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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봉에서 바라본
영신봉
촛대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촛대봉에서 바라본
제석봉(좌)과 천왕봉(우)
촛대봉에서 바라본
영신봉
촛대봉에서 바라본
영신봉과
좌측 멀리 보이는 반야봉
[촛대봉~세석산장] 구간 산행로 주변 설경
[촛대봉~세석산장] 구간 산행로에서 바라본
세석산장과
그 뒤로 보이는 영신봉
[세석산장~목연폭포] 구간 산행로
한신 계곡 상류에 위치한
목연폭포
[하루 전인 4일
빙판 추락 참사의 현장이다.]
눈이 지워진 부분이
이성수가 2월4일
목연폭포 얼음판에서 사진 찍다가
미끄러져 내려온 10 미터의 흔적이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참사의 현장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하긴 다른 분은 저기로 안 갔을테니까.....]
[목연폭포~한신폭포] 구간 산행로 주위 풍경
[목연폭포~한신폭포] 구간 산행로 주위 풍경
[목연폭포~한신폭포] 구간 산행로 주위
한신계곡 풍경
[목연폭포~한신폭포] 구간 산행로 주위
한신계곡 풍경
[목연폭포~한신폭포] 구간
얼어붙은 산행로
[목연폭포~한신폭포] 구간 산행로 주위
한신계곡 풍경
[목연폭포~한신폭포] 구간 산행로 주위
한신계곡 풍경
[목연폭포~한신폭포] 구간 산행로 주위
한신계곡 풍경
지리산 이야기 - 스물 넷. ( 장터목 산장. 천왕샘. 산희샘. 기자신앙. )
지리산악회 회원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산희(山姬)샘. 명명한 주인공은 구례의 '지리산악회' 회원들. 여기에는 흥미롭고 신선한 사연이 담겨져 있다. '지리산이 개방된 직후 구례 산악회가 이곳을 답사. 산행 전 출산할 아이 이름을 미리 '산'이라 지었다. 아내가 아들을 낳으리라 믿고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 그러나, 하산 후에 태어난 그의 아기는 딸이었다. 딸 이름을 산(山)이라고 부를 수가 없게 된 안 씨. 생각 끝에 산 뒤에 계집 희(姬)자를 붙여 산희(山姬)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지리산 산악회 회원들 그때까지 이름없던 장터목샘을 산희샘으로 명명. ....................찾아가는 길.......................... 산희샘(장터목샘)은 중산리 쪽 20m 아래 위치 식수를 받으려고 줄서 기다리는 인파가 인상적. 이곳 동쪽 20분 거리에 옛 향적사가 있던 곳이다. 고려때 천왕봉 성모사에 향화를 올리던 곳. 이조 때 사라진 향적사는 그 옛 터만 남았다. ................................................. 예나 지금이나 장터목 산희샘은 갈증을 풀어주는 샘. 물물교환 등짐 남정네들에겐 '산 아가씨'같았던 존재. 백무동, 중산리, 세석 방향에서 온 인파로 항상 붐빈다. 그곳 산장 바로 아래 샘은 수량이 적어도 마르지 않는다. 요즘은 워낙 찾는 이가 많아 주말엔 길게 줄서야 한다. 산희샘은 등산객의 타는 갈증을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물. 아울러, 그 못지 않게 짜릿하고 감미로운 전설들이 있다. ....................전설 - 1............................................. 약초를 캐러가 돌아오지 않은 총각을 기다리다 찾아나선 처녀. 며칠 동안 산중을 헤메다가 갈증을 못 이겨 이곳에서 숨졌는데 총각이 뒤늦게 오자 그 혼이 눈물로 반기듯 솟았다는 전설의 샘. ................................................................... 산청군 일대의 지리산 자락은 2400 여종 약초 자생지. 약초꾼들이 캔 한약재 약초를 장터목에서 거래했던 듯. 약초꾼 총각을 찾아나선 처녀가 숨진 전설의 고향 산희샘. 산희샘은 예나 지금이나 물이 많은 곳. 백무동도 가깝고 중산리도 멀지 않은 곳. 옛 약초꾼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샘물 같다. .................전설 - 2........................ 마야부인이 멀리 떠난 남편 기다리며 거울 삼아 몸 단장했던 전설 속의 샘. 