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무엇이든 시로 쓸 수 있다. 실제로 시는 세상사보다도 더 많은 사연을 시로 쓰기도 한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만이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이나 있었으면 하는 일까지도 시가 되므로 시의 세계는 세상사보다 광대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하다. 내용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노래하는 방식도 가지가지다. 모든 시가 저 나름의 형식을 찾아 내서 새로이 노래를 한다.
이처럼 광대한 시의 세계에서 우리는 시조라는 하나의 양식을 특별한 것으로 인정한다. 무엇이든 노래할 수 있고, 어떤 방법으로든 노래할 수 있는 시의 세계에서 시조는 어떤 공통된 관습을 지켜 나감으로써 그 정체성을 확보한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시조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시조를 시조라 부르는 일차적 조건은 그 형식적 특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시조의 유일한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조를 시조로 인정하는 근거가 형식이고, 좀 거칠게 생각해 보면, 무엇을 노래한 작품이건 시조의 형식만 갖추면 일차적으로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시조의 정체성이 형식에서 비롯한다는 말은 형식과 내용의 상관성을 생각하게 한다. 굳이 시조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문학은 형식과 내용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기를 넘어서서 내용을 생성하고 결정하기까지 한다는 점에도 우리는 동의할 수 있다. 일상의 삶에서도 쉽게 이 점이 인정된다는 점을 들어 문학의 형식은 더욱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시조의 형식은 규정된 틀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시의 다른 요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것이 밝혀진다면 형식과 내용의 유기성이라는 일차적인 요건을 충족시키는 답변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시조에 관한 생각의 단서는 그 형식성에서 얻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시조의 형식에 대한 해명이 중요한 과제가 되는 또 다른 까닭은 시조의 형식이 과거의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문학의 역사성을 생각한다면 과거의 형식은 과거의 산물이라는 말이 가능해진다. 시조에 이 말을 대입한다면 과거의 삶이 시조라는 형식을 낳았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조는 오늘에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 양식이다. 시조의 시조다운 정체성이 그 형식성에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시조 형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하면서 생명력을 가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를 느낀다. 전통은 ‘과거로부터 끼쳐진 것’이라는 역사성과 ‘오늘에도 작동하는 것’이라는 현실성을 본질로 한다. 그러기에 전통은 흘러간 과거라기보다 지금 이 시간에 살아 숨쉬는 과거일 때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시조는 이 점에서 전통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시조의 정형은 과거의 것이면서 오늘에도 살아 있는 형식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조의 형식은 이처럼 정체성과 전통이라는 양면을 구현하는 요소이다. 그러기에 시조 형식이 지닌 전통성을 토대로 시조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본다. 시조의 형식이 단순히 가시적인 틀의 역할을 넘어서서 양식적인 정체성을 구현하는 기제를 드러내고, 이를 구체적 실천으로 구현해 온 전통을 살펴보는 것은 현대시조의 과제를 생각하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시조 형식의 본질
보통 3-4 음절로 구성되는 ‘마디’는 시조 형식에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형태적 최소 단위가 된다. 이것이 2 또는 5음절로도 될 수 있는 것은 자수에 얽매이지 않고 유의미한 단위를 구성하는 우리 시가의 의미 위주의 경향에 따른 것이며, 한 마디가 그보다 작은 음절수의 집합으로 되어 있더라도 3-4음절을 단위로 생각하는 경향은 마디의 정형성으로부터 연역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기 아니 무노매라’라는 구절의 ‘아니’는 ‘고기’보다는 ‘무노매라’와 긴밀한 의미론적 관계를 가지지만 이를 ‘고기 아니/ 무노매라’로 묶고 나누는 관습은 이러한 3-4 음절의 단위성에 근거한 재조정이라 할 만하다. 말하자면 시조는 3-4 음절 단위의 마디가 모여서 이룩되는 시형이라 할 수 있다.
마디는 두 개가 모일 때 의미론적 구체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추강에’라는 마디는 그 자체의 의미를 지니기는 하지만 사전적 의미에 머무를 따름이며 ‘추강에 밤이 드니’로 짝을 이룰 때 비로소 진술로서의 구체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잇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우리 시의 의미론적 단위성은 두 마디가 대응함으로써 구현된다고 할 수 있다. 두 마디 대응이 의미론적 율격의 최소 단위가 된다는 뜻이다.
