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전당 시인선 374, 진서윤 시집, 『여기까지가 인연입니다』
진서윤 시집 | 여기까지가 인연입니다 | 문학(시) | 변형국판 | 136쪽 | 2024년 1월 10일 출간
값 10,000원 | ISBN 979_11_5896_628_7 03810 | 바코드 9791158966287
생이 아름답다는 말을 써야 할 때
201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진서윤 시인의 첫 시집 『여기까지가 인연입니다』가 문학의전당 시인선 374로 출간되었다. 진서윤 시인은 매일 8만6천400초를 소진하는 인간의 여로는 물론 우리와 동행하는 ‘세계 없음’의 존재들을 빛과 시간으로 담백하게 화폭에 담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한다. 세계와 사랑을 해보라고, 그럼 진실한 사랑에 대해 알게 될 거라고……
진서윤 시인에게 ‘오늘의 운세’는 “내 점(占)은 내가 치고 살 나이”를 말한다. 흔들리지 않기에 “오늘 내가 한 일은 뭐든지 옳”(「오늘의 운세」)은 일이며 당당한 일이다. 그래서 시인의 시도 그러하다. 자문(自問)에 대한 자답(自答)은 머뭇거리지 않고 명쾌하다. 시인의 은유는 그 명쾌함에서 빛나는 ‘태양’이다. 별들은 “수박들이 붉은 속셈으로 익어갈”(「수박」) 때 수박 속에서 유영하는 ‘검은 별’이다. 그것이 시인의 시(詩)며 시(詩)앗이다. 진서윤 시인의 시가 건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창 시절부터 시를 잡고 살아왔기에, “개량되고 개량되어 온”(「표백」) 시의 유전자를 가졌기에 좋은 시를 읽는 기쁨과 즐거움이이 첫 시집에 그득하다.
― 정일근(시인·경남대 석좌교수)
인간은 매일 할당된 8만6천400초를 노잣돈 삼아 시간을 소진하는 여로에 있다. 주어진 시간이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추억이라는 풍경을 얻는 대신 죽음에 한 걸음씩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삶은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는 과정이다. 시집 여기까지가 인연입니다는 이러한 인생의 여로에서 펼쳐지는 풍경들을 지나치지 않고 눈에 담겠다는 시인 진서윤만의 방식이 느껴지는데 이것이 곧 그녀만의 시적 형식이기도 하다. 특히 그녀의 시들은 빛과 시간에 민감한 양상을 보이기에 마치 한 편의 인상주의 회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빛을 예민하게 감지한다는 사실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한다는 것이며 햇살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던 사물들, 그리고 그것들이 맞이하는 소멸과 그에 따른 애수를 담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 줄기 빛이 제 몸을 꺾어 드는
공구점 안 청년은 작은 기계 하나를 열고
어디쯤에서 끊어진 회로를 찾고 있다
기계 안은 온통 먹구름이다
낡은 책상 서랍에 붙어 있는 스티커처럼
엇박자가 되어버린 나사
기계에 연결된 뭉툭한 꼬리 같은 콘센트
사이에서 대립 중이다
누구나 한때는 중심에 서 있었다
제 코드를 해독하지 못하고 끊어진 바람 혹은
어딘가에서 끌려온 시린 은빛도 그러했을 것이다
웅크린 청년의 수신호는 강하다
가끔 궤도를 가늠하듯 이마를 다녀가는 빨간 손바닥
굴절을 수리할 만큼 환심을 사려면
절박해야 한다는 걸 안다
그의 손이 햇빛을 끌어들인다
막 먹구름을 벗어난 기계 속을 쨍하고 비추는데
이제야 찾았다는 듯 햇살 줄기를 잇고 있다
쭈그리고 앉은 종아리를 타고
한쪽 발에서 미세한 전류가 저릿하며
청년의 자세로 막 들어간다
― 「햇살을 수리하다」 전문
