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자손이 학대를 받다
1:1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2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3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4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 자, 우리가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국고성:국가의 식량이나 물품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는성)(비돔:'태양신의 처소'라는뜻)(라암셋:'태양 신이 낳았다'라는 뜻)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펴져 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요셉은 자기를 노예로 판 형제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50:20)".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해치려고 할 때, 평소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한다. 일상적인 삷 속에도 하나님은 역사하시지만 그런 대에는 대체로 느리고 조용하게 일하신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면 많은 일들이 한순간에 일어난다. 우리가 어떤 일에 압도당했을 때, 자포자기하고 절망적일 때,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이 우리의 삶을 파괴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에 크게 반응하신다. 꼭 재앙이나 홍해가 갈라진 사건 같은 큰일이 일어나는 경우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우야 어찌되었든 그 결과는 언제나 해방이다.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나 자신의 달라진 모습에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개입하실 수 밖에 없으시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히브리 노예들이 억압당하자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셨다. 그 결과 히브리인의 역사와 더불어 전 세계 역사가 바뀌었다.)
13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엄하였더라:가혹하엿더라)
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21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모세의 출생 이야기는 여인들의 힘과 용기가 없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세의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국법을 어겼다. 바로의 딸은 모세가 히브리 아이인 것을 알면서도 자기 나라와 아버지의 뜻에 반하여 그를 자기 아들로 길렀다. 그의 누이 미리암은 모세가 바구니에 담겨 강을 따라 흘러갈 때 먼발치에서 지켜보다가 자기 어머니를 바로의 딸에게 유모로 소개시켜 주었다.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있었기에 모세는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특히 이런 여자 영웅들의 행렬 맨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여인들은 산파 십브라와 부아다. 이들은 바로의 명령에 저항하여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죽이지 않앗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 다음에는 바로의 인종 말살 명령이 이어진다. "(히브리인들에게)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이후 모세의 어머니와 그의 누이 미리암도 바로의 명령을 거부한다.)
모세가 태어나다
2: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잔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라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가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모세:건져냄이라는 뜻)
모세가 미디안으로 피하다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것처럼 나도 죽이려는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18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는냐
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20 아버지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더라
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엿더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도울 지도자를 세우시기 위해 우회로를 택하신다.
왜 하나님은 모세가 애굽에 남아 거기서 직접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도록 하지 않으셨을까?
왜 하나님은 그를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여러해(2:23)동안 멀리 떠나 보내셨을까? 오
늘날과 마친가지로 그때에도,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듯이 보이는 동안 무고한 이스라엘 백성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때가 따로 있다거나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큰 그림을 보고 계시다거나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의 이야기들이 다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나 요나 혹은 시편 기자들처럼 맹렬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질문하고, 도전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비록 납득할 만한 답을 찾을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한 위대한 왕국의 황태자였던 모세는 망명생활을 통해 지도자로서 서서히 준비되어 갔다. 그는 광야의 돌과 덤불들 사이를 오가고, 장인의 가축을 돌보면서 지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끝내도록 하기 위해 움직이시기 전 까지, 그는 몇 십 년 동안 그렇게 살았다(15~22절). 하나님은 모세의 영혼과 운명을 다듬으시기 위해 이러한 우회로를 택하셨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과 운명을 다듬으실 때 이런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길을 택하신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된다.)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상달:아랫사람의 의견이 윗사람에게 전해짐)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기억하셨다라는 이 표현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의를 갖고 계시기는 하지만,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기억해 주시기에는 우주의 하나님으로서 하시는 일이 너무 많다고 하시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의 누군가가 그분의 기억을 일깨워 주기 위해 뭔가를 해야만 하며, 그때에야 비로소 그분은 언약을 기억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인간의 시각에서 쓰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종종 우리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경우가 있다. 이것이 잘못됐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런 현상은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걸쳐 계속 나타난다. 우리는 신적인 것을 인간적인 수단을 통해서 겨우 설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마치 뭔가를 잊어버리신 적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하나님식 표현이 아니라 우리식 표현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이와 동시에 인간의 언어는 우리에게 무엇이 진리인지 말씀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도구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언어는 '영원'이라는 질료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신비들은 언제나 우리의 불완전과 무능과 결함 그리고 때로는 우리의 고상함을 통해 표현될 것이다. 그리고 항상 그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