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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쇼트프로그램 D-67. 캐나다 토론토.
음악 소리, 스케이트와 빙판의 마찰음이 토론토 크리켓-스케이팅 & 컬링 클럽 빙상장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따금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이 재미있는 농담을 하는지 데이비드와 김연아의 폭소가 터진다. 3년째 반복되는 이곳의 풍경이다.
평소와 한 가지 다른 건 빙상장 주위의 모습이다. 11대의 방송 카메라, 9대의 스틸 카메라가 김연아의 움직임을 숨죽여 쫓고 있다. 유리창 벽 너머 스케이팅 라운지에는 전 세계에서 온 기자들이 김연아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며 기사를 구상한다. 2009년 12월 18일, 김연아의 올림픽 미디어데이 풍경이다.
"미셸 콴의 현역 때 같아." 콴의 에이전트 솁 골드버그 씨가 감탄한다. 3월 LA 세계선수권에서 처음 만난 뒤 김연아 측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그는 김연아의 미디어데이를 '놓치지 말아야 할 행사'로 느꼈고, 시카고에서 당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기자들을 모은 적이 있었는데, 꼭 그 날의 느낌이군." 회한이 어린 얼굴이다. 꼬마로 만난 콴이 전설로 성장하고 세 번의 올림픽에서 좌절한 뒤 은퇴한 지금까지 곁을 지키고 있는 그다.
대한민국 스포츠사에서 전례가 없는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올림픽을 맞이하는 선수라곤 믿기 힘든 천진한 표정. 그녀가 항상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녀의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올림픽을 정말 '즐길' 준비가 된 것일까.
작전명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라'
올림픽이 열릴 2009-2010 시즌을 앞둔 오프시즌. 김연아와 코칭스태프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 직전까지 김연아가 이뤄낸 것이 워낙 엄청났기 때문이다. 2월 캐나다 밴쿠버에서 올림픽 전초전 격으로 열린 4대륙 선수권에서 자신의 종전 쇼트프로그램 세계기록을 갈아 치웠다. 3월 세계선수권에서는 쇼트프로그램 세계기록을 76점대로 훌쩍 높여놓은 데 이어, 여자 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합계 200점대를 넘어서며 우승을 차지했다. 세계선수권 '최초 우승자'를 낳은 국가로 대한민국이 기록됐다. 지난 1995년 세계선수권 여자 싱글 우승자 첸 루를 배출한 중국에 이어 14년 만이다. 몇 년 동안 '한국인 최초'라는 표현이 줄줄이 따라붙던 김연아의 성취에는, 이제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김연아의 2008-2009 시즌을 함께 했던 두 프로그램 '죽음의 무도'와 '세헤라자데' 역시 격찬을 받았다. 특히 '죽음의 무도'는 보는 이들 모두를 압도하는 김연아 특유의 카리스마를 멋지게 드러내며 시즌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평가받았다. 이 모든 호평은, 새 프로그램의 만들어 내야 하는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에게는 곧 엄청난 부담이었다.
"많이 힘들었어요. 사람들은 뭔가를 즐기고 나면 '이젠 뭘 더 보여줄 거야?'라고 요구하죠. 난 사람들이 지난 일을 다 잊어버렸으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했어요."
산드라 베직(Sandra Bezic)은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안무가 가운데 한 명이다. 1998년 브라이언 보이타노, 1992년 크리스티 야마구치, 1998년 타라 리핀스키 등이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할 때의 프로그램들이 모두 그녀의 손을 거쳤다. 오랜 세월 미국 NBC 방송의 해설가로도 활동하며 북미 피겨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 가운데 하나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페어 부문의 판정 스캔들은, 생방송 도중 강력하게 편파 판정임을 주장한 베직의 해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김연아와도 인연이 깊다. 2009년의 관능적인 갈라 프로그램 'Don't stop the music'이 바로 베직의 작품이다.
마침 2009년 6월부터 그녀는 캐나다 CBC 방송의 리얼리티 쇼 '배틀 오브 더 블레이즈(Battle of the Blades)'의 기획을 담당하고 있었다. 데이비드 윌슨 역시 제작진 가운데 한 명이었다. 두 사람은 김연아의 '올림픽 프로그램'에 대한 의견을 자연스럽게 교환했다.