인용 시 「햇살을 수리하다」는 시인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주관적 정서를 드러내는 데 회화성을 활용하고 있다. 상실감이 불러일으키는 감상성을 어떻게 해서든 조형예술의 형태로 바꾸어보려는 시인의 고군분투가 엿보이는데, 이 때문에 불필요한 수식이나 불안의식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 감정의 절제미를 획득하고 있다. 「햇살을 수리하다」의 주체는 “한 줄기 빛이 제 몸을 꺾어 드는/공구점”에서 “어디쯤에서 끊어진 회로를 찾고 있다”. 청년의 속사정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한때는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일 수도 있다. 지금은 “기계에 연결된 뭉툭한 꼬리 같은 콘센트/사이에서 대립 중”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기계 안은 온통 먹구름이다”라는 시문은 아직 햇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공구점의 시공간적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청년의 현실 상황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중의적 의미를 지닌다. 사소한 일이지만 절박한 마음으로 “그의 손이 햇빛을 끌어들”이자 기계 속은 먹구름을 벗어나게 되고 “이제야 찾았다는 듯 햇살 줄기를 잇고 있다”. 그는 “어디쯤에서 끊어진 회로를 찾”은 듯 보인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빛의 이동에 따른 공구점이라는 공간의 변화와 주체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회화적 이미지로 재현한 이 시를 마주하는 우리는 알 수 없는 비애감과 공허감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직접적인 정념적 표출을 하지 않았음에도 “제 코드를 해독하지 못하고 끊어진 바람”, “어딘가에서 끌려온 시린 은빛”, “웅크린 청년”, “쭈그리고 앉은 종아리”라는 이미지들에서 연상되는 알 수 없는 슬픔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풍경의 재현과 그것을 응시하는 시인의 시선이 고독하고 슬프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슬프다기보다 그녀의 시선, 그녀의 정서가 슬퍼서 묘한 애상감이 발현된다.
― 장예원(문학평론가)
채집을 다녀왔다
손등이, 띄어쓰기 없는 거북손 무늬로 반짝인다
그 속에서 바람결이 주름처럼 박혀 있고
먼 나라 불행한 아이들에게 보내던 30년간의 후원은
실직 이후 나에게로 계좌가 바뀌어 있다
묵은지를 곁들여 먹을까 누룽지 냄비를 불 위에 올리는 것도 잊고 후미진 곳에 있던 제비꽃을 화분에 옮겨 놓고 딱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본다 혼자일수록 잘 먹어야 한다고 나는 무던히 잘살고 있던 제비꽃을 어떤 침묵의 곁으로 데려온 것일까 서로를 위로하며 사는 것이 소용에 닿는 일이라 강제하는 것일까 침묵에 건네는 질문은 언제나 닿기 어려운 곳에 있다 해는 뉘엿뉘엿 지는데 예전 잠시 알던 사람한테서 뜬금없이 전화가 온다 내 점(占)은 내가 치고 살 나이라는데 하루 치의 밑바닥을 긁어 누룽지를 끓인다
오늘 내가 한 일은 뭐든지 옳다
— 「오늘의 운세」 전문
움직이지 않을 때 비로소 뿌리내리는 것이라고
벽에 박힌 못은 견고했다
그곳에 잎이 아름다운 식물을 걸어둔 적이 있다
새잎은 일일드라마 전개가 바뀔 때쯤 돋아나곤 했다
우리는 가끔 서로의 방에서 나와 식물의 안부를 나누었다
흙 속의 수분에 대해
마디와 마디 사이 불편한 기형에 대해
내가 식물이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하자, 식물은 감정이 없는 거라고
그는 말했다
사는 일이 슴슴했던지 식물이 사는 방에
비밀스럽게 날것들이 드나들었다
영리하게 빠르게 식구들을 늘려나갔다
감정은 있지만 두려움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화분이 떠난 자리에 고양이 창문이 생겨났다
당장 고양이를 키울 여력이 없다고 여길 뿐
뒤지면 어딘가 그 정도 돈은 있을 것이다
창문을 부수지 않고서는 떠나지 못하는 오래된 기억들이 무례하게 매달렸다
부속품처럼 시시한 외로움이라도 걸어 놓았어야 했나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을 때
텅 빈 그곳이 여전히 텅 비어 있을 때
형체만 남은 못을 빼기 위해 벽을 허문다
당초 계약서에는 없던 항목이다
— 「계약서」 전문
꽃이 가려우면 사람도 가렵다
서쪽 나라에서 먼지가 오고
남쪽 나라에서 꽃이 몰려온다