결국,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며 메꿔버린 샘이 장터목 인근에.. 산희샘. ....................................................... 마야부인은 신라 진평왕의 첫째 부인. 승만(僧滿)부인은 진평왕의 둘째 왕비. 성은 손씨(孫氏)이고 후사(後嗣)가 없다. 이 전설의 주인공은 승만부인인듯. 산희샘의 풍부한 물이 장터목 옛 장터의 원동력. 오늘날 산장까지 들어선 그 원동력은 바로 산희샘. '마야 부인과 반야의 비련'이 애닲은., 전설의 고향. 여성에게 거울이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아무리 속상해도 산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물. 샘물을 메꿔야 할 숨은 사연이 있는 듯 하다. 천왕봉에서 법계사 쪽으로.. 500m 아래 너덜지대 깔딱고개 위에 있는.,'천왕샘'. '천왕성모 위력을 상징하는 통신골'은 거대하지만, 그 거대한 계곡이 품은 천왕샘은 가뭄에 자주 마른다. 그에 비해 산희샘은 언제나 변함없이 샘물이 솟아난다. 천왕샘보다 훨씬 맑고 깨끗한 산희샘. 산희샘은 높은 곳에 있어 오르기 힘들지만 물 맛은 천왕샘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다. 반가운 님을 반기듯 펑펑 눈물처럼 쏟는 산희샘. <천왕성모의 천왕샘>과 <장터목의 산희샘> 둘 다 여성에 비유한 샘물이란 공통점이 있다. 천왕성모 영원한 젊음도 산아가씨보다 못했을 듯. '마야부인이 산희샘을 메꾼 이유는 무엇일까?' 남편을 기다리다가 거울인듯 들여다 보았다는 산희샘. 여성이 거울을 들여다 보기를 포기했다면 죽음을 의미. 마야부인은 남편을 향한 사랑이 삶의 전부였던 듯 싶다. 이조 사대부 안방마님이라도 첩은 얄미웠을듯. 40대 여인네의 질투심을 제라늄 꽃에 비유한다. 질투란 뜻의 '제라시'는 제라늄에서 유래. ........................제라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원예식물이고 중 하나. 영국에서는 19세기의 빅토리아 왕조시대에 크게 유행. 제라늄의 생태적 특성을 보면, 여성의 질투심과 흡사. 제라늄은 주변식물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옆으로 퍼진다. 제라늄은 꽃이 지더라도 해충도 접근 못할 향기를 풍긴다. 제라늄은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끊임없이 꽃들을 피워낸다. 다른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꼴을 시기하고 시샘하는 듯. 그 꽃이 40대 여인의 질투심 어린 정열같다 하여 제라늄이다. 화장실에 두면 방향제이고 베란다에 두면 해충을 쫓아버린다. 부엌에 두면 그 근처에 바퀴벌레 조차 얼씬거리지 못한다. 베란다에 두면 다른 꽃나무가 제대로 꽃을 피우기 어렵다. 제라늄의 독특한 꽃향기가 주변 벌 나비를 쫓아 버리는 탓. ................................................................... 하여, 제라늄 주변에는 다른 종류 식물이 서식하기 어렵다. 제라늄은 정성들여 가꿔주지 않으면, 곧 산만하게 흩어진다. 마치, 40 대 여인의 모습과 같은 특성을 갖고 있는 원예식물. 깨끗한 샘물을 펑펑 쏟아내는 젊음에 대한 마야부인의 시샘. 산희샘은 아직도 장터목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듯 눈물 쏟는다. 깊은 산속 산희샘은 마야부인과 더불어., 지리산 전설의 산실. 산희샘은 '산아가씨의 젊음을 상징하는 샘물이다. 사랑하는 총각을 반기며 혼이 눈물로 반겼다는 전설. 산희샘은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재에 위치한., 옹달샘. 장터목은 일기변화 극심하고 높아 오르기 힘든 곳. 찬바람 불듯 도도한 매력을 지닌 산세를 처녀에 비유. 그 샘물을 마시기가 쉽지 않다는 뜻으로도 풀이가 된다. 여성을 상징하는 샘은 대부분 높은 곳에 있다. 두 봉우리 사이의 깊숙한 계곡 안에 숨어있다. '처녀바위' 이름 붙은 곳은 오르기 까탈스럽다. 일명 '장터목샘'이라 불리우는., '산희 샘.' 지리산의 샘물은 저마다 색다른 전설을 품고있다. 그러나 공통점은 생명체의 젖줄이자 산실이라는 점. 산희샘을 산 아가씨에 비유한 전설 내용이 흥미롭다. 