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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석주길(천화대) |
(석주길/천화대-사진 셀파님) |
---------- 하얀 빙벽위에 울던 표범 - 송준호 傳 |
설악은 너무나 많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솜다리꽃, 박새품, 둥굴레, 함박꽃, 전나무, 아! 자작나무, 설악골, 용소골, 토막골, 잦은바위골, 곰골, 그리고 대청의 바람과 구름 그리고 동해까지…… |
거기에다 설악시를 가지고 있고 또 설악가라는 노래까지 가지고 있다. |
설악의 노래는 슬픈 노래다. 아니, 서럽도록 아름다운 노래다. |
“너와 나 다정하게 걷던 계곡 길, 저 높은 봉우리에 폭풍우칠 적에….” |
그 설악의 가을에 산 친구는 죽었다. |
죽은 친구를 설악에 묻고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부르는 노래가 설악가이다. |
“잘 있거라 설악아, 내 어이 잊으리요 꿈 같던 산행을, 잘 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
외설악 초입 노루목에 가면 지금은 관광단지 C지구의 호텔과 여관들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
설악의 맞은편 산자락에 사자(死者)의 마을이 있다. |
설악을 사랑하다 결국 설악의 품에 안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곳에는 1969년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조난한 한국산악회의 열 동지를 비롯해 많은 산사람들의 무덤이 있다. 인가는 없지만 우리나라 유일의 산악인 묘지인 셈이다.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인생에서 이름마저 남기지 않은 이름없는 산사람의 조그마한 묘지들이 모인 곳이다. 상석은 고사하고 비석마저 제대로 없는 이 무덤의 주인공들은 거의가 벚꽃처럼 젊은 나이에 산에서 져버렸다.그 중에 엄홍석과 신현주라는 두 남녀의 무덤이 있다. |
서로 사랑하던 두 사람은 설악에서 등반사고로 함께 죽었다. 송준호는 이 두 사람과 같은 산악회 회원이었고 엄홍석과는 자일 파트너였다. |
그는 석과 주의 무덤에 자주 갔다. |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공룡능은 설악의 주능이다. 이 공룡능에서 흘러내리는 설악골과 잦은바위 사이를 천화대라는 암릉이 헐떡이며 치밀어 오르고 있다. |
이 천화대에는 여러 지능이 있다. |
그 중에서 설악골에서 왕관봉과 범봉사이를 올라붙는 성곽 같은 암릉 하나가 특히 눈길을 끈다. |
그 암릉을 송준호는 처음으로 올랐다. |
그리고 그 능선에 이름을 붙였다. 엄홍석과 신현주의 이름 끝자를 따 ‘석주길’이라고. 그는 손수 석주길이라 새겨넣은 동판을 제작해 그 암릉과 천화대가 만나는 곳에 붙였고, 그 길은 석주의 영전에 바쳐졌다. |
그리하여 석주길이 태어났고, 석주는 그의 마음에 산과 인간이 만든 절대미를 조형했다. 산의 절대적인 추상미에 영혼을 빼앗긴 그는 조형과 석주의 산과 인간의 열정이 탄생시킨 환상에 늘 부담감을 가지고 살았다. |
그리고 더욱 완전한 산행을 석주에게 바치기를 원하며 산으로 갔다..… |
일제 말기 백령회가 설립되면서 우리나라에 근대 알피니즘이 보급되었다. |
하지만 알피니즘의 등정주의나 등로주의의 대상이 될 만한 입지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70년대 후반 들어 해외원정으로 그 출구를 마련하기 전까지 알피니즘의 대상은 일부 짧은 암장에서의 기교적인 등반에 머물러 있었다. |
그런데 이러한 우리나라의 알피니스트군들에게 군계일학 격의 국내 등반 대상지가 된 곳이 딱 한 군데 남아 있었으니, 바로 설악의 토왕폭 빙벽등반이었다. |
1970년대 초기의 빙벽장비와 기술로 그것은 바로 불가능이었고 절대였다. |
그래서 그것은 한국 알피니스트의 존재 이유가 되기도 했다. |
70년대 초반까지 히말라야 원정은 정찰대에 지나지 않았고 본대라도 거의 실패의 연속이었다. 때문에 국내에 아직 미등인 채 남아 있는 토왕폭의 아성은 더없이 높아만 갔다. |
그것은 히말라야 8,000미터급 거봉 원정보다 더 귀한 등반이라는 얘기도 돌았다. |
그것은 살아있는 신화였다. |
산 선배에서 후배로 이어지면 결정(結晶)된 산행미의 실체였다. |