두 마디 대응은 얼마든지 긴 연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가사라는 양식은 그러한 연첩의 원리에 근거하여 장형화한 형식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시조는 두 마디 대응이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짐으로써 한 장을 이루게 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말하자면 한 장이 의미론적 자족성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나 ‘낚시 들이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는 장의 의미론적 자족성을 충분하게 보여 준다 하겠다.
그러고 보면 한 편의 시조는 초,중,종이라는 세 개의 자족적인 의미론적 단위가 모여서 이루어지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시조가 과거에 가곡창으로 노래되던 시절에는 5분절로 인식되기도 하였지만 시조라면 3장 구조를 떠올리는 것은 이러한 의미론적 자족성이라는 단위성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초,중,종장으로 불리는 세 개의 단위가 상호간에 맺고 있는 관계는 무엇인가? 한 편의 작품이 시조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지니는 성격을 중심으로 살핀다면 여기서 우리는
[대상(Object)-관계(Relation)-의미(Meaning)의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들이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이 시조의 초장은 대상(Object)의 제시다. ‘가을밤의 차가운 물’이 그 대상이다. 이처럼 시조의 초장은 대상을 제시함으로써 말머리를 연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아침이라는 시간을 대상화하여 제시한 것이고,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도 죽음이라는 대상을 제시함으로써 화제를 여는 것이다.
이처럼 시조의 초장은 화제를 대상화하여 제시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시조의 초장은 무엇에 대하여 말하리라는 것만을 짐작하게 할 따름이지 그 이야기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는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전통적인 구성의 용어로는 말머리를 일으키는 기(起)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중장은 초장에서 제시된 대상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구실을 한다. ‘추강에밤이’의 예를 보면 가을 밤의 차가운 물은 ‘고기가 물지 않는’ 것으로 성격이 구체화된다. 가을 밤 차가운 물이 지닐 수 있는 수많은 측면 가운데 낚시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성격이 드러난 셈이다.
시조의 중장은 초장에 제시된 대상의 성격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그 대상을 관계(Relation) 속에 위치시키는 성격을 지닌다. ‘소치는 아이놈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는 초장에서 제시한 아침이라는 시간을 잠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으로 관계를 지음으로써 그 성격을 드러낸 것이며,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는 초장에서 제시한 죽음의 의미를 소멸의 뜻으로 구체화하는 셈이다.
이것을 전통적인 구성법으로 말하자면 승(承)이라 할 수 있겠는데, 생각을 이어받는다는 뜻을 넘어서서 초장에서 제시된 대상이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 관계의 드러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단순히 생각을 이어받는다는 수준을 넘어선다는 점이 중요하다. 실제로 사물의 인식은 그것이 놓여 있는 맥락과 연관지을 때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과 관련하여 시조 중장이 관계를 드러내는 의의가 특별해진다.
시조의 종장은 중장에서 관계를 통해 구체화된 대상이 ‘나’에게 주는 의미(Meaning)를 제시하는 구실을 한다. 전통적인 구성법의 용어로는 결(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는 단지 서경에 그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기 대신에 달빛이 가득한 배에서 미를 추구하는 삶의 자세에 대한 예찬을 듣는다.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에서는 아침이라는 시간이 노동의 시간으로서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환기하고 있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에서는 자신의 삶이 지닌 태도의 일관성이라는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모든 시조의 초,중,종장이 반드시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기 어렵다. 초장과 중장이 동일한 수준의 병렬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뇌정(雷霆)이 파산(破山)하여도 농자(聾者)는 못 듣나니
백일(白日)이 중천(中天)하여도 고자(瞽者)는 못 보나니
우리는 이목(耳目) 총명(聰明) 남자로 농고(聾瞽) 같지 말으리
말 타고 꽃밭에 드니 말굽에서 향내 난다
주천당(酒泉堂) 돌아드니 아니 먹은 술내 난다
어떻다 눈경에 걸은 님은 헛말 먼저 나느니
이처럼 초장과 중장이 동일한 수준의 대상 제시로 이루어지는 시조가 없지는 않으나, 시조의 3장 구조가 우리에게 주는 인상은 이러한 중장조차 관계의 드러냄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초장에서 제시된 대상과는 동일한 수준의 대상이 병렬된 것이면서도 이 둘을 아우름으로써 그 복합성을 통해 대상이 구체화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병렬을 통하여 그 대상의 총화적 인식으로 지각하게 해 줌으로써 의미를 구체화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시조 형식의 표본적 구조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검토가 필요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옛시조는 대체로 이러한 구조적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어느 작품을 대상으로 해도 쉽게 드러난다. 이 점을 분명히 하면서, 현대시조에서도 친화감을 주는 시조가 대체로 이런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가고파’의 구조는 대체로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초장은 ‘남쪽 바다의 파란 물’이라는 대상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중장에서는 그 바다와 나와의 관계가 설정된다. 남쪽 바다의 파란 물이 지니는 의미는 다양할 수 있지만 나와의 관계에서는 ‘잊을 수 없는 고향 바다’임이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어받는 궁극적인 의미는 종장에 제시되는 ‘가고파’로 귀착된다.