마야부인이 산희샘을 메꿔버린 행위는 궁형 옛날 중국에서 시행되던 5가지 형벌 중 하나. 중국의 5형은 사형, 궁형, 월형(발꿈치를 자르는 형벌) 의형(코를 베어내는 형벌)·경형(얼굴에 문신하는 형벌) 5 형벌 중 궁형은 사형에 버금가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남자는 거세하고, 여자는 질을 폐쇄시켜 자손생산 불능 도요새 궁형 치욕을 감래하고 <사기>를 저술했던 사마천 <사기>는 사명감을 목숨보다 중히 여긴 그가 쓴 중국역사. 사기는 상고시대 황제부터 진한 무제까지 약 2천 수백년 사. 사마천은 죽음 만큼 고통스러운 세월을 책을 쓰면서 보냈다. 기자신앙(祈子信仰). 나무가지 사이에 있는 여성의 성기같은 구멍. 구멍 주변이 도톰하게 솟아있으면 더욱 흡사. 그 구멍에 돌을 끼워넣는 우리나라의 옛 풍습 일명 '나무 시집 보내기' 과수원에서 주로 한다.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하는 행사로서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넣기. 일명 '대추나무 시집 보내기'라고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단옷날 <화수신재>에는 단옷날 오후 도끼로 가지치기 하는 풍습이 있다. 영동 지방은 대보름날 감나무, 영서 지방에서는 대추나무에, 경기 지방은 배나무와 호두나무 '접붙이기 또는 돌 끼우기' 풍습. 전남 에서는 나뭇가지에 옷을 입히고 '시집 보내기' 많은 수확을 기원하는 풍습으로 풍작을 바라는 풍습. 과일 나무 가랑이 사이에 돌 박아 끼우는 풍습. 물이 오른 과수나무 가랑이를 처녀 성기로 보고 여기 박아 넣는 돌은 우뚝 선 남성의 성기를 상징. 과수나무 가지가 낮게 양쪽으로 갈라져야 열매가 많이 열린다는 사실에 기인한 풍속 풍성한 생산과 결실을 기원하는 바램인듯. 정월 초사흘 날에 복숭아 ,대추, 살구, 밤나무 암 수가 따로 떨어져 늘 애만 태우는 은행나무 암나무에는 여성의 성기와 유사한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꼭 맞는 수나무 토막을 끼워 넣는다 '나무시집 보내기'는 기자신앙 풍습. 자연을 남녀 생식기에 비유한 민간신앙. 기자신앙에는 그러한 사례들이 참 많다. 우리나라 기자신앙은 어디서 유래된걸까? .................기자(箕子)조선......................... 기자(箕子)는 고조선 시대 기자조선 시조(BC 1122년). 기자는 고대중국 은(殷) 주(周) 교체기의 현인(賢人). 주나라 무왕에게 패망한 은나라 은나라 기자가 기자조선을 건국 범금 8조(犯禁八條)로 다스렸다. 무왕에 의해 조선왕에 봉해진 기자 단군조선을 교체했다고 전해져 온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즈음 기자를 민간신앙의 차원에서 받들었고 고려 시대에는 왕실에서 제사를 행했다. 또한 이조시대에는 기자를 성현으로 숭배하는 풍조가 유행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기자동래설은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기자동래설은 진(秦) 한(漢)대 이후라 현실성 희박. 1102년(고려 숙종 7) 건립되었다는 기자묘중수기적비 당시 기자동래성은 사대사상에 의해 조작된 듯 보인다. 기자조선은 동이족 계통인 기자족의 세운 나라. 기자족이 평양까지 와 고조선 변방에 세운 나라. 즉, 기자조선은 '은나라 소국' 기자국이 세운 국가. ............................................................ 기자신앙(祈子信仰)은 이조시대 19세기 말에 성행.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 이씨 조선은 고조선을 계승 고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에 이어 계승된 이씨조선 기자신앙(祈子信仰)은 기자(箕子)조선과 다른 한자. 기자신앙은 고대국가 이전 민간 신앙에서 유래된듯. 지금부터 한반도의 기자신앙 관습에 대해 알아보자. ............................................... ................................................ 우리나라 전통적인 토속 민간신앙은 참으로 다양하다. 결혼한지 여러해 된 부부가 아들을 기원하는 기자주술 부처·산신(山神)·삼신할미·서낭신 등에게 비는 행위. 