그래서 당시의 산사람은 누구다 "토왕폭!"을 되뇌였다. |
석주의 무덤이 있는 노루목은 토왕폭 맞은편에 자리잡은 산기슭이다. |
화채봉에서 발원하여 함지덕, 칠성봉 일대에서 하늘에서 내려 드리운 듯한 얼음기둥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겨울철, 노루목 석주의 무덤에 성묘를 하고 뒤돌아 설악을 바라보라. |
그 얼음기둥의 머리 부분이 보일 것이다. |
이 땅의 어떤 말도, 어떤 해석도 거부하는 그 토왕의 아름다움에 그 산사람의 온몸은 그가 평소 즐겨 부르던 「설악가」와 끝없이 암송하던 듀 프라의 "그 어느날"의 환청에 휩싸일 것이다. |
"그 어느 날 내가 산에서 죽을 때 |
오랜 산 친구 자네에게 부탁하네. |
내 피켈을 집어다오. |
이 피켈이 치욕 속에 죽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네. |
어딘가 아름다원 페이스에 가져다주게. |
그리고 피켈만을 위한 작은 케른(돌무덤)을 만들어다오. |
그리고 그 위에 나의 피켈을 꽂아주게.” |
동해에서 치솟는 아침 햇살을 받아 토왕의 얼굴이 수정처럼 빛날 때나, 설악이 온통 잿빛으로 가라앉을 무렵의 모습은 차라리 신성을 느끼게 한다. |
그는 석주에게 재배하고 나서 토왕폭을 보며 단독등반을 결심했다. |
그 빛나는 토왕폭 위에 석주의 피켈을 꽂고 그 곳에 작은 케른을 하나 쌓을 것을, 그리하여 그 토왕폭 초등을 석주에게 바칠 것을 다짐했다. |
1973년의 새해 첫날밤, 토왕폭 단독등반을 결심한 송준호는 석주에게 편지를 썼다. 둘이 하나가 되어 이 세상 주소로는 찾아갈 수 없는 곳으로 그 엽서를 보냈다. |
받는 사람 "석주 귀하", 주소는 "벽(토왕성 폭포를 이름)에서 노루목", |
보내는 사람 "준". |
그것은 3차원의 바깥 세계로 보내진 편지였다. |
그리고 그는 토왕폭에서 결국 석주의 곁으로 갔다. |
지금 그는 석주와 함께 노루목에 묻혀 있다. |
이들 세 사람 앞에 세워진 충혼비에는 |
“시간과 존재의 불협화음으로 공간을 활보하고 있는 악우(岳友)들이여! |
철학적 경이로써 모둠된 그대들의 자취는 훗날 이 인자한 산정을 찾는 |
이들의 교훈일 것이다. |
추억을 침묵으로 승화시킨 사람들, |
그 대담한 의지로 회생하리라.” 라고 새겨져 있다. |
송준호, 그는 1947년 9월 20일 서울 전농동에서 태어났다. |
외아들이었고 여동생이 둘 있었다. |
배제중학교, 광성고등학교를 나왔다. 고2 때 부친이 대우중공업 인천공장 자재부장으로 전근하게 되어 인천으로 옮겨 살았다. 65년 광운전자공과대학에 입학, 3학년을 마치고 69년 육군에 입대했다가 72년 10월에 제대했다. |
산과의 인연은 고2 때 맺어졌다. |
중학교 시절부터 산을 익힌 나경봉 씨와 62년 6월 백운대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그 맞은편에 우뚝 솟은 인수봉에서 바위하는 클라이머의 모습을 보았다. |
힐끗 쳐다본 그 산쟁이의 오름의지는 그에게 산사람으로서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
"아!"하는 낮은 탄성을 송준호의 가슴으로부터 뽑아낸 그 클라이머의 실루엣에서 소년 송준호는 자신이 그 바위를 오르고 있는 내일의 모습을 보았다. |
그해 여름방학 때 나경복 씨와 송준호는 도봉산 선인봉으로 가서 박쥐코스를 다른 사람이 오르는 모습을 1주일이나 지켜본 후 그들을 본따 기어이 올라갔다. |
그 후 고교 졸업까지 둘이서만 그 어깨 너머식의 산행을 계속했다. |
고3 때 산에서 요델산악회의 백인섭 씨를 만났다. |
백인섭씨는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 산쟁이로, 요델산악회를 고양이에서 표범으로 만든 사람이다. 백씨는 산악회를 이끌 재목감으로 탐이 나는 송준호에게 요델 산악회에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팀에 소속되어 구속받고 싶지 않다며 입회하지 않았다. |
하지만 백씨는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접근했다. 대학 1학년 때인 65년 겨울, 송준호는 선인봉 표범길을 몹시 오르고 싶어했다.표범길은 백인섭씨 등의 요델 산악회에 의해 개척된 후 다시 등반한 사람이 없는 최난코스였다. |
요델 산악회원도 아닐 뿐만 아니라 코스도 모르는 그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나경봉 씨와 그는 한 달간이나 계속 관찰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
