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오후부터 가졌던 교회 수련회는 은혜 가운데 잘 마쳤습니다. 3년만에 갖는 수련회인데, 코로나 사태로 인한 여러 가지 변수가 있었지만, 우리 교회에서 제일 나이 어린 수호와 예준이까지 참여하여, 모처럼 은혜로운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번 수련회 주제는 “또 하나의 금촛대”였습니다. 소아시아 지방 일곱 교회에 보내신 사도 요한의 편지를 통해서, 오늘 서울에 세워진 우리 늘푸른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수련회 진행을 위하여 수고하신 모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가평 수련회 장소까지, 가깝지 않은 그 길을 오가며 최선으로 수련회에 참여하신 교우 여러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은혜로운 수련회를 위하여 함께 기도해 주신 교우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이렇게 한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며, 작은 힘이지만 힘써 주님의 뜻을 구하고, 온 교우들이 하나되어 서로를 섬기는 우리 교회는 참 좋은 교회임을 새삼 고백하는 수련회였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이스라엘 유다 왕국이 멸망하기 이전, 나라가 주변 나라들의 공격으로 위태롭게 흔들리던 시절에, 예루살렘에 살았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는 총 6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꽤 많은 분량의 예언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세 편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1장부터 39장까지는 ‘제1 이사야’, 혹은 ‘예루살렘의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이 제1이사야는 주전 8세기, 유다 왕국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만 믿으며 그 계명의 말씀대로 살아갈 것을 일깨웠던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40장부터 55장까지는 그 시대적 배경이, 유다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와 살아가던 기원전 6세기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학자들은 그래서 이 부분을 제2이사야라고 부릅니다. 포로기에 활동한 제2이사야는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온 유다의 백성들에게, 이제 곧 페르시아의 황제 고레스가 바빌론을 무너뜨리고, 유다 백성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게 될 것을 예언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56장부터 66장까지는, 제3이사야라고 부르는데, 그 시대적 배경은 포로지에서 돌아온 이후의 예루살렘입니다. 해방의 감격을 가지고 포로지에서 돌아온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사야서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시대적 배경을 가진 예언의 말씀들이 묶여서 한 권의 책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본래 주전 8세기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던 인물인데, 이사야의 신앙과 정신을 이어받은 후대의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그들을 일러 ‘이사야 학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던 시대 상황 가운데 예언을 선포했고, 그들을 제2이사야, 제3이사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제3이사야가, 바빌론 포로지에서 돌아온 이후에 선포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포로지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가 과연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인지, 새로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회복에 관하여 제3이상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선포한 것입니다.
사실 포로지에서 돌아올 때는 감격은 너무나 컸습니다. 그 감격을 시편 126편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정말 뜻밖에 찾아온 해방을 맞이하여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올 때, 유다 백성들은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입술에는 찬양이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포로지에서 제2이사야는 해방과 함께 이루어질 새로운 이스라엘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사 51: 3, 4). 시온의 황폐한 사막과 광야를 에덴과 같은 여호와의 동산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고, 그 가운데 백성들은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기쁨으로 노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제2이사야는 말씀하였습니다. 포로로 끌려온 이방 땅에서 이제 곧 회복될 예루살렘에 대하여 제2이사야가 선포한 말씀은 참으로 아름답고 찬란하였습니다.
그러나 포로지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마주한 현실은 사뭇 달랐습니다. 포로지에서 기쁨과 감격에 겨워 돌아왔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나 혹독한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포로지에서 선포되었던 그 희망에 찬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포로지에서 돌아온 직후의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학개의 예언서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학개는 특별히 포로지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독려했던 예언자입니다. 제사와 기도의 집인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로에서 돌아온 지 십 수년이 지나도록 성전 재건은 기초만 놓여진 채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성전 재건에 관해서는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아직 성전을 건축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의 방해도 있었고, 가뭄으로 인하여 농사 수확도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은 가족들과 함께 살아갈 자신들의 집이었습니다. 좋은 집을 짓고 꾸미기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개는 1장 6절에 보면,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난 자루에 넣음이 되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많이 뿌리고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해 애를 쓰는데 수확이 적었습니다.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마셔도 시원하지 않고 입어도 따듯하지 않고, 임금을 받아 돈을 모으려 하였지만 전대가 구멍이 난 듯 전대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삶이 피곤하고 만족이 없고 기쁨이 없는지 아느냐’고 학개는 백성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학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황폐하게 버려두고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에 빨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의 집을 세우는데 무관심한 채, 각자 자기 집만 크게 짓고 꾸미는 일에만 몰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하나님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가뭄이 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회복은 먼저 성전을 재건하는 것으로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회복, 영적인 회복이 우선이라는 의미입니다. 경제적인 회복도 중요합니다. 집을 마련하고 삶의 안정을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고, 힘써 농지를 개간하고 열심히 씨를 뿌리고 가꾸는 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회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기초 위에서 자신의 삶과 사회를 새롭게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58장 중에서 우리는 중간의 일부분만 읽었습니다. 59장에서 이사야가 말씀하는 주제는 금식입니다. 