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배(빌 길버트/2015년 류광현 옮김)
● 제5장 미국의 국가 비상사태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한 후 맥아더는 11월 24일에 총공세를 명령했다. 그가 전에도 호언 장담했듯이, "이 공세가 '성공'만 하면 여하튼 간에 전쟁을 종식시키고 한국에 평화와 통일을 구축한 후 유엔군을 조속히 철수시킬 것이다."
11월 28일에 중국은 압록강을 넘어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증파하여 대규모 반격 작전을 전개했다. 미군을 주로 하여 조직된 유엔군은 혼돈상태 속에 후퇴를 해야만 했다. 이것은 그때까지 미국 역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되었다. 오전 6시 15분에 오마 브래들리 (Omar Bradley) 육참총장은 펜실베이니아 가(街) 건너편의 블레어하우스(Blair House) 관저에 있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때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을 급히 수리하는 동안 블레어하우스에 머물고 있었다. 불과 4주 전 11월 1일에는 푸에르토리코(Puerto Rican) 독립단 테러분자 2명이 대통령을 압살하려고 블레어하우스에 난입한 사건이 발생했다. 대통령은 저격을 모면했지만 한 경호원이 총상으로 죽었다. 두 테러리스트들 중 한 명은 현장에서 사살되고 한 명은 체포되었다. 브래들리는 트루먼에게 맥아더로 부터 "아주 심각한 메시지'를 받았다고 보고했다.
그날 아침 급히 열린 안보보좌관 회의에서 트루먼은 말했다. "현재 우리는 매우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이 두 발로 완전히 걸어 들어왔단 말이요.' (완전 침공을 감행했다는 뜻. 역자) 그것은 5년 반 전 대통령이 된 이후 일어난 최악의 뉴스였다고 그는 말했다.
이 예기치 못했던 엄청난 위협에 직면한 맥아더는 대규모 병력 증강과 중국의 해상 봉쇄와 중국 본토 폭격을 원했다. 그날 오후 3시에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는 전쟁을 확대하는 대신 한반도 내로만 국한시킴으로써 (contain) 스탈린과 그 일당이 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전쟁을 확대하여 최악의 경우 3차대전의 유발을 정당화시킬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UN군의 운명은 거의 하룻밤 사이에 뒤바뀌었다. 맥아더는 북에서 남으로 "후퇴(withdrawal)"를 명령했다. 북진, 후퇴, 북진을 거듭한 전쟁은 이제 미국 주도의 UN군이 인천 상륙작전 이후 탈환한 지역을 통과하여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는 양상으로 변했다. 후퇴 작전은 전반적 전쟁 상황의 악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본국의 미국인들은 매일같이 급박하게 달라지는 신문 제1면의 톱기사를 읽게 되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12월 1일자에 제일 큰 활자로 8단 3행에 걸쳐 제목을 달아 주의를 끌었다.
"트루먼 원폭투하 신중 검토 중, 아직 명령은 미정, 애틀리 영국 수상 트루먼과 회담차 방미, 소련 한국전 최후통첩 거부권 행사, 지아이(GI)와 해병대 중공의 함정에 걸려 듬."
같은 날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귀하의 성공은 귀하 자신과 우리 지도자 동지들과 소련 인민 전체를
기쁘게 했습니다. 귀하와 귀국의 지도자 동지들과 중국 인민이 미군과의 투쟁에서 놀랄만한 성공을 거둔 것을 충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스탈린을 기쁘게 한 중공군의 성공은 계속되고 있는 반면에, 맥아더의 군대가 직면한 상황은 갈수록 점점 더 위태로워졌다. 11월 30일 알렉산더 헤이그의 직속상관인 미 10군단 사령관 아몬드(Almond) 장군은 휘하 장병들에게 흥남 방어선까지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12월 9일에는 맥아더가 UN군에게 흥남에서 바다를 통한 소개 명령을 내렸다. 해군과 해병대는 그 명령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1주일 전부터 흥남에서 해상철수 준비를 해온 것이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미군들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철수시킬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빨리 퍼져나갔다.
피난민들은 먼 거리에서 홍남을 향해 걸어서 몰려오고 어떤 피난민들은 기차를 타고 왔다. 함흥에서 홍남으로 가는 마지막 기차가 떠날 때에는 함흥시 전체 인구의 반수가 되는 약 5만 명의 피난민이 서로 기차를 타려고 아귀다툼이 벌어졌다. 어린 아이들을 들쳐 업고 먼 지방에서 오는 피난민들은 고도리에서 흥남까지 32킬로 도로를 걸어오다가 지뢰밭을 밟거나, UN 군이 위험하다고 수없이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전선(戰線)으로 잘못 들어가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피난민의 수가 놀랄 정도로 불어나 군대의 퇴각 작전이 곤란에 빠졌다. 흥남으로 가는 길이 피난민들로 꽉 메워졌기 때문이다. 참으로 딱한 정경이었다. <한국에서의 미 3보병사단>이라는 두툼한 정부 보고서에서는 도로를 가득 메운 피난민들의 비참한 실태를 상세히 적고 있다: "피난민들의 헐벗고 굶주리고 슬프고 딱한 모습들은 어디서나 눈에 흔하게 띄었다. 전국이 전쟁으로 상처를 입었다. 민간인들은 고통과 공포에 지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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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로 피난길에 오른 피난민 행렬 가운데는 훗날 통일교의 교주가 되고 <워싱턴 타임즈>의 발행인이 된 문선명 목사가 있었다. 그는 민주사회에서는 당연히 허용되고 있는 종교 활동을 절대 금하고 있는 북한의 공산정권에 의해 포교활동을 한 죄로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문 목사도 모든 남북한 사람들처럼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강단이 있는 사람이었다. 1947년 4월, 20대 청년인 문선명은 평양 거리에서 전도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1948년 4월 "사회 문란 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머리를 빡빡 깎여서 수갑을 찬 채 하루 종일 걸린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5년형을 선고받고 흥남 동리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수인번호 586을 단 그는 평균 생존기간이 6개월에서 3년이 고작인 그 수용소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것과 진배없다고 생각했다.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열악한 조건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죄수 들의 음식은 하루 쌀 한 줌 물 한 컵뿐이었다. 문 목사는 그래도 자기 음식을 다른 죄수들과 반씩 나누어 먹었다. 밥이 목에 걸려 컥컥거리다가 죽는 죄수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목에 걸린 밥을 손으로 꺼내서 자신의 입에 넣어 씹는 죄수들도 있었다. 대부분 생을 포기하고 죽어 갔다. 그러나 장래 목사가 될 그는 죽어도 내 스스로 죽지 형리들 손에는 안 죽는다 하면서 버렸다.
문선명은 2년 반 동안 수용소에 갇혀 있으면서 한번은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했다. 한국인의 특성인 극기심(克己心)과 기도로써 문 목사는 견뎌냈다. 문 목사는 훗날 그때를 회상하면서 말했다:
"나는 마음이 약해져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불평불만 하지 않았어요. 내가 처한 환경에 분개한 적도 없었습니다. 내가 주님의 도움을 청하기 전에 오히려 주님을 위로하고 주님께 '제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라고 기도했지요."
10월 중순에 UN군이 처음으로 홍남 가까이 후퇴해 왔을 때, 형무소 경비원들이 수감자들을 쏴 죽이고 있었다. UN군이 더 접근하자 경비원들은 놀라서 자기들 목숨부터 구하고자 수감자들이 도망치건 말건 줄행랑을 쳤다.