"산드라가 007 시리즈 메들리를 제안했을 때, 나는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지만, 딱 맞는 버전의 연주를 찾을 수 있을 지가 고민이었어요. 그러다 프라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영화 음악 모음집을 만났고 '아, 이거다' 싶었어요. 연아가 쇼트프로그램에서 특히 좋아하는 강력한 파워를 느낄 수 있었거든요."
지구상에 존재하는 '007 음악'을 다 들었다는 윌슨의 노력 속에 쇼트프로그램 음악이 완성됐다. 안무 작업은 오히려 일사천리였다고 한다. 멜로디의 이미지들을 김연아가 표현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편인지 악당인지 알 수 없지만 아름다운, 때로는 선과 악을 넘나드는, 그러면서 제임스 본드와 로맨스를 즐기는 복잡한 캐릭터야말로 연아의 표현력을 드러내기에 안성맞춤이었죠."
"마지막 엔딩 동작이 문제였어요. 총 쏘는 동작을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거든요. '제임스 본드'하면 떠오르는 너무 전형적인 동작을 쓰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린 시절 TV에서 본 한 장면의 기억이 윌슨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70년대에 '폴리스 우먼(Police Woman)'이라는 TV 시리즈가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캐나다에서는 꽤 인기였죠. 앤지 디킨슨이 주인공 여경찰로 나왔는데, 항상 총을 쏘고 난 뒤 그 총으로 머리를 반대쪽으로 쓸어 올려요. 여성적이면서도 파워 있는 그 동작이 불현듯 떠올랐죠."
세계 피겨팬들의 가슴에 '설레임의 총알'을 박아 넣게 될 '본드 걸 김연아'의 마지막 포즈가 그렇게 탄생했다.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은, '캐릭터 연기' 말고 다른 걸 해 보고 싶다는 김연아의 요청이 반영됐다. 김연아는 2007-2008 시즌에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비련의 여주인공을, 2008-2009 시즌에는 '천일야화'의 매혹적인 공주를 연기한 바 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타인의 감정 대신 '나의 스케이팅'을 전면에 드러내고 싶다는 연아의 자신감 서린 욕망을 읽기란 어렵지 않았다. 너무 귀에 익고 쉬운 멜로디는 관객들이 스케이팅에 몰입하는 걸 도리어 방해할 터. 자연스럽게 현대음악에 초점이 맞춰졌고, 조지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가 선택됐다.
김연아의 여러 가지 장점을 드러내기 위해 곡의 상이한 부분들을 엮어 편집한 뒤 안무를 구상하던 데이비드에게 어느 날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음악은 강하고 다이나믹하면서도,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면이 섞여 있고, 또 갈라쇼에서 보이는 재미있는 면모도 들어 있지요. 안무를 짜는 동안 난 이 프로그램이 연아의 지난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어요. 쑥스러움 많은 어린 소녀에서 아름다운 월드스타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요."
"옛날에는 안무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하지만 데이비드와 작업을 하면서 '아, 나는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저런 아이디어가 나올까... 정말 타고나지 않으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프로그램 안무를 새로 할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에요."
'밴쿠버 올림픽은 나의 한풀이 무대가 아니다' - 브라이언 오서
새 프로그램들은 곧바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쇼트프로그램 '본드 걸'은 곧장 대중과 매스미디어의 눈길을 잡아 끌었다. 프리 프로그램은 심판들과 피겨 전문가들부터 감동시켰다. 그랑프리 1차 대회부터 세계 기록이 세워졌다.
브라이언 오서 코치는 기쁘면서도, 내심 '위기가 올 거라면, 제발 올림픽 전이기를!'이라고 되뇌었다.
"한 시즌에는 굴곡이 있게 마련이죠. 올림픽까지 계속 기량이 상승해 가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해요. 파리에서의 출발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보다 조금 떨어졌을 경우 어떻게 대처할 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13년 동안 세계 정상권을 지킨 현역 생활을 포함해, 40년 넘게 스케이트와 함께 해온 이의 직감이었을까. 난공불락이던 김연아의 연기가 흔들렸다. 그랑프리 5차 대회 프리스케이팅에서 세 번의 점프 실수를 범했다. 허리 부상에 시달렸던 2007년 세계선수권 프리스케이팅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점프 감각 난조와 애매한 판정이 겹치며 우승은 했지만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가슴 철렁한 고비였지만, 넘기고 나니 오서 코치는 도리어 홀가분한 표정이다.
