구를 배웠다. 하지만 유럽의 문화가 바뀌면서 길거리 축구는 20년 전부터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록스버그는 이런 모습에 대해 아쉬움을 보인다. “마르첼로 리피는 요즘 아이들이 길거리 축구를 하지 않는다고 항상 투덜대곤 합니다. 좀 더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축구를 하는 있는 환경을 다시 조성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에요. 스페인, 포르투갈에서는 브라질처럼 풋살을 많이 합니다. 기본기를 배우기에는 최고인데 유럽 다른 지역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죠. 과거에는 거리에서 축구 하는 아이들이 많아 뽑을만한 선수가 많았지만 지금은 좋은 선수를 발굴하기 위해 특별한 기관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록스버그가 가장 좋아하는 표어는 “Chance or design(우연 혹은 계획)”이다. UEFA의 풀뿌리 축구 육성 책임자라는 위치 때문인지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이야기할 때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는지에 관해서는 딱 꼬집어 말하길 피하는 외교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해외 선수를 지나치게 많이 영입하는 특정 국가에 관해 대단히 우려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선수를 많이 사서 그 중 몇몇이 잘 해주기를 바라는 식으로 우연(chance)에 맡길 수도 있고, 계획(design)을 세워 선수를 직접 키워낼 수도 있습니다. 잉글랜드 클럽은 선수들을 살만 한 자금이 있고 몇 명을 사던 제한이 없습니다. 그곳 아카데미 소속 선수들에게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항상 존재하는 셈이죠.”
록스버그는 돈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말은 납득할 수 없는 핑계라며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옹,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인터 밀란 등의 빅 클럽의 예를 들었다. 그들은 유소년 육성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 편이 돈이 덜 들기 때문이죠. 바르셀로나가 좋은 예입니다. 리오넬 메시는 아르헨티나 출신이지만 12살 때부터 바르셀로나에서 지냈어요. 바르셀로나는 세스크 파브레가스, 사비 에르난데스, 카를로스 푸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를 키워냈습니다.”
스페인 유소년 시스템의 아들, 챠비ⓒJoe Toth/BPI/스포탈코리아
#3.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가 유소년 양성에 열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잉글랜드와 유사하게 세계적인 선수들을 프로 리그에 긁어 모으고 있는 스페인의 상황은 어떨까? 청소년 대표팀의 성적은 언뜻 봐도 대단히 훌륭하다. 스페인 청소년 대표팀은 17세 이하 유럽 선수권대회에서 6차례나 우승한 최다 우승팀이고 19세 이하 대회 우승은 4차례나 차지했다. 1999년에는 골문에 이케르 카시야스를, 미드필드에는 사비를 앞세워 FIFA 20세 이하 세계 청소년 선수권대회에서 첫 번째 우승을 거뒀다.
유럽 최고의 유소년 클럽 중 하나인 안티구오코는 스페인의 자랑거리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가? 리버풀이나 에버튼 팬이라면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바로 챠비 알론소와 미켈 아르테타를 배출한 바스크 지역 유소년 클럽이다. 안티구오코 16세 이하 팀은 2007년 스페인 챔피언십 플레이 오프에 진출했다.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에스파뇰의 유소년 팀을 누르고 결승에 오른 안티구오코는 1군 소속 선수가 2명이나 되는 발렌시아에게 패했다. 공식적인 수입도, 경기장도 없는 아마추어 클럽이 결승까지 진출한 것만으로도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리버풀이 그들의 탁월한 유소년 양성 능력을 높이 사 위성 구단으로 삼겠다고 나서자 그간 안티구오코와 선수 공급 계약을 맺어왔던 레알 소시에다드는 불편한 심기를 보였다. 스페인에서는 하나의 클럽이 여러 소규모 지역 클럽에서 선수를 공급받는다. 상위 구단이 위성 구단에 ‘급료(salary)’를 지불해 가장 좋은 선수들을 선점하는 권한을 얻는 것이다.
산 세바스티안에 거주하며 'Morbo: 스페인 축구 이야기'라는 책을 쓴 잉글랜드 출신의 필 볼은 스페인의 시스템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상당히 포괄적입니다. 학원 축구와 클럽 축구의 결합으로 한 주는 학교 팀과, 또 한 주는 지역 클럽과 경기를 갖습니다. 클럽에서는 좀 더 전문화된 지도가 이루어지죠. 그곳에서 좋은 기량을 보이면 프로 클럽에서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대신 학교와 클럽 모두 철저한 관리를 통해 아무도 낙오하지 않도록 지도합니다.”
