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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말콤 딕키(1997년 6월 6일1993년 11월 12일)는 미국의 프로 야구 포수 겸 감독이었다.
그는 뉴욕 양키즈의 메이저리그에서 19시즌 동안 뛰었다. 딕키는 선수생활에서 은퇴한 후 양키스를 운영했다.
딕키는 1928년부터 1943년까지 양키스에서 뛰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국 해군에서 복무한 후,
딕키는 1946년 선수와 감독으로 양키스로 돌아왔다. 그는 1946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했지만
1949년 코치로 돌아와 요기 베라에게 더 좋은 포획을 가르쳤다.
딕키의 선수 생활 동안 양키스는 8번의 우승을 하면서 9번의 월드시리즈에 갔다. 그는 11개의 올스타 게임에 지명되었다.
감독이자 감독으로서 양키스는 또 다른 6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딕키는 1954년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선출되었다
[초기]
딕키는 1907년 6월 6일 루이지애나 주 배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존과 로라 딕키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명의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디키스는 알칸사스주 켄세트로 이동했고,
존 디키는 미주리 태평양 철도 회사의 브레이크맨으로 일했다.
존 디키는 테네시 주 멤피스에 기반을 둔 세미 프로팀에서 야구를 했었다.
빌의 형인 구스는 이스트 아칸소 세미프로 리그에서 2루수였고, 동생인 조지는 포수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딕키는 아칸소주 서시에 있는 서치 고등학교에 다녔다. 디키는 서시에서 투수 겸 2루수로 그 학교의 야구팀에서 뛰었다.
그는 리틀록 대학에 입학하여 미국 축구팀의 가드와 야구팀의 투수를 맡았다.디키는 포수로
아칸소 주 핫스프링스에 있는 세미 프로팀으로 대신해 팀의 매니저에게 공을 던지는 그의 팔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마이너리그 야구팀 리틀록 트래블러스의 매니저인 레나 블랙번은 핫스프링스 팀에서
외야수를 스카우트하면서 딕키를 주목했다. 블랙번은 딕키와 계약을 맺고 팀을 위해 뛰었다.
[마이너리그 경력]
딕키는 1925년에 A급 남부의 리틀록 여행자들과 함께 18살에 프로에 데뷔했다.
리틀록은 아메리칸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계약했는데, 아메리칸리그는 리틀록, 클래스 C 웨스턴 협회의
머스코기 애슬레틱스, 클래스 D 코튼 스테이트 리그의 잭슨 세너스 간에 선수들을 보내는 것을 포함했다.
딕키는 1925년 리틀록에서 3경기에 출전했고 1926년 무스코기에 배정되어 61경기에 .283의 타율을 기록했다.
딕키는 리틀록으로 돌아왔고 시즌 말에 17경기에서 0.391의 타율을 기록했다.
딕키는 1927년 잭슨을 위해 101개의 게임에서 3개의 홈런으로 .297을 쳤다.
디키는 수비수로서 0.989의 수비율을 기록했고 84개의 어시스트를 받았지만 9개의 실수를 범했다.
[뉴욕 양키스]
잭슨은 1927년 시즌 후에 딕키를 포기했다.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트인 조니 니는
자신의 상사 에드 바로로우 양키스의 감독에게 양키스가 자신을 주장해야 한다고 전보를 쳤다.
양키스는 잭슨으로부터 12,500달러에 딕키를 구입했다. 그는 1928년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 독감에 시달렸지만,
디키는 양키스 감독 밀러 허긴스를 감동시켰다.그는 리틀록의 60경기에서 .300을 기록하며
AA 인터내셔널 리그의 버팔로 바이슨스로 승격했다.버팔로 경기에서 세 경기에 출전한 뒤,
딕키는 1928년 8월 15일 양키스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그는 8월 24일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의 조지 블래이홀더를 상대로 첫 안타를 기록했다.
딕키는 1929년 메이저리그에서 첫 풀타임 경기를 했다. 벵구가 어깨 부상을 거듭하고
딕키가 벵고와 조니 그래보스키를 제치고 양키스의 선발 포수로 발탁됐다.