10월 14일, 문 목사는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어 걸어서 피난길에 올랐다. 흥남에서 구조선을 탈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것은 갖지 않고 ㅡ그 당시에는 홍남 항에 구조선이 한 척도 없었다.ㅡ 도시를 벗어나 400리 떨어진 평양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12월 초에 평양을 떠나 서울을 향해 걸어갔다. 이때엔 박정화와 김원필이란 사람이 그를 동반했다.
눈과 얼음에 덮인 거칠고 험한 산길을 헤치며 가는 그들의 걸음은 퇴각하는 군인들의 장비와 차량에다 중공군과 인민군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피난민들 사이에 끼여 더욱 고통스러웠다. 세 사람은 적에게 잡히기만 하면 참수를 당한다는 위험 속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걸었다.
그때 박정화가 실족하여 다리를 부러뜨렸다. 문 목사는 그를 등에 없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혹독한 추위에 떨면서 하루에 80여 리를 걸어갔다. 피난길 어느 지점에 당도해서는 박정화를 등에 업은 채 황해 바다의 일부를 건너 어느 한 섬까지 가기도 했다. 그들은 성탄 전야에 서울에 도착했다. 자유와 안전을 찾아 500마일을 걸어온 셈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80고령의 문 목사는 생명의 은인인 미군 병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2000년 2월 2일, 문 목사는
<미국의 세기 상(American Century Awards)> 수상식에서 연설을 했다. 이 상은 모든 미국인들의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지도자들을 인정하고 치하하려는 취지에서 문 목사가 제정하여 <워싱턴타임즈 재단(the Washington Times Foundation)>에서 수여하는 상이다.
워싱턴의 캐논 하우스(Cannon House) 빌딩에서 개최된 수상식에서 그는 미국 상하의원들과 외교사절단 앞에서 연설을 했다. "미국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내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미군이 이끈 유엔군이 한국전쟁에서 나의 조국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죄로 수감되어 있던 나를 공산당 수용소에서 구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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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으로 향하는 피난민이 홍수처럼 불어나자 후퇴하는 미군들은 피난민들에 대한 생각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사단의 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폭이 넓은 바지저고리와 훌렁한 두루마기를 한때는 호기심으로 보았지만 지금은 의심스러워서 수색 대상이 되었다. 검문소와 초소에서 미군 헌병과 한국 경찰이 검색하는 과정에 그 품이 훌렁한 옷 속에 감추어진 무기를 찾아내기도 했고, 인민군이 자신들의 군복을 두루마기로 가린 것도 발각되었다. UN군의 병력과 장비를 정탐하여 보고하라는 북한 여자와 아이들로 된 적군의 첩자들도 색출되었다. 미군들은 그들이 접근하여 특히 뒤쪽이나 혹은 옆에 있을 때 신경을 더욱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농장에서 일하던 농사꾼 부부는 특히 경계 대상이 되었다. 가득 실은 나무더미는 겨울철 땔감일 수도 있으나 그 더미 속에 무기나 탄약을 감추었는지도 모른다. 수색 정찰대도 이제는 배수 도랑이나 쌀가마 속이나 그럴만한 은밀한 곳에서 무기를 찾아내는 데 능숙해졌다."
실제로 철수작전은 미 해병 1사단이 홍남에 집결한 12월 10일에 시작되었다. 해병대뿐만이 아니었다. 도시와 마을과 농촌 사방에서 몰려오며 길을 막아 군인들의 후퇴를 곤경에 빠트린 피난민 행렬은 이제 흥남 시내로 흘러들어갔다.
열일곱 살 난 여학생 박정과 그녀의 어머니도 그 물결 속에 파묻혀 있있다. 박정의 회고에 따르면, 그들은 아주 "운이 좋은" 측에 끼여 있었다. 그 까닭은 홍남까지 까마득한 거리를 걸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근방에서 싸우던 남한 군인 한 사람이 그녀의 오빠 중의 한 사람이었기에 그들은 트럭을 타고 40마일의 길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박정 모녀는 12월 중순 야밤중에 어둠을 타고 은신처에서 빠져 나왔다. 작은 논두렁 옆에 있던 그들의 농가가 폭격에 허물어진 뒤 인민군들의 눈을 피해 다른 이웃의 가족들과 같이 숨어 있다가 흥남을 향해 도망 치기 시작했다. 북한의 혹독한 추위가 그들의 피난을 더욱 힘들게 했다. 메릴랜드의 그녀의 꽃가게에서 박정은 말했다: "진눈개비와 바람이 지독하게 몰아쳤지요. 북한의 겨울 날씨는 시카고(Chicago)와 같았어요."
그녀는 책가방 속에 생필품 몇 가지를 싸서 넣고 오빠의 기타와 아코디언까지 어깨에 메고 갔다. 해변에서의 교전은 며칠 후에야 벌어졌으므로 잠시 정적이 지속되었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겁에 질려 쥐죽은 듯 있었지요." 피난민들 중에 처음으로 흥남부두에 왔기 때문에 50대 중반의 어머니와 여학생은 처음 눈에 띈 작은 고깃배에 우선 타고 봐야만 했다. "그 배가 가라앉는 줄 알았어요. 사람만 태우지 짐은 안 된다고 해서요...." 그때가 그들이 모든 짐을 배 밖으로 내던져버린 때였다.
마침내 그 어선은 바닷물 속에 잠길 듯 말 듯 하면서 동해안의 홍남과 부산 중간쯤에 있는 묵호항까지 갔다. 거기서 피난민들은 훨씬 크고 안전하며 편한 해군의 LST를 기다렸다. 며칠 기다린 후에 LST가 나타났다. 원래 LST는 승객의 항해를 위해 업그레이드된 배가 아니었지만 고깃배 속에서 시달린 피난민들에겐 퀸 메리(Queen Mary) 호 여객선만큼이나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박정 모녀는 LST를 타고 크리스마스 음식을 처음으로 먹어봤다. "평생 처음으로 스파게티를 먹어 봤지요. 아, 그 토마토소스! 맛있었냐고요? 그럼요. 무척이나 맛있었어요. 배도 몹시 고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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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이라고 하는 다른 여학생은 그녀의 동급생들과 같이 홍남에 당도해서 대기 중인 LST로 인도되었다. 배가 며칠 동안 홍남을 떠나지 않고 있어서 박순과 함흥에서 같이 온 그녀의 친구들은 배 맨 밑바닥층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2000년 3월에 박순을 인터뷰했을 때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그때 적어도 춥지는 않았어요. 갑판 위에 탄 사람들은 추위에 벌벌 떨었지요." 박순과 학급 친구들은 갑판으로 올라가 철수 중에 해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포격전을 바라본 중인들이 되었다. "그것은 마치 불꽃놀이(fireworks) 같았어요."
그 여학생은 LST가 묵호항으로 들어올 때 또 다른 전쟁의 끔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사지가 마비되어 죽은 피난민의 시체 대 여섯 구를 뱃전 밖으로 내던져 버리는 것을 보았다. 박순은 말했다: "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니까요!"
남한의 안전한 곳에 내린 후 박순은 만나는 사람마다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소식을 물었다. 마침내 남녀노소 5만여 명의 피난민들이 함흥에서 흥남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에 서로 타려고 아귀다툼을 하던 그 기차에 탔던 고향사람 여자 하나를 만났다. 그녀는 순에게 말했다. 그녀의 부모들을 그 마지막 기차에서 보지 못했다고. 40년이 지난 후에야 그녀의 가족들 모두 피난 가지 않고 남았다는 사실, 이미 부모님들은 다 돌아가시고 남동생마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북한사람들, 미군이 생명을 바쳐가며 싸우고 있는 적국의 민간인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스탠리 볼린(Stanly Bolin)은 25년이 지난 후 이렇게 술회했다. "그들은 북한에서 좌익세력이 공산혁명을 전개할 때 환영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정치적으로 반공투사들, 지주들, 기업인들과 교육자들이었다.