현재 산 세바스티안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 선수는 필 볼의 아들인 11세 소년 해리 볼이다. 최근 레알 소시에다드로부터 초대를 받았을 정도로 기량을 인정받고 있다. “제 아빠를 꼭 빼닮았죠”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은 필 볼은 “공식적으로는 14살이 되기 전에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뛸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때까지는 학교 축구부와 지역 클럽에서 뛰게 하면서 어떻게 성장하는지 지켜보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학창 시절 꽤 괜찮은 선수였다는 필 볼은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환경이 너무나 다르다고 말한다. “잉글랜드의 학교 축구 시스템은 엘리트 위주로 돌아갑니다. 일단 한 팀에 들어가면 거기서만 뛰어야 하죠. 잉글랜드에서 엘리트 아카데미 계획안(축구협회가 버튼 어폰 트렌트에 설립할 예정이었던 국립 센터)이 무산됐다고 화내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합니다. 왜 소수 정예만 집중 육성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재원이 있다면 각 지역으로 분산시켜 지역별 클럽을 지원해야죠.”
볼은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유소년 축구 수준을 비교하며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성장기 후반의 소년들의 경우, 프리미어리그보다 라 리가 선수들이 더 우세하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에 갈 때마다 아들 또래 꼬마들의 훈련을 보면 주로 뛰고, 땀 빼다가, 서로 발길질하는 데만 집중되어 있어요. 프리미어리그의 판박이죠. (2007년에) 잉글랜드 팀이 세 팀이나 챔피언스리그 준결승까지 올랐으니까 다들 프리미어리그가 최고라고 말하는데 러시아 갑부의 지원을 받아 준결승조차 못 올라가면 되겠어요? 리그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엇비슷한 팀끼리 서로 경쟁하는 UEFA컵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난 2년간 이 대회를 휩쓸었던 건 스페인이죠.”
1995년 유러피언컵을 차지한 후 판 할 감독은 주력 선수 7명을 잃었다ⓒGreig Cowie/BPI/스포탈코리아
#4. 보스만 판결이 가져온 변화
1995년은 아약스에겐 잊지 못할 해였지만, 네덜란드 축구에 있어서는 무덤과도 같았다. 5월 25일, 비엔나의 에른스트 하펠 경기장에서 패트릭 클라위베르트가 85분경 AC 밀란을 상대로 뽑아낸 골로 아약스는 22년 만에 처음으로 유러피언컵을 획득했다. 3년 전 UEFA컵에서도 우승했던 반 할 감독의 아약스는 자체적으로 육성한 선수 8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7개월 뒤, 세상이 뒤바뀌는 일이 생겼다. 벨기에 축구선수였던 장 마르크 보스만이 기념비적인 소송에서 승리하며 유럽 연합(EU) 내의 계약 만료 선수들은 이적료 없이 다른 클럽으로 이적할 수 있게 되었다. 아주 부유한 소수 클럽을 제외한 나머지는 기존 계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선수들을 붙잡아둘 수 없게 됐다.
비엔나에서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기쁨을 맛본 지 2년 만에 아약스는 주력 선수 7명이 스페인, 이탈리아, 잉글랜드로 떠나갔다. 물론 전에도 이런 일은 있었다. 70년대 리누스 미셸 감독의 지휘하에 유럽 대회 3연패를 일궈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두 명의 요한, 크루이프와 네스켄스는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그러나 보스만 판결이 프로 선수들에게 선사한 자유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약스, 입스위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미드필더를 거쳐 현재 아약스의 14세 이하 팀 감독으로 있는 아르놀드 뮈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네덜란드를 떠나 잉글랜드로 갈 때 제 나이가 27살이었죠. 근데 요즘은 17~19세 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해요.” 뮈렌은 리버풀과 계약했던 18세의 아약스 출신 스트라이커 요르디 브루어를 보스만 판결의 전형적인 예로 꼽았다. 그의 목소리에서 불쾌한 기색을 엿볼 수 있었다. “브루어는 잉글랜드에서 성공하지 못할 겁니다. 좋은 선수지만 1군에서 뛸 수는 없을 거예요. 너무 어리고 문화적으로 완전히 다른 곳에 가 있으니 향수병에 시달릴걸요? 오직 돈 때문에 간 거죠. 이런 선수들과 좀 더 세밀한 장기 계약을 맺어야 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떠난다고 해도 최소한의 이적료는 받을 수 있잖아요. 결국은 다 돈 문제입니다.”
