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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노동자의 성 요셉 기념일)
요셉 성인은 성모 마리아의 배필이며, 예수님의 양아버지다. 목수로 일한 성인은 오늘날 노동자의 수호자로 공경받고 있다. 1955년 비오 12세 교황은 해마다 5월 1일을 ‘노동자 성 요셉’의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하였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2023년 노동절 담화
노동과 휴식을 통하여 하느님을 닮아 가야 하는 인간
(「노동하는 인간」, 25항 참조)
1890년 5월 1일. 전 세계 노동자가 하루 8시간 노동을 주장하며 거리로 나섰습니다. 그들은 하루 12-16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이 건강을 크게 해칠 뿐 아니라 결국 고용 불안과 임금 하락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자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지금의 하루 8시간 노동은 노동자들의 오랜 노력의 결실입니다. 이에 관하여 교회는 1891년에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반포하며 비인간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과중한 노동을 비판하는 동시에 적절한 노동 시간과 휴식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를 끊임없이 옹호하여 왔습니다.
노동 시간 단축과 그 정당성은 ‘휴식’에 관한 성경 가르침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종과 이방인 심지어 가축도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이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다.’(신명 5,14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노동하는 인간에게 휴식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누구나 동등하게 누려야 하는 권리입니다. 그들에게 휴식은 노동으로 소모된 체력과 더불어 무디어진 정신의 보호와 회복이라는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 사랑이라는 공동체적 차원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곧 노동자에게는 자신과 가족 공동체 그리고 사회 공동체의 일치와 완성을 위한 휴식이 필요합니다(「어머니요 스승」, 250항 참조).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교회는 “가정, 문화, 사회, 종교 생활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휴식과 여가”(사목 헌장 67항)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하였습니다.
사실 인간은 노동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공동체의 완성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완성은 노동과 그 결과물만이 아니라 휴식과 여가 가운데 예배와 봉사, 가족과 사회 공동체와 일치함으로써 비로소 실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그리고 휴식을 하면서 하느님을 닮아 가야 합니다”(「노동하는 인간」, 25항). 휴식은 노동과 그 결과인 생산성과 이윤을 위한 대가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휴식이 먼저 보장되어야 하고, 그럴 때 그 정당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새로운 사태」, 31항 참조).
그런데 우리의 노동 현실은 노동 시간의 양으로 생존하는 구조입니다. 말하자면 밤낮으로 쉼 없이 일하여야 살아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노동자는 그렇게 노동을 하여도 ‘품위 있는 가정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기’(사목 헌장 67항 참조)는커녕 자신의 생존마저 위협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동자가 자신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임금을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휴식과 여가는 ‘사치’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노동 시간은 노동자의 생명에도 직접 영향을 끼칩니다. 2019-2021년 산재 승인 판정서에 따르면 산업 재해로 인정된 자살자 10명 가운데 3명이 과로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세계 보건 기구(WHO)와 국제 노동 기구(ILO)는 2016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주 55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으로 74만 5천 명이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최대 노동 시간이 주 52시간으로 제한되었음에도 경제 협력 개발 기구(OCED) 회원 국가 중 가장 많은 시간 동안 일하여야 하는 우리 현실을 볼 때 이러한 통계는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최근 ‘집중-장시간 노동’의 법제화 그리고 실행 그 자체가 불투명한 ‘노사 합의에 따른 장기간 휴식’에 대한 움직임은 ‘과로 사회’ 그리고 “죽음의 문화”(「생명의 복음」, 12항)를 부채질할 뿐입니다.