"지난 84년과 88년, 올림픽 시즌 직전에 열린 캐나다 선수권은 나에게 거의 재앙이었어요. (필자 주 : '재앙'을 겪고도 우승에는 문제가 없었다. 오서 코치는 81년부터 88년까지 캐나다 선수권을 8연패했다) 내 주위 모든 이들이 모두 경악했지요. 하지만 그 최악의 연기 때문에 올림픽에서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었어요. 준비가 완벽했거든요. 연아의 5차 대회와 파이널은 나의 캐나다 선수권과 같은 역할을 할 겁니다."
더 본질적인 변화는 '전설적인 과거의 선수’에서 ‘떠오르는 실력 있는 코치'로 변신이다. 특히 올해는 연아 말고도 남자 싱글의 애덤 리폰, 주니어 여자 싱글의 크리스티나 가오까지 좋은 성적을 거두며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고 코치 생활은, 아이스쇼를 다니던 프로 시절 가슴 속에 잠시 묵혀두었던 현역 때의 투지와 경쟁심을 깨웠다. 그에게 2010년이, 1984년 혹은 1988년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올림픽의 해, 1월 1일이 오면 항상 연도를 쓰곤 했어요. 1984 혹은 1988... 그 순간 심장 박동이 한 번씩 건너뛰곤 했죠. '아, 이제 바로 그 순간이구나'. 올해도 그러겠지요."
오서 코치의 현역 시절 올림픽에 얽힌 이야기는 이미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84년 사라예보 대회와 홈팀 캐나다의 개막식 기수로 참가한 88년 캘거리 대회에서 모두 은메달에 그친 비운의 주인공. 그래서 미디어데이에 모인 외신의 질문이 오서에게 집중된다. 22년 만에 올림픽을 맞이하는 기분이 어떠냐고. 오서의 답은 한결 같다.
"이번 대회는 연아의 올림픽입니다. 연아가 올림픽을 느끼고 즐기기를 바랍니다. 연아는 그럴 자격이 있는 선수죠. 나는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미 두 번의 기회를 가졌잖아요."
김연아 혹은 피겨의 '현재와 미래'
2004년, 국제빙상연맹은 새로운 채점방식을 도입했다. 동계올림픽 사상 최악의 스캔들 가운데 하나였던 2002년 솔트레이크 대회 때의 판정 파문에 대한 대응이었다. 핵심은 객관성의 강화였다. 예전의 뭉뚱그려 '6.0' 만점으로 표현되던 방식에서 탈피해, 개별 기술과 예술적 요소들에 대해 일일이 점수를 매김으로써 심판들의 주관적 판단 혹은 의도적 오심을 막아보자는 취지였다. 많은 수정과 보완을 거쳐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이 새 채점방식에는 다양한 비판이 쏟아졌다. 복잡해서 관중들이 한 눈에 알아보기 힘들다, 개별 심판들의 점수를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익명의 가면'을 제공한다, 선수들을 점수 따기 경쟁에만 몰입하게 해 피겨의 예술성을 죽인다, 모든 프로그램들이 비슷비슷해 보여서 개성이 없다... 그리고 이 비판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의 근거들이 있다.
하지만 이 채점방식의 긍정적인 효과로 확실한 것은,
1. 피겨 스케이팅의 평준화에 기여했고,
2. 특정 기술에만 의존하지 않고 '골고루 잘하는 선수'가 유리해졌다는 점이다.
2004년 이후 세계선수권 여자 싱글의 우승자는 해마다 바뀌었다. 물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선수 미셸 콴과 이리나 슬루츠카야 이후 세대교체가 일어난 시기였기에 벌어진 현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채점방식 역시 큰 역할을 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높아진 판정의 객관성 때문에, 선수의 명성과 국적이 점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던 과거의 방식에 비해 특정 국가 출신 유명 선수의 연속 우승이 힘들게 된 측면이 있는 것이다. 김연아의 2009년 세계선수권 첫 우승 역시 예전의 채점제 하에서는 불가능했을 거란 게 일반적인 평가다.
'올라운드 스케이터'가 각광받는 것 역시 새 채점제 하에서 당연한 현상이다. 모든 기술 요소들에서 차곡차곡 점수를 쌓아야 하기 때문에, 특정 기술에 오랜 시간을 쓴다든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가령 미셸 콴이 보는 이들에게 인상을 남기기 위해 본인의 트레이드마크인 스파이럴 시퀀스를 좀 더 오래 보여주는 식의 전략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여러 기술들을 골고루 구사하도록 요구하는 쇼트와 프리의 규칙에 따라, 모든 기술을 능숙하게 소화해야만 고득점과 우승이 가능해졌다.
