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해설
자연 변화에서 탐색하는 자아의 성찰
--주광일 시집 『나의 꿈, 나의 기도』
김 송 배
(시인.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
1. “나”를 인식하는 성찰과 기도
주광일 시인이 제4시집 『나의 꿈, 나의 기도』를 상재한다. 그는 일찍이 시집 『저녁노을 속의 종소리』와 『유형지로부터의 엽서』 그리고 『당신과의 세월』을 세상에 펼쳐보임으로써 우리 한국 시단에 그의 위상을 이미 평가 받은 바 있어서 주변의 동료 선배 문인들로부터의 상찬(賞讚)으로 그의 문학성과 인성에 대한 교감을 통한 인지도(認知度)가 높은 중견 시인이다.
그는 그동안 보펀적인 일상에서 창출하는 이미지에서 좀더 진행된 그의 사유(思惟)는 시간성의 변화에서 탐색하는 심도(深度) 있는 시적인 원류에 접근하면서 다시 자신을 되돌아보는 인식의 범주(範疇)를 확장하는 자아성찰의 시법에 천착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주광일 시인은 먼저 “젊은 날 밤낮 없이/ 죄와 벌을 따지며/ 살던 내가/ 여든되어/ 허접한 시를 쓰며 살 줄/ 꿈엔들 짐작하였으리.// 남은 나날/ 나에게 정직하며/ 섭리에 순응하며/ 정성껏 기도하며/ 말없이 살다 가리.(「남은 나날」 전문)”라는 의미심장한 어조(語調)를 통해서 우리들은 그의 인생론에 대한 명민(明敏)한 인식세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치면서 시민들에게 자각을 깨우치게 했다는 여운은 아직도 영원히 새로운 지적인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데 나를 인식하고 성찰하는 것은 인생의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계기로써 자신을 다시 회고(回顧)하면서 여생을 보내는 가장 현명한 일이 아닌가 한다.
내 마음 줄 끊어진 연처럼
갈 곳 몰라 하던 날
창문을 연다. 가차 없이 햇빛이
쏟아진다. 봄꽃 활짝 핀 아침.
하필이면 이렇게 좋은 날 어인 까닭으로
내 마음은 갈곳 몰라 했던 것인가?
내 몸, 창문 닫힌 빈방에 콕 박혀 있을 때
내 마음, 무엇을 찾아서 어디를 헤맸던 것인가?
햇살 밝은 5월의 아침
내 마음은 여전히 모든 것을 빼앗긴
황막한 들판 같지만, 그래도
힘껏 목청을 돋우어 꿈속에서도 그리운
자유와 정의를 노래하고 싶구나.
-- 「내 마음」 전문
주광일 시인의 내면에서 창출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그는 어떤 갈등과 절망에서도 창문을 열고 봄날 아침에 화사하게 핀 꽃을 보면서 “이렇게 좋은 날 어인 까닭으로/ 내 마음은 갈 곳 몰라 했던 것인가?”라는 한때의 치졸한 생각으로 갈 곳을 몰라 했던 그의 마음은 “무엇을 찾아서 어디를 헤맸던 것인가?”라고 절망의 세상을 벗어나려는 새롭게 단장된 심연(深淵)으로 그는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거추장스러운 상황들을 탈피하고 작품 결론에서 천명(闡明)한 내심(內心)과 같이 “내 마음은 여전히 모든 것을 빼앗긴/ 황막한 들판 같지만, 그래도/ 힘껏 목청을 돋우어 꿈속에서도 그리운/ 자유와 정의를 노래하고 싶구나.”라는 어조로 활기찬 그의 진실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는 이처럼 희망찬 세계를 구상하는 데는 기도라는 필수의 신념이 필요하게 된다. 작품 「나의 기도」 중에서는 “어느새 나이 들어 살아온 날들보다/ 살날이 턱없이 적다 보니/ 나 깨어 있는 순간순간마다/ 기도가 나와 함께한다.”는 신심과 더불어 인생향연을 구상하는 그의 기원 의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진
가을날 오후 바람도 멈춘
앙상한 가지 사이로 시퍼렇게
멍든 하늘이 서럽네요.
