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지키다> 작년 여름 나는 우연히 금지면 호산마을에서 일제의 파괴를 피해 비석 하나를 마을 뒷동산에 숨겼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호기심에 끌려 마을 어르신들하고 동산에 가보니 후미진 응달 구석에 과연 비석하나가 서 있었다. 나는 이장님께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판독하여 탁본과 함께 드리기로 약속했다. 나는 친구인 김용근 박사(남원시청 퇴직, 향토사학자)에게 탁본과 비문의 해독을 요청하였다. 김박사는 발벗고 나서 직접 비석의 탁본을 뜨고 인맥을 총동원하여 비문을 해독해냈다. 김박사가 건네준 탁본과 해독집을 광복절을 앞두고 오늘 마을 이장님께 전달하였다.
비문의 내용을 주요요점만 소개해 본다. "김평천 공이 운명하고 17년이 지나 문인들과 친구, 장손이 찾아와 비석을 세워 공의 발자취를 새기고자 나(최병심)에게 비문을 요청하였다. 공의 행적을 살펴보니 사람됨이 강직하고 시에도 뛰어나 교류한 사람들이 당대 저명인사들이었다. 갑오년(1894년) 이후 공은 외부와 교류를 끊고 책을 읽으며 울분을 삭이고 있었다. 무오년(1918년)에 고종황제의 부음이 전해지자 고을인사들과 집뒤에 있는 산에 올라 통곡을 하였다. 이어 각처에 있는 선대의 묘를 들러보고 친척들과 친구들을 일일이 방문하고서 유서를 썼다. '아~경술년(1910년)의 변고(경술국치=한일합방)를 어찌할꼬! 내가 죽지 못한 까닭은 우리 고종황제께서 살아 계셨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대한제국에 복을 내리지않아 갑자기 황제가 승하하신 마당에 어찌 더 살기를 바라겠는가? '하였다. 절명시를 짓고나서 새옷을 갈아입고 북쪽을 향해 큰절을 하고 곡을 한 뒤 독을 마시고 돌아가시니 이때가 기미년(1919년)1월 4일이었다. 공의 죽음은 임금을 져버리지 않고 선조를 욕보이지 읺는 절개를 지닌 의로운 선비의 행동으로 그 후 이산을 지나는 사람들은 공의 그날의 행적을 이야기하며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오늘날 공이 남긴 행적을 드러내 비를 세우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더 우러러보게 하여 백대의 먼 훗날에도 기억되게 하려는 것으로 어찌 비석을 세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