유엔군이 북진하여 공산당들을 만주 땅으로 몰아냈을 때 공무원으로 일한 사람들도 있었다. 수복지에서 수립된 지방정부 공무원이나 청년단원이 되어 유엔군의 지도 아래 평화와 질서 회복에 헌신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염원하던 남북통일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그들의 운명도 바뀌었다. 중공군에 밀려 UN군이 홍남 주위의 고립지대에 빠지게 되었을 때 "수십만 명의 피난민들도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 대부분은 중공군이 무서워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미 7사단과 제3보병사단의 방어선이 급속도로 줄어들면서 고립된 항구 지역의 포위망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볼린은 당시 홍남시 주위의 정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그때는 12월 10일이었다. 흥남항구 밖으로 온갖 종류의 배들이 일렬로 쭉 뻗어 있었다. 193척의 대 선단을 만들어 전투사상 최대의 철수작전을 수행할 단계였다."라고 했다.
이와 동시에 미 육군에서는 전쟁영웅들이 배출되었다. 그 중 한 영웅은 AP통신의 한국 특파원 스탠 스윈튼(Stan Swinion)의 특별 타전으로 알려졌다. 그는 한국에서 이렇게 써 보냈다:
"작달막한 체구의 2성 장군 로버트 슐리(Robert H. Soule)가 현재 이곳에서 가장 중심인물이 되어 있다. 제3보병사단장인 술리야말로 '인간발전기(dynamo)'(정력의 화신, 초인이란 뜻. 역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이다. 신출내기 3사단이 이 고립된 해안 교두보에서 핵심적 전투사단으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술리 장군은 부하 장병들을 고무시키며 자신의 유명한 구호를 외쳤다. '장병들! 독하게 버텨!' 그는 수없이 '사격! 사격! 제군들이 죽어라고 퍼붓는 한, 놈들은 쏘질 못해!'하며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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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애틀리(Clement Atlee) 수상이 워싱턴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고 본국에서는 미국인들이 교외의 쇼핑 몰 시대가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내의 백화점으로 크리스마스 쇼핑을 하러 몰려들고 있을 때, <워싱턴 포스트>지의 마샬 앤드류스(Marshall Andrews) 기자는 12월 5일자에, 트루먼 대통령이 다음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이며 그날 밤 전 국민에게 "미국이 급박한 위기에 처하게 되어 그간 소매를 걷어붙이고 해온 중대한 과업을 완수해야 할 때가 왔다"는 요지의 중대한 담화문을 발표할 것이라는 기사를 터뜨렸다.
앤드류스의 예보 기사가 맞았다. 다음날 트루먼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규모 군사력 증강, 전시체제 하의 생산을 위한 경제안정, 임금과 물가 동결을 요구하는 담화였다. 징병제도 하에 매월 8만명을 군에 입대시킨 결과 한국동란 중 전 세계에 포진한 미군 남녀 장병들은 총 5백7십만 명에 이르렀다.
트루먼은 12월 16일 행정명령을 발동하여 연봉 $175,000를 받던 제너럴 일렉트릭 (General Electric)의 찰스 윌슨(Charles E. Wilson) 사장을 국가방위 총동원국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심각한 공산당들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한 그의 직위로, 연봉은 $22,500로 줄어들었다.
프란시스 더글러스 (Francis P. Douglas)에 의하면, 트루먼의 행정명령으로 윌슨은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재량권을 부여받았다. 즉, 이 행정명령은 윌슨으로 하여금 군사물자의 생산, 조달, 인력수급, 수송 및 기타 업무에 관한 행정부의 총동원령 활동 전반을 지휘·감독·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전 합참의장이었던 조지 마셜(George C. Marshall) 국방장관은 후에 말했다. "그때 우리는 최악의 사태에 직면해 있었지요. 한국전쟁은 '2차대전과 3차대전의 중간'이란 말이 돌았을 정도였지요."
세계의 모든 신문들이 한국전쟁을 계속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지는 다시 한번 전면 상단에 가장 큰 활자로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으로 국내외적으로 휩싸여 있는 전쟁 분위기를 반영했다.
트루먼 언명: 국가 위기사태, 특단조치 임박.
170억 달러 국방비 의회 통과.
빨갱이군대 한국의 동북 해안 교두보 분쇄
미군의 후퇴과정에 중공군은 10만 명의 미 육군과 해병대 대부분을 38선 이북 135마일 지점 장진호 근방에서 포위해 버렸다. 최초의 뉴스 앵커맨인 CBS의 더글러스 에드워즈 (Douglas Edwards)와 NBC의 존 캐머런
(John Cameron)의 한국전쟁 뉴스를 처음으로 TV를 통해 시청하면서 전국민이 군인들의 운명을 초조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때는 흐린 흑백 사진, 엉성한 지도, 전투와 후퇴 장면을 찍은 뉴스영화 등으로 해설을 하면서 군인들의 운명을 전해 주었다.
아군 병력은 정치 상업 교육의 중심지인 함경남도의 수도 함흥과 홍남항구를 향하여 꾸불꾸불하고 험준한 산간도로를 따라 후퇴를 하고 있었다.
휴대 가능한 만큼의 장비와 군수품을 몸에 지니고 산속에서 밤에는
온도가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추위에 떨면서 3미터나 깊이 쌓인 눈을 헤치고 행군을 해야만 했다. 무섭게 휘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끊임없는 적의 포화를 뚫고 빠져나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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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베이징의 중국해방군 군사과학원은 이 시기의 전투에 관한 전투결과 보고서를 발간했다. 그 보고서의 한 발췌문 역시 격렬한 전투상황과 무서운 추위를 지적했다.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12월 7일 적군(미국군)은 고도리(장진호와 흥남 사이)로 퇴각했다. 8일오전 7시엔 남쪽으로 대대적인 공군 지원(미국 공군)을 받아 탈출을 계속 시도했지만 아군 58사단 2개 중대병력이 고도리 남방의 협소한 도로에서 그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때 적군은 수많은 전폭기의 지원을 받아 퇴로를 확보하려고 맹렬히 공격해 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쪽으로 적의 증원부대가 올라와서 그들을 구출해 주기를 바랬다.
아군(중공군)은 영하 30도의 맹추위를 견디며 완강하게 적을 막아냈다. 격렬한 전투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아군은 800명의 적을 사살하고 증원부대의 진입을 차단했다. 그러나 적군은 9일 아군의 진지를 뚫고 계속 남쪽으로 도주했다. 아군 20군단 89사단이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600명 이상 적군을 사살하고 90대 이상의 차량을 공격하여 노획하거나 파괴했다. 12일에야 적군 3사단 증원부대가 오로리에서 북진하여 그들을 구출했다. 적군은 마침내 우리의 포위망을 뚫고 오로리로 패주했다."
