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권은 모든 대원들이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대 이기자 수색중대 특공대원이라는 작자들이 군법을 무시하고 중대장을 능욕한 대가다. 오늘 너희들은 죽고 나는 산다."
전태권의 발차기는 거침없었다.
원상포격의 위태로운 자세에서 간신히 지탱하던 몸은 중대장의 발길질에 군장의 하중을 못이기고 무참히 무너져내린다.
괴성을 지르는 전태권의 이빨사이로 지독한 악취섞인 침이 튀며 빗물과 함께 뭍힌다.
행보관은 홀로 단상위에서 비를 피해 처참한 광경을 구경하며 흥취에 젖어있다.
정오에 쏟아지는 빗줄기는 늦어질 수록 눈발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2열 종대로 연대 위병소를 벗어나 독립부대인 수색중대로 복귀하는 길이다.
수색중대 2소대에서 온 교대 자가 현재 중대에서 난리가 나고 있다고했다.
연대내 별도로 불상을 모신 암자를 지나쳐 연대 뒷문을 벗어나 언덕길로 한참을 걸었다.
K-1소총의 총기청소를 염려하여 미리 준비했던 판촉의 입고 비를 맞으며 이동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며 눈발로 변하고 있었다.
강원도 화천의 화악산 줄기를 덮은 검은 장막은 하늘도 가렸다.
나는 각오의 심정으로 두 상병과 함께 부대로 복귀했다.
온몸이 물에 젖어 미끌미끌한 몸들이 뒤엉켜 고작 5평도 채 안되는 재래식 화장실 대변칸에서 사십여명의 부대원들이 낑낑대며 버티고 있었다. 화장실 밖에서는 전태권과 행보관이 혀를 끌끌 차며 우산을 들고 서있었다.
삼십여분이 지나자 전태권이 행보관에게 말했다.
"그만합시다. 행보관님께서 해산시키세요. 전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전태권은 지친 표정으로 전 부대원들이 감금된 재래식 화장실을 등지며 중대장실이 있는 행정반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만, 해산!"
행보관의 얇고 길게 째지는 음성이 울려퍼졌다.
좁디좁은 단 한 칸의 화장실 문이 덜컥하며 열렸다.
제일 먼저 튀어나온 이태식의 두 눈에 살기가 어린 채로 화장실 복도 바닥에서 미끄러졌다.
그 뒤로 하나 둘 쏟아져 나오는 대원들은 마치 미끄럼을 타듯 동료들 위, 그위로 쓸려 내려갔다.
화장실로 들어가기전 미리 내려 놨던 군장들은 화장실 건물 옆 언덕위로 정렬된 채 온통 비에 젖어 있었다.
대원들은 기운이 빠질대로 빠진 상태로 하나 둘 일어서며 재래식 화장실 건물을 빠져나온 뒤 자신의 군장과 총기를 찾았다.
중대 위병소를 지난 나는 위병조장의 우려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저 미친 싸이코가 사십여명의 모든 중대원들을 화장실 한칸 안에 쑤셔넣었답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나보다 후임인 육병장은 나와 같이 그날의 참변을 피할 수 있었던 행운아중에 하나였다.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소대로 복귀한 대원들은 휴식과 정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복귀 보고를 위해 행정반을 들려 또한 명의 행운아인 일직사관 박운영 중사를 만났다.
"얌마 중대장이 나오기전에 빨리 들어가."
나는 '이기자'의 경례구호와 함께 숨을 죽이듯 두 상병과 함께 1소대로 돌아갔다.
그날의 일은 중대원 어느누구도 잊혀지지 않는 2008년의 눈비오는 수색중대 만의 3.1절로 기억되었다.
누군가를 상대로 싸움을 하는 것 자체에서 승패는 반드시 갈리게 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상 그 승패에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싸움의 대상들은 반드시 치명상을 입고 평생을 고통속에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정면으로 화를 돋구어 싸움을 일으켜 승패를 갈구한다면 그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모든 게임에서 패자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싸움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승자의 길인 것이다.
싸이코 전태권의 어떠한 음모에도 나는 미꾸라지처럼 비껴갈 수 있었다. 그의 기억속에 나는 그가 이길 수 없는 한 수 위에 있었다.
게임의 법칙에서 이기는 것은 마지막 순간 게임의 법칙을 뒤집는 것이다.
혹은 게임의 법칙을 새롭게 정하면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법칙을 정하지만 그 누군가에게 모든 전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나의 입장에서 세상의 중심인 나는 모든 상황을 뒤엎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거나 그러했던 모든 상황에서 나는 항상 지혜든 운명이든 어떠한 방식으로 비껴갈 수 있었다.
지금 있는 이자리에서 비록 실업자로서 카페에 앉아 있는 나는 사실 직업이 없는 실업자이기도 하며 내 거대한 인생을 경영하는 실업인이기도하다. 따지고 들면 한도 끝도 없다. 이글을 읽는 모든 이들 역시 같은 실업인이다.
자신을 세상이 만들어낸 게임의 개념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3.1 환란 이후 어느 날 종교행사차로 암자에서 나는 나의 지기 연평원을 만났다.
그는 내가 입대 1년 뒤 우연찮게도 같은 사단에 같은 연대로 입대했다.
그리고 39평생 나의 파란만장한 인생속에서 다른 친구는 모두 떠나갔지만 오직 그만이 남아서 가끔 차를 마시며 옛 추억을 되새기고 한다.
아마도 친구로서 평생을 함께할 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며 암자에서 나는 그에게 내가 수색중대에 지원하게된 동기를 이야기했다.
사실 별다른 것은 없었다. 수색중대로 가면 편할 것이라는 나의 신병교육대 동기의 설득에 넘어간 것이었다.
어느 대대로 발령나느냐 하는 길로에 서서 신병들과 대기하던 차에 수색중대 박운영 중사의 차출 행차가 있었고, 나의 동기와의 약속대로 박운영 앞에서 황비홍을 연기한 이연결의 물레방아차기를 손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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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12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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