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문동리 산 114-2
[산아래에서 연못에서 담은 우암송시열 증조부 묘역 전경]
이 연못은 하늘 나라 선녀가 목욕을 하려
내려왔다는 전설을 간직한 연못이라 합니다.
尤庵(우암) 宋時烈(송시열) 그는 孔子(공자) 孟子(맹자) 朱子(주자)와
같은 반열인 조선 유학자 중 유일하게 '子(자)'를 붙여 '宋子(송자)'로 숭상받았다.
우암 송시열선생의 직계 선조의 묘역으로 명당이라 알려진
옥녀가 베를 짜는 형국인 玉女織錦形(옥녀직금형)의 증조부 宋龜壽(송구수)의
묘와 조부 宋應期(송응기) 그리고 그 후손들의 묘를 소개합니다.
일설에는 증조부 宋龜壽(송구수) 묘의 發蔭(발음)으로
송시열이란 큰 인물이 태어나게 되었다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묘역으로 오르는 길]
묘가 자리한 터의 좋고 나쁜 기운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發蔭(발음), 發福(발복) 또는 같은 혈통끼리는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同氣感應(동기감응)이라 하기도 한다 합니다.
[묘역 아래에서 담은 전경]
묘역에 오르기위해서는 약간 높은 둔덕을 올라가야합니다.
둔덕에 올라가서는 묘역을 찾아가려면 아래쪽 묘들을 통과하여
맨 위쪽까지 올라야 송시열의 조부 宋龜壽(송구수)의 묘에 다다를 수 있다.
[宋龜壽(송구수) 墓(묘) 전경]
宋龜壽(송구수 또는 귀수, 기수, 1497~153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恩津(은진). 자는 耆?(기수). 호는 西阜(서부).
안동대도호부사 汝諧(여해)의 손자이며, 참봉 世良(세량)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선악에 대한
好惡(호오)가 분명하였으며, 특별히 효도와 우애가 깊었다 한다.
[宋龜壽(송구수) 墓(묘) 앞 좌측 문인석]
[宋龜壽(송구수) 墓(묘) 앞 우측 문인석]
[宋龜壽(송구수) 墓(묘) 전경]
그가 모친상을 당해 여막에 거처하면서 예를 다 하니,
흰 제비가 날아와서 둥지를 틀고 사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응한 징조라고 칭송하였다.
蔭敍(음서)로 벼슬은 永慶殿參奉(영경전참봉). 宗廟署奉事(종묘서봉사) 등을 지냈다.
蔭敍(음서) : 고려와 조선 시대,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나
지위가 높은 관리의 자손을 科擧(과거)를 치르지 아니하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
[宋龜壽(송구수) 墓(묘)와 墓碑(묘비)]
[宋龜壽(송구수) 배위 고성이씨 墓(묘)와 墓碑(묘비)]
[묘뒤에서 바라본 안산]
송구수는 아우 송인수와 매서인 동주 성제원과
더불어 함께 동거하면서 강학을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 거처를 삼현려(충북 청원군 남일면 화당리 소재)라고 불렀다.
[내려오기 전 다시 담아 본 안산 전경]
그는 특히 아우인 송인수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동생 인수가 권간의 뜻에 거슬려 귀양 갔을 때 제수(동생의 처)가
홀로 한성에 남아 있다가 전염병에 걸리었는데, 이 때 좋은 약을 구하여
간호에 힘써 쾌유케 했으며, 또한 송인수가 유배지에서 이질에 걸리자
직접 그곳에 달려가서 병을 돌보아 주기도 하였다 한다.
[송구수 묘 앞 송응기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내려오면서 차례로 담아 본 은진송씨 묘소를 소개해 봅니다.
[뒤쪽 송구수묘와 앞쪽 그의 아들 송응기 묘(송시열의 조부)]
그의 아들 송응기 묘 는 아버지 宋龜壽(송구수)가 포근하게
안아주듯 바로 앞 자리에 아들 송응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宋應期(송응기) 墓(묘)]
조부 송응기에 대해서는 검색을 해 보았으나,
별다른 내력을 찾을 수 없었다. 도사벼슬을 하였다는 것 외에는....
[宋應期(송응기) 墓(묘) 앞 우측 문인석]
[宋應期(송응기) 墓(묘) 앞 좌측 문인석]
[宋應期(송응기) 墓碑(묘비)]
[宋承祚(송승조) 墓(묘) 전경]
蔭仕(음사)로 관직에 나가
繕工監役(선공감역)과 여러 관직을 거쳐 知禮縣監(지례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宣傳官(선전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청주의 靑石橋(청석교)에서 왜구를 만나
혼자서 분투하다 여러 왜적을 죽이고 마침내 피살당하였다.
후에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으로 추증되었다.
[宋承祚(송승조) 墓碑(묘비)와 墓갈묘갈]
[宋承祚(송승조) 墓(묘) 앞 좌측 문인석]
[宋承祚(송승조) 墓(묘) 앞 우측 문인석]
[墓碣(묘갈)]
墓碣(묘갈) :
머리 부분을 둥그스름하게 다듬어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碑石(비석). 죽은 사람의 이름, 世系(세계), 행적, 출생 및
사망의 연월일, 자손의 대략적 상황 등을 새겨 놓는다.
[墓碑(묘비)]
墓碑(묘비) :
무덤 앞에 죽은 사람을 기릴 목적으로 세우는 비석.
죽은 사람의 신분, 성명, 행적, 자손 관계, 나고 죽은 때 등을 새긴다.
그러나, 墓碑(묘비) 와 墓碣(묘갈)은 같은 말이라 하네요.
굳이 구분하여 碑(비)는 面(면)을 평평하게 간 것이고,
碣(갈)은 자연석 상태다 라고 해설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 같이
쓸 뿐 아니라 처음부터 混用(혼용)해서 썼던것 같다합니다.
[좌측에서 담은 송승조의 아들 宋時爀(송시혁) 墓(묘)]
宋時爀(송시혁)은 砥平縣監(지평현감)을 지내셨다.
[우측에서 담은 송승조의 아들 宋時爀(송시혁) 墓(묘)]
[宋時爀(송시혁) 墓(묘) 앞 우측 문인석]
[宋時爀(송시혁) 墓(묘) 앞 좌측 문인석]
[宋時爀(송시혁) 墓碑(묘비)]
[묘역에서 담아 본 아래쪽 연못]
답사를 마치고 내려왔습니다.
이곳을 가려고 입구를 찾다 못찾아 두리번 거리는데..
마침 지나가시는 분이 왜 그러시냐고 물으시기에...
여차저차해서 왔노라 하였더니, 친절하게 들어가는 길을 알려주셨다.
채소밭길을 따라 올라가야하는데...
처음엔 그곳이 그냥 채소밭이였거니 하여 남의 밭으로
어찌 들어갈까하고 되돌아왔지요.
그분의 안내로 무사히 답사를 마칠수 있었기에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더 감사의 마음을 보내드립니다.^^
草阿(초아)의 삶과 그리움 http://blog.chosun.com/pts47/7662924 2015/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