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장이 산에 가자고 연락이 왔다. 몇 년 만에 들어본 소리인가 감회가 새로웠다. 같이 갈 친구는 누군가 보니 그때 그 사람들이었다. 시간은 흘렀지만 멤버는 변하지 않았다. 나, 대장, 강언, 영화 그리고 홍일점 은미 독수리 오형제는 다시 뭉쳤다.
5월 22일 오전 7시 30분에 반월당 지하철 5번 출구 앞 항상 그 자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평소처럼 5시에 일어나 침대에서 뒹굴다가 퍼트 연습하다 냉장고 뒤져 배 채우고 시계를 봐도 6시, 다시 씻고 가방 싸고 옷 입어도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내는 아직 한밤중이다. 코 고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아내가 깰까 조용히 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7시가 채 되지 않은 달구벌대로 길가에는 산악회 버스가 줄지어 있다. 집 앞 신남네거리부터 반월당까지 걸어오면서 몇 대나 보았는지 모른다. 내가 지나치면 자기들 회원인가 싶어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다시 등산의 시간이 도래했나 보다. 회원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정을 내는데 등산만 한 게 또 어디 있겠나.
5번 출구 앞에 가방을 내려놓고 돌의자에 앉아 친구를 기다렸다. 항상 그자리에 앉으면 소머리 국밥집이 땅값을 얼마나 달라했기에 오피스텔 지으며 사지 못했나 궁금했다. 강언이 오고 영화가 왔다. 내 궁금증을 풀어달라 했더니 더 헷갈리게 만들었다. 시간이 되어도 대장이 오지 않아 전화했다. 금호 호텔 앞이란다. 자기 집 앞이란 말이었다. 맛있는 술을 친구들에게 맛보여 주려 했다가 집에 두고 온 생각이 나서 다시 갔다 오느라고 늦었다고 했다.
은미가 오지 않았다. 15분에 대곡에서 지하철을 탔으니 빨라도 50분은 되어야 오겠다. 은미는 못 본 지 한참 되었다. 잡담하며 한참을 기다리자 멀리서 은미가 보였다. 키는 맹 그대로 작았다. 왜 이리 늦었냐고 묻자 자기가 늦었냐며 깜짝 놀란다. 여자로서 특권을 부리는지 나이 때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서로가 이해해야 하는 나이가 아니겠나 한 번 웃고 차에 올랐다.
창수가 새로 장만한 새차가 달리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뒷자리에 3명이 탔지만 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가운데 은미가 앉아 쿠션이 좋기 때문이기도 했다. 승차감, 코너링, 소음 무엇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꼭 하나 짚어야 한다면 기사가 문제였다. 두 갈래길에서 네비가 가르키는 데로 가면서 가지 않은 다른 길로 가지 않은 것을 내내 투덜대며 후회했다.
대장이 배내고개 출발지인 사슴농장을 찾지 못해 헤메었다. 그렇게도 자주 왔으면서 헷갈리느냐고 했더니 일행이 모두 창수가 길치라고 했다. 한 명이 한 가지 이상 창수가 길을 헷갈려 고생한 얘기를 했다. 그래서 누구는 다시는 안 온다고 했다는 얘기도 했다. 오늘은 그러지 말기를 빌며 대장의 뒤를 따랐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길은 외줄기 6 Km였다. 완만한 임도라서 시골 비포장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가볍게 산책 나온 차림의 젊은 아베크족도 보였다. 산악자전거도 지나쳤다. 길가 나무들이 많이 자라 길이 그늘에 숨어있었다. 그러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머리 위에서 햇볕이 내리쬈다. 대구에서는 낮 온도가 32도가 넘었다 했으니 배내고개로 가는 길의 열기가 예사롭지는 않았다.
다섯의 걸음은 비슷했다. 대장이 시간을 계산하며 우리를 재촉하듯 앞장섰고 나머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제일 힘들어 보이는 친구는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84Kg이나 체중을 찌운 퇴직공무원이었다. 나 은미 강언을 뒤에 두고 우리를 인솔하는 듯 앞서가는 모습을 창수에게 찍어달라고 할 때는 애잔함마저 느꼈다. 사진 확대해서 대초64 회장 출마할 때 쓰라고 귀띔해주었다.