이 시조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까닭은 함축적인 시어와 탁월한 조사법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이 시조의 3장이 이루고 있는 대상-관계-의미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 데서 오는 친근감도 큰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이렇듯이 시조의 3장이 이루고 있는 형식적인 구조를 가리켜 O-R-M 구조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ORM 구조는 단순히 형식적 장치를 넘어서서 시조 발상의 원리로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3. ORM 구조의 문화적 전통
시조의 ORM 구조는 형식으로서 정립된 것이지만 이것이 실은 역사적으로도 면면히 이어져 온 사고의 전개 과정이라는 점은 의미 심장한 데가 있다.
시조의 연원을 찾는 과정에서 논의되었던 것이기는 하지만 10구체 향가가 시조와 같은 의미론적 3단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시조의 정형과는 다른 것이면서도 이러한 사고의 전개 구조가 우리 문화에서 하나의 틀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다음은 ‘祭亡妹歌’를 해독한 것이다.
生死路는
예 이샤메 저히고
나는 가나다 말도
몯다 닏고 가나닛고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떠질 입다이
하단 가재 나고
가는 곧 모다온뎌
아으 彌陀刹에 맛보올 내
道 닷가 기드리고다
제1-4행에서는 누이의 죽음을 제시하고, 이어 제5-8행에서는 나뭇가지와 관련을 지음으로써 그 대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것은 대상이 지닌 구체적 의미가 된다. 죽음은 가는 곳을 알 수 없이 떠나가는 일이라는 슬픔이 압축적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종장은 그것을 이어 받아 그것이 내게 주는 의미를 태도로 제시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죽음은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다양할 수 있겠으나 내게는 ‘도 닦으며 기다리는’ 것으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10구체 향가가 3 개의 의미 분절로 이루어진 데서 시조와의 친연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3분절 그 자체보다도 3분절의 의미 전개가 ORM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찬기파랑가’, ‘혜성가’, ‘원왕생가’ 등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러한 구조의 전형성이 드러난다.
ORM 구조가 현저하게 드러나는 양식으로 說을 들 수 있다는 점은 이러한 사고 구조가 시만의 특징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차마설’, ‘슬견설’ 등 많은 설 작품은 앞 부분에서 대상을 제시하고 그것을 관계망 속에 놓음으로써 그 성격을 분명히 한 다음에 그것이 내게 주는 의미를 구체화하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사고의 전개 과정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수필 양식이라 할 수 있다. 피천득의 ‘시골 한약방’이라는 수필은 시골에서 병이 났을 때 찾았던 허름한 한약방의 모습을 제시한다. 약을 지을 약재가 없어서 자신의 돈으로 읍내에 나가서 약재를 사올 정도로 보잘것없는 약방의 모습을 대상으로 제시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사고를 이끌어 가고 있다.
양복 한 벌 변변한 것을 못 해 입고 사들인 책들을 사변통에 다 잃어 버리고, 그 후 오 년간 애면글면 모은 나의 책은 지금 겨우 삼백 권에 지나지 아니한다. 나는 이 책들을 내가 기른 꽃들을 만져보듯이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자라는 아니를 바라보듯이 대견스럽게 보기도 한다.
물론 내가 구해 놓은 이 책들은 예전 그 한방의가 나한테서 돈을 취하여 사 온 진피, 후박, 감초, 반하, 행인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우황, 웅담, 사향, 영사, 야명사 같은 책자들이 필요할 때면 나는 그 시골 약국을 생각하게 된다.