한편 어떤 이는 노동 조건이 노사의 자율적 합의에 따라 정하여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동등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노동 조건은 ‘사회 정의의 기준‘에 따라 정하여져야 합니다(「간추린 사회 교리」, 302-303항 참조). 특히 노동 시간 확대와 유연성의 문제는 생산성과 이윤의 극대화가 아니라, 인간 존엄성 그리고 가정과 사회 공동체의 존립과 일치라는 기준에 부합하여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노동자는 숫자가 아니라 인간”(이탈리아 건설 협회 대표단에게 한 연설, 2020.1.20.)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부와 기업은 노동자에게 정당한 휴식권 보장과 함께 휴식으로 노동 시간이 단축되더라도 노동자가 살아남을 정도의 임금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임금을 보장하여야 합니다(「백주년」, 34항 참조). 그리고 노동자라면 누구나 ‘사회 보장 제도’(「간추린 사회 교리」, 301항 참조)의 대상에 포함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여야 합니다. 특히 정부는 노동자의 존엄과 권리를 침해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인 원청-하청, 대기업-영세 기업 그리고 소상공인 등의 관계 안에 존재하고 다양한 고용 형태에서 종사하는 노동자가 경험하는 불공정하고 탐욕적인 거래 구조와 다양한 방식의 중간착취 등을 강력하게 규제하여야 합니다. 동시에 영세 사업장에는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 노동은 ‘생존 노동’이 아니라 ‘세상을 일구고 돌보는 노동’(창세 2,15 참조)입니다. 장시간-저임금의 늪인 ‘생존 노동’을 권하는 세상은 사회를 ‘노예 사회’, 인간을 ‘노동의 노예’로 만듭니다. 이것을 강요하는 그 어떠한 정치‧경제‧사회‧문화 구조도 결코 정의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휴식과 노동의 조화를 통하여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과 사회를 돌봄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 사업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가 하느님의 선물이자 모든 인간의 보편적 권리인 휴식이 제한되지 않고 ‘생존 임금 노동’에 인간을 가두는 노예 사회가 되지 않도록 함께 연대하여야 합니다.
노동절을 맞이하여,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모든 노동자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서 교회의 형제적 연대로 위로를 보냅니다. 또한 더 합당한 휴식과 여가를 누리며 노동자 자신과 그 가족이 더욱 행복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노동자이신 예수님, 당신의 동료인 노동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소서.
2023년 5월 1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김선태 주교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14-15.17.23-24
형제 여러분, 14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7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23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24 주님에게서 상속 재산을 상으로 받는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은 주 그리스도의 종이 되십시오.
축일5월 1일 성 예레미야 (Jeremiah)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 연도 : 650-588년경BC
같은 이름 : 예레미아, 예레미아스, 제레미
성 예레미야(Jeremias)는 구약성서 예언서 중 하나인 예레미야서의 저자이다. 만일 성서에 이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는 그 종교적 본질을 아주 달리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마음과 인격의 종교를 주창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보다 1세기 뒤에, 그러니까 기원전 650년경 예루살렘 근교의 어느 사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성서는 예레미야의 생애와 성격을 그 어느 예언자들 보다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예레미야를 3인칭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들이 성서에 다수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 그러니까 요시야 왕 치세 제13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젊은 예언자로 나섰다(예레 1,2). 그는 유대왕국의 멸망이 예견되었고 드디어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초래한 비극적 시대를 살고 있었다. 요시야왕의 종교개혁과 주권회복은 유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609년에 그 왕이 므기토에서 전사하게 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고대 중동의 세계는 또다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으니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612년에 함락됨으로써 바빌론제국이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은 팔레스티나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집트는 유대왕국을 사주하여 바빌론의 지배에 항거하도록 하였으니, 느브갓네살은 59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하였고 주민의 일부를 유배지로 끌고 갔다. 이집트의 조종에 끝내 놀아난 유대는 또다시 바빌론 세력에 항거하였다. 587년에 바빌론 군대는 한 번 더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깡그리 파괴하였고 저항세력의 지도자들을 또다시 유형지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는 이 어두운 시대의 역사적 비극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가 이 비극을 좌시한 것은 아니었다. 예언자는 지도자와 민중에게 하느님 말씀의 대변자로 나서서 맹렬히 설교했고 위협했으며 왕국의 몰락을 예고했던 것이다. 다윗의 왕좌를 차지했던 유대의 왕들은 예언자의 이 불칼 같은 경고를 아예 무시했으며 또 군인들은 예레미야가 패배주의를 선동한다고 비난하며 그를 박해하고 고문하며 투옥시키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강기슭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시편 137)에게서 희망을 보았지만 망명하는 것을 끝내 거부하고 고국 땅 팔레스티나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그의 보호자는 바빌론인들이 임명한 총독 게달리야였다. 하지만 유태인의 한 무리가 총독을 암살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은 바빌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레미야를 인질로 삼아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집트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 것 같다.