보스만 판결이 초래한 현실, 그리고 챔피언스리그가 강력하게 부상하며 클럽 간의 빈부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아약스의 연매출은 5,000만 파운드(한화 920억 원)에 못 미치는 반면 맨유의 연매출은 그 세 배를 훌쩍 뛰어넘는 1억 6,500만 파운드(한화 3,037억 원)다. 프리미어리그가 방송 중계권 계약을 새로 맺으며 간극은 더욱 커졌다. 아약스가 직면한 새로운 위험과 싸워 이기기 위해 다양한 전략적 변화를 꾀하는 것은 네덜란드인들의 비상한 수완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아약스는 구단을 주식 시장에 상장했다. 북대서양리그 창설 등의 새로운 발상에 동참하는가 하면, 미국과 아프리카까지 시선을 돌리고, 동유럽의 몸값이 싼 선수들을 영입하는 모험을 시도했다. 그러나 뮈렌은 아약스를 비롯한 네덜란드 클럽들이 결국 자신들의 장기인 선수 양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네덜란드리그에는 아약스에서 축구를 배운 선수가 100여 명 정도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네덜란드 축구 전체를 위한 일입니다. 네덜란드 밖에서 선수를 발굴하겠다고 돈을 쓰는 건 제가 보기에 모두 헛일이에요. 남아공에 아약스 케이프타운이라는 위성 구단이 있지만 제대로 된 선수는 스티븐 피에나르 밖에 나오지 않았죠. 남아공이나 가나 선수보다는 네덜란드 선수를 가르치고 키우는 게 훨씬 쉽습니다. 사고방식이 다르니까요.”
요한 크루이프는 네덜란드가 과거 자신들의 세대처럼 기술 좋고 박진감 있는 선수들을 키워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네덜란드 내에서 그의 목소리는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소수 의견에 속한다. 헹크 스판은 크루이프의 의견에 대해 반박하는 입장이었다. “크루이프는 항상 70년대 이야기만 늘어놓아요. 17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들은 각종 국제 대회에서 여전히 우승을 놓치지 않습니다.”
과거와 달라진 부분은 성인 대표팀의 우수한 수비수 부족. 이에 관한 새로운 해법은 크루이프 같은 기술 신봉론자들을 절망케 한다. “과거에는 선수를 신장보다 기술과 스피드의 관점에서 뽑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약스가 비토 보름고르 같은 어린 선수와 계약한 것은 엄청난 변화죠. 체격과 신장이 크지만 기술이 떨어진다는 것이 대번에 눈에 띕니다. 잉글랜드에는 그런 선수가 수도 없이 많아요. 토니 아담스 같은 선수죠. 하지만 아약스는 이런 선수를 뽑은 적이 과거에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대단히 흥미로운 전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첼시의 위성구단(?) 아인트호벤 ⓒBPI/스포탈코리아
#5. 아인트호벤, 첼시의 위성구단화
보스만 판결 이후 유럽의 많은 클럽이 유소년 육성을 접었다. 18살이 되면 다른 클럽과 계약할 선수를 굳이 키워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이유에서다. 이에 UEFA는 클럽에 일정 숫자의 자체 육성 선수를 포함하도록 강제했다. 그러나 유럽 연합은 국적에 의한 차별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클럽들이 빠져나갈 여지는 충분했다. 이러한 지침은 빅 클럽들이 다른 나라의 어린 선수들을 빼돌리도록 장려하고 있다. 어느 국가가 최악의 범인인지 말 안 해도 잘 알 거라 생각하지만….
에드워드 스튀링은 어딜 가나 잉글랜드 스카우트를 만난다고 말한다. “우리 선수들을 뺏어가는 것보다는 직접 선수를 육성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나요? 잉글랜드는 나라도 크고, 축구에 대한 열정도 뜨거워서 실력 있는 아이들이 훨씬 더 많잖아요? 단순히 게으른 거겠죠. 대신 돈이 있으니까 신동들을 사갈 수 있을 테고요.” 그렇다고 비관만 하지는 않았다. “네덜란드는 운이 좋습니다. 돈도 많고 인구도 많았다면 선수 양성을 위해 이만큼 노력하지 않았겠지만, 덕분에 세계 6위의 국가대표팀을 갖게 됐으니까요.”