시골 한약방을 떠올린 이유가 자신의 서가에 귀한 책이 없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좋겠고, 귀한 책이 없음을 말하고자 시골 한약방을 빗대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수필은 시골 한약방의 모습(O)-내 서재와의 관계(R)-내게 던지는 의미(M)의 구조로 생각이 흐르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시조의 3장 형식은 단순히 형식의 문제이기를 넘어서서 사고의 과정이 형식으로 집약된 것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ORM의 단계를 밟아 나가는 생각의 흐름이 시조의 3장으로 자리잡은 것이며, 이것은 그만큼 널리 관찰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 문화를 형식으로 구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4. 관계 인식과 의미 추구의 시학
시조가 단순히 세 개의 뜻덩이를 모아 작품을 이룬다는 수준을 넘어서서 전통적인 사고의 구조를 집약한 형식이라는 점은 시조가 노래할 것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사실 이 세상 삼라만상의 무엇이나 시조가 될 수 있고, 그에 잇대어 오는 어떤 생각이나 다 시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조는 어떤 내용이거나 3장 형식에 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시조의 3장이 ORM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우리 문화의 전통적인 사고 과정과 맞물려 있다는 점은 시조야말로 문학의 본질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양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해 준다.
살아가면서 체득한 경험을 통해서도 익히 아는 바이지만 삼라만상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을 나와 관련짓는 맥락에 놓을 때 비로소 분명해진다고 할 수 있다. 무심해 보이는 한 덩이의 수석에서도 관계에 의해 드러나는 의미를 확인할 수 있으며, 박물관에 놓인 고려 청자는 그것이 지녔을 법한 관계의 망에 위치시킬 때 그 실상이 이해된다는 것을 통해서도 관계를 이룰 때 비로소 사물의 진정한 의미를 읽을 수 있음이 드러난다.
이쯤에서 우리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새삼스레 꺼내게 된다. 삼라만상의 의미가 백과사전에 규정된 것처럼 확정적인 것이라면 구태여 문학은 필요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문학은 삼라만상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그 의미가 甲男에게는 이렇게 비치고 乙女에게는 저렇게 인식되기 때문에 문학은 우리가 할 만하고 귀기울일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문학은 항상 새로운 발견이요 창조이다.
그러한 발견과 창조는 대상을 대상 자체로 놓고 바라보는 한 불가능한 법이다. 대상이 나와 관계를 맺을 때 그 대상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문학은 대상과 나의 관계 맺기라 할 수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 바로 문학이고, 우리는 그렇게 발견해 낸 참신한 의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조야말로 문학의 본질에 가장 충실하고 이상적인 형식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ORM 구조 자체가 바로 대상을 드러내고 그것을 나와 관계짓고,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는 구조를 형식으로 정형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시조를 쓰는 일의 중핵은 대상을 나와의 관계망 속에서 바라보는 일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삼라만상이 내게 던지는 의미를 관계의 맥락에 위치시켜 탐구하는 일이 시조 창작의 과정이며, 그런 과정이 시조의 3장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표출되게 마련이다.
이처럼 시조를 쓰는 일은 삼라만상이 내게 던지는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이므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양분법을 떠나서 일체감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대상과 내가 관계망의 그물코를 이루면서 이어지는 일체감이 없이는 시조의 본질에 닿는 창작이 불가능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시조시인마다 추구하는 살아가는 삶이 다르고 추구하는 가치는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성은 문학의 생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차이 자체가 사물이 지닌 다의성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조의 목소리는 작품마다 다를 수 있고, 또 그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목소리인가 아닌가는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과 내가 긴밀한 관련 속에서 하나가 되는 과정을 통해 그 의미를 추구한 것일 때 삼라만상의 진정한 의미는 드러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시조는 행복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의 본질을 형식으로 양식화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그것이 삶의 중요한 방법이자 태도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우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일이며, 그럼으로써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시조는 그것을 노래하는 양식이라는 점에서 문학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조의 3장 형식이 지닌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적 장치이기를 넘어서서 삶의 본질과 가장 가까운 구조이며, 또한 문학의 본질을 구현하는 장치라는 뜻도 지닌다. 그리고 시조를 쓴다는 일은 이처럼 본질적인 과정을 집약된 구조를 통해 수행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하겠다.
5. 현대시조의 사명
시조 형식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충분히 드러났다고 생각하므로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필요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라는 사회의 특수성과 관련하여 시조가 해야 할 몫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일도 시조의 본질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시조의 향유 방식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대 사회가 지닌 특성이 옛날의 그것과는 판이하다는 점에서 시조의 책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현대 사회의 특색을 규정하는 말은 많겠으나 그 중에서도 우리의 삶과 연관된 핵심어를 고른다면 산업화, 정보화, 세계화, 통일 등으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특징은 우리 삶을 음으로 양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결과 인류의 삶은 삶의 본질보다는 부가적인 가치에 몰두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산업화 사회로 규정되는 현대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고민은 환경 파괴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환경이 파괴된 것은 악의적인 의도에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양분법적으로 분리시켜 생각해 온 결과라 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을 함께 아울러 생각하기보다 인간만을 위한 이로움을 추구한 결과가 환경의 파괴로 나아간 것이다.