영하 수십 도의 강추위에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맹위를 떨쳐 뼛속까지 스며드는 북한의 추위를 가지고 GI들 사이에서는 "빨갱이들이 써먹는 모든 수단들처럼 이놈의 추위도 시베리아에서 곧바로 왔다."라는 농담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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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3보병사단 장교 프레드 롱(Fred Long) 대령은 1997년 미 7보병연대 재향군인협회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지독한 추위야말로 우리들이 당해낼 수 없는 적이었다. 그 추위에 총의 노리쇠와 총열이 얼어붙어 쪼개져 버렸다. 배터리가 다 나가버리고 오일이 얼어붙어 발동을 걸 수가 없었다. 땅이 꽝꽝 얼어붙어 박격포 바닥판을 부러뜨렸다. 참호를 판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맹추위는 병사들의 힘을 빼고 사기를 저하시켰다. 그 그칠줄 모르는 지옥 같은 추위에 적군은 우리보다 더 크게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이 냉혹한 위안이 되었다고나 할까."
크리스마스이브에 롱(Long)의 7연대는 존 거쓰리(John Guthrie) 대령의 지휘 하에 흥남의 핑크 해변을 건너 상륙정을 타고 해군 수송선에 승선하여 위험지대를 빠져나와 항구 밖으로 나아갔다.
롱 대령의 회고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상륙 지휘부대에 속한 해병대와 해군장병 몇몇이 해변을 건너가는 중에 적의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거쓰리 대령의 침착한 지휘 아래 일시적인 혼란이 수습되고 그 이상의 사상자 없이 해변을 빠져 나왔다. 거쓰리 대령과 상륙 지휘부대 요원은 맨 마지막으로 상륙정을 타고 해변을 떠났으며, 그들은 흥남항을 떠난 맨 마지막 미군들이 되었다."
그러나 9만8천 명의 피난민들은 아직도 추위에 벌벌 떨면서 부두와 해변에 남아 있었다.
● 제6장 놀라운 광경
미군 부대들의 철수작전이 진행되고 있는 한편에서는 한도 끝도 없는 남녀노소의 피난민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UN군의 행군대열에 합류되어 같이 철수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철수작전에 밀리어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보다 안전하고 편안한 삶의 가능성을 찾아 정든 집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었다. 로이 애플만(Roy E. Appleman) 중령은 1990년 발간한 그의 저서 <1950년 10군단 북한 함정 탈출기>에서 자기 체험을 밝히면서 10만명의 피난민이 UN군에 합류한 것을 "엄청난 장관"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UN군에 피난민이 섞인 것은 그들 자신은 물론 군부대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애플먼은 "그 사실은 군에 즉각적인 위협을 끼쳤다. 적은 스파이나 소요책동 분자들을 민간인들 사이에 침투시켜 기회를 노려 파괴공작을 일삼듯이 해왔기 때문이다. 미군부대의 후퇴 행군 대열이 바다를 향해 눈 덮인 산길을 뚫고 지나갈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고 적었다.
그것은 미국의 전사(戰史)에서 최장, 최악의 철수작전이었다. 미국 국민들은 그들의 아들. 형제 · 남편. 보이프렌드들 대부분이 살아남은 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실은 4.395명의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해병 제1사단만 해도 전사 342명, 행방불명 78명, 부상 1.683명 합쳐서 2,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12월 13일 홍남 근교 해병대 묘지에서 여러 차례 영결식을 엄수하며 전사자를 묻었다. 사단장 스미스(Smith) 소장은 맨 마지막으로 경례를 하고 묘지를 떠났다.
헤이그 장군은 그의 자서전에서 그 작전은 "철수(withdrawal)"가 아니었다고 기억했다. "그 철수가 아무리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후퇴였다. 그리고 병사들도 후퇴로 알고 있었고, 우리가 구출하지 못하고 뒤에 남겨두었던 운이 없었던 민간인들도 그렇게 여겼다."고 적고 있다.
헤이그는 그 소개 작전 중 아몬드 장군과 L-19 정찰기를 각각 따로 타고 그 아비규환의 현장 위를 날아가며 살펴봤다. 지상에서 또는 항구의 선박에서 보고 기술되어온 장면들을 공중에서 목격했던 것이다. 헤이그의 기록에 따르면, 피난 보따리를 이고 지고 홍수같이 밀려온 피난민들이 우리 장병들과 뒤섞여 있었다. 우리 병사나 해병들이 분명히 본 것은 그들 모두가 공산정권이 다시 돌아온 것을 필사적으로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헤이그는 후에 이렇게 썼다.
"피난 보따리를 이고 지고 홍수감이 밀려온 피난민들이 우리 장병들과 뒤섞여 있었다. 우리 병사나 해병들이 분명히 본 것은 그들 모두는 공산정권이 다시 돌아온 것을 필사적으로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소개 작전 막판에 잊을 수 없는 분명한 광경을 소형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흥남항에 정박한 미국 선박을 놓치지 않으려고 얼어붙을 듯 차디찬 바닷물 속으로 수천수만의 피난민들이 죽기 살기로 뛰어들어 걸어가는 장면을 보았다."
장군과 그의 젊은 부관은 경비행기로 항구 위를 선회하면서 무전기로 말을 주고받았다. 아래에 펼쳐지고 있는 살려고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그 압도적인 장면을 내려다보면서 아몬드 장군은 10월에 대위로 승진한 헤이그에게 명했다: "저 사람들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어! 헤이그, 저들을 보살펴줘야 한다. 알겠나!"
50년이 지난 후 필자는 헤이그 장군에게 아몬드 장군이 그때 내린 그 명령에 대해 농담조로 물었다. 헤이그는 오랜 군대생활 경험으로 너무도 잘 안다. 사성(四) 장군이 일개 위관급 장교에게 아무리 복잡하고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보살펴줘라!" 단지 이 한 마디면 그 장교는 이의 없이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헤이그는 그 명령을 실천했다. 그는 장군의 명령을 비겁한 행위나 책임 회피로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령관은 단지 군에서나 민간사회에서나 올바른 상급 지휘자라면 하급자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그런 일을 했을 따름이다. 헤이그는 웃으며 말했다. “장군은 그런 식의 지휘에 능했지요. 그가 뱃심이 없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분이 적의 포화에 노출되었을 때 떠밀어서 막은 적이 여러 번 있었으니까요.'
그는 치열한 전투 중 문자 그대로 아몬드 장군을 적의 포화선상에서 구해 낸 한 가지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가 탱크를 앞세우고 중공군의 기관총 좌)를 향해 돌진하자 놈들이 총알을 비 오듯이 퍼부을 때 일어난 일이지요. UN군이 남쪽으로 후퇴하고 난 뒤 우리가 다시 북쪽으로 올라갈 때였어요. 놈들이 총알을 퍼부어대는데 우리는 그때 탱크 뒤를 따라가다가 내가 탱크 위로 뛰어오르며 장군께 소리쳤지요. 내 뒤에 몸을 숨기라고. 그리고는 전차포를 놈들의 기관총좌를 겨냥하여 갈겨댔습니다."
아몬드 장군은 결코 전투를 겁내지 않았다고 헤이그는 말했다 "이 양반은 가장 치열한 전투 때마다 전투원 옆에 항상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부관이었으므로, 나는 소대장 노릇할 때보다 훨씬 많이 적의 포화에 노출되었지요.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는 항상 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녹초가 되어 밤에 돌아와서는 항상 그의 전투 일지를 내가 먼저 쓴 후에야 참모회의로 가서 할 일을 끝내곤 했거든요."