바위 나무 우물 자연물에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행위. 민간에서는 수명이 긴 것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앞에서 정성드리면, 신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 '아들 많은 집안의 금줄을 훔치는 기자 주술.' 아들 많이 낳은 여인의 진 자리옷을 가져 와 입는 풍습. 아들 많이 낳은 여인의 생리대를 훔쳐서 몸에 차는 풍습. 고추를 주머니에 넣어 갖고 다니는 등 다양한 풍습이 있다. 이 밖에도 바위에 구멍을 내거나 문관석 돌부처 코를 갈아 마시기. 아들이 많은 집안 식칼을 훔쳐 작은 도끼를 만들어 속옷에 차기. 여자가 임신하면 해산할 때까지 삼가야 할 금기사항들과 먹거리 부녀자가 자식을 낳기 위해 벌리는 여러가지 형태의 신앙.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기록된 전통적인 토속적 민속신앙. 특히, 이조시대에는 아들 선호 유교사상으로 인해 발달했다. 신앙의 대상은 산과 개울가의 성기형태의 기암괴석이며 자식을 기원하는 부녀자 행위에 따라 5가지로 나눠진다. 1. 영험이 있다고 믿는 자연 석물에 치성을 드리는 유형 2. 동식물에서 축출한 약물 복용 또는 음식을 먹는 유형 3. 특정 물건을 몸에 지니거나 은밀한 곳에 숨겨두는 유형 4. 남녀 성기 모양 돌 나무에 잉태와 출산을 기원하는 유형 5. 생전에 남에게 후덕한 일을 많이 하여 공덕을 쌓는 유형. 기자신앙은 생명을 존중하고 남아선호사상에 대한 강한 애착 아들을 낳지 못한 불안과 초조감을 해소하려는 심리적인 믿음. '아들 선호 풍습은 언제 어디에서 비롯된걸까?'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아들을 기원하는 풍습이 많았다. 동부여 해부루왕이 산과 강에 제사 후 얻은 아들이 훗날 금와왕 신라 경덕왕은 아들 못 낳는 왕비 '삼모부인'를 쫓아내고 새 왕비 '만월부인'을 맞아 표훈대사를 불러 아들을 청한다. 고려 명종은 태자가 없자 사신을 보내 백마산에서 제사 고려의 의종 임금도 왕비와 함께 사찰에서 득남을 기원. 득남하면 금과 은으로 된 화영경 네권을 만들겠다고 발원 고려태조 왕건이 나주를 공략하고 부인 오씨를 만나 하루밤 오씨(장화황후)가 임신 할까봐 돗자리에 사정하니 부인이 흡입 아들을 낳아 그 이마에 돗자리 자욱이 난 아이가 고려 2 대 혜왕 ..................................................................... ..................................................................... 딸부자 집의 딸 이름은 섭섭이 끝순이 꼭지 후남이 순남이. 딸을 내리 다섯 낳고 다섯째 딸 이름을 꼭지라 짖고서 득남. 특히, 강릉 일대는 아들을 선호하는 사상이 뿌리깊은 곳이다. 신혼부부가 아들을 기원하며 방문한다는 강릉의 명소. 보물 제84호 신복사지 석불좌상, 보물 제87호 3층석탑.' 이 석불좌상 옆에는 여성 생식기를 상징하는 음석(陰石). 아들 낳으려는 여인들 탓에 돌부처 코가 남아나질 않는 곳. 음석이 있는 숲속에는 사람들이 하도 들락거려 반질반질하다. 주문진 소돌마을에는 남자 생식기를 닮은 버섯바위(아들바위) 여성을 상징하는 달에 얽힌 '전설의 고향' 경포호는 자궁 형태. 용꿈 꾼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은 오죽헌 몽룡실. 대관령 박물관에 있는 남근석은 기자신앙의 상징. '다산을 기원하는 성기에 관련된 풍속신앙들.' 남근바위 , 처녀바위, 미륵바위, 옥문바위는 고상한 이름. 공알바위, 암탑, 수탑, 자지방구, 소좆바위, 이름은 노골적. 마을 어귀에 세워놓은 남근석은 처녀를 낯 뜨겁게 할 모양새. 하지만, 동네총각이나 여인네들은 신주 모시듯. 정월에는 새끼를 감아 제를 올리며 풍년도 기원. 남근 숭배는 일본을 거쳐 동해안에 정착한 남방풍습 동해안 수신제 또는 해신제 풍습은 흥미롭다. 남근 나무조각이 동해 물결타고 출렁이는 모습. 파도가 거칠면 거친대로.. 파도가 잠잠하면 잠잠한대로 파도 따라 출렁거리며 껄떡댄다. . "철석 철석~" 살 섞는 듯한 파도소리 "끼룩 끼룩~" 갈매기떼들의 울음소리. 비릿한 바다 바람과 파도를 헤치고 수평선을 향해 떠가는 남근 나무조각. ......................동해안 수신(해신)제 풍습........................... 옛날에 시집 갈 나이가 된 어부의 딸이 사공인 청년과 약혼했다. 