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특별히 정약용선생 그 집안을 말하자면 천주교회애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정하상이 그러했고 그리고 황사영에게 시집간 정난주의 이야기도 유명하다
정약용은 천주교에 입문했고 그 믿음을 앉고 돌아가셨지만
관직을 가진 사람으로서 천주교에서 대놓고 활동하기가 어렸다.
그를 총애하는 정조임금이 승하한후에
순조가 어린나이에 등극하자 천주교 탄압과 더불어서 다산선생은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머니인 해남윤씨부인은 윤선도의 후손이었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여러상소때문에 왕 가까이에 두지 못하였기에
왕실과 가까운 황해도 곡성에 부사로 제수했다고 한다
다산선생은 지방목민관생활이 그리 길지 않았으나
다른 지방관과 다르게 행정을 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관아에는 6방 아전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특별한 녹봉이 제공되지 않았기에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많이 갔다고 한다
이를 경험한 다산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목민심서를 남겼다
그는 특히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깊었으니
특히 강진유배생활중에서는 역관을 통해서 입수한 중국의 서책을 접하고
오늘날과 같은 대형 출판사를 그곳에 세워서 많은 서책을 편찬했다고 한다
억울하게 처벌받는이를 위한 형법에 관한 서책도 만들었다고한다
요즈음은 국가관직이나 종교계나 본래 정신과 어긋나게
권력을 휘두르는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 서울시흥본당에 다닐적에
정의구현사제단의 고문과 총무가 본당 주임신부와 보좌신부였기에
그들은 본당일보다 명동성당에서 마주칠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특히 본당신부였던 김승훈신부는 처음 사제가되고 얼마있지않아서 발령난곳이
대림동 가난한 지구라서 그지역에서 빈민사목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런곳에서 연탄가스중독으로 거의 죽을뻔했다고 한다
그 후유증인지는 모르지만 60세를 갓넘으셨을때 하늘나라로 가셨다
늘 성당마당에서 성모상근처를 돌아다니면서
묵주를 돌리던 신부님 모습이 떠오른다
특히 다산산생은 유배지에서 아들의 교육에도 열중했다고 한다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도 유명하거니와
그 아들을 유배지로 불러서 직접 훈육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분은 아마도 죽을힘을 다해서 백성을 위한 뭔가의 기록을 남길려고 애쓰셨던 것 같았다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 하시는 일을 하는것인데요
하느님의 기쁜소식을 이웃에게 전하는 일이고
또 하느님을 알리려고 하는 이들을 양성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인이 교사로서 양성되고 해서 할수있는 일이 아닐것이다
우리가 배우고 체험한 바를 나눗는 것도 그와 같은 일이라 여겨진다
어려울때일수록 기회가 생긴다고 한다
요즈음과 같이 어려운시기일수록 소공동체 코이노니아를 위한 봉사자 말씀선포자가
필요한것이다. 이들을 위한 환경이 필요하고
이들을 위해서 앴느는 이들이 존경받는 문화가 필요한 싯점이라 여겨진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