10군단에서 상륙작전 전문가 중의 하나로 꼽힌 에드워드 훠니(Edward Forney) 해병대령은 부두 근처의 헛간에 본부를 두고 홍남 해변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훠니는 아몬드 장군의 부(副) 참모장으로 소개 작전을 총 책임지고 있었다. 그의 역할은 선박에 군대를 태우고, 물에 떠 있는 것에는 무엇이든 간에 해변에 운집한 피난민들을 태우고, 추격해 오는 적들이 쓰지 못하도록 군장비와 군수품을 다 폭파하는 일이었다. 그는 군단의 병참참모 로우니(Rowney) 대령과 긴밀하게 연락해 가면서 작전을 수행했다.
헤이그는 훠니와 로우니 대령들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철수작전에 필요한 선박들을 충분히 확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헤이그는 위관급 장교였으나 군대 내에서 작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묘책을 잘 찾아내기로 유명했다. 그가 상급 장교들에게 필요한 선박을 요청할 때에는 그것이 "장군의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도록 했다. 그가 장군의 의사라고 말을 유포시킴으로써 좌우간 훠니 대령으로 하여금 자유를 찾아가는 10만여명을 운송하는 데 필요한 선박을 찾아내도록 했다."
그렇게 수많은 민간인들을 소개시키는 일이 자동적으로 되었거나 극적인 토론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미군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전무후무한 민간인 구출 작전을 펴야만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미군 지휘관들 간에 막후교섭과 토론이 빈번히 오고 간 후에야 결정이 났다.
현봉학 박사는 그의 <크리스마스 화물 ㅡ흥남철수 민간인측 이야기>란 제목의 저서에서 이러한 토론을 다루었다. 아몬드 장군의 민간업무 자문역이었던 현 박사는 훗날 필라델피아의 토마스 제퍼슨 대학(Thomas Jefferson University)의 병리학과 혈액학 교수가 되었다.
현 박사는 훠니 대령이 아몬드 장군에게 피난민을 버리지 말고 반드시 소개시켜야 된다고 역설하여 설득시켰다고 확신하고 있다. 훠니 대령이 아몬드 장군에게 건의하겠다고 말하면서 "현 박사, 어려운 일이지만 한번 해 봅시다!"라고 말할 때, 현 박사의 근심에 찬 얼굴표정을 보고는 "나폴레옹이 내 사전에는 '불가능(impossible)'이란 말은 없다고 하지 않았소. 한번 해봅시다."라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
11월 30일, 현 박사와 훠니 대령이 아몬드 장군을 만났다. 미군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북한 피난민의 소개를 위해 미군의 철수 시간을 지연시키는 것에 대해 완강한 반대가 있음을 알고 있는 현 박사는 아몬드장군에게 "장군님,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5년간 이들은 공산당과 싸웠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했다. 워니 대령도 "장군님, 이들은 생명을 걸고 우리에게 협력한 자들입니다."라고 역설했다.
현 박사는 계속해서 "장군님, UN군을 도와서 일을 해온 사람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군 작전상 편의를 위해 그들을 포기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다그쳤다.
이들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아몬드는 말했다: "좋소.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우리 군대 자체만이라도 철수시킬 수 있을지가 의문이오."
그러나 아몬드 역시 다른 많은 지휘관들이 두려워하듯이 적의 스파이들이 피난민에 침투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밀고 댕기고 하는 설득작업이 끝나자, 아몬드는 동경의 총사령부에 타진해 보겠다고 했다.
현 박사는 포기하지 않고 그 후 몇 차례 더 아몬드장군을 만나서 민간인 소개 문제를 가지고 그를 괴롭힐 만큼 설득했다. 훠니 대령과 전사(殿史) 과장인 제임스 쇼트 (James Short) 소령은 현 박사를 지지하는 발언을 계속했다.
12월 9일, 미군 당국이 민간인 고용인들은 소개할 수 없을 것이라는 발표가 있자 현 박사가 주장한 일은 허사로 끝나는 듯 보였다. "나를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나중에 회고했다.
그러나 4일 후 현 박사는 종군신부로서 10군단에 배속되었던 한국의 메리놀(Maryknoll) 선교사인 패트릭 클리어리(Patrick Cleary) 신부를 만났다. 클리어리 신부와 현 박사는 남한의 요인과 접촉하여 LST 2대를 차출하여 군 장비를 흥남에서 선적시키고 대신에 다른 배가 4,000여 명의 피난민을 태우도록 하였다. 그것이 12월 중순의 일이었다. 흥남 철수의 커트라인은 30리 밖까지만 정해지고 데드라인 시간은 다음날 아침 6시로 정해졌을 때, 중공군은 벌써 도시의 외곽까지 진격해 와 있었다.
12월 15일 오후, 훠니 대령과 현 박사가 참석한 회의에서 아몬드 장군은 말했다: "우리는 4천 내지 5천 명의 피난민을 함흥에서 흥남까지 기차로 소개시키겠소."
현 박사가 한 장로교 예배당에 들러서 이 말을 전하려고 했을 때, 지하실에서 50명의 교인들은 신자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마지막 밤인 줄 알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 아침이면 중공군이 들이닥칠 기세였다. 그가 미군이 그들을 구출할 것이라고 말하자 한 신자는 "우리를 구출해 주러 모세가 왔다!" 고 외쳤다. 그러자 교인 전체가 그를 따라 한목 소리로 계속 외쳐댔다.
현 박사는 한 초등학교 동창 친구의 집에 들러서 부인을 데리고 속히 기차역으로 가면 구출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부인이 곧 해산을 앞두고 있어서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친구와 그 부인을 포기하고 떠나면서 현박사는 큰 슬픔에 잠겼다. 후에 그는 "어떻게라도 그 친구와 부인을 강제로라도 떠나게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한참 울었습니다."라고 했다.
현 박사에 따르면, 북한의 반공 지도자들 상당수가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과 함께 소개되었으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함흥에서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자정이 지난 2시에 함흥을 떠난 기차가 새벽 5시에 홍남에 도착했지요. 기차를 놓친 수많은 사람들이 얼어붙은 논과 산길을 걸어 흥남까
지 가려고 했지요. 그 중 반수 이상은 미군 헌병들이 미군 차량 통과를위해 도로를 확보하려고 그들을 막고 강제로 되돌려 보냈어요. 그런 중에도 나머지 사람들은 헌병들을 제치고 동북지방에서 내려온 피난민들과 합류하여 흥남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함흥에서 미군의 철수가 완료되자 그 다음의 도전은 흥남으로 운집하여 며칠 동안 배를 타기를 학수고대하는 10만명이나 되는 피난민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차디찬 텅 빈 학교와 가정집에 수용되었지만 운이 없는 사람들은 불도 물도 취사시설도 없는 학교 운동장이나 회당(會堂) 마당에 모여서 기다렸다. 더러는 얼어 죽기도 했고, 그 와중에 애를 낳는 여인들도 있었다.
한편 먼저 군인들부터 소개시키려고 각종 선박이 항구에 도착했다. 한 번에 7척의 배만 수용할 수 있는 항구에 11척의 배들이 닻을 내렸다. 현 박사는 회고했다: "군대의 소개작전은 밤낮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영하 10도의 추위에서 수병들이 파손된 항구시설을 수리하고 고장난 예인선들을 고쳤지요. 전투의 포화소리는 가까워 오는데 민간인들을 태울 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2월 17일인지 18일에 남한의 LST 3척과 일본으로부터 수송선 6척이 홍남항에 도착하고서야 구원의 손길이 뻗쳤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12월 19일에야 민간인 소개가 시작되었다. LST는 1,000명 정도 탈 수 있는 적재량 한도를 넘어 5,000명 이상을 태웠다. 한 척은 1만명까지도 태웠다는 보고도 있었다.