어느 날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간 청년은 풍랑을 만나 조난당한다. 처녀는 사랑하는 청년이 풍랑과 싸워 이기고 돌아오기만 기다린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 바다를 바라보며 청년이 무사하기만 염원한다. 사랑하는 청년이 돌아오지 않자 처녀는 바다에 몸을 던진다. 그 후에 마을에 좋지 않은 일만 생기고 물고기도 씨가 마른다. 마을 어부는 물론 젊음이들까지 조난을 겪고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 마을사람들은 시집도 못가고 죽은 처녀의 넋을 위로하여 사당을 짓고 향나무로 남근을 깍아 단오절마다 해신제를 올렸다. 그후부터 고기도 많이 잡히고 풍랑 조난사고도 많이 줄어들었다. ..................................................................................... 남근 숭배는 풍요와 안녕을 바라는 우리 민족의 풍습. 선사시대부터 가장 신성시 여겼던 남근 성기숭배 문화. 인류의 생산능력 상징물로서 잉태와 연관시켜., 신앙화. 그래서 큰 선돌이 있으면 그 근처에 여근석을 마련. 여근석이 있으면 남근석을 결부해 당산돌로 삼았다. 서울 연희동 봉원사 뒤 안산 능선에 우뚝 선 남근석 이화 여대 방향을 내려다 보고 있는 거대한 남근석 옛부터, 남근석 앞에는 여인들이 많이 꼬이게 마련 지금도 자식을 원하는 여성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옛 선비들이 쓰던 여성의 무릎을 닮은 연적 여체를 떠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몸매의 불상 경북 포항 왕룡사에 삼신할머니를 모신 사당 전북 고창의 당산 옆에 있는 남근석, 전북 남원부근 지리산 자락의 음바위 청동기시대 선돌이나 솟대는 남근석의 초보적 형태 이들을 매개로 마을 또는 부락 공동체 문화를 형성, 우리나라에서는 남근석과 여근석을 마주보게 놓는다. ....................처녀바위와 총각바위 전설.................... 전설의 고향 중 한 곳인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당산.' 옛날 청남마을에 담 하나 사이에 두고 살았던 처녀 총각. 처녀는 양반 부잣집, 총각은 가난하지만 예의가 엄격한 집안 어느날 처녀는 담장 너머 옆집 총각이 글을 읽는 모습을 본다. 남녀칠세 부동석 유교사상이 지배하던 때라 마음속으로만 흠모. 처녀는 잠못이루던 끝에 몸종을 통해 편지를 총각에게 보낸다. 다음날 정오에 소당산 깊은 산속 큰 바위 앞에서 만나자는 내용. 다음날 아침 해가 뜨자 처녀는 나물 캐는 바구니를 들고 나선다. 첫 만남에서 서로에게 반한 두 남녀는 그곳에서 자주 만났다. 이런 소문이 동네에 퍼져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고 잘못 와전 사태를 수습하려 총각은 처녀 아버지를 찾아 뵙고 청혼한다. 처녀 아버지는 가문을 욕되게 한 죄를 용서할 수 없다면 거절. 그 후에도 총각은 몇번 간청을 했지만 처녀 아버지는 요지부동. 두 남녀는 운명을 한탄하며 처음 만났던 바위 위에서 동반 추락.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을 저승에 가서 이루자고 다짐하며 죽는다. 그 순간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며 큰바위가 반으로 뚝 갈라진다. 마치, 두 사람의 애달픈 소원이 이루어지 듯 마주보고 선 바위 모습. ...................................................................................... ................... 삼막사의 남근석과 여근석.................................. 677년(신라 문무왕 17년)에 원효, 의상, 윤필 고승이 정진한 사찰. 서울 관악산에 있는 삼성산(三聖山)이란 이름도 이때 명명되었다. 삼막사 칠성각 앞에 자연암석 남근석과 여근석은 토속신앙의 대상. 자식을 원하면 출산, 일가의 번영 무병 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단다. 4월 초파일과 칠월칠석날 전국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치성 성기숭배 사상은 다산 및 풍요를 기원하는 선사시대부터의 민간신앙 동남아와 일본은 물론 한반도 전역에 분포된 남방 지역의 풍습이다. 