조금씩 조금씩 더 서러워지는
하늘은 이윽고 어두워지는데
마지막 남은 철새마저
어디론가 떠나고 있는데
엉망이 된 땅에 갇혀 꼼짝도 못 하고
남몰래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노시인 한 분,
싸늘한 울음 홀로 삼키며
잠못들어 하네요.
-- 「노시인」 전문
주광일 시인의 뇌리(腦裏)에는 어쩐지 흘러가는 세월과 더불어 늙음에 대한 연민이 가득하다. 자신도 모르게 시간성에 따른 심신의 강도(强度)가 매말라가는 현상을 몸소 감지할 수 있게 되면서 스스로 자신을 “노시인”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진/ 가을날 오후”나 “앙상한 가지 사이로 시퍼렇게 멍든 하늘” 그리고 “마지막 남은 철새마저/ 어디론가 떠나” 등의 시적 상황은 노시인에게 잠재해 있는 사유(서럽네요, 서러워지는 등)가 그의 존재의식에 대한 결정체(結晶體)의 한 장면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그는 결론으로 “남몰래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노시인 한 분,/ 싸늘한 울음 홀로 삼키며/ 잠못들어 하네요.”라는 한탄의 어조로 노시인의 진정한 속마음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작품 「노인 엽서」 연작 3편과 함께 「노인과 젊은이」 「노인의 봄날」 등에서 노인들의 애환이 적나라하게 투영되고 있어서 우리들에게 노년의 공감을 유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작픔 「뒤늦은 깨달음」 중에서 “가을이 떠나던 날/ 나는 깨달았다네./ 내 젊은 날의 허물도/ 내 삶의 일부였음을,/ 나의 인생에 있어서/ 틀에 박힌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이제 큰 눈 내리면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고서도/ 실컷 울 수 있음을.”이라고 참회하고 있는 것이다.
2. 세월 따라 변화하는 사유의 향방
주광일 시인은 우리 현대시 창작법에서 강조하는 몇 가지 분류에 충실하게 적응하면서 작품의 소재를 깊게 주시 관찰하거나 거기에서 감응한 메시지들을 들려주는 시법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먼저 외적(外的)으로 시야에 펼쳐진 자연 사물들의 현재의 상황을 보여주거나(showing) 그들이 간직한 애환들을 들려주는(story telling) 내적(內的)인 형태의 작품 완성이 우리들의 시각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거울을 훔쳐본다.
팔순이 다 된 평범한 시인의 얼굴 하나
보인다. 반백 년半百年 넘는 세월 동안
독하게 마음먹고 시집이 아닌 법전法典을
읽으며 살아왔는데, 어인 일로 느닷없이
이 속임수 모르는 거울 속에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 것일까? 아 결국 나는 말년末年에
무엇이 될지도 모른 채 여기까지 왔구나.
여기까지 오는데 일흔아홉 해가 결렸구나.
또다시 거울을 본다.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
본다. 단풍마저 떨어진 가을 산을 비추며
흐르는 가을 강이 보인다.
-- 「거울」 전문
그는 그가 착목(着目)한 사물 “거울”에서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생각했는가 잘 살펴보면 하찮은 거울에서 그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이는 거울 속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 아무 생각 없이 거울을 훔쳐보고 “팔순이 다 된 평범한 시인의 얼굴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반백 년半百年 넘는 세월 동안/ 독하게 마음먹고 시집이 아닌 법전法典을 읽으며 살아” 온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크게 깨닫는다. “아 결국 나는 말년末年에/ 무엇이 될지도 모른 채 여기까지 왔구나./ 여기까지 오는데 일흔아홉 해가 결렸구나.”라는 독백을 읽어내는 자화상이며 자성(自省)의 메시지가 다시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거을에는 단풍마저 떨어진 가을 산과 가을 강이 비취고 있어서 반백년이나 아홉아홉의 세월이 대칭을 이루고 있어서 그가 구축하려는 작품의 이미지는 명징(明澄)하게 현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세월 따라 변화하는 그의 사유의 향방은 다채롭다. 무엇이 될지도 모르는 미지의 삶에서 “그래서 내 마음을 깊은 산 속 샘물로 가득 채운 다음,/ 맑은 비가 되어 강과 산에 내리고 싶습니다.(「남한강변에서」 중에서)”라는 어조로 기원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허허로운 들판을 정처 없이
헤매는 내 귓가에
어디로 떠나는 바람인지
서글픈 이별의 소리가 들린다.