현 박사는 12월 21일에 싸전트 앤드류 밀러 (Scargent Andrew Miller)호에 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갑판에서 밤새도록 소개가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자리가 없어서 못 탈 수도 있다는 공포에 떨었다. 그들의 공포는 적군 포화의 굉음소리가 가까워지면서 가중되었다. 밤에는 미 해군의 함포사격이 지평선에 떨어지는 유성처럼 보였다.
현 박사가 탄 배는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떠나기 전인 12월 22일에 흥남항을 빠져나갔다. 그는 회상했다. “흥남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멀리서도 전투의 포화를 보고 들을 수가 있었지요." 니 대령은 후일 흥남부두에서 구출된 피난민 수가 10만명이나 된다는 말을 듣고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울먹였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말문이 열어지지가 않았어요. 10군단은 내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 그 이상의 사람을 구했습니다."
그 철수작전이 끝난 후 훠니 대령이 본국으로 전출되어 현 박사는 그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대령은 회신에서 "나는 박사님이 살던 그 땅에서 10만명 이상의 생명이 구출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박사님의 그 얼굴 표정을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얼굴 표정만으로도 충분한 감 사의 표시가 되었습니다."라고 썼다.
구출작업이 그 이상 지연되었다면 모든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홍남 에서 가까운 원산시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자 남쪽으로의 소개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민간인을 태울 비행기는 물론 전무했다. 유일한 길은 홍남항구에서 바다로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몇 척의 선박이 이 일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배가 바로 메러디스 빅토리 (Meredith Victory) 호였다.
이 배는 지난 가을까지 인천, 부산, 일본을 왕래하던 배였는데, 동경에서 흥남 근방의 연포 해군비행대 기지까지 200리터 드럼통에 든 제트기 연료를 1만 톤이나 운반하도록 명령을 받고 항해를 하고 있었다. 동해상의 주요 항구인 흥남항에 도착했을 때에는 적들의 강한 공세에 봉착해 연료의 하역 작업이 불가능해졌다. 해병대는 이미 철수하고 있었고...
그때 제트기 연료를 다시 부산으로 가서 하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부산에서 하역 작업을 다 끝내기도 전에 라뤼(LaRue) 선장은 급히 홍남으로 가서 철수작전을 도우라는 비상명령을 받았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항에 도착한 것은 12월 20일이었다. 미군들이 홍남으로부터 철수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선박은 다 필요했다. 거기에다 거의 10만명에 가까운 북한 피난민들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 피난민들은 여자들, 아이들, 노인들 모두 적국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이다. 도대체 그들이 어떻게 되어야 한단 말인가?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흥남의 외항(外港)으로 진입했을 때 해군의 소해정(掃海艇: 어뢰 제거함)의 에스코트를 받아 피난민들이 태워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는 해변 가까운 한 지점까지 진입했다. 1등 사관 러니는, 소해정이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어떤 화물을 실었느냐고 묻는 신호를 보내왔다고 기억하고 있다. 모든 미국의 함선은 무전통신을 못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널빤지에 조사등(照射燈)을 비춰서 신호를 반짝반짝 보내는 방법을 썼다. 수면 아래에 소련의 잠수함이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니가 제트기 연료를 적재하고 있다고 신호를 보내자 그들의 놀라운 얼굴 표정이 비쳐진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소해정 역할이 절대 필요했던 것은 해전사상(海戰史上) 기뢰 설치가 가장 심했던 항만 중의 하나로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진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을 러니는 이렇게 회고했다
"적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기뢰를 설치해 놓았어요. 자력기뢰, 미끼 기뢰, 계수 기뢰(counter mine)- 이놈은 위로 지나가는 배를 세고 있다가 조정하기에 따라 다섯 번째나 열 번째 배가 지날 때 폭발하는 교묘한 기뢰지요. 요사이는 이런 놈을 '꾀보 기뢰(smartmine)'라고도 부릅니다. 게다가 압력 기뢰(pressure mine)도 설치해 놓았는데 지나가는 배의 크기에 따라서 폭발합니다. 상당히 많은 기뢰들이 2차대전 중에 만들어진 것들인데, 영화에서 본 것 같은 그런 것들입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소해정 사이에 2,500 야드의 거리를 유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빅토리 호 선원들은 두 배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루니는 말했다: "소정이 계속 물러나고 있더군요. 우리 배의 제트기 연료와 가까웠다가는 큰일을 당하니까요."
그 화물선이 해변 가까이 닻을 내리자 미군 대령 몇 명이 승선했다. 그 중 한 사람은 아몬드 장군의 직속부하인 10군단 소속 존 차일스(John H. Chiles) 대령이었다. 대령들은 라뤼 선장과 러니를 포함한 사관들과 해군의 은어로 "상급 사관실(ward room)" 이라 부르는 집합소인 담화실(saloon)"에서 만났다. 차일스 대령이 라뤼 선장에게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맨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선박들 중의 하나인데, 피난민들을 태우고 부산까지 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때 라뤼 선장이 한 대답은 세월이 지났어도 러니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대령들이 상황을 설명하고 라뤼선장에게 흥남 철수작전이 벌써 시작되었다고 말했어요. 우리는 그런 얘기를 처음 들었지요. 제1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은 이미 철수했고, 제3보병사단은 방어선을 지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적군들의 진격이 바짝 다가왔다고 했어요. 곧 사태가 심각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눈이 닫는 끝까지 해변은 수천 수만의 피난민들로 꽉 차 있었거든요."
대령들은 라루 선장에게 피난민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었다. 특히 그 배는 규정상 사관과 선원 외에 더 탈 수 있는 사람은 12명뿐이다. 그때 한 대령이 "우리는 당신에게 그들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신이 자원해서 태울 수는 있다. 그러니 상급 사관들과 상의하여 결정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러니는 라뤼 선장이 전혀 주저함 없이 대답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선장은 좌나 우로 머리를 돌린다거나 누구와 상의하는 일 없이 즉석 대답을 했어요. 그가 태울 수 있는 한 많이 태우고 가겠다고요."
사관들 중 어느 누구도 선장의 결정에 질문을 던진 사람도 없었고 토론한 다음에 대령들에게 대답하자고 건의하는 사람도 없었다. 포탄이 사방에서 터지고 있는 전쟁 북새통에 제트기 연료를 싣고 있으므로 위험하니 속히 배를 돌려 달아나자고 말하는 사관도 없었다.
"우리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좀 진부하게 들릴는지 모르나, 우리는 그때 우리 할 일에만 열중했지요. 무서워하지도 않았어요. 선장이 배를 진입시키라고 하면 그대로 했고요. 우리가 하기로 된 일을 한 것입니다."라고 러니는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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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 한 사람이 피난민을 배에 태우는 문제와 관련해서 조정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승선했을 때 일어난 코믹한 장면 하나를 멀 스미스(Merl
Smith)는 기억하고 있었다
"배에는 그 장교가 본 적도 없는 맛있는 음식들이 너무 많았지요. 먹고 싶은 대로 마음껏 먹으라고 했지요. 우리는 그가 아주 입에 살살 녹을 듯한 비프스테이크를 원할 줄 알았지요. 그런데 양파가 그렇게 먹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주 동안 양파가 먹고 싶었어요.' 우리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 장교가 우리를 놀리는 줄 알았어요. 그러면서 그는 우리 앞에서 양파를 집더니 사과처럼 어적어적 씹어 먹더라고요.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좌우지간 피난민들이 몇 명이 탔건 간에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초만원을 이루게 되었다. 철수 후 그 배의 성공담을 실은 기사에서 더 탈 수 있는 인원이 12명이었다고 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도 더 태울 수 없는 규정이 있었다. 기관사 멀 스미스가 설명했다.