찾아가는 길. 전철은 1호선을 타면 관악역에서 하차후 관악산 시내버스(1, 51, 99, 103, 103-1, 104-1, 499, 703) ........................................................................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바위에 얽힌 전설이 유난히 많다. 그중 처녀바위라 불리우는 곳은 위험한 곳이라 알면 된다. ...............................처녀 바위...................................... 바위의 모양새가 옴푹 패이고 찢어진듯 서있으면 처녀바위. 그 찢어진 듯 패인 바위 틈이 처녀 음부를 닮아 붙여진 이름. 순결한 처녀인 듯 접근 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까탈스럽다. '우격다짐으로 오르면 거칠게 밀어내는 처녀바위.' 마치 거친 사내를 거부하는 처녀처럼 앙칼지게 할퀸다. 몸무계 실린 등산화가 바위 틈에 꽉 물리면 잘 안빠진다. 처녀바위 바위 틈에 낀 발은 용쓸수록 점점 꽉 조여 온다. '한번 발목 붙잡히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 하여, 처녀바위는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발목 꺽이기 쉬운 곳. 무리하게 오르면 떨어져 죽지 않을 만큼, 다치기 쉬운 처녀바위. 처녀바위라 불리는 곳은 좀 멀더라도 우회하는 습관이 안전하다. ...................................................................................... 풍수지리 음양사상의 궁극적 원리는 성(性)에 있다. 남근석이나 여근석도 숭배의 대상으로 여긴 우리 조상. 풍요와 다산은 地力을 비롯한 주술적 힘에 있다고 신봉. 좌청룡, 우백호 묘자리 터는 여성의 국부(局部) 형태 산줄기의 철부(凸部)에 잡은 터는 성교(性交)의 형상. 여성의 심볼처럼 움푹 패인 바위를 농바우, 두덩바위 마을에 음풍(陰風) 바위가 바라보이면 옛부터 여성들이 바람 난다고 여겨왔다. 총각들이 몰래 두덩바위를 작대기로 쑤시면 여성들이 잠 못 이룬다고 하여 금기시 했다. 그래서 여근석 근처에 남근석을 세우고, 제를 지내 음풍을 다스리는 풍습이 있다. 원래 심볼석 숭배 근원은 기자(祈子)습속. 즉, 크고 우람한 남근은 성적 쾌감이 높고, 좁고 단단한 여근은 수태를 잘 한다는 믿음. 하여, 남성은 대물, 여성은 명기를 꿈꿔왔다. '우리나라 기자신앙은 언제 어디서 비롯된걸까?' 중국학계는 고조선 역사까지도 중국 역사 범주에 포함 고대 중국 은나라와 주나라 교체기의 기자조선(箕子朝鮮) 은나라의 후예인 기자는 실존하는 철학가이자 정치가이다. 기자조선은 주(周)와 진(秦)을 황제의 나라로 섬긴 속국. 위만조선은 한(漢)의 속국이었다가 한 무제 때 한의 변방. 중국학계는 고대 동북지구 3대 종족을 숙신 예맥 동호로 구분 한국학계의 단군 -고조선 - 부여 -고구려 -발해 역사관과 상반 조선이란 명칭이 중국의 신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 중국의 태양숭배 신화인 탕곡부상십일신화에 근거한 것. 10개 태양이 탕곡(湯谷)에서 목욕후 서쪽에 도착해 하루 탕곡은 중국의 동쪽인 현재의 산둥반도 칭저우(靑州)지역 중국학계는 단군신화가 중국신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 중국 사서에 동이(東夷), 북적(北狄) 등은 외국인의 개념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공간에서 제외된 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한반도는 진나라의 만리장성 변방에 있는 고대국가. ........................................................ ........................................................ 구석기시대 이후 인간의 성문화는 성기숭배신앙이 기조. 고고학계에서는 남녀의 성기를 결합한 조각 유물의 발굴. 이러한 유물은 생존, 풍요, 다산을 기원하는 종교적 염원 한반도 선사시대 유적에서도 남녀 성기 유물들이 다수 출토. 