앙상한 나무에 남은
잎새 서걱대는 소리,
낙엽 구르는 소리도 들린다.
늦가을 하늘 저 멀리
날고 있는 들새 한 마리,
그 들새의 날갯짓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쩐 일인가,
그 들새의 울음소리가
내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아파하는
그 들새의 울음소리가
내 가슴을 멍들게 하는 것 같다.
-- 「들판의 소리」 전문
지금까지 어떤 사물에서 추출한 이미지가 상황을 설정하면서 그 다채로운 현장을 보여주면서 거기에서 시각적으로 느낀 바를 진실로 들려주었다면 여기서는 들판에서 들리는 소리를 청각적으로 이미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작품 도입부분에서 “허허로운 들판을 정처 없이/ 헤매는 내 귓가에/ 어디로 떠나는 바람인지/ 서글픈 이별의 소리가 들린다.”는 상황 설정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서글픈 이별의 소리”가 내포하는 의미는 어쩌면 그가 예비하는 훗날의 서글픈 형상의 소리인 것이다.
그에게서는 잎새 서걱대는 소리, 낙엽 구르는 소리, 들새들의 울음소리 등이 앙상한 나무나 늦가을 하늘 저 멀리에서 “들판의 소리”로 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허허로운 들판이나 앙상한 나무나 늦가을 하늘 등의 상황이 서글프게만 느껴지는 현장이라서 세월이 전하는 이미지의 향방은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어서 그가 시적으로 주창(主唱)하는 반백년과 아흔아홉의 시간성과도 상응하는 정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어느 날 “그 들새의 날갯짓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어조와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아파하는/ 그 들새의 울음소리가/ 내 가슴을 멍들게 하는 것 같다.”는 결론은 더욱 절망의 세태에게 경종을 울리는 경구(警句)의 의미도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3. 생몰의 경계에서 올리는 간절한 기도
주광일 시인이 심리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일년 사계절에 대한 변화의 섭리를 순응하는 긍정의 이미지를 접맥하는 시법을 많이 대하게 되는데 이는 계절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모하는 자연의 형상이 바로 우리 인간들과 대비하는 생성의 근원이 소멸이라는 생몰의 경계에서 관조하거나 조망하는 성숙한 사유의 일단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이처럼 계절의 섭리에 대한 이미지는 각각 다른 양상으로 깊은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데 가령 봄에는 만유(萬有)의 대자연이 새 생명의 탄생으로 새로운 출발이나 새 희망이 함축된 것이 여름으로 나아가면 왕성한 생기의 발산으로 만물의 전성기를 형성하다가 가을이 되면 결실의 계절, 모든 것이 풍요가 넘치는 충만의 계절이 다시 겨울이면 모두가 동면(冬眠)을 하거나 생을 마감하고 다음 해를 기약하는 자성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뭇 가까워진 어느 봄날
60년 넘는 내 친구
마지막 숨을 쉬고 있는데
이제는 사는 동안
실컷 반성하고
실컷 기도하며
닫혔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이 들어 마음마저 닫아버린다면
누가 늙은이를
가까이하려 하겠는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뭇 흐릿해진 봄날
더는 허둥대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이 들어 차분하게 마음을 열고
서녘 하늘 바라보니
별을 기다리는 저녁노을만
눈부시게 타고 있구나.
