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휘는 하내(河內) 사람이다. 12세에 도안에게 투신하여 출가하였다. 도안이 그의 고상한 풍채를 가상히 생각하였다. 우선 책을 읽게 하니, 2ㆍ3년 안에 배움이 경전과 역사를 겸하였다. 열여섯 살에 비로소 머리 깎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오로지 불교의 논리에 힘썼다. 그윽이 엉킨 진리를 거울에 비추어보듯 헤아려서, 30세가 되기 전에 곧 강설할 수 있었다. 뜻하는 일이 높고 깨끗하였다. 또한 공손함과 양보함으로써 존중을 받았다.
그 후 도안을 따라 양양에 있었다. 부비(符丕)가 경내를 침범하였다. 곧 동쪽 형주로 내려가 상명사(上明寺)에 머물렀다. 법륜을 한 번 굴릴 때마다 도인과 속인들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늘 근본이 있음을 뒤돌아보았다. 마침내 도안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잊지 않고 예배를 드렸다. 이에 강릉의 선비와 여인들이 모두 서쪽을 향하여 인수(印手)보살7)에게 공경을 드렸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법사의 도에 의한 교화를 그대 스승[和上:道安]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담휘가 말하였다.
“스승님의 내부 행실이야 그 깊고 얕음을 쉽게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외부 인연에 미친 바는 대부분 모두가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있는 한 방울의 물로 어찌 강이나 바다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진(晋)의 태원(太元) 20년(395)에 세상을 마쳤다. 죽음을 맞이한 날에도 몸에 별다른 병이 없었다. 당(堂)에 올라가 대중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어 고별을 하고 식사를 끝냈다. 그런 뒤 방으로 돌아와, 오른편 겨드랑이를 대고 모로 누워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는 73세이다. 『입본론(立本論)』 아홉 권과 「육식지귀(六識旨歸)」 12수를 지었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11) 석도립(釋道立)
도립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어려서 출가하여 도안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방광반야경』에 뛰어났다. 또한 노자와 장자의 삼현학8)이 불교의 이론과 약간 상응한다 하여, 그것의 뜻을 자못 귀속시켰다. 성품이 맑고 텅 비어 세상의 일에 나서지 않았다.
그 후 도안을 따라 관중(關中)으로 들어가 복주산(覆舟山:當陽東南玉泉寺의 뒷산)에 은거하였다. 홀로 바위굴에 거처하며 공양을 받지 않았다. 늘 깊은 생각에 잠겨 선정에 들어가면, 곧 7일 동안을 일어서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일이 자주 있었다.
그 후 초여름에 담휘는 문득 산에서 내려왔다. 대중 승려들을 모아놓고 스스로 『대품경(大品經)』을 강의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였다.
“나는 다만 가을까지만 살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품던 생각을 거칠게나마 끝마치고 싶었을 뿐입니다.”
자자일(自恣日:陰 7월 16일) 뒤 며칠이 지나서, 과연 병 없이 세상을 마쳤다. 당시 사람들은 천명을 아신 분이라고 일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