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목사골 나주를 돌아보면서 역사와 유적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왕건이 오씨 낭자와의 첫 만남이 있던 나주
나주라는 명칭은 고려태조때 시작된것이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의 첫 머리를 따서 지어진 것이고,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에서 비롯된 것일 터.
나주읍성은 고려시대부터 쌓았던 것이고 이곳 영금문을 비롯하여 동점문, 남고문, 북망문 등 사방에 성문을 두었다.
이어서 전국적인 지위와 규모를 지닌 나주 향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평소 정문이 잠겨있어 후문으로 들어간다.
나주향교에는 '계성사'라는 사당있는데 공자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있단다.
대성전은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양식을 갖추었으며 보물 제394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다른 향교와 달리 나주향교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명륜당은 뒷쪽에 배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봄 가을에 제사만 지낸단다.
호남지방에서 계성사가 있는 향교는 전주향교와 함평향교 등이 있다.
향교 안마당에 있는 이 비자나무는 수령이 약 500년을 넘어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이제 금성관으로 이동했다. 임진왜란때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
명성황후 시해사건때는 이곳에서 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하였다.
금성관은 객사로서 보물로 지정되었다.
1645년에 나주목이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 9년 후에 다시 복구되었다는데,
그후 관찰부가 광주에 설치되고, 목포가 성장하면서 나주의 기능이 약화된 점이 있다.
끝으로, 목사가 기거하던 금학헌에 왔다.
금학헌에 있는 팽나무는 벼락을 맞고도 살아나 오백년 넘는 세월동안 나주를 지켜왔단다.
이곳에서 숙박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니 하룻밤 기거해보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