-- 「2021년 어느 봄날」 전문
보라. 주광일 시인은 새봄을 맞이하여 사유의 진폭이 우수(憂愁)의 지향으로 변모하고 있어서 약간 어리둥절하다. 그는 새롭게 출발하는 희망의 봄날에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뭇 가까워진 어느 봄날”이라는 생뚱맞은 상황으로 낮선 이미지를 추출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는 생명이 소생하는 날 “60년 넘는 내 친구/ 마지막 숨을 쉬”는 상황에서는 생몰의 경계가 흐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는 사는 동안/ 실컷 반성하고/ 실컷 기도하며/ 닫혔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어조로 비상한 결단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그는 결론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뭇 흐릿해진 봄날/ 더는 허둥대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어조로 순리를 수긍하면서 “나이 들어 차분하게 마음을 열고” 기도에 정성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끝까지 겸손하고/ 끝까지 절박하게/ 끝까지 인내하며/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그래도 나의 오랜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 나의 간절한 기도는/ 헛되지 않았다. (「가슴에 먼저 온 봄」 중에서)”는 그의 기도가 성취되었음을 내심 안도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분다.
조금은 살 것 같다.
역대급 무더위로 무장하고
끔찍하게 심술부리던
2022년 여름이 떠나려 한다.
잔혹했던 올여름, 끈질기게 살아남아
다가오는 가을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올여름에 떠나버린 이들을 위하여
쉴 새 없이 기도하여야 한다,
모든 떠남들을 지켜보며
오늘 하루, 목숨값을 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끊임없이 두 손을 모아야 한다.
-- 「2022년 여름을 보내며」 전문
이제 여름의 정황(situation)은 어떠한가. 그는 봄에서 심각하게 감지하였던 “모든 떠남들을 지켜보며/ 오늘 하루, 목숨값”에 대한 개념이 끈질기게 맴돌고 있어서 지난 봄의 향훈이 “올여름에 떠나버린 이들을 위하여/ 쉴 새 없이 기도하여야 한다,”는 어조로 변함없는 기도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2021년 여름일기”를 연작으로 11편이나 표명(表明)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당시 위협의 대상이었던 코로나 역병과 탈레반이 카불에 진입하여 죽음의 공포로 떨었던 위기의 상황들이 작품으로 형상화하면서 “아무리 코로나 역병이 설쳐대도/ 지금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시간, /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할 시간.(「2021년 여름 일기 2」 중에서)”이거나 “악귀들이 장악한 아프간에 남겨져/ 죽음보다 더 참혹한 생지옥의 삶을 이어가는/ 자유민들을 위하여/ 피 울음 담긴 기도를 드린다.(「2021년 여름 일기 7」 중에서)”는 간절한 그의 기도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4. 가을, 그 허전한 심연의 전언들
주광일 시인은 이제 봄,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가을의 이미지는 성숙을 통한 풍요와 완성의 상징인데 그 성취감 이후에 다가올 추수동장(秋收冬藏)의 풍족에서도 어쩐일인지 그의 내면 일각(一角)에서는 허전한 의식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가을이 깊어갈수록 불타는 듯/ 다채로워지는 가을 산,/ 하지만 너무 일찍 서둘러 떨어지는/ 낙엽을 밟는 내 생애가/ 어쩐지 쓸쓸해진다. (「가을 엽서 7」 중에서)”는 허전함과 고독감이 엄습(掩襲)하는 낙엽의 이미지는 더욱 그에게 고적(孤寂)한 사유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이어령 선생은 그의 글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중에서 “가을은 전쟁을 치른 폐허이다. 그리고 가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침몰한다. 하나의 모반, 하나의 폭동, 들판의 꽃들과 잎과 열매와 모든 생명의 푸른 색채가 쫓긴다. 쫓겨서 어디론가 망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을은 그 자리에서 침몰한다.”라는 언질(言質)로 무엇인가 쫓기고 침몰하는 의식이 바로 낙엽 이미지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조락하는 가을빛 속의 모든 것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풍 찬연한 숲길에도
머지않아 찬 서리 내리고
찬바람 가득한 하늘 아래
나뭇잎 떨어져 쌓일 것이다.