그 해 첫눈이 왔다. |
나경봉씨 집으로 전화가 왔다. 송준호가 산에 가자는 것이었다. |
나경봉 씨는 무심히 배낭을 꾸려 그를 따라 선인봉으로 야영을 들어갔다. |
다음날 송준호는 사진기를 꺼내들고 스타트 지점의 튀어나온 바위에 올라 표범길 일대를 찍어 댔다.바위에는 약간씩 요철된 곳마다 간밤의 눈이 쌓여 있었다. |
인화한 사진을 찾은 송준호는 사진의 눈 쌓인 부분을 연결하여 선을 그었다. |
그 선은 기가 막히게도 백인섭 씨가 개척한 표범길과 일치했다. |
제2의 선을 그은 것이다.. |
그는 곧바로 그 제2의 선을 좇아 등반에 성공했다. |
다음해 봄, 그는 결국 요델 산악회에 입회했다. |
그 후 그의 산행은 요델의 든든한 뿌리 위에서 꽃 피었다. |
같이 입회한 나경봉 씨와 엄홍석과 송준호는 의형제를 맺고 여러 등반코스를 개척했다. |
1967년 우이암 전면코스, 68년 선인봉 요델 버트레스(일명 준호 버트레스), |
68년 동계 설악산 표범골(잦은바위골)을 개척 등반했다. |
그리고 그해 7월, 설악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암릉에 새 코스를 내고 그 여름 설악산에 조난사한 의형제 엄홍석과 그의 연인 신현주의 영전에 바치는, 그 설악산 석주길을 냈다. |
70년 11월 인천 청악산 오버행 인공등반코스 등을 개척등반했으며 71년 1월에는 설악산 표범골 50미터 폭과 100미터 폭 빙벽등반에 성공했고, 72년 1월에는 설악산 용아장성을 동계 초등했다. |
그 짧은 기간 내에 그처럼 많은 초등반을 기록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
그는 거듭되는 산행이 습관적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언제나 노력했다. |
가령 선인봉 표범길의 언더홀드를 스타트할 때 매번 자세를 바꾸었다. |
언드홀드를 붙을 때 왼쪽 슬랩으로 붙는가 하면, 바로 언더홀드로 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
그와 같이 미세한 밸런스를 요구하는 지점은 누구나 경험에 의해 스스로 터득한 방식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게 마련이다. |
그렇다면 그에게는 그곳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는 말일까. |
그는 178센티미터의 키에 75킬로그램이라는 좋은 체격에 클라이머로서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다. 한 손으로 턱걸이를 여러 번 할 정도로 완력이 좋았다. 남들이 오르기도 급급한 곳에서도 그는 언제나 여유가 있었다. |
그 여유는 그에게 눈을 주었다. |
도봉산 선인봉 표범길을 오르며 멀리 설악산의 흑범길을, 흑범길을 오르며 천화대를, 천화대를 오르며 석주길을, 석주길을 오르며 천화대에서 뻗어내린 염라길을 보았다. |
여름의 용아장성을 오르며 눈 덮인 용아장성을 볼 수 있었다. |
그는 언제나 더 높이, 더 높이 보았다. 표범골의 50미터 폭과 100미터 폭을 그는 하늘 높이 걸린 토왕폭으로 연결시키려는 꿈을 키웠다. |
(중략) |
1972년 12월 30일, 맑고 바람이 센 날이었다. |
기온은 영하 10도 안팎으로 빙벽등반하기에 최적의 날씨였다. |
오전 9시 잦은바위골로도 불리는 내설악 표범골의 비박지를 출발한 송준호는 설악동을 거쳐 11시경 토왕골 들목의 비룡산장에 도착했다. |
토왕성 폭포하단을 우회해 중단의 완경사 부분에서 피켈만 들고 상단 스타트 지점을 관찰할 수 있는 곳까지 전진했다. |
정찰을 마치고 중단의 잡목지대에 장비를 남겨두었다. 오후 2시 30분 하산하여 오후 5시 비룡산장으로 되돌아왔다. |
이날 저녁 요델산악회의 선배인 서울 백인섭씨에게 토왕폭 상태가 빙벽등반하기에 최적이니 빨리 내려오라는 내용의 전보를 띄웠다. |
‘피켈, 아이젠, 아이스 하켄 지참, 31일 비행기편으로 오기 바람. 준호’ |
이튿날, 날씨는 맑고 바람은 여전히 강했다. |
날씨는 조금 풀려 영하 3도. 새벽 3시에 일어나 설악동으로 가서 백인섭씨와 같은 산악회 후배인 박경립씨에게 전화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
(요델산악회에서는 72년에 표범골 등반,그리고 그 다음해 겨울에 토왕폭 등반을 계획하고 있었다.) |
11시 30분 비선대에서 일행 중 나머지 7명과 합류하여 용소골 40미터 폭 폭포에서 빙벽훈련을 마친 후 오후 6시 30분 양폭산장으로 갔다. |