김연아는 세계 피겨의 새로운 흐름이 요구하는 '바로 그 선수'였다. 피땀 흘려 몸에 익힌 기본기 덕분에, 남들은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든 고난도의 점프들을, 그것도 여러 종류를 실전에서 구사할 수 있다. 과거에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평도 있었지만, 필라테스 요가 등 꾸준한 유연성 강화 훈련으로 극복해 냈다. 스파이럴 시퀀스와 스핀 등 유연성이 절대적인 기술들을 최고 수준으로 소화해낸다. 탄탄한 스케이팅 기술이 필요한 스텝 시퀀스는 단연 여자 싱글 최고다. 타고난 음악적 감각과 자신감에 기반한 표현력이 어우러지면서 이제 예술성 역시 범접한 선수를 찾기 힘들게 됐다. 데이비드 윌슨은 해마다 창의력 넘치는 전혀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연아에게 선물한다. 새 채점제가 개성적인 피겨를 말살한다는 건 김연아에게 만큼은 해당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김연아 안에 '피겨 스케이팅의 현재와 미래'가 있다.
'피겨 여제'로 성장해 온 지난 몇 년 간, 김연아가 가장 향상된 부분은 무엇일까. 뭔가 특별한 비결 같은 걸 기대한 질문에, 김연아는 뜻밖의 답을 내놓는다.
"기본기인 것 같아요. 한국에 있을 때는 점프 연습에 너무 집중하기 때문에 정작 기본적인 스케이팅을 몸에 익히는 부분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얼음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려면 기본기를 유지하는 게 필수이고, 토론토에서 훈련하면서 그 부분이 가장 좋아진 것 같아요."
김연아의 탄탄한 기본기는 시즌마다 달라지는 채점 규정에 대한 적응력에서 잘 드러난다. 국제빙상연맹은 매 시즌을 앞두고 채점의 상세 가이드라인을 발표한다. 2007-2008 시즌을 앞두고는 점프 도약 시 축이 되는 발의 '잘못된 엣지 사용'을 철저하게 규제하겠다는 규정이 신설됐다. 이 때문에 일본의 간판 선수 아사다 마오와 안도 미키는 꽤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사다는 러츠, 안도는 플립 점프의 엣지 사용에 문제가 있었고, 안도는 그 시즌에 엣지 사용을 교정하다 점프 성공률이 급강하하며 그랑프리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다. 아사다는 그 시즌에 잘못된 엣지를 고수하다 막대한 점수 손해를 본 뒤 2008-2009 시즌을 앞두고 교정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올 시즌에는 아예 러츠 점프를 프로그램에서 빼버렸다. 원래 불안했던 트리플 살코에다 러츠까지 빠지며 점프 구성이 지나치게 단순해졌다. 득점 전략도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투수가 던질 수 있는 구질이 갑자기 줄어든 것과 같다.
문제가 생긴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우' 연속 점프는 아사다가 '김연아에게 가장 부러운 것'이라고 밝힐 정도로 김연아의 '필살기'였다. 하지만 김연아는 5년 넘게 자신의 간판 기술로 사용했던 이 점프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새로운 연속 점프를 만들었다. 앞 점프를 트리플 플립 대신 더 어려운 트리플 러츠로 바꾼 것이다.
피겨계에서는 김연아가 실전에 한 번도 구사한 적이 없던 고난도 기술을 올림픽 시즌에 처음 쓰겠다고 한 결정에 대해 놀랐다. 아사다와 안도처럼 점프 테크닉을 바꾸려다 어려움을 겪게 되는 건 아닐까라는 걱정도 많았다. 하지만 김연아는 흔들리지 않았다. 새 연속 점프를 구성하게 될 두 기술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별로 다른 게 없어요. 어차피 트리플 러츠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점프이고, 뒷 점프인 트리플 토우는 앞 점프만 깔끔하게 착지하면 언제든지 뛸 수 있거든요. 몸에 워낙 배어 있어서 별 부담 없이 연습하고 있어요."
새 시즌이 시작되고, 김연아는 옛 기술과 전혀 다르지 않은 완성도로 새 연속 점프를 해내고 있다. 완벽한 기본기로, 갑작스레 닥친 위기를 넘긴 것이다.