신인시절 그는 타율 0.324에 10홈런, 65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95개의 어시스트와 13개의 더블 플레이로 모든 포수들을 이끌었다. 1930년에 딕키는 339를 기록했다.
1931년 디키는 3개의 실책만을 범했고 3할 2푼 7리의 타점을 기록했다.
그 해, 그는 The Sporting News에 의해 올스타 팀에 지명되었다.
비록 그의 공격적인 생산은 양키의 거물 베이브 루스에 의해 가려졌지만, 루게릭과 조 디마지오[7]는 1930년대 말에
포수가 세운 최고의 공격 시즌 중 일부를 기록했고, 1936년부터 1939년까지 4년 연속 20개 이상의 홈런을 쳤다.
그의 1936년 타율 0.362는 2009년 미네소타의 조 마우이어가 .365를 기록할 때까지
1997년 LA 다저스의 마이크 피아자가 공동 기록한 역대 최고의 단일 시즌 평균 타율이다.
1932년 그는 칼 레이놀즈가 홈 플레이트에서 충돌한 후 한 번의 펀치로 칼 레이놀즈의 턱을 부러뜨렸고,
30일간의 정학 처분을 받았고 벌금으로 1천 달러를 받았다.
그 해, 그는 3할 10의 홈런을 쳤고, 15개의 홈런과 84타점을 기록했다.
1932년 월드시리즈에서 볼넷 3개 4타점 2실점으로 7타수 16안타를 쳤다.
1936년 딕키는 3할 2푼 2리를 기록하며 루크 애플링(3.88개)과 얼 아베릴(3.78개)에 이어 AL에서 3위를 차지했다.
딕키는 1936년 그의 14,500달러에서 25,000달러의 급여를 받으려고 하는 것을 견지했다.
그는 17,500달러짜리 계약에 동의함으로써 보류 상태를 끝냈다.딕키는 1939년에 18,000달러를 벌었다.
딕키는 1940년에 20,500달러의 급여를 받는 계약을 맺었다.
1941년 시즌은 메이저리그 기록인 최소 100승을 거둔 13번째 해였다.
그는 또한 더블 플레이 기록을 세우고 0.994의 수비율로 AL 포수들을 이끌었다.
딕키는 1942년에 어깨 부상을 입었고, 한 시즌에 최소 100경기 이상을 잡는 그의 행진을 끝냈다.
딕키의 백업인 버디 로자르는 버팔로 경찰에 합류하기 위해 검사를 받고 아기를 갖으려는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허락 없이 팀을 떠났고 양키스의 조 맥카시 감독은 롤리 헴슬리에게 두 번째 현수 포수로
서명하여 로사를 세 번째 현 위치로 강등시켰다.그는 헴슬리가 추가되면서 경기 시간이 단축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1942년 월드 시리즈로 돌아왔지만 쇠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딕키는 1943년 월드시리즈에서 연속 홈런을 쳤다.[16] 시즌 후, 딕키는 미국야구기자협회 뉴욕지부에서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감독]
딕키는 1943년 시즌 이후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관리직 후보로 거론되었다.
딕키는 1944년 3월 15일 미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선택적인 서비스 시스템에 의해 군복무에 적합한 1A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하와이 해군 병원 지역에서 근무했다. 그는 1946년 1월 중위로 제대했다.
그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태평양에서의 오락 활동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1946년 양키스로 돌아온 딕키는 조 맥카시가 사임한 후 1946년 시즌 중반에 양키스의 선수 감독이 되었다.
양키스는 57-48로 딕키의 시계 아래서 꽤 잘했다. 하지만 주인 래리 맥파일은 딕키에게 시즌이 끝날 때까지
새로운 계약을 주기를 거부했다. 디키는 레임덕 감독의 가능성에 직면하기 보다는 9월 12일 사임했지만
선수 생활을 유지했다.그는 시즌 후 은퇴해 통산 202홈런, 1209타점, 0.313타율을 기록했다.