이날 저녁 요델 회원 정일주 씨에게 토왕성 빙벽등반의 촬영 및 기록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고 토왕폭 단독등반을 결심했다. |
1973년 새해 아침 날씨 역시 맑았다. 기온은 영하 8도. 송준호와 지원조 두 명은 10시 30분 양폭산장을 출발해 우호 1시 30분 비룡폭포에 도착했다. 양초와 기타 등반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러 설악동에 다녀온 후 비룡산장에서 잤다. |
이날 밤 송준호는 '석주에게'라는, 이승에서 저 세상으로 띄우는 편지를 썼다. |
"잘 있었니. |
그 동안 나는 안정성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
1년 당겨 바로 내일 벽과의 감격적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네. 아니면 자네 품으로… |
등반 날 나를 도와줄 S상대 O.B인 J와 P 두 악우를 소개하겠네(노루목에서). |
기억해두고 깊이깊이 사귀어보고 싶은 두 사람일세. |
지기(知己)도 아닌데 나를 Support해 준다는 것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세. |
석주도 고마워 할 거야, |
현재 마음의 동요 없이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다. |
전진, 용감한 후퇴,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한 스텝 한 스텝 가까워진다는 것은 표현하기 어려운 보람이네. |
나는 확신한다. 아직 너는 나의 곁에 있다는 것을... |
석주가 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열심히 한 발 한 발 힘차게 오를 것이다. |
정상에서 대화를! 노루목에서 일배하세! |
좁은 지면 메우기보다는 서로 힘찬 격려로써 서로를 지켜주면 좋을 걸세. |
용아장성처럼... 후회하지 않을 행동뿐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네. |
나의 맘 한없이 메꾸고 싶지만 주고받을 얘기는 토왕성의 하얀 벽 꼭대기에서! |
여유를 가져보세. |
1월 1일 설날 이러한 일들이 있다는 것은 보람일세. |
넘기기 싫은 하루였다네. |
1973년 1월 2일 여전히 맑은 날씨에 기온은 영하 5도. 오전 8시 40분 송준호와 지원조를 포함한 세 명은 비룡산장을 출발했다. 등반계획은 상단 40미터 지점의 고드름기둥까지를 1피치로 잡고 그 곳에서 70미터 자일을 고정한 후 스타트 지점의 지원대원으로부터 120미터 자일을 지원받아 등반을 계속하여 두 시간 정도에 끝낸다는 것이었다. |
이날 속초에는 한파주의보가 내렸고 빙질이 백빙에서 점차 청빙으로 변하가는 상태에서 송준호는 등반을 시작했다. |
12시 15분 중단의 빙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
송준호는 70미터 자일의 한쪽 끝을 몸에 묶고 올랐으며 다른 한쪽 끝은 지원대원이 몸에 묶지 않고 30미터 정도 사려 배낭위에 얹었다. 중단은 30~50도 정도 경사진 빙벽이다. 바로 앞뒤에서 출발한 지원대원은 처음에는 5~6미터 간격으로 따라올라 앞선 송준호와의 간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사가 차츰 급해지면서 간격이 점차 벌어져 송준호가 상단 스타트 지점에 거의 다다랐을 때 간격을 35~40미터가 되었다. 지원대원의 손에 감겨 있던 줄은 점점 더 풀려 나갔다. 지원대원은 경사가 약간 심한 곳을 피해 옆으로 방향을 바꾸려 했다. |
그 순간 지원대원은 밸런스가 깨지면서 ‘앙카’라고 소리치며 넘어져 떨어졌다. |
그 바람에 지원대원과 연결된 자일로 목을 묶고 있던 송준호도 밑에서 갑작스레 잡아당기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함께 추락했다. 앙카 소리에 놀란 촬영담당 대원은 위를 쳐다보았다. |
일부러인 것처럼 자연스레 떨어지는 송준호화 그 밑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지원대원을 목격했다. |
먼저 떨어져 내리던 지원대원은 아이젠이 얼음에 걸리며 방향이 바뀌어져 중단의 완경사가 끝나는 부분에서 설사면 쪽으로 퉁겨 정지했다. |
송준호는 계속 떨어지며 제동을 시도했다. |
얼음이 갈라지는 듯한 찌익찌익소리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점차 가속도가 붙어 그의 몸은 중단을 빠져나가 하단으로 떨어져 120여미터의 허공을 날았다. |
