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미스터리
다음에 벌어질 일이 뻔히 예견되는 상황에서 예상과 달리 엉뚱하게 진행될 경우, 특히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이유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단지 추측으로만 추론하게 될 경우 이를 미스터리로 취급하는데, 6·25전쟁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많았다. 그 중 하나를 고르라면 북한군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이후 대책 없이 허물어져 가던 국군에 대한 추격을 멈추고 도심에서 3일간 지체하였던 경우다.
점령하자마자 새 세상을 열겠다며 인민재판을 열어 피의 학살을 자행하였던 그들이 특별히 없던 자비심이 갑자기 생겨나서 그랬던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한때는 아군이 폭파한 한강다리 때문이었다고 추측하기도 했지만 3개로 구성된 한강철교 중 단지 하나만 폭파에 성공하였기에 북한군이 마음만 먹었다면 도하할 통로는 충분히 있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의견이 주장되고 있다.
- 한강 철교를 이용하여 도하하는 북한군 전차. 이처럼 파괴되지 않은 교량이 남아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진격이 가능했다. 하지만 북한은 6월 28일 서울 점령 후 3일간 시간을 지체했고 이는 6.25 전쟁의 미스터리로 불린다.
남한 내에서 암약하던 남로당 계열의 봉기를 기다렸다는 의견, 북한군의 재편을 위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였다는 의견, 남한 정부의 투항을 유도하기 위해 시간을 주었다는 의견 등이 그렇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빙성 있게 여겨지는 가설은 춘천-홍천 일대에서 펼친 국군 제6사단(청성부대)의 선전으로 말미암아 전선이 단절되면서 서울을 점령한 서부전선의 북한군이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이다.
그만큼 청성부대가 이룬 성과는 가히 전쟁의 초기향방을 결정한 의의가 대단한 승리였다. 당시 춘천 전투를 이끈 부대장 김종오(金鍾五, 1921~1966)는 비록 이후 치욕적인 패배도 겪었지만 전략적으로 가장 의미가 큰 승리를 이끈 6·25전쟁 최고의 용장으로 결코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참전사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가장 고난했던 시기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극적인 순간을 확인할 수 있다.
김종오는 충북 청원 출생으로 일본 주오(中央)대학에 유학중이던 1944년 강제징용당하여 학도병으로 입대하였다. 징용 후 견습사관생도로 훈련을 받은 후 소위로 임관하였으나 일본의 패망으로 실전참가없이 귀국하였다. 해방 다음해인 1946년 미 군정에서 이후 국군의 모태가 되는 2만5천명 규모의 '남조선 국방경비대' 설립을 발표하면서 60여명의 기간요원을 뽑았는데 김종오는 여기에 지원하여 국군의 창설요원이 되었다.
- 합참의장 시절의 김종오. 그는 전쟁 초기 춘천 전투의 대승을 이끌어 북한의 전쟁 전략에 차질을 불러오게 만들었다. /합참
전쟁이전의 전쟁 1947년 그는 26살에 육군 제1연대장이 되었다. 지금 기준으로 따진다면 말도 너무나 과분한 직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창군 초기에 참모총장을 비롯한 대다수의 장성급 지휘관들이 불과 20~30대의 청년들이었을 만큼 해방 조국에는 인재들이 너무 없었다. 사실 이점은 북한도 마찬가지여서 6·25전쟁 발발 당시의 북한군 총참모장이었던 강건(姜健)은 불과 32살이었다.
- 국군의 모체가 되는 남조선 국방경비대의 창설행사 모습.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편의상 남북을 갈랐던 38선은 어느덧 국경 아닌 국경이 되어갔고 그러는 사이에 소소한 군사적 충돌이 수시로 벌어졌다. 공간사(公刊史) 자료에는 한 줄만 언급되어 있는 사실인데, 당시 벌어졌던 충돌에서 김종오는 혁혁한 전과를 보인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특히 제6사단장으로 부임하기전인 1949년 5월 포천군 사직리에서 있었던 대규모 전투에서 북한군 1개 대대를 완전 섬멸하는 기습작전을 펼쳤다.
1949년 5월 5일, 춘천에 주둔하던 제6여단 8연대 소속의 강태무, 표무원 소령이 지휘하는 2개 대대가 지휘관들의 기만에 의해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육사 2기 동기인 강태무와 표무원은 북한이 파견한 고위 간첩들이었는데, 비밀이 해제된 구 소련 문서에는 '남한 군대의 붕괴를 위해서 북한 첩보원 2명이 대대장과 장교로 복무했다'고 되어 있다. 이들은 6·25 전쟁 초기에 이른바 강표부대를 이끌고 남침의 선봉에 서기도 했던 철저한 프락치였다.
당시만 해도 국군은 급하게 창설되고 확장을 시작하였기에 아직 질서가 완전히 확립되지 않았던 과도기적 상태였다. 한마디로 사람도 조직도 무기 체계도 제대로 준비된 것이 없었던 혼란의 시기였다. 따라서 군 내부에 수많은 간첩들이 암약하며 여순사건처럼 공공연히 반란을 획책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었고 이들을 퇴치하기 위해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 주기도 하였다.
- 군 내부에서 암약하다가 지휘하던 부대를 속여 대동 월북한 강태무의 말년 모습. 이처럼 창군 초기에 군 내부에는 암약하던 간첩들이 많았다. /조선중앙TV
어쨌든 2개 대대의 월북사건에 분노한 국군 수뇌부는 5월 8일 보복차원의 대규모 공격을 실시하였다. 이때 사직리 인근에 포격을 가한 후 김종오가 이끄는 부대(정확한 단대호는 나와 있지는 않은데, 아마도 위치상 제7사단 예하부대가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가 38선 이북 3km지점까지 침투하여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38경비대 소속 북한군 1개 중대를 섬멸하는 특공작전을 펼쳤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