1947년에 딕키는 여행자들을 관리했다. 그 팀은 남부에서 51-103의 기록으로 끝마쳤다.
딕키는 1949년 요기 베라의 포지션 플레이를 돕기 위해 1루 코치와 포획 지도자로 양키스로 돌아왔다.
이미 훌륭한 타자가 된 베라는 훌륭한 수비 포수가 되었다. Dickey는 Berra가 자신의 유니폼 번호 8을 물려받으면서
1960년까지 33번을 입었다. 딕키는 나중에 엘스턴 하워드에게 베라가 외야로 이적했을 때 잡으라고 지시했다.
[영화 경력]
그는 1942년 여전히 현역 선수였지만, 게리 쿠퍼가 양키스 주장과 1루수 루게릭으로 출연했던 The Pride of Yankees 에
그 자신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영화 후반부에 게릭이 결국 목숨을 잃을 질병으로 쓰러졌을 때,
한 젊은 미국인은 라커룸에서 처음에는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해 라고 투덜거렸다.
대본에 따라 딕키는 그 어린 선수를 말도 못하고 라고 말했다.
딕키는 1949년 영화 스트래튼 스토리 에 그 자신처럼 등장했다. 이 영화에서 딕키는 지미 스튜어트의 역할에서
삼진이라고 불리는 것을 얻도록 대본이 쓰여졌다. 딕키는 나는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한 적이 없다 고 말하며 반대했다.
나는 항상 휘둘렀다.그리고 샘 우드 감독에게 그가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거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드는 딕키가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치라고 주장했다.
여러 차례 투구한 뒤 오늘 아침 야구 선수 생활 내내 내가 한 것보다 더 많이 삼진을 당했다.
[개인 생활]
1932년 10월 5일 디키는 뉴욕 잭슨 하이츠 성 마크 교회에서 뉴욕 쇼걸 바이올렛 아놀드와 결혼했다.
이 부부는 1935년에 태어난 로레인을 낳았다.
딕키는 훌륭한 메추라기 사냥꾼이었다.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은퇴의 일부를
아칸소 남서부의 밀우드 호숫가에 있는 야버러 랜딩 커뮤니티에서 보냈다. 그는 1993년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죽었다.
[레거시]
빌 딕키의 8번 번호는 1972년 뉴욕 양키스에 의해 은퇴되었다.
딕키는 뛰어난 타격과 투수들을 다루는 능력으로 유명했다.그는 끈질기게 경쟁하는 성격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딕키는 1954년에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1972년 양키스는 딕키와 베르라를 기리기 위해 8번을 은퇴했다.
양키스는 1988년 8월 22일 양키스타디움의 기념공원에서 그와 베라를 기리는 명패를 걸어 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베라가 전대 최고의 포수 로 여겨지는 초기 양키스 라고 지적했다.
딕키는 1999년 포수들 중에서 스포츠 뉴스 베스트 플레이어 명단에 57위로 쟈니 벤치(16위), 조시 깁슨(18위),
요기 베라(40), 로이 캄파넬라(50)에 이어 선정되었다.그 포수들처럼 딕키는 메이저리그 올케 대표팀 후보로 나섰지만
팬 투표에서 베라와 벤치를 두 포수로 선택했다.
2007년에 디키 스티븐스 공원은 아칸소 주 노스 리틀록에 문을 열었다.
그 야구장은 빌과 그의 형 조지 그리고 두 유명한 아칸소 사업가 잭슨과 비트 스티븐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팀]
뉴욕 양키스 선수로서 (1928–1943, 1946)
뉴욕 양키스 감독으로서 (1946)
[경력 하이라이트 및 수상]
11번의 올스타(1933, 1934, 1936–1943, 1946)
14번의 월드시리즈 챔피언(1928, 1932, 1936-1939, 1941, 1943, 1949-1953, 1956)
뉴욕 양키스 8번 은퇴
명예의 전당(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