그대로 모든 것은 끝났다. |
중단과 하단의 접합지점 빙벽 위에 그가 최후의 제동을 시도하며 휘드른 피켈은 얼음을 뚫고 빙벽에 굳게 박혀 있었다. |
(중략) |
제 2의 선, 그것은 어떠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전달되는 것일까? |
1973년 1월 2일 새벽, 송준호의 작별인사는 제2의 선을 타고 서울의 어떤 여자에게 현몽했다. |
송준호가 토왕폭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 그녀가 놀라 깨어났다. 송준호는 등반에 그녀가 짜준 목도리, 모자, 장갑 등을 끼고 있었다. |
토왕폭 등반을 깨끗하게 마무리하면 그는 스위스의 등산학교로 유학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귀국 후 둘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
그녀에게 설악의 석주길을 신혼여행 삼아 함께 등반하자고도 했다.1973년 1월 5일 오후 2시 그녀는 토왕폭 등반을 마치고 올 송준호와 중앙극장앞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그 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기로 약속했던 그는 스스로 바람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그후 꿈에 다시 나타난 그는 그 영화를 보라고 자꾸 보채고는 사라졌다. |
예전에 그 영화를 보았지만 그녀는 꿈속의 송준호 때문에 그 영화를 다시 보러 갔다. 그리고 송준호의 뜻을 알았다. 그 영화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처럼 살아가달라는 그의 뜻을. 그는 그녀를 ‘까만돌’이라 불렀다. |
그해 가을 요델 산악회는 송준호의 추모등반을 설악산 용아장성에서 갖고, 추모동판을 제14봉에 부착했다. |
까만돌은 그 동판뒤에 송준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고인의 뜻대로 강하게 살아가겠노라는 그 편지는 제2의 선을 타고 송준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
1974년 1월 2일 송준호의 1주기에 까만돌은 어떤 남자와 설악의 노루목을 찾았다. 송준호에게 두 번 절한 그 남자는 송준호에게 산친구로서, 남자의 이름으로 약속했다. 당신 뜻대로 까만돌이 잘 살아가도록 하겠노라고… |
그는 송준호를 잘 알고 있던 동양산악회회원이었고 농대출신의 젊은 상록수였다. |
까만돌과 상록수는 그 이듬해 결혼했다. 결혼 후 상록수는 고향인 전북 장수로 귀향해 어릴 적 꿈인 목장을 이루었다. 스칼렛 오하라 같은 까만돌과 그 상록수의 집념으로 자그마하던 목장이 5만여 평의 넓이로 |
늘어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얘기 하나 하지.옛날 어느 산에 폭포가 하나 있었어. 그 폭포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높고 곧은 폭포였지.그 폭포가 얼마나 높은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떨어지는지 아무도 몰랐어. 그런데 그걸 아는 이가 하나 있었어. 그는 노래꾼이었지. 그의 이름은 수영이었고 성은 김을 썼지. 그 사람 노랠 한 번 들어봐. |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
곧은 소리는 |
곧은 소리를 부른다. |
번개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
취한 순간조차 마음에 두지 않고 |
나타(懶楕)와 안정(安定)을 뒤집어놓은 듯이 |
높이도 폭도 없이 |
떨어진다." |
헌데 말이야, 곧은 소리를 내며 곧게 떨어지던 그 폭포가 어느 겨울날 얼어붙은 후에 풀리질 않았어. |
계절을 잃은 폭포는 더 이상 노래하질 않았던 게야. |
곧은 폭포소리가 얼어붙은 게야. |
얼마나 답답했겠어. 폭포나 보는 사람이나 말이야. |
그래도 다들 편히 잠자고 있을 때 곧은 폭포소리를 못내 그리워하던 어떤 소년이 있어 |
폭포를 풀러 하얗게 얼어붙은 그 폭포를 올라간 게야. |
미끄러져도 오르고 떨어져도 오르고 또 올라 소년은 폭포의 언 얼굴에 매달렸어. |
그는 젓빛 손으로 차가운 얼음덩어리를 두들겼어. |
폭포야 풀려라, 폭포야 한을 폴어라 하고 두드린 게야. |