청동기시대에 새겨진 울산반구대의 바위에 새겨진 그림 여러 종류의 물고기와 짐승 맨 윗 부분에는 남성의 성기 맨 아랫 부분에는 팔과 다리를 벌리고 드러 누운 인물상 여러 물고기와 짐승이 많이 잡히기를 바라는 사람들 염원 신석기시대 함북 경원 농포리 유적지에서 출토된 여체상 흙으로 빚은 것으로 가슴부위가 크고 허리가 잘룩한 모양 당시 사회는 보통 모계사회지만 실상은 부계와 부권사회 삼국유사 기록에는 지증왕의 성기가 한자 다섯치(45cm) 마땅한 배필이 없어 사자를 파견해 수소문 끝에 찾는다. 모량부 상공의 딸로 키가 일곱자 다섯치(2m 25cm)라 왕후 성기 크기와 체격이 힘과 세력의 상징으로 인식한 듯 하다.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남근 목제조각과 성애 토기. 토기에는 노골적으로 남녀가 성기를 드러내 놓고 교접 안압지는 신라 왕족과 귀족들이 모여 연회를 즐기는 연못 당시의 왕족과 귀족들의 성윤리를 단적으로 알수 있는 유물. 화랑세기 기록에 나오는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성생활은 문란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동생 입종갈문왕과 결혼한다. 그 아들이 진흥왕이지만 상대등(국무총리)이사부(태종)와 사통 숙명공주, 세종, 만호태후를 낳았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진흥왕은 어머니 지소태후의 이복동생 숙명을 부인으로 맞는다. 숙명은 4세 풍월주(화랑 우두머리) 이화랑과 정을 자주 통한다. 결국, 진흥왕에게 발각되어 숙명후를 폐하려 하자 어머니가 만류. 숙명후를 폐하지 않았으나 숙명후는 이화랑과 도망쳐 아들을 낳는다. 진흥왕은 어머니와 둘째부인의 간청으로 이화랑과의 결혼을 허락했다. 숙명후와 이화랑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이 장성해 원광법사와 보리. 화랑세기에는 지소태후보다 한술 더 뜨는 자유분방한 여자 그녀는 2세 풍월주 미진부와 묘도부인사이에서 태어난 미실. 미실의 어머니 묘도부인은 원래 법흥왕의 후궁이었다. 법흥왕이 죽자 법흥왕 외손자 미진부에게 시집을 간다. 미실이 지소태후의 허락을 받아 결혼한 사실이 놀랍다. 미실은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진흥왕의 태자와도 동침 그 뿐아니라 5세 풍월주 사다함(4촌 오빠)은 미실의 첫사랑. 지소태후의 아들이자 6세 풍월주였던 세종은 그녀의 남편이고 7세 풍월주 설원랑은 그녀의 정부였다고 밝힌 화랑세기의 기록. 이렇게 남성 편력이 심한 미실의 애정행각에도 남편 세종은 담담. 오히려 세종은 태후에게 효도하고 대왕과 왕후, 태자에게도 충성 미실에게도 정조를 지킨 화랑중 화랑이라고 화랑세기에 극찬했다. 신라왕족과 귀족은 적자혈통을 왕권계승에 우선으로 적용.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발해시대는 일부 일처제를 준수했다. 일정한 사회 경제적 지위 상류층은 둘 이상의 처첩을 두었다. 고조선의 8조금법에 여성의 간음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부인은 정신(貞信)하여 음탕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부여에서는 남녀가 음란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 특히 질투하는 여인은 그 시체를 산에 버려 썩게 했다고 한다. 고구려의 혼인제도(서옥제도)는 신부집 처가살이 제도를 말한다. 신랑은 혼인 약속을 받으면 신부집 뜰 뒤에 서옥을 짓고 혼인식 신랑은 신부집 문에서 엎드려 절하며 신부와 자게 해달라고 간청 신라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가계상속권과 재산상속권 선덕여왕을 비롯한 3 여왕이 신라에서 배출된 당시 법적인 배경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 왕족이나 귀족은 아들을 서열에서 우선시 아들과 딸에게 차별없이 가계상속과 재산상속의 권한을 인정했다. 우리나라는 신석기 시대부터 족외 혼인을 강조했다. 같은 씨족끼리 배필을 구하려다 싸움까지 일어난 탓. 근친 혼인도 도덕적으로나 관습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고대사회 권력자들은 일반 평민과 달리 성을 가지고 있어 권력계승과 상속문제로 아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늘어 났다. 