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생, 67세의 이순희 수미사 대표는 지금 대학생이다. 동대문시장에서 스카프를 만들어 파는 사업가이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공예문화정보디자인학과 4학년에 다닌다. 5년 전만 해도 이순희 대표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었다. 2009년 4월 중졸 학력 검정고시 학원 문을 두드렸다. 첫 수업은 수학시간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50년 만에 앉은 책상은 너무나 낯설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더니 수학 선생님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고 벙긋거리는 입만 보였다. 괜한 일을 시작했나 하는 순간, 두 사위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개적으로 ‘초등학교 졸업’을 알린 셈이니 어떡하나. 죽을 힘을 다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4개월 후 이 대표는 평균 88점으로 합격증을 받았다. 또 8개월 후엔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날 이 대표는 실컷 울었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한과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가 눈물과 함께 녹아내렸다.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모를 일이건만 못 배운 한은 늘 그의 가슴을 짓눌러 왔다. 평생 시달렸던 학력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날개가 달린 듯 몸이 가벼워졌다. 세상도 달리 보였다.
지난 10월 13일 서울 동대문구 제일평화시장 내 이순희씨의 매장을 찾았다. 매장의 스카프·머플러는 이탈리아, 중국에서 수입하기도 하지만 이 대표가 디자인한 제품이 많다. 푸른색 무늬의 스카프를 두르고 파란 안경을 쓴 이 대표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사진=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 대표가 동대문 밥을 먹은 것은 딱 30년이 됐다. 사업을 하던 남편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빚더미에 앉았다. 넋 놓고 앉아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남편 손을 끌고 동대문 광희시장에서 옷장사를 한 게 출발이었다. 억대 빚을 안고 시작해 서울 강남에 4층짜리 건물, 아파트, 상가 지주권 등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상가 지주권은 매장 하나가 5억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3남매 잘 가르치고 딸은 유학까지 보냈다. “남편 원망하고 부모 원망하고 팔자 타령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더라. 내가 나가서 먹고살자 생각하고 나섰다. 처음 10년은 힘들었다. 빚 돌려 막아야지 이자 부어야지 정신이 없었다. 날마다 기도했다. 건강하게만 해달라고. 그래야 열심히 뛸 수 있으니까. 남들이 안 하는 보세 옷이 좋아 떼다 팔았는데 장사가 아주 잘됐다.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돈 셀 틈이 없어 가방에 쓸어 담아 은행으로 가져가곤 했다.”
장사가 잘되자 매장을 몇 개 늘렸다. 동대문 상권이 커지면서 임대매장의 권리금이 치솟기 시작했다. 당시 한 매장에 권리금이 1억원까지 붙었다. 앉아서 수억원을 번 것이다. 사람들이 임대권을 사들이기 시작했지만 이 대표는 달랐다. 권리금은 언젠가는 내릴 것이란 생각을 했다. 임대권을 팔아 집을 사고 지주권(토지 지분)을 샀다. 끼니도 거를 만큼 가난했던 어린 시절 누구보다 집 없는 설움을 절실하게 겪었던 때문인지 집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권리금 거품이 꺼질 때 이 대표는 웃을 수 있었다.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가 동대문 상가를 덮쳤다. 800원, 900원 하던 달러환율이 2000원까지 치솟았으니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이 대표도 부도 위기에 몰렸지만 위기대처 방법은 달랐다. “남편에게 ‘빈손으로 시작했으니 망해도 제자리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말하고 이탈리아로 가서 돌파구를 찾아보자고 했다. 스카프 사업을 할 때였는데 이탈리아의 컬러가 너무 좋았다.” 원색 위주였던 한국의 컬러에 비해 이탈리아의 색은 은은하고 세련돼 보였다. 이탈리아 스카프 샘플을 들고 무작정 강남 현대백화점 본점 매니저를 찾아갔더니 “좋다”면서 행사 코너의 매장을 내줬다. 대박이 났다. 하루 매상이 700만~800만원에 달했다. 색깔을 보는 눈이 남달랐던 것이다. 이렇게 한 고비를 넘었다. 처음엔 손님에게 인사도 못할 만큼 숫기가 없었던 이 대표의 사업 노하우를 들어보자.
1. 유행을 좇지 말고 유행을 만들어라. “남들과 똑같은 것은 하기 싫었다. 남들이 유행을 좇아갈 때 나는 다른 것을 찾았다. 스카프·머플러도 남들이 만들어진 것을 팔 때 나는 원단시장 쫓아다니며 직접 만들어 팔았다. 장사가 안 될 때는 강남의 백화점을 둘러보고 원단시장을 돌아다녔다. 트렌드를 연구하고 업그레이드를 시켰다. 컬러만 봐도 다음엔 뭐가 되겠다 보이더라. 내가 선택한 컬러는 전부 히트쳤다.”
2. 손님을 친구로 만들어라. “손님이 오면 무조건 커피를 권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되더라. 30년 단골도 많다. 환불, 교환? 무조건 해준다. 지금은 그냥 가도 다음번엔 손님이 된다.”
3. 나를 먼저 가꿔라. “내가 예쁘게 하고 있어야 손님도 오고 내가 웃고 행복해야 손님도 즐겁다.”
4. 긍정 마인드를 가져라. “장사가 안 된다고 우는 소리 하지 말고 ‘잘된다 잘된다’ 말해야 복이 들어온다.”
5. 남편을 최고로 모셔라. “집안이 화합해야 장사도 잘된다. 내가 남편을 높여줘야 남도 높여준다.”