두드리다 두드리다 두 주먹은 핏빛 멍이 들었어. |
이제는 그의 마음보다 차가운 폭포가 소리칠 때도 되었건만, |
그의 가슴보다 답답한 폭포는 풀릴 만도 하였건만 폭포는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어. |
폭포는 가슴마저 얼어붙은 게야. 그러다, 그러다가 말이야 문득 폭포는 응얼거리기 시작했어. |
'네 머리로 이 몸을......' |
그는 결국 그 폭포를 푸는 열쇠구멍에 자신의 머리를, 온몸을 던져버린 게야. |
그래서 그 폭포는 계절과 밤낮을 되찾고 다시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 시작한 게야. |
동해에 솟는 맑은 해가 그 폭포를 비출 때면 지금도 머리 깨어진 그 소년의 붉은 피가 폭포수가 되어 곧게 곧게 그 절벽의 폭포로 떨어지고 있지. |
그러다가 겨울이면 그 폭포는 하얀 얼음으로 그 소년의 넋을 다시 결정시키곤 하는 게야. |
다르지만 같은 또 하나의 사랑이야기- 고(故) 이경해씨 러브스토리 |
“꿈속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은 당신! |
대학까지 나온 고운 서울색시를 데려다 고생만 시키다가 |
저 세상에 먼저 보냈을 때, |
나도 이 세상과 연을 끊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소. |
(중략) |
내가 흔들리지 않게 당신, 하늘나라에서 나를 지켜주오.” |
지난 9월 11일 멕시코 칸쿤의 WTO 각료회의장 부근 현장에서 할복자살한 농민운동가 이경해씨의 일기장에 담긴 내용이다. |
죽은 아내에게 쓴 편지는 부치지 못한 채 고스란히 그의 일기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멕시코에서 극단적인 행동을 한 이경해씨는 소박한 이상주의자였고 쉰다섯 해 동안 한 여자만 사랑했던 순정주의자였다. |
그의 아내 김백이씨는 1993년 전북 장수에서 전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덤프트럭에 받혀즉사(卽死)했다. 부부는 전주농민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길이었다. |
아내가 운전 중이었고 이씨는 옆자리에 타고 있었다. 그는 의식을 잃어 스무날이 지나서야 눈을 떴다. 아내의 시신은 이미 친지들의 손에 의해 장례가 치러지고 장수 땅에 묻힌 뒤였다. |
병상을 지켰던 이씨의 여동생 이영신(46)씨는 “오빠는 눈을 뜨면서부터 계속 언니 이름만 불렀고 |
주위 사람들에게 ‘아내가 괜찮으냐, 어떻게 됐냐’는 물음만 계속했다”고 말했다. |
그러나 아무도 김씨의 사망 소식을 쉽게 입에 담지 못했다고 한다. |
두 사람은 1970년대 초 설악산 등반 길에서 만났다. |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월간 산’에서 일하고 있던 김백이씨 옆엔 원래 다른 사람이 있었다. |
‘요델산악회’ 소속 전문 산악인이었던 송준호씨였다. |
송씨는 작고 까무잡잡한 김백이씨를 애칭으로 ‘까만돌’이라고 불렀고 김씨의 가방에는 언제나 까만 조약돌이 들어있었다. |
하지만 송씨는 1973년 1월 설악산 토왕성폭포 빙벽 등반 도중 추락해 세상을 등졌다.혼자 남겨진 김씨를 지켜준 것은 이경해씨였다. 당시 이씨는 ‘동양산악회’ 소속으로 세 사람은 같이 어울려 설악산을 즐겨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
지난 6월 22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소설가이자 전 ‘사람과 산’ 발행인인 박인식씨의 글 중 일부는 이렇다. |
‘송준호의 1주기인 1974년 1월 2일. |
송준호의 연인이었던 ‘까만돌’은 한 남자와 노루목의 ‘석주 무덤’ 곁에 누워 있는 송준호를 찾았다. |
송준호의 묘에 두 번 절한 그 남자는 노루목을 굽어보고 있는 하얀 토왕폭을 바라보며 송준호에게 |
산 친구로서 약속을 했다. |
“그대 뜻대로 까만돌이 살아가도록 평생을 보살피겠소.”’ |
‘송준호의 산 친구’는 다름아닌 이경해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
월간 산 안중국 차장은 “김백이씨가 죽은 애인의 사진과 까만 조약돌을 버리려 하자 고인은 그것도 다 소중한 추억이라며 간직하라고 했다”며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두 사람은 시골로 내려가 함께 농사지으며 살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