“오직 35명의 선원과 12명의 사관들을 위한 수용시설만 있었습니다. 12명을 더 태울 수 있는 공간은 있었지만 그것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그런 방이 아니었어요. 12명을 위한 침상이나 부대시설이 전혀 없었어요. 12명을 위한 공간은 있었지만 그곳은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빈 방이었지요."
선장의 결정 명령이 떨어지자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해변 쪽으로 가까이 가서 다른 미국 화물선 노쿠바(Norcuba) 호 옆 제3부두에 정박했다. 미군 공병대가 재빨리 노쿠바 호 위를 건너질러 피난민들의 유일한 생명줄인 보행판도를 설치했다.
"눈이 닫는 끝까지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미치고 환장할 정경이었다." 라고 스미스는 회고했다. 피난민들은 선원들이 배 옆면에 사다리처럼 늘어뜨린 화물 선적용 밧줄 그물을 타고 기어 올라갔다.
러니는 덧붙여 말했다: "그들 모두가 혹독한 공산치하에서 5년 동안 버틴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발로 투표하여 정권을 택했습니다." 러니의 말이 끝나자 스미스도 덧붙여 말했다: "그들은 공산당이 무서워 죽을 뻔했던 사람들이었어요."
49년이 지난 후 장진호 후퇴에서 살아남은 그 당시 젊은 해병대 소위였던 조세프 R. 오웬 (Joseph R. Owen)도 해군대학의 저술가로서 그가 쓴 <지옥보다 더 추었다(Colder Than Hell)>라는 책에서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1999년 3월 <로버트 맥코믹 트리뷴 재단 (Robert R. McCormic Tribune Foundation)>과 해군대학이 공동 주최한 학회에서 흥남철수 피난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남북 내란에 가담한 사람들이라고 가정할 때, 그들은 발로써 자기편을 택한 것을 보여줬다. 그들은 총칼의 위협을 받고 집을 뛰쳐나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올바른 일을 했다고 나는 재인식하게 되었다. 내가 그 올바른 일의 일원이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2차대전 중 주검 같은 위험 속에서 머맨스크 (Murmansk)를 왕복하면서 화물수송을 했던 라뤼 선장이 그의 1등사관 디노 사바스티오 (Dino Sabastio)에게 "승선을 개시하라! 1만명까지 태운 후 내게 알려줄 것!" 하고 명령
했다.
러니는 이렇게 회고했다
"피난민들을 짐짝처럼 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물칸과 갑판층 사이에도 틈만 있으면 그들을 태웠습니다. 음식도 물도 없고 의사도 없었고 통역관도 없었어요. 지독하게 춥고 캄캄한 화물칸 속에서 벌벌 떨고 있었지요. 변소 시설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피난보따리들을 이고 지고 탔습니다.
아이가 아이를 업고 있었고, 한 아기를 등에 업고 한 아기는 젖을 먹이는 여인들, 먹을 것과 아이를 끌고 온 노인들 하며 참으로 처참한 군상이었습니다. 모두들 공포에 질린 얼굴 표정이었습니다. 우리가 '빨리! 빨리!! 하고 소리를 쳐도 그저 공손하게 아무런 반응도 없었어요. 그 '빨리! 빨리!'란 말은 영어로 '허리, 허리!(Hurry, Hurry)'와 같은 뜻인데, 우리
가 배운 한국말 몇 마디 중의 하나였습니다."
20세기에 가장 유명했던 해군 장교들 중의 하나였던 알리 버크(Arleigh Burke) 제독도 당시 홍남에 있었다. 후일에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수심에 가득 차 있던 피난민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배고프고 찌들고 공포에 떨면서도 단 한 가지, 생각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강렬한 의지와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피난민들이 임시 보행 판도를 건너오며 소개 작전이 한창 진행 중이고 대부분 미군은 철수하고 홍남시는 적의 포화로 불바다가 되었을 때 미군의 보복 함포사격이 개시되었다. 5년 전 맥아더 장군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문서에 조인을 했던 미조리 (Missouri) 함을 포함한 미군 함정들이 함포사격에 참여했다.
미조리 합의 40밀리 함포가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갑판을 뒤흔들었다. 라뤼 선장은 아군의 포탄이 짧게 잘못 떨어질 경우의 위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막을 찢는 미조리 함의 굉장한 포성에 겁이 난 무전통신사는 그의 선실로 들어가더니 나오지를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다. 훗날 어느 기자가 러니에게 그때 무서워서 울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러니는 말했다: "그런 어색한 질문을 받고 뭐라고 대답할 줄을 몰랐다."
3척의 미국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미 해군 전폭기들이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이 폭탄은 목표물을 파괴하고 그 주위를 다 태워버리는 신종 폭탄이었다.
러니는 그런 격렬한 전투현장 속에서도 일말(一抹)의 향수 같은 감정이 솟아났다. 그것도 전쟁의 열기를 체험해 가면서 ... 어마어마한 함포사격에 참여한 함선들은 2척의 순양함 로체스터 (Rochester)와 세인트 플(St.Paul), 미조리 전함, 3척의 항공모함 3척 내지 8척의 구축함들이었다.
흥남시의 건물과 시설에 네이팜을 투하한 전폭기들을 탑재한 항공모함 중의 하나는 바로 러니가 수년 전 해군 예비병으로서 대서양에서 복무한 레이트(Leyte) 함이었다. 하긴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사관들의 대부분은 해군 예비역 장교들이었다. 전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77속전 항모군'은 공격용 항모 4척,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22척을 동원하여 10군단 흥남 철수작전의 최후 국면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중공군의 추격은 매 시간 가까워졌다. 열세에 처한 3군단의 방어선이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다. 생사를 오락가락하며 전투 현장을 처음 경험한 부대 중에는 미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한국에 파견된 의무부대인 제1야전 후송병원 (First MASH)이 있었다. 흥남시의 북쪽 외곽의 빈 학교건물 안에 군의관 16명, 간호사 13명, 의무병 87명이 지프차 한 대와 2차대전 때의 트럭 14대, 60개 병상을 가지고 야전병원을 운영했다. 거기서 군의관들은 "고기 완자 수술 (meatball surgery)" (대충 대충하는 수술ㅡ 역자)을 행했다.
매쉬(MASH) 야전병원은 새로 조직된 의
무부대였다. 부상병에게 일본 또는 그 외 지역의 보다 좋은 시설과 장비를 갖춘 병원까지 후송되는 동안만 살아 있도록 즉석 간이수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매쉬 요원들은 전진해 오는 중공군에 대항하여 홍남의 해변에서 용맹스럽게 방어선을 지키고 있는 제7. 제3보병사단의 항전) 현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매쉬 의무부대장이었던 칼 두바이 (Carl T. Dubuy) 중령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학교병원 바로 뒷산에 올라가 포탄이 우리와 멀리 아주 조그맣게 보이는 중공군 사이에 떨어져서 터지는 것을 보았지요. 그리고 우리와 함흥 사이의 얼어붙은 들판에 중공군의 소형 말(당나귀: 역자)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귀한 반창고를 있는 대로 다 찾아내서 교실 창문을 싸 발라서 끊임없는 포격의 충격파로 유리가 깨져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했지요."