이 험난한 운명의 사나이의 드라마는 단순히 사건들만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전 생애가 일종의 비극이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끝까지 그 말씀에 충실하다 보니, 예레미야는 그야말로 ‘말씀의 고독한 예언자’가 되고만 것이다. 그는 성품이 온순했고 사랑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야훼는 그에게 ‘무너뜨리고 파괴하며 전복하고 없애버리는’ 사명(1,10)을 주셨다. 그의 예언은 끝없는 불행만을 예고하였다(20,8). 예레미야는 평화를 원했건만 자기 가족과 왕들과 사제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과 모든 민중을 반대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예레미야는 “온 나라 안에서 싸움과 불화의 사나이로 통한 것”이다(15,10). 그가 이 같은 사명을 수행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예레미야는 말씀에 의해 완전히 가루가 될 뻔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20,9). 하느님과의 내적인 대화는 온통 고통의 외침이었다. “무엇 때문에 나의 고통은 끝이 없나이까?”(15,18) 욥의 저주를 예고한 예레미야의 그 외침은 고백론의 절정이다. “내가 태어난 그날은 저주받을지어다!”(20,14 이하).
하지만 이 고통은 예레미야의 영혼을 정화시켰으니 하느님과의 내밀한 친교를 가능케 하였다. 우리에게 이 예언자가 그토록 귀중하고 가까운 인물로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계약을 성문화시켜 예고하기에 앞서(31,31-34) 자신이 먼저 마음의 종교와 내적인 종교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인격적 종교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심화시켰다. 하느님은 마음과 콩팥을 꿰뚫어 보시는 분(11,20)이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분이다(31,29-30). 하느님과의 우정은 인간의 거짓스러운 마음의 소산인 죄에 의해 끊어진다. 거짓말이 모든 죄의 뿌리란 것을 예레미야만큼이나 강조한 사람은 없다(4,4; 17,9; 18,12). 이 점에 관한 한 예레미야는 호세아 예언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율법은 그에 의해 내면화되었으며 또 하느님과의 모든 관계는 마음의 소산임을 그가 밝혔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인간의 개인적 인격에 큰 관심을 둔 것으로 보아 신명기(申命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물론 그가 신명기에 바탕을 둔 요시야왕의 개혁을 처음에는 환영하였으나 마음의 회개가 없는 제도적 개혁이 무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민중의 윤리적 종교적 삶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내적 인간의 개조 없이는 불가능함을 예레미야가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사명은 살아생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으나 죽은 뒤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마음의 종교에 기초를 둔 ‘새로운 계약의 사상’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유다이즘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우리는 에제키엘서와 제2 이사야서(40-55)와 시편들에서도 그의 영향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마카베오 시대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민족의 수호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꼽았다(2마카 2,1-8; 15,12-16). 예레미야는 힘과 물질보다는 영성적 가치를 더 중대시하였고 또한 영혼이 하느님과 맺은 내밀한 관계를 밝혔다 하여 이 예언자는 그리스도교의 새 계약을 준비한 인물로 통한다. 말씀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과 말씀 때문에 당한 그의 고통은 이사야서 53장의 야훼의 종의 모습을 예고하였으니,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형상(形象)을 앞질러 보여 준 것이다.
오늘 축일을 맞은 예레미야 (Jeremiah)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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