늦은 저녁 남산에 올라 “시골 가서 내가 잡은 토끼로 털옷 만들어 주고 싶다”는 것이 이경해씨의 수줍은 프로포즈였다. |
하지만 장수행을 결정한 직접적인 계기는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참가를 |
위해 이씨가 훈련을 받으면서였다. 김백이씨는 그의 에베레스트 길을 한사코 말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산에서 잃는 일은 한 번이면 족하다, 시골로 내려가 함께 농사지으며 살자”고 설득했다고 한다. |
이씨는 결국 에베레스트 원정 기회를 포기하고 사랑을 택했다. 그 해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태극기를 꽂고 전국을 들썩이게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전북 장수로 향했다. |
싸전을 해서 큰돈을 벌었던 이경해씨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두 사람은 장수읍 대성리 야산 6만여평에 ‘서울농장’을 세우고 젖소 100마리를 길렀다. 직접 흙벽돌을 구워 만든 신혼집은 부부 방과 손님용 방 한 칸이 전부였다. |
그 때부터 이씨는 15년 영농계획을 세워 억제재배(채소나 화훼 등을 보통의 재배시기보다 늦추는 재배기술)며, |
고랭지 채소, 약초 재배 등에 대한 연구를 했고 농대생들에게 그의 농장을 실습장으로 내주었다. |
당시 농장에서 한 달에 먹어치우는 쌀만 7가마나 됐다고 한다. |
1980년대 초반 서울농장에 들렀던 한 지인은 “두 사람은 그림 속에서 막 튀어나온 동화 속 주인공 같았다”고 그 때를 회상했다. |
시골 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와 편한 옷차림의 부부는 두 사람을 닮은 세 딸(보람, 고운, 지혜)에 둘러싸여 웃고 있었다. |
나무에는 부부가 직접 만든 그네가 걸려 있었고 |
사방에선 풀 냄새, 소똥 냄새가 구수하게 퍼져왔다. 부부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그러나 이경해씨는 서서히 산 사람들과 멀어졌다. 대신 언제부턴가 농민운동가란 이름으로 시민단체를 결성해 시위 현장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
그는 사재를 털어 농민운동을 벌였다. 매일 외지로 나다니다가 한 달에 한 번 농장에 들러 소 한 마리씩을 팔아 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
농민운동 함께 한 ‘동지같은 부부’ |
젖소 파동 때 부채를 안고 허덕이던 사람들은 자살을 했고 야반도주를 했다. 그가 꿈꾸던 농촌의 현실은 이것이 아니었다. |
시가 20억원이던 그의 농장은 축협에서 얻어 쓴 부채 대신 경매에 부쳐져 3억원에 팔려나갔다. 세 딸은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게 하고 부부는 함께 전국 방방곡곡으로 다니며 “잘 사는 농촌을 만들자”고 부르짖었다. |
“그 힘든 나날 속에서도 그가 의지를 꺾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아내의 격려가 있었다”고 한결같이 주위 사람들은 말한다. |
지난 9월 19일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이씨의 빈소에서 만난 둘째 딸 이고운(27)씨는 “언제나 두 분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무슨 일이든 함께 상의하셨다”며 부모의 모습을 떠올렸다. |
“집에는 사람으로 늘 북적였고 엄마는 들판에서 사람들 먹을 밥과 찬을 마련하시곤 했다”며 “한 달에 한 번씩 부모님이 읍내로 나가 맛있는 것을 사주시던 기억은 잊지 못한다”라면서 |
눈가를 적셨다. 이고운씨는 9월 28일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었지만 현재 결혼을 무기한 연기한 상태다. |
부부는 농민집회 자리에 언제나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
이경해씨의 연설문 수정이나 외국 기관에 보낼 영문 서한 쓰는 일은 아내 김씨의 몫이었다 |
김씨가 떠난 지 1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전북 장수 마을에선 ‘김백이’라는 이름 석자만 대면 사람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하다. |