두바이 중령은 미조리 함의 40밀리 함포의 굉음을 음악의 "남성 최하저음(Basso Profundo)"과 같다고 묘사했다. 그는 말했다: "멀리서 보니까 마치 120리터 휘발유통을 공중으로 쏘아서 폭발시키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 발사체들이 마치 쓰레기통이 머리 위의 얼어붙은 공중을 뚫고 비호같이 지나가며 내는 소리처럼 들렸어요."
두바이는 회고하여 말했다.
"그때 우리 의무부대원 대부분은 홍남에 갇혀서 철수하지 못할 것으로 믿었어요. 끊임없는 포격, 찌푸린 하늘, 군인과 장비를 싣기 위해 북적대며 초조하게 대기하는 배들, 게다가 제1야전 후송병원은 맨 나중에 떠나야 하는 부대라는 말이 돌았고, 그런 분위기에서 우리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그러나 운 좋게도 그들은 떠날 수 있었다. 그들이 탄 배는 2차대전 때의 자유 함정(Liberty Ship)인 마리아 루큰바크(Maria Lukenbach)였다. 두바이의 설명에 따르면, 그 배의 시설과 상태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너무나 흡사했다
"이런 타입의 화물선에는 선원 이외의 사람을 위한 선실(船室)이나 공간은 전혀 없었다. 온방(溫房)이나 목욕. 급수와 변소 시설이 전무했고, 칠흑같이 캄캄하고 위풍이 센 헛간 같은 방에는 침상도 없었다. 쇠 바닥에 침낭을 깔고 서로 붙어 누어서 체온으로 온기를 유지해야만 했다.
군용 변소는 노천갑판 고물 쪽 배 끝머리 밖으로 튀어나오게 매달아 놓은 간이변소였다. 이런 시설들을 이용하는 것은 생존이 걸린 모험이었다. 그곳에는 일을 보는 동안 배가 흔들리더라도 안전하도록 철봉 손잡이가 달려 있었고, 궁둥이를 찬바람에 노출시켜서 용변을 봐야 했으므로,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끌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러니는 동료 사관과 선원들이 피난민을 태우고 있을 때, "흥남시는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우리는 거의 최전방에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적군 포화의 압박 속에서 피난민들을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한 최대한 많이 태우려고 전력투구하고 있을 때 라뤼 선장이 두 가지 주의사항을 시달했다. 즉, 배를 회전시켜 해안에서 급히 철수해야 할 경우에 대비하여 배를 열린 바다 쪽으로 향하도록 하고, 둘째, 승선 작업 중에도 배의 엔진을 계속 틀어놓으라고 명했다.
러니는 말했다: "만약 중공군과 북의 인민군이 돌파해 쳐들어 왔더라도 우리는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절대로 항복해서 배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지독한 북한의 추위는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바람은 질풍 수준으로 심하게 불었고 눈은 펑펑 내리고 있었다. 해변에 있는 부대와의 통신은 홍남에 설치된 통신장비와 케이블이 모두 타버려 두절되었다. 제1차로 태운 피난민들은 갑판에서 다섯 층 내려간 제5선창(槍)으로 다 내려 보냈다. 선원들은 그들을 화물 발판에 실어 내려 보냈다. 배의 해상 일지(日誌)는 피난민의 승선을 간결한 사무적 용어로 기입했다.
1950년 12월 22일(금)의 일지 난에는:
피난민 승선, 밤 9시 30분 개시, 밤새도록 진행. 다음날 오전 11시 10분 종료:
-21:30 승선 개시. 화물 발판 사용. 제5선창으로 승선
-22:00 승선 개시. 제4선창으로 평갑판과 대형 장비 사용. 사다리 이용, 갑판 승강구 1.2.3번으로 피난민 채움
-23:15 평갑판 사용. 2.3선창으로 피난민 승선
-24:00 5개 선창을 피난민으로 계속 채움, 전등과 배선 점검. 순회점검 완료. 갑판 위 이상 무.
ㅡ스미스(H.J.B.Smith Jr.)3/0. 기록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인간 화물을 만적하고 바다로 향하려고 하는데 지프차 한 대가 급히 부둣가로 질주해 왔다. 한 젊은 육군 소위가 지프차에서 뛰어내려 배다리로 달려와서는 함교(艦橋)에서 라루 선장에게 소리쳤다
"선장님, CID(Criminal Investigation Division: 군 범죄수사대)에 방금 들어온 정보입니다. 공산당 첩자들이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배에 탔다고 합니다. 부산까지 무장 경비원을 데리고 선장님을 동반하도록 파견 임무를 받았습니다. 17명의 남한 헌병들이 나와 같이 갑니다."
12월 22일에서 23일로 넘어가면서 바다는 잔잔해졌으나 "구름이 짙게 낀 날씨"라고 일지는 적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피난민들의 승선이 진행되는 동안 노쿠바(Norcuba) 호의 좌현(左) 쪽에 정박해 있었다. 투광조명등(Floodlights: 건물이나 인물 등에 여러 각도에서 강한 광선을 비추어 뚜렷이 드러나게 하는 조명법.역자)을 비춰서 한밤중의 어둠을 뚫고 승선 작업을 도왔는데, 라뤼 선장이 나중에 회고하기를, 그렇지 않아도 위험한 상황을 그런 조명이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했다
"분명히 여러 가지 위험이 따랐지만 작업을 위해서는 투광조명을 안할 수도 없었지요. 우리는 불빛 속에 완전히 노출된 제일 쉬운 목표물이 되었지만, 다행히 적의 포탄이 가까이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군 함포의 포탄이 빗나가 우리 배에 잘못 떨어지는 날이면 사람이고 뭐고 다 박살이 날 텐데, 하고 두려워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 사관은 그 장면을 어린아이들에게 잘 알려진 놀이와 생생하게 비교하여 묘사하면서 말했다. "아주 미쳐버릴 것만 같았지요. 피난민을 다 쑤셔 넣다시피 태우는 일은 마치 서커스에서 12명도 넘는 거인들이 미니 자동차에 얼굴을 처박고 다 들어가려고 애쓰는 어릿광대 장난 같다고나 할까요."
구출작전의 전 과정을 통해 라뤼는 갑판 아래는 피난민으로 꽉 차있고 수백 톤의 제트기 연료가 배 안에 있다는 사실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훗날 그가 따져본 연료는 자그마치 300톤이나 되었다. "자칫 불똥이 라도 튀는 날이면 내 배는 거대한 장례 화장터의 불더미로 돌변하여 역사상 최악의 해양 참사가 될 건 뻔했습니다."
더구나 구조장비도 전혀 없었다. 피난민에게 돌아갈 구명보트나 구명구는 전혀 없었고, 있는 것이라고는 구명보트 2대와 47명의 사관과 선원용 구명구 47개뿐이었다. 일단 항구를 빠져나가면 안전 경계로 인해 무전통신도 두절된 상태로 망망대해에 홀로 떠가게 되는데, 더욱 겁나는 일은 50킬로 해역에 깔린 기뢰망 위를 지나가야 하는데 기뢰 탐지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피난민들은 몰랐지만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사관들은 알고 있었던 사실이 있다. 흥남 철수 두 달 전에 미 해군의 소해선 3척이 적의 기뢰가 터져 침몰했다. 적의 잠수함도 근해에 잠복해 있을 수 있고, 임시 대용의 구조선 정도는 어뢰 한 방으로 침몰시킬 수도 있었다. 그 배는 바다나 공중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항할 아무런 무기도 없었다. 일단 항진하고 나면 호위해 줄 배 한 척도 없었다.
2차대전 참전용사인 러니는 그때의 상황을. 군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수륙 상륙작전을 정 반대로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