현재 김연아는 현역 선수들 가운데 '전설'의 반열로 올라설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선수다. 그리고 2010년, 그녀는 '전설'로 가는 마지막 시험대에 오른다.
피겨 스케이팅은 TV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스포츠다. 정확히 시간이 지켜지는 경기 스케줄, 중간 중간에 광고를 틀 수 있는 휴식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비주얼까지. 전통적으로 스포츠에 열광하는 남성 시청자들에다, 여성 시청자들까지 잡아 끄는 다양한 매력을 갖고 있다. 세계 최초로 컬러 TV 생중계가 이루어진 대회인 1968년 그레노블 동계올림픽은 피겨 스케이팅의 인기를 급상승시킨 계기가 됐다. 지금의 김연아처럼 아름다운 외모와, 라이벌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기량을 갖췄던 페기 플레밍이 예상대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TV로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된 플레밍의 연기는,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을 동계올림픽의 하이라이트로 올려놓았다.
올림픽은 TV 방송사들에게는 사세(社勢)가 걸린 비즈니스이기도 하다. 2003년 6월,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미국 NBC 방송과 2010년 동계올림픽과 2012년 하계올림픽에 대한 미국 내 독점 중계권 계약을 체결했다. 중계권료가 무려 20억 100만 달러. 우리 돈 2조 3천억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액수다. NBC 방송은 이 외에도 올림픽 브랜드 홍보에 3억 달러를 투자하고, 천만 달러를 들여 '올림픽 TV 아카이브'를 구축해줬다.
천문학적인 투자를 하는 이유는 천문학적인 이익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 올림픽 중계권사들은 올림픽을 최대한 재미있는 컨텐츠로 만들어 팔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유망한 선수를 미리 발굴해 스타로 만드는 건 필수 과제다. 시청자들이 스타의 경기를 보기 위해 TV를 틀 것이기 때문이다.
김연아의 미디어데이를 취재하러 온 NBC의 간판 모닝 토크쇼 '투데이쇼'의 피터 알렉산더 리포터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에서 올림픽은 동계든 하계든 엄청난 이벤트입니다. 하지만 4년에 한 번씩 TV에 등장하는 선수들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초면이지요. 모두 일반인들에게는 '무명'입니다. 지금 TV 저널리스트로서 우리는 '보세요. 여기 그들의 이야기가 있어요'라고 소개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밴쿠버 동계올림픽 여자 싱글의 최강의 우승후보 김연아는, 올림픽 중계권사들이 꼽은 예비 스타 후보 1순위이다.
"김연아는 단순히 최고의 선수일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인생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해요. 어머니의 엄격한 훈육 하에 성장해 자신감 넘치는 19살 여성으로 됐고, 지금 모두가 '퍼펙트 스케이터'라고 평가하지만 그동안 수많은 좌절을 겪어왔죠. 미국인들이 대단히 좋아하고 우러러볼 만할 이야기의 요소를 모두 갖추었어요."
모두가 그녀에게 열광할 준비를 마친 듯하다. 정작 김연아 본인은 올림픽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을까. 그녀의 출사표는 슬프게 들릴 정도로 초연하다.
"올림픽을 많이 봐오면서 예상 밖의 결과가 나오는 걸 많이 봐왔기 때문에 어쩌면 올림픽에서는 큰 이변이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그날의 주인공이 내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의 승자가 제가 아닐 지라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어요. 혹시 금메달이 아닐 지라도 실망하지 않을 준비를 하고 있어요."
"등에 가방을 메고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 돌덩어리를 하나씩 넣는 것 같아요. 아무도 빼내주지는 않아요." 김연아의 스케이팅 코치이자 88년 아이스댄스 동메달리스트 트레이시 윌슨의, 올림픽의 압박감에 대한 설명이다.
올림픽의 중압감을 이기기 위해, 김연아는 금메달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로 했다. 계속되는 편파판정의 의혹보다, 전일본 선수권을 통해 부활의 신호탄을 쏜 아사다 마오보다, 더 중요한 건 김연아의 마음이다. 기량 면에서 이미 그녀의 상대는 없다. 올림픽의 부담은 모든 선수에게 평등하다. 피겨 역사상 강한 정신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 80년대의 여제 카타리나 비트의 홈페이지 인사말처럼, "대부분의 선수는 육체적으로 준비되어 있다. 챔피언은 정신적으로 준비된 자다."