한번은 집회 때 모인 일꾼들이 먹다 남긴 밥을 김씨가 먹기에 사람들은 “깨끗한 밥 먹으라”고 말렸다고 한다. 김백이씨는 “농민들이 고생해서 얻은 밥인데 더러운 게 어디 있느냐”며 그 밥을 말끔하게 먹어치웠다는 일화도 있다. 아내가 죽고 난 뒤 세 딸은 이씨의 노모가 맡아 길렀고 이씨는 농민운동에 더욱 사력을 다했다. |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넋을 놓아버릴 정도로 통곡하던 |
사람이 다시 일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주위에선 이제 아내에게서 벗어나겠거니 안심했다. |
그 뒤 이씨는 안 다니던 교회에 나갔고 세례교인이 되었다. |
세 딸은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 가방 속에서 어머니의 주민등록증을 보았다. |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가방 한쪽에 잘 모셔놓았다고 한다. |
동생 이영신씨는 멕시코로 떠나기 전까지 자신의 집에 기거하던 이씨의 소지품 속에서 일기장 한 권을 발견했다며 그 속에는 “사랑하는 당신, 미치도록 보고 싶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고 |
털어놓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언니가 먼저 가지 않았다면 오빠가 그렇게 삶을 놓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며 안타까운 속내를 털어놓았다. |
◈ 고 이경해씨는? |
한농연 2대 회장 지낸 3선 도의원 지난 9월 11일, 멕시코 칸쿤 WTO 각료회의장 앞에서한국의 농민 한 사람이 가슴에 칼을 꽂았다. |
이름 이경해.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1974년 서울농업대(현 서울시립대)를 졸업. 고향인 장수에서 ‘서울농장’을 경영하다 젖소 파동을 겪으며 농민 된 설움에 몸서리를 쳤고 농민운동가로 변신해 이후 20여년을 농민운동에 몸담았다. |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 2대 회장을 지냈고 사재를 털어 농어민신문을 창간했으며 전라북도농민연합회를 결성하고 1991년 도의원 선거에 출마, 2002년까지 3차례 연거푸 도의원을 지냈다. |
[주간조선 2003-10-06] 이선정 자유기고가 |
덧붙임 -설악가 |
1.굽이져 흰띄두른 능선길 따라, 달빛에 걸어가는 계곡의 여운을 |
내어이 잊으리오 꿈같은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다시 오리니 |
2.저멀리 능선위에 철쭉꽃 필적에 너와나 다정하게 손잡고 걷던길 |
내어이 잊으리오 꿈같은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다시 오리니 |
3.저 높은 봉우리에 백설이 필적에 나는야 생각난다 친구의 모습 |
내어이 잊으리오 즐겁던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다시 오리니 |
*.저 높은 봉우리에 폭풍우 불 적에 나는야 생각난다 친구의 모습 |
내어이 잊으리오 꿈같은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다시 오리니 |
*.험준한 계곡 위에 낙엽이 질 적에 친구를 생각하며 나는 가리라 |
내어이 잊으리오 꿈같은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다시 오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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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아름 설악 공룡능선 산행하면서,석주길의 이야기를 추억해봅니다. 가슴져미는 산꾼들의 이야기가 차라리 전설이 됩니다.(우리항상안전히즐거운산행을기도합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글이지만 너무 길어서 눈이 아파....ㅎㅎㅎ 아무튼 좋은글 감솨.
담부턴 짧고 굷게 쓰세용.ㅋㅋ
산에는 길마다 깊은 사연이 있기에 더 의미가 있는것 같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