3절에 보면, 백성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주님께서 보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알아주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행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금식은 왜 하는 것입니까?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포로지에서 돌아왔을 때 금식하던 모습이 느헤미야 9장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서 금식하면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먼지를 뒤집어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든 이방 사람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리에 선 채로 자신들의 허물과 조상의 죄를 자백하였고, 모두들 제자리에서 일어나서, 낮의 사분의 일은 주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고, 또 낮의 사분의 일은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주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것이 금식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와 성결을 위하여 금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가 식욕인데, 식욕을 스스로 억제하고, 오직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삶을 회개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금식의 목적일 뿐, 다른 어떤 인간적인 목적이나 욕망이 개입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금식의 본래적인 의미와 목적에서 빗나가 버렸습니다.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금식했는데 하나님은 보시지도 않고 알아주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금식을 하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제시한 요구를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뭣하러 금식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빗나간 그들의 신앙을 지적합니다. 철저한 회개를 통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억누르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금식의 의미인데, 4절부터 보면,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함으로 너희의 목소리를 하늘 아버지께 전달하며 진정한 금식을 하고자 한다면 이런 식의 금식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고 앉아 있다고 해서 그것이 금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말씀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진정 자신의 욕망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회복하는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금식을 행할 때 주어지는 약속이 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행하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탐욕과 정욕을 다 덜어내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약속이 이것입니다. 캄캄한 영혼의 밤을 지나 새벽 햇살과도 같은 은혜의 빛, 새로운 희망과 구원의 빛이 비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네 인생은 험한 길을 걸어가다 보니 수많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이웃들로부터, 심지어 가족들이나 교회로부터까지,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은 상처를 입고, 그 아물지 않은 상처를 그대로 안고서 살아갑니다. 그 상처가 어떻게 치유됩니까? 결국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서부터 치유는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욕망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회개하고, 오직 주님의 뜻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때, 상처는 속히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이 나를 앞 뒤에서 지키고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금식’으로 상징되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의 회복은 사회적인 관계로 이어집니다. 9절 하반절부터 보면,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제하여 버릴 것이 있습니다.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입니다. 나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지워주고 강요하였던 멍에, 그리고 남을 조롱하고 경멸하던 그 손가락질, 그리고 허망한 말을 제하라는 것입니다. 허망하다는 말은 없다는 뜻입니다. 헛되고, 무가치하다는 의미입니다. 더 나가서 남을 속이는 것 같은 온갖 사악한 행위를 일컫는 말이 허망하다는 뜻입니다. 이웃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제하여 버릴 것들입니다.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고, 이제는 적극적으로 “주린 자와 괴로워하는 자를 향하여 그 마음이 움직이고, 그를 만족하게 해 주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주시는 약속입니다. 10절 하반절부터, “그리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정말 아름다운 축복의 그림이 펼쳐져 있습니다. 내 영혼을 어둡게 하던 그 모든 상처와 인간적인 욕망이 치유받고, 이제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과 희망의 빛이 내 길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본문을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가 나를 항상 인도하면 어떻게 됩니까? “메마른 곳에서도 내 영혼을 만족하게 하여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뼈를 견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메마른 곳에 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을 만족하게 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초막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인도하시고, 내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며, 메마른 곳에서도 천국을 맛보며 살아가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물 댄 동산 같다”는 말은 팔레스틴과 같이 광야와 사막이 이어지는 건조한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나타낼 때 흔히 쓰는 표현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봄 가뭄이 심하여 논바닥이 갈라질 때 가 종종 있습니다. 이 때 저수지나 다른 수원으로부터 물을 끌어다 댈 때, 그 농부의 심정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논과 함께 타들어 가던 그 심정에 새로운 희망과 생기가 피어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집중 호우로 인하여 여러 지역의 주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 또 그 반면에 지구상 여러 지역에서는 최악의 가뭄으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들이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과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물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이 수가 성 우물 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가 정오쯤이었습니다. 햇살이 가장 뜨거운 한 낮입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는데,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그 여인은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메마른 대지와 같지 않습니까? 마셔도 시원하지 않고 먹어도 만족함이 없고, 지갑을 채우려 애를 써도 늘 비어있고, 영혼에 만족함이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정한 금식을 주님은 요구하십니다. 먼저 인간적인 탐욕, 육신의 정욕을 다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고, 이제는 주린 자로 인하여 마음이 동이고, 괴로워하는 자를 향하여 그로 하여금 만족하게 해 주는 삶을 힘써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인생의 어두움 가운데 구원의 빛이 드리우고, 이 메마른 땅에서 물댄 동산 같고, 시원한 생수가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과 같은, 축복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