<김연아의 숨겨진 도우미들> 김연아의 성장에 어머니 박미희 씨와 브라이언 오서 코치,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의 역할은 이미 수많은 매체들이 다룬 바 있다. 여기서는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도우미'들을 소개해 본다.- 트레이시 윌슨(스케이팅 코치) 김연아의 훈련 장면을 지켜보면 브라이언 오서 코치만큼이나 김연아에게 많은 주문을 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스케이팅 코치를 맡고 있는 트레이시 윌슨이다. 기사 본문에서 잠깐 소개한 것처럼, 트레이시는 80년대를 풍미한 아이스댄스 선수 가운데 한 명이다. 파트너 롭 맥콜과 호흡을 맞춰 캐나다 선수권을 7회 연속 제패했고, 세계선수권에서 세 번, 올림픽에서 한 번 동메달을 차지했다. 아이스댄스는 점프 등 난이도 높은 '묘기'가 중요한 싱글 종목과 달리, 스케이팅의 기본 기술과 예술성이 중요시되는 종목이다. 정상급 아이스댄서로 활동한 트레이시는 기본기가 중요하다고 느끼는 김연아에게 안성맞춤의 코치였다. "저는 지금도 스케이팅이 너무나 재미있습니다. 스피드, 날 위의 완벽한 균형, 그리고 무릎의 힘과 스케이팅 에너지가 만드는 특별한 순간의 느낌을 후배들에게 전수해주고 싶어요. 연아는 내 경험을 받아들였어요. 연아는 싱글 선수지만 아이스댄서로서의 소질도 다 갖추고 있어요. 이런 미묘한 스케이팅의 뉘앙스를 다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죠." 트레이시는 캐나다 방송국들의 피겨 해설자로도 활동하며 제자 김연아를 시청자들에게 알리는 역할도 맡고 있다. 2008년 3월까지, 김연아가 출전하는 국제대회의 순위는 김연아의 몸상태가 결정했다. 부상이 없던 대회는 항상 김연아의 우승으로 끝났다. 하지만 부상이 끊이지 않았다. 2007년과 2008년 두 번의 세계선수권에서도 부상 때문에 눈물을 삼켰다. 허리와 고관절, 발목 등 부위도 다양했다. 국내 한 스포츠 클리닉에서 일하던 송재형 과장은 피겨 선수들의 몸 상태를 국내에서 가장 잘 아는 전문가로 꼽혔다. 2008-2009 시즌을 앞두고는 아예 토론토로 가서 '연아 팀'에 합류했다. 그 뒤로 '김연아의 부상' 소식은 자취를 감췄다. 훈련 전후로 송 과장에게 받는 물리치료가 결정적이었다는 평가다.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정보는 이 정도가 전부다.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절대로 인터뷰나 사진 촬영을 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심 때문이다. 선수보다 앞서지 않겠다는 자세로, 그는 지금도 김연아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 하주희(매니저) 지난 그랑프리 5차 대회에서 김연아가 의자에 앉아 연기 순서를 기다리는 장면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대기실에서 홀로 스케이트를 고쳐 신는 모습이 너무나 외로워 보인다는 댓글이 쏟아졌다. 사실 그 공간은 '대기실'이 아니라 경기 직전 선수들과 중계방송사들이 어우러져 있는 '백 스테이지'의 일부다. 진짜 대기실에서, 김연아는 더 외로웠다. 피겨 강국의 선수들이 팀 동료와 협회 임원 등 스태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긴장을 푸는 동안 김연아는 항상 혼자였다. 2008년부터 남자 매니저가 있었지만, 여자 대기실에 함께 있을 수는 없었다. 이번 시즌부터는 그 외로움이 조금 덜어졌다. 여성 매니저 하주희 씨가 합류했기 때문이다. 피겨 스케이팅을 전혀 모른 채로 매니지먼트사에 입사했지만, 지금은 김연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언니' 같은 존재다. 4개월째 아예 토론토에서 살며 김연아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고 있다. 김연아에 대한 인지도를 확실하게 끌어올린 올림픽 미디어데이 역시 하주희 씨의 작품이다. 능숙한 영어와 일본어로 해외 미디어 관계자들과 다져놓은 인연을 통해 전 세계에서 60명이 넘는 취재진을 끌어 모았다. 하주희 씨 역시 인터뷰는 올림픽 이후에야 기대할 수 있을 전망이다. |
2009-12-3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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