6. 손님 취향을 먼저 파악해라. “손님이 들어오는 순간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살펴라. 손님의 취향에 맞춰 물건을 권해라.”
7. 물건을 팔려고 하지 말고 가치를 팔아라. “가격만 말하기보다 왜 비싼지, 만져 보게 하고 그 가치를 느끼게 하면 십중팔구 산다.”
이순희씨의 첫 개인전에 전시한 작품으로 한글 글꼴을 디자인한 스카프와 넥타이.
사업으로 충분히 만족한 인생을 산 셈인데 이 대표는 왜 뒤늦게 공부에 도전했을까. “홍익대 평생대학원 디자인 아카데미에 다녔다.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내 색채를 보더니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났다고 칭찬하며 대학원에 다녀보라고 하더라. 하는 수 없이 초등학교 졸업이라고 밝혔다. 너무 창피했다. 아카데미에 같이 다니던 후배가 검정고시에 등록해줄 테니 도전해 보라고 권해서 용기를 냈다.”
이 대표는 TV에서 생소한 단어가 나올 때마다 자신의 무지함이 너무 싫었다. 학교 이야기가 나올 때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학력을 들키면 어쩌나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곤 했다. 거리에 즐비한 영어 간판을 보고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5남매 맏딸로 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이북 출신인 아버지는 ‘양반’ 타령만 하고 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 학교 갈 때 봉제공장에 다니고 감자 깎기로 동생들을 가르쳤다. ‘남들은 다 아는 걸 나는 왜 몰라야 하나.’ 공부에 대한 ‘한’은 지독하게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설움이자 누리지 못한 소녀시절에 대한 억울함인지 모른다.
검정고시반에 등록하고 A, B, C부터 배우는 왕초보 영어반에 들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 7시면 학원으로 갔다. 10시에 집에 돌아와 남편과 하루 일과를 이야기하고 보면 밤 12시. 그때부터 예습, 복습 하다 보면 새벽 2, 3시는 보통이고 날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굳어진 머리는 외워도 외워도 돌아서면 잊어먹었다. 냉장고며 화장실, 화장대 유리 할 것 없이 벽마다 메모지를 붙여놓고 외웠다. 자다가도 일어나 화장실로 슬며시 들어가 공부하는 그를 보고 남편이 말했다. “당신 그렇게 노력하면 고시에도 합격할 것 같아. 차라리 고시공부를 하지 그래.”
수학은 하루에 3문제씩 정해놓고 하루 종일 풀릴 때까지 붙잡고 늘어졌다. 고졸 검정고시 수학에서 두 문제 틀렸더니 학원 선생님이 “만점이나 다름없다. 인간승리다”고 말했다. 다행히 대학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 사회경력을 인정해주는 특례입학이 있어 수능을 보지 않고 입학할 수 있었다. ‘11학번 새내기’로 대학에 입학하자 지도교수가 “우리 과 생긴 이래 최연장자”라고 하더란다. 문제는 입학 후였다. PPT니 워드니 도통 강의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한 달 코스 컴퓨터 학원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다니고 딸, 조카의 도움을 받았다. 지난 4학년 1학기 때 학점 4.25를 받아 장학금까지 받았다. 이 대표는 “한턱 내느라 장학금보다 돈이 더 들었다”며 웃었다. 지난해에는 서울 중구 필동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한글 글꼴을 직접 디자인해 만든 텍스타일 작품을 선보인 첫 개인전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후 혼란을 겪기도 했다. 색채며 디자인이며 이론을 배우다 보니 오히려 작업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디자인이라고 했던 것들은 주먹구구식이었다. 무식하니 용감했더라. 이론을 알고 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3년 동안 디자인을 못했다.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다.”
이 대표는 기사에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꼭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한때 학교에 안 보내준 부모 원망, 부도로 힘들게 한 남편 원망을 했지만 생각해보니 자신처럼 행복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올해 90세인 어머니는 “내가 밥해줄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것 해라”면서 지금도 공부 뒷바라지를 해준다. 어머니에게도 맏딸을 못 가르친 것은 평생 한이었다. 남편은 “집 팔아서라도 학교에 보내주겠다”면서 든든한 응원군이 돼주고 있다. 사위들도 등록금을 한 번씩 대줬다. 이 대표는 공부하면서 몰랐던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기쁨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줄 모른다고 했다. 내년엔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다. 가능하면 박사 과정까지 도전할 생각이란다. 그의 인생 이야기를 책으로 내자는 출판사도 있다. 이 대표는 “사람들에게 내 나이에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어려운 걸 풀었을 때 더 큰 희열을 느낄 수 있다. 노력도 해보지 않고 힘들다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된다. 나태하기 때문이다. 살아보니 어려운 것은 있어도 안 되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첫댓글 우리보다 10살위인데 자기 노력도 많겠지만 하늘이 낸 사람이다
대단한 사람이네..
울 마눌은 저사람보다 11살이나 작은데도 공부를 통 안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공부한다고 집한채있는거 팔아 달라고하면
우리겅구는 어디가 있겠노
나는 나이들러서 공부하는사람을 미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온전신이 아프다고 하면서 책상에는 와 앉아있는지...
지금 배워서 뭐할끼고...
안아프고 건강하게 살다가 가는게 훨씬낮다고 생각하는데...
등록금으로 해외여행이나 댕기면서...()()
지금 와이프가 그러시단 말?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