단풍에 취해
노을에 취해
숲길을 홀로 걷던 나는 마침내
지난날의 나를 용서하고
쌓인 낙엽 위에 내릴
흰 눈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떠날 준비를 끝낸
모든 것들은 늦가을의
애잔한 선율에 홀린 듯
가을빛 속의 숲길에는
어둠이 스며드는 적막뿐
아무런 설레임도 없었다.
-- 「가을 엽서 20」 전문
그렇다. 그는 봄과 여름내내 청청하던 나뭇잎이 가을 서리에 단풍들고 종내에는 풀죽은 시든 낙엽으로 생을 마감하는 나뭇잎들의 한 생애가 그는 “조락하는 가을빛 속의 모든 것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전제 아래 “단풍 찬연한 숲길에도/ 머지않아 찬 서리 내리고/ 찬바람 가득한 하늘 아래/ 나뭇잎 떨어져 쌓일 것이다.”라는 상황에서 그는 가을 숲길을 걸으면서 단풍과 노을에 취해서 “지난날의 나를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시인의 사색이 우리 시의 위의(威儀)이며 본령(本領)인 인본주의(humanism)의 범주를 더욱 확연하게 정착하려는 심리적인 주제의 탐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결론에서 “이윽고 떠날 준비를 끝낸/ 모든 것들은 늦가을의/ 애잔한 선율에 홀린 듯/ 가을빛 속의 숲길에는/ 어둠이 스며드는 적막뿐/ 아무런 설레임도 없었다.”는 담담한 긍정의 진실을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을 탓하지 않고
대지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
낙엽이여.
그대는 참으로 대견하구나.
바람결에 쏠려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날려가도
따스한 미소를 지을 뿐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구나.
끝내 다가온 마지막 순간에
깨달은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성스러운 몸짓으로 구겨진
이 세상의 고뇌와 결별하는구나.
-- 「가을 엽서 21- 낙엽에게」 전문
주광일 시인은 「가을 엽서」란 제하의 작품 27편을 연작으로 창작했으며 「가을비 」 6편과 「가을과 헤어지며」 등 많은 작품으로 가을 풍광과 정취 그리고 다채로운 이미지를 투영하고 있어서 그는 어쩌면 가을을 지극히 사랑하는 시인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도 낙엽에 대한 대화를 멈추지 않는다. 그대(낙엽의 의인화)는 바람이나 계절의 섭리를 탓하지도 않고 원망하지도 않고 순응하는 미(美)를 발현하면서 “끝내 다가온 마지막 순간에/ 깨달은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성스러운 몸짓으로 구겨진/ 이 세상의 고뇌와 결별하는구나.”라는 성찰의 미학으로 작품을 결론지으면서 주제를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작품 「가을밤」 「가을비」 「가을 바람」 「가을 편지」 「낙화」 「낙엽과 바람」 「단풍잎」 「단풍 위에 내린 눈」 등에서 서정성이 넘치는 안온한 주제의 시법들이 우리들의 공감 영역을 확대하고 있어서 그의 서정적 자아와 동시에 예민한 현실적 감각을 적시하는 의식에서 그의 궁극적인 작풍(作風)의 지향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5. 겨울 이미지와 나를 찾는 일
일찍이 이어령 교수는 “바깥세상이 폐쇄되면 내부의 세계가 넓어진다. 겨울은 내면의 계절이다.(그의 글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중에서)”라는 어조와 같이 겨울은 만물이 휴면을 취하면서 외부와는 단절된 채 깊은 명상에 들어가는 계절이다. 자연이나 인간들은 모든 진행사항을 잠시 멈추고 내년 봄에 다시 소생할 생명의 환희를 에비하고 있는 것이다.