전지구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이 환경 문제가 과학의 힘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렵다는 것에 누구나 공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안은 자연과 인간을 아울러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적이고 의미 있는 관련성을 지닌 존재로서 상호 조화와 균형을 회복할 수가 있다는 생각이다.
시조가 대상을 관계망의 맥락에 놓고 바라보는 형식을 가졌다는 것은 이 점에서 미래 사회의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대상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사고의 전개는 필연적으로 모든 것이 깊은 연관 속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이끌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은 조화를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정보화 사회라는 현실의 조건도 인간을 피폐하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정보화 사회의 중요한 특질은 인간이 정보를 중시하고 추구하는 나머지 개인화한다는 점이다. 인간과 인간이 상호적인 유대보다는 끝없는 경쟁의 순환 속에서 각자가 분리된 개별적 존재로 삶을 영위하게 되리라는 전망이다. 정보화 사회가 가져오는 불안과 초조가 결국 개인화의 문제와 밀접하다는 점이 이런 전망을 쉽게 이해하게 해 준다.
이런 전망 속에서 꼭 필요한 것은 인간적 유대의 회복이다. 그러한 유대는 삼라만상은 물론 인간까지를 관계망의 맥락에 정치시키고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시조의 ORM 구조는 인간 회복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심한 돌맹이 하나에도 관계를 생각하는 눈길을 던진다는 것은 모든 타자 또한 나와 깊은 의미 연관을 가진다는 태도를 형성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화는 널리 인정받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의 세계화는 서구화로 대치되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또 세계화라는 말 속에 이미 서구 강대국의 음모가 깃들여 있다는 진단도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서구화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는가? 그것은 자연과 인간을 철저하게 분리시켜 바라보는 양분법의 사고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서구의 문명이 거둔 성과는 대체로 이러한 양분법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진단이다.
이러한 세계화 또는 서구화의 사회에서 우리가 굳게 지녀야 할 것은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세계가 한 지붕 한 마당에서 생활하는 것이 현실로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온세계가 똑같아진다는 의미와 동의어는 결코 될 수 없다. 세계가 울타리를 헐고 한 자리에 서는 날이 오더라도 그 때에 중요한 것은 저다운 정체성이며, 공동체의 공동성이다. 이런 교훈은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읽을 수 있고, LA 폭동의 교훈도 이런 깨달음을 우리에게 던져 준다.
이러한 세계화의 경향 속에서 시조는 정체성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그 형식이 지닌 ORM의 사고 구조는 우리다운 정체성을 확보하는 정신적 근간으로 중시되어야 한다고 본다. 시조를 쓰는 일도, 시조를 읽는 일도 다 문학 행위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사고와 문화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길이 될 것이다.
통일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은 기대와 우려를 우리에게 동시에 던져 준다. 통일은 당위로서 마땅히 와야 할 것이지만, 통일의 상황은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특히 북한은 시조를 한가한 양반들의 것이었다고 함으로써 이를 백안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것은 과거의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시조의 창작은 논외로 하고 있는 북한의 현실과 맞닥뜨릴 때 현대시조가 할 일은 무엇인가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그런 상황을 위해서는 시조의 ORM 구조가 민족문화적 전통을 지닌 것이라는 점을 더욱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통일이 오면 어차피 한반도기나 아리랑을 넘어서는 문화 표상이 필요해질 것이고, 그 때의 대안으로서 시조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본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은 시조의 3장 구조가 단순히 형식적 장치이기를 넘어서서 민족문화적 전통과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시조는 우리가 생각해 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시조를 짓기 위해서는 하나의 단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나의 음소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배려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다. 심지어는 시행의 숨결을 조절하기 위해서 한 줄의 말마디에 수없는 수정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지만, 시조 형식이 지닌 본질에 충실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나서는 일은 그 모든 일에 앞선다고 본다. 그렇게 할 때 시조 형식의 전통을 오늘에 살리는 길이 되고, 그 과정을 통해서 미래를 천착할 수가 있을 것이며, 시조로 꾸려 가는 삶의 길을 열 수가 있을 것이라고 감히 주장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