배내고개 가는 길은 변하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신불산, 가지산이 멀리 둘러서 있고 산들은 신록에 흠뻑 절어 있었다. 우리는 벌써 6학년이 되어 인생의 종점으로 향하거늘 몇백 년이 넘어 보이는 소나무는 아직도 싱싱하고 우람스러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자연 앞에 인간의 삶이란 찰나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배내고개는 그사이 변해있었다. 낯선 건물이 우리를 맞았다. 화장실과 관리사무실이었다. 시원한 물이 지나가는 등산객의 갈증과 더위를 식혀주었다. 매점에서 부라보콘으로 입을 다신 후 잣나무 숲에 점심 먹을 자리를 잡았다. 영화는 김밥을 내놓았다. 변하지 않았구나 몇 년 전에도 그랬는데 또 김밥, 포장지를 보니 그때 그 집이구나. 그래 사람은 변함이 없어야지. 은미도 김밥이었다. 아침에 늦은 이유가 김밥 때문이었단다. 옆구리 터진 것들은 가족들 먹으라 하고 말짱한 것만 담아왔다. 간이 딱 맞아 맛있다고 먹어보란다. 강언이 하나 입에 넣더니 간이 누구 입에 딱 맞냐니까 자기 입이라며 웃었다. 나는 전날 밤에 아내가 담은 김치를 가져갔다. 모두 맛있다고 한마디씩 했다. 그런 일이 처음이라 친구들이 김치통을 엄지척으로 둘러싼 인증샷을 찍었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외국 젊은 사내들 몇 명이 상반신을 벗고 지나갔다. 은미만 눈 호강했다. 다시 밥 한 숟갈 뜨려는데 사내 숫자만큼의 계집애들이 상반신을 딱 가릴 것만 가리고 시원하게 벗고 올라왔다. 이번에는 우리 남자들이 고마운 마음으로 경건하게 바라보았다. 얼마나 눈 빠지게 쳐다봤으면 탑이 아니고 브래지어라는 걸 알아냈다. 그 정성으로 공부했으면.........
울산 가까이 올 때마다 같이 산행했던 종덕에게서 전화가 왔다. 창수와 은미가 전화해도 받지 않았었다. 오전 근무 마치고 점심시간이라며 같이 못 와서 미안하다며 긴 통화를 했다. 창수와 한참 하더니 잠시 후 은미한테 다시 전화했다. 바꿔 달라면 될 텐데 무슨 얘기를 하려고 따로 했을까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주고받는 얘기 다 들렸다. 그 말이 그 말인데 오고 싶은 만큼 길게 끌었다.
잠시 자리 깔고 누웠다.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었다. 잣나무에는 잣송이가 자그마하게 맺혀있었다. 가을에 그 잣을 다람쥐가 따먹을까, 까마귀가 먹을까 궁금했다.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는 일, 송이채 떨어져 지나가는 등산객이 주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창수가 종호와 석남사 상가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하산길을 재촉했다. 계자도 같이 나온다고 했다. 종호와 계자는 참 친한 것 같다. 실과 바늘이라고 해야 할까 따로 본 적이 없다. 먼 타향에서 초등 동기끼리 의지하며 정을 나누는 게 참 보기가 좋았다. 아무리 재촉해도 하산길 6 Km가 엎어져 코 닿는 데는 아니었다. 종호가 사돈과 식사 약속이 있어 오래 기다리지 못한다고 했다. 창수는 빨리 따라오지 못하는 우리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더니 혼자서 보이지 않을 만큼 먼저 가버렸다.
내려오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지껄였는데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심각하기도 했고 포복절도할 만큼 우습기도 했지만, 우리의 뇌의 능력은 거기까지였다. 길은 끝이 있듯 결국 창수가 기다리는 사슴농장까지 내려왔다. 창수는 누가 잠시 태워달라는 걸 우리 때문에 가지 않았다면서 의리의 사나이라도 되는 것처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 사람 남자였제하고 물으니 힘없이 그렇다고 했다. 우리 대장은 여자였더라도 가지 않을 사람이란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석남사 식당 번호 '가운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번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그들은 친구도 보고 뭐든 먹여서 보내고 싶어 했다. 점심 먹고 달려 내려왔더니 아직 배가 꺼지지 않아 많이 먹지 못했다. 묵, 파전에 동동주를 시켰다. 묵은 30도가 넘는 날씨에 지쳐있었다. 탱글과 빤짝거림이 상실되어 있었다. 배가 고프면 우짜든지 먹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해물이 얹힌 파전은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동동주는 내가 시킨 죄로 혼자 다 마신 듯 했다. 등산길에 맥주, 식사 때 소주와 고량주 가운데집에서 동동주 너무 여러 종류의 술을 마셨다. 취하기보다는 기분이 최고였다. 오래 있지 못하고 길을 나섰다. 잠시라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종호와 계자였다. 고맙다. 꼭 갚으마.
돌아오는 차에 올라 두 번 눈을 떴다. 청도 휴게소에서 한 번, 반월당에서 한 번이었다. 산행의 노곤함에 동동주 한 병이 더해진 상태에 승차감 좋은 제네시스에 오르자 순식간에 꿈나라로 가버렸다. 운전한 창수가 수고가 많았고 같이 동행한 친구가 고맙다. 다음 달에는 더 많은 친구와 함께하길 기대하며 산행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