주광일 시인도 겨울철이 되면 “두어 달 남은 찬란한 봄을/ 기다리고 있는 내 가슴이/ 이 겨울엔 왜 이리 떨리는가?/ 꽃피는 봄, 푸른 꿈의 봄을/ 기다리고 있는 나는 오늘 왜 이리/ 가쁜 숨을 쉬어야 하는 건가? (「겨울 엽서 21」 중에서)“라는 겨울에 대한 단상(斷想)을 자신의 감상적인 언어로 축약(縮約)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는 온종일
찬바람 속을 걸었습니다.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나를 떠나 나를
찾으러 헤매다가 결국은
나에게로 돌아오고 말았지요.
흐린 하늘 아래
찬바람은 끊임없이 불었고
나의 기도는 끊임이 없었고
나는 마침내
찬 손을 호호 비비며
당초 떠났던 그 자리로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 「겨울 엽서 16」 전문
이처럼 그는 겨울에 대한 엽서를 연작으로 창작하면서 그동안 실종한 자신의 행방을 탐구하는 일에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온종일 찬바람 속을 걸어서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나를 떠나 나를/ 찾으러 헤매다가 결국은/ 나에게로 돌아오고 말았”다는 허탈감에도 그는 “흐린 하늘 아래/ 찬바람은 끊임없이 불었고/ 나의 기도는 끊임이 없었”다는 진솔한 그의 어조는 결국 나를 찾는 일이 당초에 떠났던 그 자리로 되돌아오고 말았다는 정황은 그의 진정한 자아를 탐구하는 일이 이 엄동설한에도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스스로/ 위로해 주어야 함을/ 나는 알고 있다 (「겨울 엽서 22」 중에서)”는 자인(自認)의 어조로 스스로를 침착하게 간추리고 있는 것이다.
내 영혼이 나도 모르게
살며시 울렁이던 무렵
겨울 해는 서산에 기울려하고
산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습니다.
노을은 서녘 하늘을
따뜻한 이불처럼 덮어 주면서
더 이상 추하게 머뭇거리지 않고
더 버틸 욕심을 털어 버리고
잠시 머무는 순간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그 노을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온통 불그스레한
저녁 하늘을 쳐다보면서,
어느덧 나의 영혼은
깊은 강물처럼 소리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 「겨울 엽서 20」 전문
주광일 시인은 다시 나도 모르게 “내 영혼”과 교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서산에 기울고 있는 겨울 해나 산 너머 노을이 이불처럼 따뜻하게 덮어주면서 이 세상 욕심들을 털어버리고 잠시 머무는 순간에도 “그 노을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온통 불그스레한/ 저녁 하늘을 쳐다보면서,/ 어느덧 나의 영혼은/ 깊은 강물처럼 소리없이/ 흐르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어서 “나의 영혼”은 아늑한 경지의 노을과 상호 융합으로 그의 심연을 흡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영혼을 위한 기도는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밤중 내가 깨어 있는 까닭은/ 내 그대에게 힘이 되고 싶어서 일뿐,/ 새봄에 그대와 함께 태어날 빛나는/ 역사를 위하여 기도하기 위해서일 뿐,(「겨울 엽서 26」 중에서)” 그리고 “제 여정의 끝은 주님께서 정해 주시는 것./ 그러니 저를 주님 뜻대로 처분하소서./ 보잘것없는 제 영혼을 주님께 바칩니다.(「겨울 기도」 중에서)”라는 근엄한 기도로 영혼을 위무(慰撫)하는 시법으로 자존(自尊)과 자의식의 탐색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개괄적으로 살펴본 주광일 시집 『나의 꿈, 나의 기도』는 나를 중심으로 자아를 성찰하거나 자애를 위한 기도가 어떤 특정한 시법과 시론에 의하지 않고 자신이 현재 삶을 영위하고 있는 실제 생활(real life) 주변의 현상들에서 창출한 이미지들로 자신의 시적 진실을 주옥같이 적시하고 있어서 노시인의 순박한 시정신과 더불어 인생관과 가치관을 예견(豫見)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시집 출간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