반면 돈도 많고 인구도 많은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에 두 계단 뒤지고 있다. 지난 20년간 두 나라가 대규모 대회에서 거둔 성적도 비교해 볼만 하다. 유럽선수권대회에서 네덜란드는 한 번 우승하고 준결승에 3회 진출했지만 잉글랜드는 준결승 진출 1회에 불과하다. 월드컵 기록은 각각 준결승 1회 진출로 똑같지만 인구 6,000만 명과 1,500만 명을 비교하면 그 의미가 같다고 할 수 없다.
잉글랜드 클럽은 자체적인 선수 양성에 힘을 쏟을만 한 여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어 보인다. 그 대신에 축구 제국주의자로 변신해 전 세계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뻗칠 생각뿐이다. PSV 아인트호벤은 첼시의 위성 구단으로 변해가고 있다. 아스널에게는 벨기에의 베베른이 있고, 리버풀은 안티구오코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다.
해수면의 상승으로 네덜란드의 국토 관리 담당자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스만 판결 이후 축구의 글로벌화는 네덜란드 축구에 막대한 장애물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계획이 있다. 아약스는 2011년까지 매년 연매출을 6%씩 늘리고, 유럽 16강에 들며, 2년에 한 번씩 네덜란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무엇보다도 챔피언스리그에서 다시 한 번 우승하겠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다.
아약스 선수 출신으로 현재 팀 매니저를 맡고 있는 다비드 엔트는 “아약스가 유럽컵을 따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1960년대 중반에 우리는 3번이나 우승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1980년대에도 아약스가 또 다시 우승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모두 말했지만 1987년 컵 위너스컵에서 우승했죠. 1992년에는 UEFA컵을 따냈고 1995년에는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유럽에서 성공하지 못할 거란 이야기가 나도는 시기가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아약스는 언제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방법을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들이 다시 유럽 정상에 오르게 된다면, 그것은 돈으로 성공을 사들인 결과가 아니라 자신들이 보유한 선수들에게서 최대한의 재능을 이끌어 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네덜란드는 이렇게들 말한다. ‘유소년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No Youth, No Future)’고…
:::유럽의 유소년 시스템:::
네덜란드
프로페셔널 클럽과 밀접한 유대 관계의 강력한 주니어 풋볼 클럽. 모든 프로페셔널 클럽이 네덜란드 축구협회가 확립한 지도법을 충실히 따른다. 완벽한 유소년 시스템을 확보하지 않으면 리그에 참가할 수 없다.
평가 9/10
프랑스
1973년부터 지역별 엘리트 센터의 지원 하에 아카데미 시스템을 시행해왔다. 엘리트 센터와 클럽 아카데미가 힘을 합쳐 축구 수업과 정규 학업 과정을 실시한다.
평가 9/10
스페인
학원 축구와 상위 구단에 선수를 공급하는 지역별 위성 클럽이 결합한 형태. 클럽에서는 좀 더 전문화된 지도가 이루어지고, 뛰어난 선수는 프로팀에서 훈련받는 기회를 얻는다.
평가 8.5/10
포르투갈
체계적인 면에서는 약간 뒤떨어진다. 학교와 클럽 아카데미 양쪽에서 지도하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중간 형태. 현재는 기숙사 제도를 도입해 정규 과정을 지도하는 아카데미도 있다.
평가 8/10
독일
학원 축구는 거의 없다. 그러나 지역별로 멀티 스포츠 클럽이 2만 6,000개가 있으며, 우수한 선수들은 390여 개의 지역별 센터를 이용한다. 01/02시즌 이후로 모든 프로 클럽에 최우수 교육센터(Centre of Excellence)를 설치하도록 규정했다.
평가 7.5/10
이탈리아
보스만 판결 이후 이탈리아 클럽은 유소년 발굴에 대한 흥미를 잃었고, 학교와 지역 아마추어 클럽이 축구 지도를 대신 맡아 하고 있다. 실력이 나은 선수들은 프로팀에 갈 기회를 얻으며, 대부분의 프로팀은 지역 클럽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평가 7/10
잉글랜드
학원 축구의 실패를 인정하고 1998년부터 아카데미나 시스템을 가동했다. 클럽은 아카데미나 최우수 교육센터를 반드시 운영해야 하며 9세부터 21세까지의 선수들을 지도한다.
평가 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