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에는 "성지"가 하나 있다. 수원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성지"란 단어가 어떤 곳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표지판에는 사람들의 눈에 띄도록 "수원 성지"라고 문화재라고 알리고 있지만 관심을 갖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수원 성지"는 무엇을 가리킬까? 바로 북수원 성당을 말한다. 이곳으로 말하자면 천주교 박해 당시 신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모진 고문을 일삼았던 장소다. 뼈가 비틀어지고 부서지며 살이 찢어지는, 말로 이루 다 못할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을 지켰던 숭고한 희생이 깃든 성스로운 곳이다.
이번에는 순교한 이들의 혼이 숨쉬는 수원 성지를 둘러보자.
수원 성지라고 불리는 북수원 성당은 수원 정자로에 위치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화성 행궁 내 SIMA(수원시립아이파크 미술관)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다. 한눈에 들어오도록 건물 등이 티거나 화려하지 않아서 관심이 없다면 스쳐 지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곳이지만 그 평범함에 비범함이 있듯 이곳도 특별함이 느껴진다.
도로표지판에 "수원성지"로 나타냈지만 주변 건물과 가로수 등으로 눈에 띄지 않는다.
정문 돌기둥에 "수원순교성지"와 "북수원성당" 단어가 이곳이 의미하는 바를 나타내고 있다.
정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으로, 천주교 박해 당시 사람들을 고문했던 돌형구다. 수원 성지의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97년 알릭스 신부가 수원팔부자거리의 집을 구입하고 신앙예비자즐을 위한 교육장소로 삼았다. 수원북수원성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곳은 지금도 조선시대에 팔부자집이 있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너른 성당은 옛 포도청 터도 포함하고 있는데, 조선 천주고 박해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을 때 체포되어 온 천주교인들이 심문을 당하고 온갖 고문 끝에 순교를 당한 곳이다.
1931년 5월 대전에 있던 뽈리(Desideratus Polly)신부가 북수원본당의 제 4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부임 이듬해에 어머니가 주신 돈으로 수원 최초의 고딕성당인 수원성당을 건립했고, 발전을 거듭해 부임 당시 60명이던 신자 수는 그가 떠날 때 3,0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특히 일제강쩜기 동안 성당안에 소화강습소를 설립해 일본 순사들의 분을 피해가며 한글과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면서 독립운동과 신문호 개혁운동을 펼쳐나갔다. 일본 순사들이 수시로 찾아와 한글사용 금지를 강요했지만 굴복하지 않았으며, 꿋꿋하게 한글로 된 교리서로 신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17년 동안 북수원성당에 머무르다 해방 후인 1948년 천안성당으로 부임했다. 얼마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양떼를 두고 목자만 피난을 갈 수는 없다며 성당을 지켰고, 결국 인민군에게 붙잡혀 대전에서 총살형으로 순교했다.
4대 주임이었던 뽈리 신부(한국명 심응영) 동상. 그의 이름을 딴 뽈리 화랑도 눈에 띈다.
반대편 성당 한켠에 마련된 뽈리 신부의 기념비의 모습.
표시판에 나타나듯이 한국전쟁 당시 지붕이 파괴되어 붕괴 위험이 있이서 결국 헐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문화재 복원 능력과 경제력, 이곳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었다면 지킬 수 있었지 않았을까.
성당과 교육관 옆으로는 1954년 건립된 옛 소화국민학교 건물인 석조건물이 있는데 2007년 이 건물 1층에 화랑(뽈리화랑)이 들어섰다. 뽈리화랑은 1932년 옛 성당을 짓고, 현 소화초등학교의 전신인 소화학술강습회를 설립했던 제4대 주임신부인 심 데시데라도 뽈리 신부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곳이다.
소화초등학교로 사용되던 이 석조건물은 이제 뽈리화랑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소 투박해보이는 이 건물은 근대 우리나라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돌형구는 구멍에 밧줄을 넣어 천주교인의 목에 매달고 나서 반대편에서 끌어당기는 고문 도구였다. 두개골이 부서지는 고통을 가했을 것이다.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몸을 바친 그들이 있었기에 현대에 사는 우리들은 종교의 자유가 있지 않았을까.
돌형구 맞은편에는 붉은 장미가 피어 있었다.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듯했다.
겨울이라서 다 떨어지는 잎들로 인해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더욱 쓸쓸해보였다.
교육관 앞 길의 모습. 돌기둥 위 지푸라기 묶음은 단순히 장식품이 아닌 듯했다.
구한말 천주교인들의 상투를 연상케 했다. 그들의 혼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성당 교육관과 뽈리 화랑의 모습.
수원 성지는 가운데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뽈리 화랑(정문 기준으로 왼편)과 중앙의 교육관, 성당이 둘러싸고 있다. 이곳은 2000년 9월 20일 수원교구에서 북수원성당과 그 일대를 순교성지로 선포했다. 천주교 박해기간 때 수원에서의 박해는 특히 혹독했는데 수원성지(수원화성)의 중심에 위치한 북수동성당 일대는 순교자들의 형이 집행되었던 토포청(중영)과 심문을 하던 이아(화청관)이 있던 자리였다. 이로 인해 북수동성당은 악의 무리를 물리칠 수 있도록 주보성인을 ‘성 미카엘 대천사’로 정했다 한다.
독특한 모양의 북수원성당 외관의 모습.
성당 입구의 주보성인인 마카엘대천사가 눈길을 끈다.
성당 옆에는 수원순교자 현양비가 마련되어 있다. 12개의 길고 짧은 침목은 교회의 초석이 되었던 12사도들과 수원순교자를 상징하며, 또한 그들의 믿음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그들의 믿음이 짧은 침목처럼 미약했지만,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체험하며 믿음이 점차 크게 자라게 되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가장 긴 침목 위의 물고기(IXOYE: 익투스)는 희랍어로 예수(I) 그리스도(X) 하느님(O) 아들(Y) 구세주(E)를 나타내고 있고 각 단어의 첫 글자가 합쳐지는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시다는 뜻이다.
한편, 12개의 침목이 수원화성의 치성 구조인 "ㄷ"자 형태로 세워져 있는데, 치는 꿩을 말하고, 꿩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바깥을 경계하는 날짐승이다. 꿩처럼 우리 자신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내적으로 주님을 굳게 믿고 외적으로 악의 세력을 경계하면, 믿음이 크게 자라나 주님고 한 몸을 이루게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글귀가 떠오르는 침목의 모습이다.
가장 높은 침목의 물고기는 믿음의 증거와 방향을 표현하는 듯했다.
이렇게 순교자의 혼이 깃든 수원 성지를 둘러보고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책임감도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수원을 여행한다면 이곳, 수원 성지도 관람하면 어떨까?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될 것이다. 여행은 일상의 쉼표이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니까.