이 때문에 왕실은 권력의 분산을 막기 위해 근친혼이 많았다. 여성의 정절문제도 당시 사회에서는 귀감이 된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백제 개로왕의 숙청을 거부한 도미의 처 개로왕이 그녀의 남편 도미의 두눈을 뽑아 강에 버린다. 그러나, 도미의 처는 남편과 함께 고구려로 피신한다. 그녀는 장님이 된 남편을 변함없이 보살피며 살았단다. '지리산녀'는 오늘날까지 정절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 ......................................................... 남근바위는 아들 기원하는 임산부들이 많이 찾는다. 아들 욕심에 위험 감수하고 오르다가 다치기도 한다. 지리산에는 남근바위로 알려진 곳이 없다는 것이 특징. '지리산(방장산) 그 자체를 천신의 정기로 여기는 탓..' ...............천신의 정기........................... 백두대간 정기를 몸에 담고 탄생한 神人이 단군. 백두산 영주, 금강산 봉래, 지리산 방장,..3 수호신. 백두대간은 3 면의 바다에서 솟아오른.. 天神의 정기. 백두대간 머리인 백두산을 다스리는 산신령은 영주 백두대간 뿌리인 지리산을 수호하는 산신령은 방장. 백두대간 허리인 금강산, 황홀경 지킴이 산신령 봉래. 백두산은 정상 주위가 흰눈에 덮여 있어 유래된 이름. 이름 그대로, 백두(百頭)산의 산정호수는 천지(天地). 천신의 정기가 백두를 통해 분출된 산정호수 천지(天地) 금강산 수호신 '봉래'는 무릉도원 황홀경을 지키는 산신령. 지리산 수호신 '방장'은 그곳에 있는 불로초 지킴이 산신령. '천신의 정기'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는 숨은 뜻으로도 해석. '하여, 백두대간은 3 신이 수호할 만큼 천신의 정기.' ............................................................. 기자신앙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백두대간 그 자체를 '천신의 정기'로서 여겨왔던 믿음. 하여, 기자신앙은 고대국가 이전부터의 토속 신앙인 듯. 덧 말. 기자신앙은 중국 은나라에서 유래된듯. 중국의 商나라와 은나라는 같은 고대국가. 일찌기 상업이 발달한 은나라가 곧 商나라. 은나라 탕왕은 하나라 걸왕을 쓰러뜨렸지만 도읍을 다섯 번이나 옮긴 후에 은허에 정착. BC 16세기 낙양에 도읍을 정한 하(夏)왕조의 걸왕 중국 최초의 폭군으로 무자비한 학정과 여색만 탐닉 탕왕은 백성들과 함께 폭군을 추방하고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탕왕이 수립한 은제국도 5백년후 점차로 타락. 제 17대 주왕은 주지육림 고사성어를 유래할 만큼 학정. 숯불 위 구리기둥을 걷게하는 포락지형 애첩 달기와 함께 구경하길 즐겼던 폭군. 반란이 일어나자 불속으로 뛰어들었던 주왕. 은나라 당시 기후는 현재보다 2~4도 더웠고 동식물 번식에 적합한 기후 조건을 갖추었다. 하여, 농사짓기 적합해 상당히 농업이 발달했다. 당시,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노동력의 동원 개, 소 가축을 길렀고 관개, 농업기술 발달. 분뇨를 비료로 쓸 만큼 농업기술이 발달한듯. 당시 주요농작물로는 수수, 고량, 밀, 조, 쌀 은 왕조 멸망 원인은 잉여농산물로 주조한 술(酒) 가축을 기른 목축업이 농업과 함께 중요 경제활동 그당시 잉여 농산물은 상업 및 무역을 촉진시켰다. 청동기 문화가 일어나기 전이었던 석기시대. 석기 농기구를 사용했고 생필품 대부분 석기. 기자신앙은 신석기 시대에 유래된듯 추정된다. 은나라 당시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한반도. 한반도는 은나라 곡창지대였을 듯 추정된다.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은 연결된 하나의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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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신계곡의 속살을 들여보는 계곡산행의 재미가 상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