나무마다 귓불이 발갛게 물든다
이럴 때 꽃은 관광객이다
봄의 증명서들이 들판의 문턱에 걸려 펄럭인다
문 밖의 봄은 언제나 문 안으로 들지 않았다
모든 문을 열라는 듯
뜰 앞의 나무와
먼 곳의 나무까지 부풀어 오른다
주소를 옮겨가고 난 후
생의 이력은 첫 꽃을 피웠다
그늘이라는 가족이
가만가만 울리는 심장을 덮는다
꽃피는 방식을 문마다 적어 놓는다
불현듯 일어나는 운세처럼
손등 위에 둥글게 퍼져 톡톡 튀는 열꽃
꽃핀 가지마다
푸른 그늘 가득하다
— 「꽃피는 방식」 전문
갈증 같기도 하고
성취 같기도 한
필연의 날들을 보냈습니다
추억으로 봉합된 몇 개의 기억에서
서로 어깨를 다독이기도 했습니다
어깻죽지에 반짝이는 날개는 무거웠지만
희망의 문양을 새기며 미래에 중독되기도 했습니다
익숙한 이별은 없습니다
헤어짐의 자리마다 늘 새로운 아쉬움이 덧나지만
먼 기억을 거슬러
함께 일행으로 걸어온 시간 때문에 참 따뜻합니다
떠남과 머무름의 경계가 한 자리이듯
하나의 문이 닫히면
새로운 문이 열리겠지요
좀 치열하게 살았던들 어떻습니까
바람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만
마음의 행보를 따랐을 길에
새의 날갯짓 같은 따뜻한 박수를 보냅니다
생이 아름답다는 말을
이즈음에 써야 할 것 같습니다
— 「생이 아름답다는 말」 전문
그림자는 빛과 함께 태어났다가 어둠에 멸합니다
남은 잔을 비우고 일어서야 해요 이마에 땀이 난다는 건 어쨌든 아직 통증이 남아 있다는 것, 각자 숙제가 있으니까 그렇게 살라고 혼미한 음성을 보냅니다 참 독특한데 흩어지는 소리, 호명은 난청을 부르지요
아웃사이드의 이점은 그의, 그들의 눈 밖에 있어도 잃을 게 없다는 것 다만 추측이 가라앉고, 좀 덜 가렵기를 바라요 그럼에도 암담하다고 말하는 건 농담인 것 같아요 싫은 게 아니라 그들은 듣는 이들만큼 신중하진 않아요
이별에 암순응이 필요할까요? 그냥 흘려보내는 감정에 실린 편도체를 자극하는 거겠지요 9시 09분 이제 당신이 떠날 시간이네요 내가 떠나든가, 별 사이가 아니란 게 별스럽게 자유를 주는 밤이네요
여기까지가 인연입니다
— 「제법무아(諸法無我)」 전문
첫 시집을 묶기 훨씬 전부터
작고 사소한 주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왔다.
그 범주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
정말 고맙다,
그 모든 기회와 상황까지도……
2024년 1월
진서윤
진서윤 시인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201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제1회 〈큰창원작가상〉, 제2회 〈진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제1부
오늘의 운세 13/계약서 14/꽃피는 방식 16/이상한 선택 18/산청 20/해어화(解語花) 22/몽혼(夢魂) 24/처서 26/서실(閪失) 28/밤길 30/그 꽃밭 32/장천 부두 34/생이 아름답다는 말 36/북어 38
제2부
제법무아(諸法無我) 41/수박 42/그들만이 안다 44/낭만적 연대 46/표백 48/환각의 뼈 50/정류장에서 52/이드 54/햇살을 수리하다 56/오그린 잠 58/아비의 셈법 60/멀티탭 62/물류창고를 지나가는 해의 일일 근무표 64/가자지구 체리나무 66
제3부
옛사랑 69/개심사 가는 길 70/네오포피아 72/유리 부스 사이의 제례(諸禮) 74/끈 76/어쩌다 오늘 77/풍금 78/뻐꾸기 80/12월 82/네일아트 84/너훈아 85/터닝포인트 86/초대 88/귀로 90
제4부
아람치 93/바람의 기호 94/다랑논 96/서해에서 98/물음들 100/그네 102/작은 성(城) 104/인터뷰 106/아름다운 독 108/환절기 110/소통 112/가절(佳節) 114/저녁이 올 것이다 116
해설 장예원(문학평론가) 117
첫댓글 시집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
무엇 한 그냥 지나치지 않은
흔하디흔한 바람에게도 더 가까이 서서 묻고 답하고
더 관찰하는 시인의 일상이 보입니다.
더 더 가다가 더 갈 수 없을 지라도
더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길 바라며
이 시대 다변화의 길에 점 하나 바로 찍길 기원헤 봅니다.
빌긴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